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6권 - 5화
개벽.
염룡 트라우카의 전력 해방이 초래한 세계의 변화를 일컫는다.
타이탄은 개벽 이후 가장 바빠진 도시 중 하나였다.
순전히 우연의 일치겠지만, ‘위험’ 등급의 판정을 받은 지역 상당수가 타이탄 주변에 자리를 잡은 까닭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난감한 건 거울 산맥과 안개의 숲.
차원의 틈새에서나 등장할 법한 환상체들이 출몰하는 지역이었다.
이치에서 벗어난 존재들이 별 해괴한 능력으로 사람들을 위협했다.
파지직!
전설의 뇌전사 카일.
타이탄 최강의 창이자 방패인 그는 평소처럼 거울 산맥을 순찰하고 있었다.
거울마냥 빛과 형상 따위를 왜곡, 반사하며 현실에는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을 보여주는 산봉우리들.
인간을 쉽게 현혹하고 위험으로 인도하는 그 불길한 것들의 사이에서, 카일은 온전했다.
뇌기의 해류가 다가오는 적들을 모조리 불살랐으니까.
초월자의 몸으로 전설을 이룬 그의 스킬들은 하나 같이 고강했다.
그가 만드는 모든 과정과 결과가 전설에 기록 될 만한 업적으로 판정 받고 강화 효과를 얻는 까닭이다.
“감사합니다! 카일 님께서 환상체들을 처리해주신 덕분에 보급로가 확보 됐습니다!”
“...어제하고 똑같은 말을 지껄이는군.”
경례하는 기사들에게 카일이 영 마뜩찮다는 반응을 보였다.
사냥터의 마물들처럼, 환상체들 역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재출현을 반복했다.
만년설이 깎여 만들어진 산봉우리의 얼음 거울들이 비추는 대상이 곧 환상체로 거듭났으니까.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단 말이다.
카일에겐 내일도 똑같은 임무가 반복해서 주어질 예정이었다.
지긋지긋했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했다.
하지만 산봉우리의 얼음 거울을 물리적으로 파괴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지 오래였다.
“염룡... 빌어먹을 생물 같으니.”
드래곤.
심지어 고룡을 욕하는 카일의 태도에는 거침이 없었다.
드래곤의 청각은 대륙 전역에 닿는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경고를 명백히 무시하는 태도였다.
그가 이 세상에서 두려워하는 존재는 단 둘.
그리드와 브라함 뿐이었기에.
그 둘을 제외하면 드래곤이고 나발이고 하나도 겁나지 않았다.
“...저것도 환상체인가?”
“끄아아악!!”
갑자기 빗발치는 병사들의 비명소리를 듣고 시선을 돌린 카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개의 숲으로 이어지는 길목.
산봉우리의 거울들마냥 불길한 존재가 병사들을 학살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제1위 대악마 바알.
지상에 있어선 안 될 거악이다.
카일의 눈에는 놈이 단순히 ‘색깔’로 보였다. 새빨갛게 일렁이되 불꽃과는 거리가 먼. 피, 살의, 증오, 분노 따위의 부정적인 개념들을 색으로 덧칠하면 저렇지 않을까 싶었다.
‘지상에 서식하는 악마들과 비교하면 귀엽게 생긴 수준이군.’
바알의 외견을 그리드, 브라함과 비교해본 카일이 콧방귀 뀌었다.
뇌전을 응축시켜 만든 구슬을 주변에 띄우면서다.
파지직!!
뇌전의 구슬이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바알의 공격을 모조리 가로막았다. 새빨간 손과 발, 꼬리가 감전을 일으키며 부르르 떤다.
“어그극. 그리드의 갓 핸드를 따라한 건가?”
바알이 감전으로 경련하는 안면 근육을 강제로 움직이며 물었다.
천천히 벌어지는 입이 크고 검다.
“칫.”
어떤 전조를 읽은 카일이 뇌기를 증폭시켰다.
그러자 밝게 백열한 뇌전의 구슬들이 일제히 폭발을 일으켰다.
동시에, 바알의 입에서 마력의 광선이 쏘아졌다.
━━!
하얗게 물든 세계에서 잠시 소리가 사라졌다.
잿빛으로 산화해가는 바알의 광소 또한 묻혔다.
