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5권 - 19화
베티를 제외한 결사들 전원 심상세계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들의 심상세계는 비반의 심상세계와 달리 안정적이었다.
용살의 기운처럼 드래곤의 소재와 충돌하는 힘을 소유한 자도 없었다.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 됐단 말이다.
그리드는 결사들의 전용 무기와 갑옷을 수월하게 완성시켰다.
‘결사들의 집중력이 너무 좋았어. 번헬리어가 같은 편이 됐다는 사실이 그들의 사기를 크게 올려준 덕분이겠지.’
드래곤을 명백히 적으로 규정한 세력은 온 세상을 통틀어도 지혜의 탑이 유일하다.
주제 파악 못하는 바보라서가 아니다.
결사들은 오히려 드래곤의 위험성을 가장 잘 알기에 제 삶을 바쳐 드래곤을 견제해왔다.
그리드를 염원의 대상으로 삼은 번헬리어가 인류의 편에 서기로 약조했다는 서사시의 내용을 접했을 때, 그들이야말로 사건의 무게를 가장 무겁게 받아들였다.
번헬리어의 가치를 비교적 낮게 평가하는 지옥과 천상의 절대자들과 달랐다.
결사들은 번헬리어를 고룡답게 존중했다.
앞으로 신뢰하고 의지할 고룡이 생겼단 사실에 무척 기뻐했다.
제시카는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했다.
그리드가 다 뿌듯해지는 반응이었다.
‘설령 신이라도 고룡의 가치를 평가하는 건 오만이다라...’
결사들은 번헬리어를 우습게 보는 자들을 꼬집어 비난했다.
저 높은 곳에 위치한 아스가르드가 한때 트라우카의 사냥터로 전락했었단 사실을 언급하면서였다.
비록 번헬리어가 트라우카보단 열등할지 몰라도, 그것이 고룡의 가치를 매기는 기준이 될 순 없다는 게 결사들의 의견이었다.
그리드도 공감했다.
애초에 그리드 역시 번헬리어를 적대할 마음이 적었다.
적대했을 때 발생할 후폭풍을 감당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했다.
하여 번헬리어의 과거 행보와 관계없이 동료가 되자는 그의 제안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받아들인 것이다. 네펠리나의 양해를 구하면서까지.
‘똥 정도로 비유하면 돼.’
고룡은.
아니, 대부분의 드래곤은 사실 엮이지 않는 게 최선인 존재다.
어쩔 수 없이 엮이게 됐을 땐 손에 묻지 않도록 적절히 대처해야하고.
“제 생각엔 바알이 먼저 움직일 확률이 높아 보입니다.”
라드볼프가 말했다.
어째서 베티는 심상세계를 보유하지 못한 거냐는 그리드의 질문에 답변한 직후였다.
“신께선 무려 고룡을 거두셨습니다. 하물며 바알에게 원한을 품은 번헬리어를 거두셨으니 바알도 경각심을 품을 수밖에 없겠죠. 자신이 다음 표적이 됐단 사실을 뻔히 알고 발 빠르게 움직이려 할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놈이 할 수 있는 일이 뭡니까?”
“지상의 실력자들을 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바알이라면 특히 카일이라는 뇌전사를 가장 먼저 노릴 겁니다. 일정 수준 이상의 뇌기는 초월적인 존재의 감각마저 다소 무디게 만드는 바, 카일의 힘은 바알에게 구미가 당기는 먹거리겠죠.”
라드볼프는 자신보다 상위 위계의 드래곤에게 표적이 됐다가 생존한 극소수의 드래곤이 뇌속성 마법에 의지했던 흔적을 근거로 들었다.
그리드가 이번에도 공감했다.
‘확실히, 뇌속성이 유독 까다롭긴 해.’
저항 가능한 수준의 화염 공격은 따뜻하다는 감상을, 저항 가능한 수준의 냉기 공격은 시원하다는 감상을 주는 반면 뇌전 공격은 최소가 정전기를 일으켰다.
겨울철 정전기에 시달려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꽤 불쾌한 감각이란 사실에 공감할 것이다.
“여러모로 동의합니다. 바알의 입장에선 빠르게 새로운 힘을 회수하는 게 최선이겠죠. 놈의 능력이면 템빨계에 잠입하는 게 불가능하지도 않을 테고...”
무후총에도 불쑥 난입했던 놈이다.
무수히 많은 망자의 힘을 흡수해왔고, 지금 이 순간에도 흡수하고 있을 바알의 권능은 강력함과 별개로 가히 전능에 가깝다.
늘 상기하며 경계해야 할 부분이었다.
“전설과 초월자들은 당분간 팀을 이뤄 움직이도록 지시하시는 편이 좋다고 봅니다. 물론 신이라고 하셔도 지상의 모든 전설과 초월자를 거느리실 순 없겠지만...”
조심스레 조언하던 라드볼프가 말끝을 흐렸다.
바알의 표적이 될 만한 지상의 전설과 초월자들.
한 명, 한 명이 위대한 존재들이다.
