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6권 - 1화
“저기, 라우엘... 나는 왜 부른 거야?”
지슈카가 떠난 후 주어진 휴식 시간.
쉴 틈도 없이 집무실로 향하는 라우엘에게 한 사내가 다가와서 묻는다.
회의 내내 어색하게 앉아있던 사내.
이벨린이다.
동심을 간직한 덕분인지 조금이나마 앳된 느낌이 남아있는 라우엘과 달리 세파에 찌든 얼굴을 하고 있다.
반짝반짝 빛났던 젊은 시절과 달랐다.
제1대 10인의 루키 중 한 명으로, 라우엘과 연배와 랭킹이 비슷해 라우엘 최대의 라이벌로 꼽혔던 시절 말이다.
너무 옛날이야기이긴 했다.
템빨국의 내정을 돌봐야했던 라우엘은 현역에서 오래 전에 물러났다.
이벨린 또한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최상위 전력으로 성장하지 못했다.
물론 십공신과 크라우젤, 데미안, 휴렌트, 지발, 하스터 등처럼 ‘인외’의 영역에 있는 자들을 최상위 전력으로 분류했을 때의 이야기다.
극히 소수의 괴물들을 비교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면, 이벨린 또한 충분히 최강의 반열에 올라있는 거물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특유의 이해력과 행동력을 바탕으로 엄청난 성장 속도를 자랑했던 소년 시절의 이벨린은 분명 최고의 수재였으니까.
그리드를 비롯한 템빨단원 모두가 이벨린이 언젠간 템빨단의 기둥이 되어줄 거라고 믿었었다.
하지만 현실은 참혹했다.
유라와 크리스, 데미안에 이어서 휴렌트, 지발, 하스터, 크라우젤에 이르기까지.
백 년에 한 번 나올 법한 천재들이 템빨단에 줄줄이 입단하면서 이벨린의 재능은 상대적으로 열약한 것이 됐다.
괴물들과의 경쟁에서 밀린 까닭에 이벨린은 끝내 최상위급 전력에 포함되지 못했다.
그나마 아직까진 코크보단 살짝 우위의 실력을 지녔다는 점이 유일한 위안거리일 정도다.
이벨린은 오늘의 자리가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 이곳에 모인 자들은 전원 바알 원정대 후보군에 오른 최상위 전력이었으니까.
초월의 격을 쌓아 그리드제 드래곤 웨폰과 아머의 주인이 될 자격을 갖춘 사람들 틈새에서, 오직 이벨린만이 평범하고 초라했다.
다소 기가 죽은 그에게 라우엘이 말했다.
“그야 당연히 너도 원정대 후보니까. 앞으로 맡게 될 임무의 내용을 미리 숙지하고 있어야지.”
“내가? 내가 원정대 후보라고?”
이벨린이 반문했다. 귀를 의심하는 듯하다.
반색하기보다 영 황당해하는 반응.
“못 본 새 자존감이 낮아졌구나.”
라우엘이 다소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주제파악 못하고 내게 라이벌 의식을 품었을 때가 그리워질 지경이네.”
“...옛날이야기 따윈 관둬. 아무튼 내가 어떻게 원정대 후보가 된 거야? 뭔가 착오가 있는 거 아니야?”
이벨린은 스스로에게 자격이 없다는 자각이 있었다.
실력이 부족하다는 건 둘째 문제다.
그는 드래곤 웨폰과 아머를 다룰 조건 자체를 충족하지 못한다.
“제국의 재상이자 템빨계의 2인자이신 이 몸께 착오를 논한다라... 한심하군.”
한숨 쉰 라우엘이 한쪽 손으로 얼굴의 절반을 덮으며 말했다.
네가 왜 템빨계의 2인자냐는 반문은 한 귀로 흘리면서다.
“착오 따위가 아니다. 폐하와 논의한 끝에 이벨린 네겐 충분한 자격이 있다는 판단을 내렸어. 아슬아슬하게 커트라인에 걸친 수준이긴 했지만, 그것도 대단한 거지.”
“아니, 이상하잖아? 난 초월의 격을 쌓지 못했어. 드래곤 웨폰처럼 엄청난 아이템 같은 거, 줘도 못 쓴다고. 근데 내가 왜 원정대 후보야?”
“천사.”
“...?”
“템빨계의 천사는 사도들처럼 그리드 폐하께서 만드신 아이템을 사용할 수 있다. 물론 사도들과 다르게 제약이 뒤따르긴 하지만, 그런 부분을 감안해도 드래곤 웨폰의 가치가 워낙 높지.”
“...!”
“물론 그리드 폐하께서 임명하실 수 있는 천사의 숫자는 다섯 명으로 무척 적어. 그 다섯 명에 포함되기 위해선 남은 보름의 시간 동안 다른 후보들과 치열하게 경쟁해야할 거다.”
