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6권 - 3화
바알은 몹시 편리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자아를 수십, 수백 개로 나눠서 분신을 만들고 운용하는 능력이다.
큰 제약 없이 지상에 올라 인간들을 죽이고 지옥으로 데려오는 게 가능했다.
표적은 늘 비슷했다.
죽어 천사가 될 인간들.
쉽게 말해 대천사들이 탐낼 만한 인재들이었다.
만약 바알에게 이런 능력이 없었다면.
지옥은 처음 야탄의 의도대로 약자들만의 세상이 됐으리라.
쿠웅!
바알의 머리 위로 잿빛의 기둥이 떨어졌다.
지상에 올랐던 자아의 파편 하나가 죽은 것이다.
하루살이보다 짧은 삶을 체험하고 한 줌의 빛이 되어 돌아온 놈의 경험과 기억이 고스란히 바알에게 회수됐다.
“이거 좋은데.”
본래 바알은 자아 파편의 기억을 흡수할 때마다 불쾌한 기분을 느끼곤 했다.
자신이 하찮은 일부에 불과하단 사실을 모르고 설쳐대는 파편의 꼴불견을 지켜보는 게 유쾌할 리 없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바알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번졌다.
“기대보다 뛰어나.”
아수라의 손.
검성 크라우젤의 ‘검’에 담긴 위력을 견디지 못하는 추태를 보였고, 그 탓에 자아 파편이 허무하게 죽어버려 사백의 영혼을 회수하는데 실패하고 말았지만.
성과는 있었다.
아수라의 손이 검성의 법칙을 저항한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확인했다.
혹시나 했던 기대가 한낱 기대에 그치지 않고 현실이 됐단 말이다.
‘학습한다는 건... 자아를 지녔다는 증거지.’
악신.
야탄과 달리 진정으로 사악할 존재가 생을 잉태하기 시작했다.
긴 세월 염원해온 순간이 코앞까지 다가온 것이다.
“저기... 괜찮으세요?”
로제.
플레이어의 신분으로 대악마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
곁에서 바알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그녀가 조심스레 묻는다.
몇 달 전.
그녀는 무려 제1위 대악마 바알에게 스카웃 제안을 받았다.
바알.
비록 그리드에게 몇 번의 고배를 마셨으나 여전히 강력한 최종 보스 후보다.
애초에 무한한 목숨을 지녔다는 설정 아닌가.
그리드가 20억 플레이어를 대동해서 지옥을 침략하는 한이 있어도 바알이 꺾일 가능성은 없었다.
그의 부하가 된다?
동화로 치면 마왕의 사천왕이 되는 격이다.
로제는 그 달콤한 제안을 거부하지 못했다.
동아줄처럼 내려와 자신을 대악마로 만들어준 아모락트를 배신하고 곧장 바알의 편에 붙었다.
찬란한 미래를 꿈꿨다.
지옥의 지존이 되는 미래.
그리드와 더불어 최고의 플레이어로 명성을 떨치는 미래였다.
바알이 수십 개의 분신을 만들어 지상에 파견하는 능력을 봤을 때는 정말이지 전율했다.
자신이 꿈꾸는 미래가 반드시 현실이 될 거라는 확신을 품게 됐다.
한데 지금.
채 1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그녀의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바알의 분신 하나가 죽는 모습을 마법의 수정구로 지켜본 직후였다.
그리드도 아닌 크라우젤과 노검마 따위에게 순식간에 제압당했다.
물론 분신은 본체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약하단 사실을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플레이어에겐 ‘업적’이 가장 큰 양분이다.
바알과 똑같은 모습을 한 바알의 분신이, 심지어 자신이 바알인양 설치다가 살해당한 이상 크라우젤과 노검마는 반드시 엄청난 보상을 받았을 것이다.
이 빌어먹을 바알은.
내가 아닌 경쟁자들을 성장시켜놓은 주제에 실실 쪼개고 앉은 것이다... 유라가 쏜 총에 대가리를 맞았을 때, 뇌 어디가 심각하게 훼손 된 건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썩은 동아줄이었나?’
로제가 아모락트를 배신한 이유는 그녀에게 희망이 없다고 판단해서였다.
아모락트.
바알과 대적하는 주제에 바알의 눈치를 살피느라 아무 것도 못했던 얼간이.
그나마 그리드와 적대하지 않은 점은 높이 평가할 만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몸을 너무 사려서 발전 가능성이 적은 느낌.
그녀에게 미래를 맡기기엔 로제가 품은 야망이 너무 원대했다.
하여 로제는 바알의 편에 서게 된 것이다.