바알 같은 천재지변이 개입하지 않는 이상에야 홀로 오롯이 살아갈 수 있었다.
당연히 콧대 높을 그들이 누군가의 뜻대로 움직인다?
그것도 실시간으로?
불가능했다.
설령 그리드라도 템빨제국에 소속 된 전설과 초월자가 아닌 이상에야 통제할 수 없을 터였다. 애초에 연락할 수단 자체가 없으리라.
생각하며 근심을 키우는 라드볼프의 귓전으로.
“네, 지시했습니다.”
그리드의 덤덤한 음성이 스며들었다.
“앞으로 지상의 모든 전설과 초월자들은 최소 둘씩 짝을 지어 움직일 겁니다. 바알이 템빨계에서 크게 약해질 거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걸로 충분하겠죠.”
“...?”
라드볼프가 귀를 의심했다.
불가능한 일을 대수롭지 않게 해냈다는 그리드를 섣불리 신뢰하지 못했다.
애초에 그리드는 제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몇 초 사이에 지상의 모든 전설과 초월자에게 지시를 내렸다는 게 말이 안 됐다.
‘설령 신탁을 쓰셨다고 해도 소통에 시일이 걸릴 터인데.’
과거, 빛의 여신 레베카가 인간들에게 종종 신탁을 내리던 시절.
절대신인 그녀의 신탁조차도 명확한 메시지를 이룬 경우는 적었다.
특히 자신을 섬기는 모든 자들에게 뜻을 전달할 때는 큰 제약이 뒤따르는 눈치였다. 내용이 두루뭉술한 탓에, 그것이 신탁이라는 사실을 해석하기까지 꽤 긴 시간을 소요하게 만들곤 했다.
‘하물며 모든 전설과 초월자가 그리드 님을 섬긴다고 보는 것도 무리가 있고.’
그리드가 존경 받아 마땅한 존재라곤 하나.
결국 사람의 가치관은 모두 다른 법이다.
사람마다 그리드를 다르게 받아들일 터였다. 극히 소수는 그리드에게 반감을 품고 있을 수도 있었다.
앞으로 지상의 모든 전설과 초월자는 최소 둘씩 짝을 이뤄 활동할 거라는 그리드의 확신은, 신뢰할 근거가 몹시 부족한 것이다.
라드볼프가 그리드를 좋아하고 신뢰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앞으로의 일정을 위해서라도 이만 떠나야겠군요.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 감사했습니다. 근시일 내에 또 뵙도록 하지요.”
머뭇거리는 라드볼프에게 꾸벅 인사한 그리드가 즉시 등을 돌렸다.
멀찍이서 손을 흔들며 배웅하는 결사들.
그중에서도 베티를 안쓰럽게 바라보면서다.
‘제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마음을 비우고 공허를 만드셨다고.’
베티가 심상세계를 보유하지 못한 이유다.
첫 번째 바알의 계약자.
그녀는 몹시 잔혹한 삶을 살아왔다. 로브 안쪽에 감춰놓은 그녀의 작은 육체가 증명한다. 피와 살 한 점 남지 않고 뼈만 앙상한 몸.
당장 미쳐도 이상하지 않을 운명을, 그녀는 짊어져왔다.
미치지 않기 위해선 마음을 공허로 만들어야만 했고, 그러므로 심상세계 또한 형성되지 않았다.
‘바알이 죽으면 차츰 나아지시리라 믿는 수밖에.’
바알을 반드시 없애야 할 이유가 또 하나 추가된다.
무섭게 솟구치는 살의를 억눌러 간신히 냉정을 유지한 그리드가 결사들에게 깊이 허리 숙여 인사했다.
“부디 보중하십시오.”
***
템빨단원들이 바빠졌다.
검성 뮐러, 뇌전사 카일, 적야의 대도, 전 황제 쥬앙데르크와 마갑 첸슬러, 맹인 검객 카벨론, 동대륙의 도사 사백, 드워프족 최강의 전사 앙트리노, 여울랑을 비롯한 신선들, 비교적 최근부터 초월의 격을 쌓기 시작한 타이탄의 공작들과 대륙제일창 키리누스, 환국을 떠난 양반들 등등.
호위해야 할 대상이 생긴 까닭이다.
서둘러야 옳았다.
지혜의 탑에서 돌아온 그리드가 곧바로 생산하기 시작한 드래곤 웨폰과 아머를 지급 받은 순서대로 즉시 임무에 투입됐다.
“바알이 지옥 외의 공간에서 극도로 약해지는 건 사실입니다. 기본적으로 본체가 아닌 파편으로 움직이니까요. 거기에 템빨계 페널티까지 받으면 드래곤 웨폰을 무장한 십공신 단독으로 손쉽게 제압할 수 있겠죠. 하지만 바알이 지옥달의 도움을 받는 등 모종의 수단으로 일시적이나마 완전체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합니다. 바알의 파편과 조우할 경우 여러분은 즉시 제게 보고해주시고, 지원이 도착할 때까지 호위대상의 보호에만 집중해주세요.”