툭! 후두두둑!
곧 정상으로 돌아온 세계를 처음으로 장식하는 소리는, 카일의 뻥 뚫린 가슴에서 떨어지는 살점과 핏방울이 만드는 소음이었다.
곧 대량의 혈액이 쏟아졌다.
전기로 상처를 지져 지혈한 카일이 주변을 살폈다.
폭발에 휩쓸린 기사들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사상자가 꽤 많이 발생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1초라도 망설였다간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궤멸했으리라.
애써 정신을 수습하는 카일의 귓전에 음침한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그래도 나름 자아의 파편으로 만든 분신인데 잘도 해치웠구나. 개골. 뇌전사 카일. 전하께서 네놈을 원하시어 나까지 이곳에 파견한 이유를 알겠다. 개골.”
거대한 두꺼비였다.
체파르데아.
바알의 최측근으로 유명한 악마다.
한 자릿수 대악마와 비견되는 힘을 지녔다는.
저벅, 저벅.
놈의 뒤편에서 새로운 바알이 걸어 나왔다.
인간과 닮은 생물의 ‘몸통’을 대동한 놈이었다.
“그게 아수라인가 뭔가 하는 것의 파편인가?”
얼마 전.
그리드가 무후총을 정벌했을 때.
중앙정부에서 아수라와 관련 된 정보를 타이탄에도 전파했다. 카일 또한 전달 받았다.
“그래, 개골. 머잖아 지옥에 도래할 신이다.”
체프레다아가 불룩 튀어나온 둥근 눈을 껌뻑거리며 답했다.
카일은 은밀히 전류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파지직!
아수라의 몸통과 가까워진 전류가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2미터 이내로 접근하는 순간 무력화되는군.’
일전에 듣기론 1미터 이내였는데 그새 영역을 확장했나.
아무튼 최악의 상성이다.
저놈은 기(氣)보다 체(體)를 위시하는 강자들.
굳이 타이탄에서 꼽아보자면 창성 레이첼이 그나마 싸움을 성립시킬만한 상대였다.
‘물론 레이첼 혼자서 감당하기엔 벅차다.’
체파르데아까지 함께 나타난 상황 아닌가.
‘바사라 황비와 다른 공작들의 협력을 얻어야할 텐데... 저 괴이한 몸통이 황비의 적기나 그렌할의 회복력마저 무력화시킨다면...’
승산이 적다.
이쯤 되면 퇴각할 명분으로 충분하지 않나?
카일이 슬그머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애초에 그가 타이탄에 남았던 이유는 그리드의 강압에 의해서였다.
전 황제 쥬앙데르크가 사라진 이후.
그는 굳이 이곳에 얽매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제길.”
물론 지금은 달랐다.
강제로 부여받은 의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책임감이란 걸 갖게 됐다.
제법 긴 시간 동안 안면을 트고 지냈던 기사들을 버리고 혼자 도망치려니 쉽사리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리드 님께 당했다.’
그 악마는, 내가 결국 이렇게 될 걸 알고 자꾸 책임을 짊어지게 만들었던 게 아닐까?
생각하면서.
“도망쳐라. 뒤 돌아보지 말고 뛰어.”
걸음을 멈춘 카일이 상처입고 쓰러져있는 기사들을 등지고 섰다.
파지직!
죽은 기사들이 남기고 떠난 검이 전류에 이끌려 다가온다.
한 자루, 두 자루, 세 자루, 네 자루... 총 아홉 자루.
그중 두 자루의 검을 양손에 거머쥔 카일이 나머지 일곱 자루의 검은 발치에 꽂아두었다.
지금 쥔 두 자루의 검을 놓쳤을 때 즉시 수급할 의도였다.
검사가 아닌 만큼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는 것이다.
‘두 번 다신 검을 쥐지 않겠노라 다짐했었는데.’
타고난 체질 탓에 카일은 늘 혼자였다.
전 황제 쥬앙데르크의 손에 이끌려 입성했을 때도 신세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카일의 체질을 높이 평가한 쥬앙데르크가 그에게 많은 걸 가르치려고 시도했지만, 카일은 늘 주변의 시선에 짓눌려 대부분의 배움을 도중에 포기해야만 했다.