바알의 성격이 워낙 호전적이고 잔혹한 탓에 플레이어는커녕 인류 전체의 대적으로 손꼽힌다는 점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로제 본인도 덩달아 인류의 적으로 낙인 찍힐까봐 두렵긴 했지만.
로제는 이미 대악마였다.
세간의 평가를 의식하기엔 너무 늦었다.
여론 따위, 언젠가 꿈을 이루고 강력한 힘과 권력을 손에 넣으면 손쉽게 움직일 수 있다고 판단하기도 했다.
실제로 그리드가 보여주지 않았나.
지금은 영웅 취급 받는 그리드도 한때는 높은 잔학성으로 인해 사이코패스 취급을 받았었다.
그렇다.
로제의 롤모델은 다름 아닌 그리드였다...
“괜찮냐고? 무엇이 말이지?”
아수라의 완성도를 확인하고 미소 짓던 바알이 고개를 돌렸다.
인간 출신의 대악마.
태생이 특이한 탓일까.
바알은 그녀를 종종 이해하지 못했다.
하급 대악마 따위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자신에게 괜찮냐는 질문을 던지는 게 어디 가당키나 한가?
처음 겪는 일이라 다소 얼떨떨했다.
“아, 그게... 자아 파편 하나가 고작 인간 몇 명에게 살해당했잖아요? 바알 님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런 꼴을 당해놓고 웃고 앉은 네 정신 상태가 걱정돼서 괜찮냐고 물어봤던 것이다...
차마 솔직하게 말할 순 없어서 말끝을 흐리는 로제에게 바알이 설명했다.
“괜찮다. 예전이라면 또 모를까, 내 파편의 가치는 매우 낮게 전락한 지 오래다.”
그리드를 시작으로.
아그너스를 비롯해 너무 많은 인간들에게 자아 파편을 사냥 당했었다.
그 탓에 바알의 자아 파편은 가치가 낮다는 인식이 세계에 새겨졌다.
처음에야 바알의 자아 파편이 실수하고 실패할 때마다 바알의 명성과 격이 약간이나마 훼손 됐지만.
이젠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리드 덕분에 바알은 자아 파편을 부담 없이 운용할 수 있게 됐다. 파편의 실수나 실패 따위를 일일이 의식하지 않아도 좋았다.
“...그래요? 그럼 바알 님의 파편을 해친 인간들도 그리 큰 명성을 얻지 못하겠군요?”
“글쎄.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지.”
“아오.”
“...?”
“아, 아니, 감탄한 거예요! 헤헷! 제 감탄사가 좀 특이하죠?”
“...”
역시 이해하기 힘들군.
뭐, 오히려 그 점에 기대를 걸어볼 만하다.
기껏 부하로 삼았더니 아모락트에 대해서 의외로 아는 게 적어서 그냥 죽여 버릴까 고민했었지만, 당분간 더 곁에 놔둬도 좋을 듯하다.
마침 마법의 수정구 중 하나에 특이점이 담겼다.
수십 개의 수정구.
지상에 파견한 파편들의 ‘눈’이다.
로제가 마법으로 연결해 만들었다.
본래 바알은 그것에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다시 돌아온 파편을 통해서 경험과 기억을 회수할 수 있으니까.
굳이 수정구를 들여다 볼 필요 따위 없었단 말이다.
하지만 수정구 속에 등장한 인물을 보자 자연히 흥미가 생겼다.
로제와 함께 상황을 실시간으로 지켜봤다.
“비, 비반...!”
사색이 된 로제가 침음했다.
검성 비반.
그리드가 지옥을 침공할 당시 대동했던 지혜의 탑의 결사들 중 하나다.
무지막지한 실력으로 제6위 대악마 발레포르를 참살했었다.
최근엔 검신이 됐다는 월드 메시지마저 띄웠다.
검신.
반드시 검성을 초월할 존재.
아마 높은 확률로 절대자일 것이다.
한데 수정구에서 흘러나오는 파편의 목소리는 비반을 눈앞에 두고도 차분했다. 도리어 거만한 어조로 비반을 아랫사람 취급했다.
겁을 먹기는커녕 경계조차 안 하는 눈치.
로제가 아주 약간의 희망을 품었다.
“머리... 아수라의 머리라는 게 엄청난가 보죠? 비반을 만나고도 저토록 위풍이 당당한 걸 보면?”
“손 따위와 비교할 순 없긴 하지.”
바알은 평소 부하들에게 친절한 편이다.
아니, 고작 그 정도가 아니라 몹시 잘 보살폈다.
마치 부모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그로 인해 충성을 얻을 뿐만 아니라 엄청난 호감을 쌓았다.
상대방에겐 세상의 전부가 될 정도로.