템빨계의 레벨이 1일 때는 2명의 천사만을 임명 가능했었다.
하지만 인신들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템빨계의 레벨은 꾸준히 올랐고 현재 그리드는 총 5명의 천사를 임명할 수 있었다.
여전히 적었지만, 라우엘은 딱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실세로 거듭날 사람들의 숫자가 한꺼번에 대량으로 늘어나면 그것도 골치니까.’
염룡 트라우카가 전력을 해방한 여파로 바뀐 세계.
새로운 위험에 노출 된 지상에서 그리드를 대신해서 활약해온 템빨단의 최상위 전력들은 전원 초월의 격을 쌓은 상태다.
물론 초월자가 아닌 전설 트리를 타면서 초월의 격을 쌓은 사람들은 아직 대부분 격의 단계가 낮았고, 심할 경우 단 1단계의 격밖에 못 쌓은 사람도 있었지만.
아무튼 그리드가 만든 드래곤 웨폰과 아머를 착용할 조건은 충분히 충족했다.
천사로 임명할 대상은 현재가 아닌 미래에 최상급 전력이 될 만한 인재들로 정해야 옳은 상황이 된 것이다. 그리드의 뜻이기도 했다.
다섯 천사.
템빨단의 계급 체제에서 십공신과 필적하는 권력과 영광을 누리게 되리라.
자칫 혼란이 생기지 않도록 숫자는 적당한 편이 좋다.
“개인적으론 이벨린 네가 가장 먼저 천사로 임명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벨린은 본인이 최상위 전력으로 발전하지 못한 이유가 순전히 재능의 차이 때문이라고 믿었지만.
그건 너무 겸손한 거다.
이벨린이 다른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밀린 이유는 재능의 차이뿐만 아니라 망캐라서였다.
망캐.
성장 트리를 잘못 탔다.
탱커 주제에 스탯을 근력에 몰빵했던 반트너처럼 무식해서가 아니다.
외력에 의해 성장 트리가 꼬였다.
그리드가 초창기에 만든 걸작, 통한의 가시.
대상에게 ‘생명력 비례 데미지’를 입히는 그 조건부 최강의 무기는 이벨린의 자랑이자 축복이었고, 또한 저주였다.
초창기 이벨린은 통한의 가시 덕분에 무시무시한 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지만 공교롭게도 그 과정에서 얻은 칭호들에게 발목을 붙잡히고 말았다.
보스 몬스터들을 학살한 것이 원인이다.
물론 보스 몬스터라고 해봤자 네임드가 아닌 필드, 던전 보스들.
즉, 리스폰되는 보스들이었다.
그리드가 사냥해온 네임드들과 비교하면 송사리 수준에 불과한.
하지만 일반적인 플레이어의 관점에선 최대의 난적이었다.
이벨린은 그런 괴물들을 비교적 손쉽게 도륙했다.
대부분의 공대에서 선두에 서며 단 일격으로 보스 몬스터에게 치명적인 손상을 입혔다.
누적 된 업적은 그에게 엄청난 칭호들을 안겼는데, 공교롭게도 그 칭호들의 효과가 무척 편향됐다.
생명력 비례 데미지를 입힐 경우 추가 데미지 확보.
생명력 비례 데미지를 입힐 경우 버프 획득.
생명력 비례 데미지를 몇 회 이상 입힐 경우 스탯 영구 상승 등등.
통한의 가시류 무기의 사용을 강요하는 칭호들이었다.
이벨린은 기껏 얻은 칭호의 힘을 이용하기 위해 본인의 컨셉을 굳혀버렸고, 그 결과 악순환이 반복 됐다.
보통의 검사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성장해버렸다.
한 방을 세게 날리는 대신, 그 한 방을 소모한 뒤로는 무력해지는 식으로.
발도술을 쓰는 검사들과도 결이 달랐다.
극검은 발검 후 발생하는 몇 초의 쿨타임 동안 칼집에 넣은 칼을 방어의 수단으로 삼는다. 여의치 않을 경우엔 가속 버프와 회피기를 이용해서 시간을 번다.
회피기.
검사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전투 직업군이 보유하고 있는 기본기다.
근데 이벨린에겐 회피기가 아예 없다.
대신 다수의 돌진기를 보유했다.
강력한 한 방을 날릴 추진력을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얻을 수 있는 대신, 한 방을 날린 뒤에 수습할 만한 저력이 없는 것이다.
유틸성에 도움이 되는 스킬도 없었다.
이벨린의 스킬은 모조리 공격력 쪽으로 치중 됐다.
