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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738화 (1,737/1,794)

템빨 86권 - 8화

‘그건 그렇고.’

협력해주겠노라 흔쾌히(?) 약속하는 마안족 왕.

그를 보며 미소 짓던 그리드의 눈빛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등 뒤에서 적의 기척을 느낀 까닭이다.

파괴 광선의 여파에 휩쓸려 파문을 일으키는 호수의 수면 위로 환상체가 떠오르고 있었다.

‘소문대로 불쾌한 놈들이군.’

환상체.

본래 차원의 틈새에 서식하는, 현실에 존재해선 안 될 것들의 총칭이다.

이곳 호수에는 ‘레벨이나 스탯이 가장 높은 침입자의 일면을 복제하고 혼합’해서 힘으로 삼는 환상체가 보스 몬스터로 출몰했다.

“허어...”

마안족 왕이 탄식했다.

전장 20미터의 거대한 괴물.

기다란 몸에 달린 수백 개의 팔과 다리를 지네처럼 꿈틀거리고 있는 놈의 얼굴은 그리드와 닮았다.

수백 개의 팔과 다리 역시 그리드의 것과 닮았는데, 사이사이 비반의 것과 닮은 팔과 다리가 섞여있기도 했다.

키에에에에에!!

환상체가 주둥이를 찢으며 내지르는 괴성이 폭풍을 불러일으켰다.

칼날이 섞인 폭풍이다.

놈은 그리드와 비반의 무기마저 복제해서 힘으로 삼았다.

주둥이를 벌릴 때마다 드러나는 새카만 심연에서부터 온갖 종류의 검이 쏟아져 나왔다.

“필드 보스 중에선 역대 최강이 아닐까요?”

날씨를 바꾸는 힘으로 폭풍을 잠재운 라우엘이 말했다.

“귀중한 아이템을 드롭할 것 같네요.”

다소 유쾌한 음성.

긴장감을 이완시키려는 노력이다.

물론 환상체는 대상의 스탯과 스킬을 100퍼센트 복제하지 못한다.

하지만 복제 대상이 그리드와 비반인 지금, 저 인간 지네는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괴물 중 하나일 것이 분명했다.

“지상에선 절망을 쉬이 체험할 수 있구나.”

대장장이의 신 헥세타이아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짓고 읊조렸다.

지상.

그리드를 비롯한 수많은 인간들이 협력해서 지켜온 이 땅은, 시대를 거듭한 끝에 전례 없는 힘과 기술을 축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안정하다.

매번 새로이 나타나는 대적에게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질지 모를 정도로 위태롭게 보였다.

‘그러므로 벗을 방패로 삼아가면서까지 싸우는 거겠지.’

그리드를 바라보는 헥세타이아의 두 눈에 측은지심이 깃들었다.

지상에 진정한 평화가 도래한다는 것.

어쩌면 영원히 불가능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창조주에게 버림받은 땅이므로 당연하다.

빛의 여신 레베카.

그녀는 처음부터 지상을 천상과 다르게 취급했다.

천상엔 늘 천사들을 호법으로 세웠던 반면 지상은 좌시했다.

지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을 한 발 물러난 채 지켜봤다.

어떤 시점부턴 아예 외면하기 시작했고.

‘지켜진다.’는 법칙이 세워질 여지가 없던 것이다.

헥세타이아가 괜한 죄책감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이번에야말로 검의 위력을 시험해 볼까.”

비반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짧고 뭉툭한 검을 손에 쥐고 있었다. 칼날이 반으로 뚝 잘라진 듯한 검. 고물상에서나 받아줄 모양새다.

“...?”

천하의 검신이 왜 저런 것을...?

라우엘과 마안족 왕이 의아해하는 그때.

키야아아아악!!

폭풍을 다시 불러일으킨 환상체가 돌진했다.

비반을 향해 수십 자루의 칼날을 흩뿌리며 그 큰 몸을 부딪쳐왔다.

비반이 부러진 검을 휘둘러 응수했다.

무의미해 보였다.

저 짧은 검이 지네에게 닿을 리 없었으니까.

설령 닿더라도 찌르거나 베지 못할 터였다.

번쩍!

“...!”

“...!”

라우엘과 마안족 왕의 눈동자에 환상이 투영됐다.

몹시 큰 검의 모습을 한 환상이었다.

방금 전까지 용처럼 거대해 보였던 환상체가 순식간에 작은 것으로 영락해버렸다.

쿠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호수가 반으로 갈라졌다.