바알을 위해서라면 망설임 없이 죽을 악마가 셀 수 없이 많았다.
‘말투 뭐야.’
로제도 바알에게 미세한 호감을 품어가는 단계였다.
거의 항상 부드럽고 인자한 태도.
악마적으로 잘생긴 외모와 더불어 로제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결코 떼어낼 수 없는 거미줄에 엮여가는 것이다.
언젠간 그녀 또한.
가장 중요한 순간에 바알에게 배신당하고 조롱 받다가 처참하게 죽게 되리라.
바알과 엮인 모든 존재가 그러했듯이.
“하지만 파편에게 자신감을 심어줄 정도는 아니다.”
“...네?”
황홀경에 빠진 표정으로 바알을 바라보던 로제가 번뜩 정신을 차리고 되묻는다.
섣불리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반응.
바알이 설명을 덧붙였다.
“자아 파편은 말 그대로 파편에 불과해. 나의 성격, 기억, 능력 따위를 일부 구현하는 자아 중에서도 지극히 일부다. 눈앞에 있는 상대의 위계를 정확히 파악하고 적절한 대응을 하기엔 손색이 크지.”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지금 저 자아 파편은 주제 파악을 못하고 있다는 말씀이시죠?”
“말귀가 밝아서 좋군.”
바알이 피식 웃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다.
나름 로제를 칭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로제는 전혀 기뻐하지 않았다.
태평하게 상황을 지켜보는 바알을 게슴츠레한 눈으로 노려봤다.
‘또 하나의 파편이 무의미하게 죽고 경험치 팩이 되게 생겼는데 지금 상황에서 웃음이 나와?’
그녀는 바알의 철저하지 못한 점을 속으로 원망하고 있었다.
강력한 힘과 더불어 철두철미함까지 갖춘 악.
나를 제외한 다른 모든 플레이어에게 오직 절망만을 안길 완벽한 이상형은 정녕 존재하지 않는 걸까.
속으로 한탄하던 로제의 안색이 차츰 밝아졌다.
다른 마법 수정구들 역시 누구와 만났는지 상황을 전달하기 시작했는데, 비반 쪽을 제외하면 대부분 승산이 높아보였던 까닭이다.
특히 탈리마의 상황이 압권이었다.
무려 네 개의 파편이 짜리몽땅한 드워프 한 명을 포위한 형국.
전이 마법을 차단하는 결계가 완성되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지슈카가 현장에 도착했다는 점이 옥의 티이긴 했지만 상황이 썩 나쁘지 않았다.
‘4대2인데 질 리가 없지. 저건 무조건 이겼어.’
사실 냉정하게 생각하면 크라우젤과 노검마에게 패배한 파편은 단순히 운이 없던 것이다.
크라우젤은 그리드 다음가는 실력자니까.
게다가 죽어가는 파편의 눈에 비쳤던 마지막 광경을 돌이켜보면, 크라우젤과 노검마의 손등에 ‘표식’이 붙어있었다.
도사 사백이라는 놈이 두 사람에게 은밀히 버프를 줬단 뜻이다. 황길동도 어떤 수작을 부렸을지 모를 일이었다.
협력을 이룬 초월자와 전설 넷을 상대로 고작 하나의 파편이 승리를 꿈꾸는 건 애초에 말이 안 됐다.
하지만 탈리마의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지슈카는 크라우젤보다 한 수 아래의 실력자였고, 사냥 대상 역시 대장일이나 잘 할 드워프 한 마리에 불과했다.
넷이 뭉친 파편들이 패배할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아쉽게 됐네, 지슈카. 그나마 유라와 더불어 나 다음 정도 되는 여장부였는데 이번에 큰 고배를 마시겠어. 그리드에게 차이지 않기만 바라줄게.’
히죽히죽.
좋아서 자꾸 미소 짓던 로제의 두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지슈카가 꺼내든 대궁.
마치 아가리 벌린 드래곤의 머리처럼 생긴 그것은, 굉장히 크고 위협적이었다.
“그리드 놈... 드래곤 웨폰의 대량 생산에 성공했나.”
바알의 탄식 같은 중얼거림이 쐐기가 됐다.
“에?”
로제가 급격히 큰 불안에 휩싸인 순간.
펑!
탈리마의 상황을 중계하던 4개의 마법구 중 2개가 폭발했다.
검신 비반을 비추고 있는 마법구보다 오히려 빨랐다.
넋 나간 표정을 짓는 로제에게 바알이 조언했다.
“지금의 인간들을 상대로 오만해선 안 된다.”
로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 반응을 보니 너 또한 내 자아 파편처럼 주제 파악을 못 했었구나...
바알이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