그나마 몇 개의 칭호가 생명력에 비례하는 데미지를 입힐 때마다 버프를 발생시켰지만 그마저도 랜덤이었다.
종류도, 수치도, 모조리 다.
평소엔 큰 문제가 없었다.
생명력에 비례하는 데미지를 수차례 입힐 경우 영구히 상승하는 스탯 덕분에 이벨린의 깡스탯은 굉장히 높은 편이니까.
높은 스탯에 천재적인 센스를 보태서 회피기가 없이도 적의 공격을 피하는 기염을 자주 선보였다.
설령 공격을 허용해도 그리드제 갑옷 덕분에 치명상을 면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디까지나 평범한 상황들에서의 이야기다.
네임드급 이상의 존재들.
이벨린보다 뛰어난 스탯을 보유하고 있거나, 플레이어의 의도를 예측하는 통찰력을 지니 상위의 존재들 앞에서 이벨린의 미묘한 강점들은 손쉽게 무너졌다.
간단히 말해서 이벨린은 양학만 잘했다.
최상위 전력이 되지 못했던 이유다.
‘하지만 강점이 명확해.’
적의 생명력을 한꺼번에 대량으로 손실시키는 이벨린의 능력은 몹시 귀중했다.
물론 네임드들은 생명력 비례 데미지 같은 거 면역해 버리지만, 바알 원정대의 표적은 바알뿐만이 아니다.
바알의 뜻대로 움직이는 악마와 마물의 숫자가 어디 한둘인가?
인마대전 당시 쏟아져 나온 마물의 숫자는 최소 수백 만 단위였다.
그리드는 말했다.
칸과 헥세타이아가 일반 공격을 광역 공격으로 만드는 드래곤 웨폰을 연구 중이라고.
광역으로 뻗어나간 이벨린의 공격이 다수의 마물을 양념해 놓으면 다른 동료들이 마무리하기 편할 거라면서.
‘무엇보다 이벨린이 전설이 되거나 초월의 격을 쌓으면 네임드에게도 강점을 발휘할 수 있을 거다.’
라우엘은 자신이 인정했던 옛 호적수가 반드시 알을 깨고 비상할 거라고 믿었다.
물론 다른 천사 후보들의 잠재력에도 큰 기대를 걸었고.
***
트라우카에 의해서 새롭게 출몰한 지역들은 다양한 특징을 지녔다.
현대의 상식과 지식으론 불가해인 먼 고대의 유적일 수도 있었고, 차원의 틈새마냥 여러 이적이 펼쳐지는 곳도 있었으며, 지옥과 입구가 연결된 것처럼 마물이 출몰하는 지역도 있었다.
호위 임무를 맡은 단원들이 경계해야하는 건 당연히 지옥과 연결 된 지역들이었다.
바알이 출몰할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싫다만?”
하지만 임무 시작부터 꼬인 사람이 있었다.
검성 크라우젤이다.
그리드 다음으로 강력한 플레이어이며, 어쩌면 그리드보다 더 동대륙을 잘 파악하고 있는 인물.
그의 호위 대상은 당연히 도사 사백이었다.
동대륙을 주 무대로 활동하며 적인지 아군인지조차 불명확해 변수가 많은 인물을 통제하는데 크라우젤보다 적임자는 없었으니까.
크라우젤도 군소리 없이 임무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금방 후회했다.
“나도 싫소이다. 지름길을 놔두고 굳이 돌아갈 필요가 있소?”
“...”
검을 쥔 크라우젤의 손에 잠시 힘이 들어갔다.
네깟 놈이 뭔데 나를 호위하겠다는 거냐며 비협조적으로 구는 도사 사백과, 그를 설득하기는커녕 똑같이 행동하는 황길동을 번갈아 보면서다.
-황길동 저자가 워낙 괴팍한 구석이 있네. 악의는 없으니 부디 오해 말고 진정하시게.
노검마가 다급히 보내온 귓속말이 크라우젤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심호흡한 크라우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노검마가 함께 있지 않은가.
최연장자 랭커.
현자처럼 지혜로우리라.
자칫 최악의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노검마와 협력하면 잘 대응할 수 있을 거라고, 크라우젤은 냉정하게 판단했다.
“진주라는 도시 초입에 내가 자주 가는 주막이 있소. 그 집 다섯 살짜리 딸내미가 키우는 족보 없는 누렁이가 사백 그대보단 나을 듯하군. 그 누렁이는 뼈다귀 하나만 던져주면 조용하거든.”
고작 몇 분 후.
도사 사백과 욕설을 교환하기 시작한 노검마의 모습을 보기 전까진 그랬다.
‘여긴... 내가 아니라 후로이가 적임자였을 듯한데.’
크라우젤의 새카만 눈동자가 점차 죽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