하늘에 닿을 지경으로 높이 솟구치는 물줄기 사이엔 여전히 거대한 검의 형상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환상체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자신보다 훨씬 더 거대한 검에 집어삼켜진 채 소멸해버린 탓이다.

쏴아아아아...

폭우를 흩뿌리며 가라앉는 물줄기 사이로 잿빛의 잔재가 안개처럼 퍼진다.

자신보다 더 큰 환상에게 허물어진 환상체의 죽음이 남긴 흔적이었다.

“...”

잠시 어안이 벙벙해져 있던 라우엘과 마안족 왕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비반을 바라보았다.

그리드와 헥세타이아도 마찬가지다.

자리의 모두가 경악하고 있었다.

단 한 명, 비반만큼은 예외다.

“...이번에도 제대로 시험하지 못했군.”

부러진 검에 덧씌웠던 심상을 거둔 비반이 아쉽다는 듯이 혀를 찼다.

환상체를 일격에 죽인 검의 위력은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드래곤을 베기 위해 스스로를 검으로 연마했던 심상을 고스란히 실체화시키는 검.

이것은, 드래곤을 베어야 마땅한 검이었으니까. 남들은 상상조차 못할 정도로 강력해야 옳았다.

다만 위력의 한계를 확인해 보고 싶었는데 여의치 않아 아쉬웠다.

“아마 당분간은 그 검의 위력을 제대로 시험하기 힘드실 겁니다.”

그리드가 말했다.

검신 비반.

지상에선 드문 절대자인 그는 나뭇가지 하나만 쥐어도 어지간한 초월자를 압도할 괴물이었다.

한데 의념 제작으로 만든 드래곤 웨폰과 아머마저 무장한 상태다.

과연 누가 그를 감당할까?

그리드와 하야테, 마리로즈 정도나 되어야 비반의 한계를 끌어올릴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리드는 비반과 대련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도움이 될 만한 대련이 아니야.’

절대자간의 승부는 대개 단기결전으로 끝났다.

하물며 그리드와 비반은 무지막지한 공격력을 잠기로 삼았다. 방어력을 파훼할 만한 기술을 겸비하기도 했다.

서로 전력을 다할 경우.

어떤 공부를 얻기보단 순식간에 결판이 날 것이었고, 상처만 남는 대결이 될 확률이 높았다.

“아무래도 번헬리어에게 부탁하는 편이 좋을 듯하네. 나 또한 바알과의 결전을 앞두고 되도록 준비를 갖춰야지.”

비반 역시 그리드와 대련할 생각은 추호도 없는 눈치였다.

애초에 번헬리어가 있다.

걱정 없이 베고 또 베도 악착같이 살아남을 고룡.

“확실히, 그렇군요.”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인다.

평온한 얼굴로 터무니없는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라우엘과 마안족 왕이 황당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무려 고룡을 아이템 제작 재료로 치부하는 사람과 샌드백으로 취급하는 사람... 저들이야말로 이치를 제대로 거스르는 환상체들 아닌가, 그런 생각을 품었다.

“그리고.”

비반이 헥세타이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언젠가 천상의 신을 만나게 된다면 묻고 싶었던 것이 있었소.”

“무엇이오?”

“염룡 트라우카가 천상의 신들을 사냥하고 다닌 시절이 있다고 들었소만.”

헥세타이아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다소 과장 된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사실이오. 그 사건을 계기로 여신께서 트라우카와 조약을 맺은 것도 맞고.”

“그때 죽은 신들의 영혼.”

비반의 눈빛이 번뜩였다.

망령에 들었던 시절에는 쉽사리 보여주지 않았던 날카로운 시선이 헥세타이아의 반응을 실시간으로 살핀다. 자칫 거짓이라도 말하는 순간 즉시 간파하겠다는 기세였다.

“그들의 영혼은 어디에 있지? 혹시 그들의 영혼 또한 지옥으로 떨어진 거 아니요?”

덜컹!

잠자코 있던 그리드가 심장이 내려앉는 착각을 느꼈다.

이 세상은.

바알에게 유리하게끔 설계되어 있다.

죽은 인간들의 영혼은 모조리 지옥으로 떨어졌고, 바알이 왜곡시킨 지옥은 그 영혼들을 모조리 바알을 위한 양분으로 만들었다.

죽는 자가 늘어날수록 바알은 고강해지는 것이다.

몬스터와 신들의 죽음은 어떻게 적용 될까?

만약 그들의 영혼 역시 지옥에 떨어져 바알을 위한 양분이 되었다면...