검술도 그중 하나다.
전 적기사단 놈들.
전기뱀장어가 무슨 검술을 배우냐며 비웃은 놈들 탓에 카일은 수치심만 키우고 훈련장을 떠나곤 했었다. 검술을 심도 있게 연마하지 못했다.
‘돌이켜 보면 처음부터 비웃었던 건 아니었다만.’
본래 적기사들은 카일의 체질과 검술이 맞지 않는 점을 지적했었다.
당시의 카일은 뇌기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으니까.
그의 손에 쥐어진 검은 뇌기의 영향을 받아 궤도를 제멋대로 바꾸기 일쑤였다.
제대로 검술을 배울 수 없는 입장이었다.
만약 계속 검술을 배우겠다는 고집을 피웠으면 누군가를 크게 다치게 만들 수도 있었다.
그들은 내게 차라리 다른 길을 걷는 편이 낫다고 말하고 싶었으리라.
하지만 당시의 나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대여서 결국 서로의 감정이 상하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고.
“...큭큭.”
“카일, 네놈 지금 웃고 있구나. 개굴. 제대로 실성한 게야. 개굴.”
“말하지 않아도 안다. 스스로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사실쯤이야 자각하고 있어.”
죽을 때가 다가오니 별 거지 같은 기억도 다 추억으로 다가오는구나.
실소를 멈춘 카일이 심호흡하며 기수식을 취했다.
뇌기를 가라앉히고 순전히 검술로 눈앞의 적들을 상대할 계획을 짰다.
초월자의 육신을 믿었다.
과거에 배웠던 검술과 현재까지 지켜봐온 검술들을 이 초월적인 신체가 어설프게나마 구현해줄 거라고.
전설의 가치를 믿었다.
전설이 행하는 일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큰 의미가 부여된다. 쉽게 업적으로 인정받는다. 치기와 다름없는 감정으로 내린 이 순간의 선택을 부디 세계가 확대 해석해서 기적을 일으키길 바랐다.
현실은 처참했다.
“약해앳! 뇌기를 쓰지 못하는 네놈은 몹시 하찮구나! 개골!”
카일은 바알과 체파르데아의 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아홉 자루의 검은 이미 모조리 부러졌다.
무신의 추종자 시절에 습득한 격투술을 펼쳐보았지만 역시 예상대로 아무런 효력도 없었다.
체파르데아의 미끌미끌한 몸을 주먹이나 발차기 따위로 가격해봤자 타격을 입히는 게 불가능했다.
“어서 죽여라.”
불사마저 소모한 카일이 저항을 관뒀다.
기사들은 이미 진즉에 도망간 상태.
타이탄의 황비와 공작들에게 이곳의 소식을 전달하고 방비를 갖추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 이상 시간을 벌겠답시고 애쓰지 않아도 좋았다.
삶에 미련도 없다.
고아나 다름없던 삶.
몹시 고독했고, 비록 때때로 잘못 된 길을 걷기도 했지만.
이 자리까지 올라온 것만 해도 충분히 훌륭하지 않은가.
“체파르데아, 네 녀석은 여전하구나.”
죽음만을 기다리던 카일이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고 시선을 돌렸다.
녹발의 사내가 보였다.
짧게 정돈한 머리카락 아래로 드러난 창백한 얼굴에 생기가 전혀 없어 괴이했다. 움직이는 송장을 보는 느낌.
실제로도 송장이었다.
“배신자 아그너스!! 개골!!”
버럭 소리치는 체파르데아가 퍼뜨린 마력에 녹발 사내의 로브가 펄럭였다. 피부와 살점 없이 백골만 남은 상체가 언뜻 드러났다.
“아그너스...”
믿기지 않는 광경에 잠시 넋을 잃었던 카일이 사내의 이름을 곱씹어보았다.
전 바알의 계약자.
과거에 몇 번 마주쳤던 기억이 있다.
“인상이 많이 바뀌었군?”
“카일 너도 눈매가 꽤 서글서글해졌는데.”
쿠구구구궁...
대지가 진동했다.
지하에서 솟구친 망자들이 순식간에 군단을 이뤄갔다.