“맞소. 애초에 야탄이 지옥을 만든 이유는 죽은 자들을 위해서였으니까. 또한 절대신의 염원은 법칙이 되는 법이오. 죽은 신들의 영혼 또한 지옥에 떨어졌소.”

“...!”

“...”

헥세타이아의 대답이 그리드에게 큰 충격을 안겼고 비반 역시 침음을 흘렸다.

최악의 경우를 떠올리는 것이었다.

“그럼... 트라우카에게 사냥당한 신들의 영혼 역시 현재 바알의 수중에 있다는 겁니까?”

어두운 표정으로 묻는 그리드에게 헥세타이아가 고개를 저어보였다.

“아닐세. 트라우카가 한창 아스가르드에서 날뛰었던 건 그대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래 전의 일일세. 아직 지옥이 왜곡되기 전... 그러니까 야탄이 직접 지옥을 통치하던 시절의 일이지.”

“그럼 그때 야탄은 지옥에 떨어진 신들의 영혼을 다시 천상으로 돌려보낸 겁니까?”

“소멸시켰네.”

“...?”

“야탄 자신이 직접 소멸시킨 건 아니야. 야탄은 윤회와 환생의 개념을 안타깝게 여기는 반면 수용했던 신이니까. 본래 절대신이 그렇지. 자신들이 만든 섭리에 거스르는 법이 없어.”

그랬다.

그리드가 만났던 ‘과거의 야탄’은 윤회와 환생으로 고통 받는 영혼들을 가엾게 여기면서도 그들의 운명을 바꿔놓진 않았었다.

“아마도 야탄의 무의식이 품었던 염원이 탄생시킨 ‘전혀 다른 신성’이 야탄도 모르는 사이에 개입해서 신들의 영혼을 소멸시켰으리라 추측하고 있네. 뭐, 어디까지나 쥬다르의 추측일세. 나는 그 추측의 근거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이해할 뿐이고.”

“전혀 다른 신성...”

딱 하나 떠오른다.

성녀.

산 자에게 이로운 영향력을 행사하는 성녀의 신성은 영혼에게만큼은 가혹하게 작용한다. 대악마, 대천사들의 강력한 영혼마저 소멸시켜버릴 정도였다.

“그래, 자네의 동생이 운명처럼 계승한 힘 말일세. 그것이 야탄에서 비롯한 거라고 쥬다르는 추측하며 경계해왔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아무튼 죽은 신들의 영혼을 바알이 비밀병기마냥 다루는 사태는 없을 거란 말이오?”

비반이 다시금 대화를 주도했다. 이야기가 길어지는 걸 원치 않고 본론만 알고 싶은 눈치였다.

“그렇소.”

헥세타이아가 화답했다. 헥세타이아 역시 모르는 게 많은 입장인지라 이 이상 말하기 꺼려졌으니까.

“받게.”

비반이 그리드에게 종이 한 묶음을 건넸다.

조금 전 환상체가 드롭한 물품이다.

신화급 아이템을 강화할 수 있는 고대의 강화 주문서였다.

차원의 틈새에서 튀어나온 괴물 중 일부는 먼 과거 이 땅에 존재했던 생물이란 의미가 됐다.

새삼 놀랄 것도 없었다.

트라우카가 일으킨 개벽 탓에 거인족의 옛 땅도 모습을 드러낸 마당이다. 매우 강력한 누군가에 의해 세상이 얽히고설킬 수 있음을, 그리드는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총 12장의 강화 주문서를 받아 챙긴 그리드가 즉시 아이템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드래곤 웨폰과 아머는 기본 능력치가 무척 높은 까닭에 균등하게 1강씩만 해놔도 엄청 강력해졌다.

‘그래도 무기는 3강씩은 해놔야지.’

크라우젤에게 잠시 빌려준 황혼에 쓸 주문서도 주섬주섬 챙겨놓던 그리드가 뒤늦게 비반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양심상 1장의 주문서를 꺼내며 말했다.

“비반 님의 검도 강화하도록 하죠.”

“...됐네. 지금도 한계를 모를 마당인데 뭘 더 강화한단 말인가?”

“그렇긴 합니다만 지옥에서 싸울 때 아쉬울 수도 있으니...”

“그럼 일단 자네가 맡아두었다가 그때 가서 강화해주던가 하게.”

“알겠습니다.”

묘하게 밝아지는 그리드였다.

비반은 머릿속에서 주문서의 존재를 지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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