체파르데아가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뭐지? 평범한 네크로맨서로 전락한 네놈이 어떻게 그 정도의 지배력을 유지하고 있는 거냐? 개골?”
“내가 이래 뵈도 평범했던 적은 없는데.”
바알과 계약하기 전.
본래 아그너스는 네크로맨서 랭킹 1위를 고수했던 인물이다.
바알과의 계약이 끊겼다고 해서 실력이 어디 가진 않는 것이다.
“그보다 체파르데아, 적당히 가엾게 굴어라.”
“가엾다...? 개골?”
“너, 이번에도 바알에게 배신당해 죽으면 최소 쉰 번째다. 베티 님의 말씀이니 신뢰도가 상당히 높아.”
“...?”
꽈아아앙!!
아그너스와 체파르데아의 대화는 짧게 끝났다.
바알이 직접 몸을 날려 아그너스를 덮친 까닭.
놈은 다 잡은 사냥감이나 다름없는 카일을 무시하고 오로지 아그너스를 노렸다.
“아그너스. 버려진 장난감 주제에 신수가 환하구나.”
“도리어 살기 좋더군.”
아그너스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면서도 전면전을 피했다.
바알이 다가온 경로상에 있던 언데드들이 맥없이 쓰러진 광경을 목격한 까닭이다.
아수라의 몸통은 네크로맨서의 지배력마저 흩뜨리는 만능의 권능을 발휘했다. 아그너스가 승산을 논할 만한 대상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그리드가 이곳의 상황을 모를 리 없다.’
그런 믿음 때문.
역시나.
쿠웅!
아그너스의 믿음에 호응하듯 하늘에서 사람이 떨어졌다.
찬란한 빛을 흩뿌리는 존재.
“늦은 줄 알고 걱정했는데 제때 도착했군.”
반트너였다.
씨익 웃는 반트너와 달리 아그너스의 표정은 썩어 들어갔다.
“...템빨단에 일손이 많이 부족한가?”
“어? 아그너스? 넌 여기서 뭐하냐? 그리고 방금 그 말, 무슨 뜻인데?”
“아니... 일손이 부족할 리 없지. 추가적인 원군이 있을 거라고 해석해야 옳겠군.”
아그너스는 반트너를 낮게 평가하는 것과 별개로 그가 탱커라는 점에 주목했다.
탱커.
말 그대로 전선에서 적의 공격을 막아주는 역할이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적었다.
“단독 임무다, 개자식아.”
아그너스가 연신 지껄이는 헛소리의 뜻을 뒤늦게 눈치 챈 반트너가 얼굴을 구기는 그때.
“잡종들이 몰려드는구나! 좋다, 개골! 네놈들 모조리 지옥으로 데려가주마, 개굴!”
체파르데아가 혀를 뻗었다.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그 긴 혀는 산성독을 품었을 뿐만 아니라 미끌미끌한 체액에 뒤덮여 있었다. 칼로 베거나 막아도 미끄러지며 궤도가 변칙적으로 비틀렸고 추가적인 파생 공격을 낳았다.
“반트너, 정면에서 상대하지 말...”
체파르데아의 능력을 잘 아는 아그너스가 경고하다가 멈췄다.
확장 된 황금색 눈동자에 허공에서 펄떡거리는 체파르데아의 잘려나간 혀가 투영되고 있었다.
“네, 네놈... 개굴...”
체파르데아가 뒷걸음쳤다. 입에서 쏟아지는 체액을 삼키며 혀를 재생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붉고 거대한 방패가 모두의 이목을 끌었다.
방패 하단부에 송곳 같은 칼날이 튀어나와 얼핏 꼬리 같다.
드래곤의 등을 위에서 바라보면 저런 모습이 아닐까 싶었다.
역사상 최초의 드래곤 실드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놀라는 꼴을 보니 바알에게 아무런 설명도 못 들었나보군. 불쌍한 두꺼비 넌 아무래도 장난감이 맞나보다.”
“...”
카일은 거울 산맥의 산봉우리가 하나 늘어난 것만 같은 착각을 느꼈다.
탱커의 신분으론 최초로 전설이 되었고, 초월의 격을 쌓은 반트너.
그가 태산처럼 높아보였으니까.
심지어 빛을 왜곡시키고 반사시킨다는 점도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