“좋아. 근데 쥬앙데르크와 첸슬러의 행적은 무슨 수로 파악한 거야? 그 둘, 꽤 오랫동안 대륙을 떠돌아다녔고 그리드와 사적인 연락을 나눈 적도 없는 거로 아는데?”
“쿠자라크 님께서 두 분과 깊은 인연을 맺고 계시더군요. 덕분에 꾸준히 소식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쿠자라크가...? 작년에 뜬 ‘인간 형상의 짐승’이라는 전설 클래스가 쿠자라크를 지목한다고 하지 않았었나?”
인마대전을 겪고도 생존한 인류의 수준은 지속적으로 발전해왔다.
새로운 전설이나 초월자가 템빨단 외부에서도 많이 탄생했다.
특히 인간 형상의 짐승이라는 애매모호한 이름의 전설은 템빨단의 뇌리에 크게 각인되어 있다.
늘 그리드 남매의 곁을 지켜온 툰, 혹은 바사라의 최측근 중 한 명인 맹수왕 모르이즈가 전설이 된 것으로 여기고 환영했었던 까닭이다.
설레발이었다.
온갖 정황들이 인간 형상의 짐승의 정체를 쿠자라크라고 지목했다.
“맞습니다. 쿠자라크 님이 쥬앙데르크 님과 첸슬러 님의 곁을 지키는 이상 사실상 호위가 필요 없다고 봐도 무방하죠. 애초에 쥬앙데르크 님과 첸슬러 님도 지고한 경지에 오른 초월자들이니까.”
“그러니까. 게다가 비상 상황이 발생했을 경우엔 쿠자라크가 귓속말로 즉시 상황을 알려줄 테니까 대응도 빠를 거 아니야. 안 그래도 일손이 부족한데 굳이 그들까지 호위 대상에 넣어야 돼?”
“그 세 분과 교분을 쌓을 기회로 여겨주십시오.”
“아... 그런 거였어? 그럼 그쪽엔 되도록 친화력이 높은 사람을 보내는 편이 좋겠네.”
템빨단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레가스에게 향했다가 멈칫했다.
뒤늦게 아차해선 딴청을 부렸다.
아수라라는 직업에 발목을 붙잡혀 성장이 역행해버린 레가스의 상황을 떠올린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현재 레가스는 누군가를 호위하고 말고 할 실력이 아니었다.
십공신은커녕 템빨단 전체를 통틀어도 중위권의 실력으로 봐야 옳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드가 드래곤 웨폰과 아머를 만들어주겠다고 선언했지만, 후순위일뿐더러 템빨을 얻어도 강해질지 의문이었다.
쥬앙데르크 일행에게 사실상 호위가 필요 없다곤 하나.
그렇다고 해서 노골적으로 약한 사람을 보낼 수도 없는 법이다.
노골적인 저의가 드러나 반감을 살 우려가 있었다.
“으음...”
씁쓸하게 웃는 레가스에게 미안함을 느끼는 템빨단원들의 얼굴이 점차로 일그러졌다.
레가스를 제외하면 템빨단 내부에서 친화력 좋은 사람을 떠올리기 힘들었던 까닭이다.
그나마 유페미나와 데미안이 후보로 떠올랐지만, 유페미나는 워낙 최강급 전력이라 쥬앙데르크 일행에게 보내기엔 쓸데없는 전력 낭비였다. 데미안은 나사 하나가 빠진 구석이 있어서 불안했고.
“뭔 고민들이 그렇게 많아? 내가 딱 적임자구만.”
반트너가 나섰다.
무시한 라우엘이 폰을 지목했다.
“폰 님께 맡기겠습니다.”
“그래.”
“아니, 나는 왜 무시하냐!”
반트너가 흥분해서 소리쳤지만 끝까지 무시당했다.
템빨단원들이 숙지해야 할 정보는 아직 너무 많았다.
“적야의 대도하고 사백이라는 도사는 행방을 찾을 순 있는 거야?”
“사실 적야의 대도는 후보군에만 올려놨을 뿐입니다. 그분이야말로 가장 호위가 필요 없죠. 드래곤과 신들의 표적이 되어도 무사하실 분인데.”
적야의 대도와 만나는 방법은 단 하나다.
적야의 대도가 원할 것.
그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이상 행방을 찾는 건 불가능했다.
오죽하면 과거 그리드에게 헥세타이아의 소검을 회수했었겠나.
그리드가 신들의 표적이 됐다간 감당하기 힘들 거라면서.
“사백의 경우는... 그리드 님조차 단 한 번 밖에 만나지 못한데다가 아군인지 적인지도 파악이 안 되는 실정이지만... 아무튼 노검마 님께서 말씀하시길 황길동 님을 통해 만남을 주선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비교적 최근에 교류를 시작했다더군요.”
“황길동이 호위 대상에 없는 이유가 그거였군.”
“네, 사백의 호위는 황길동 님의 호위와 함께 진행합니다.”
“신선들의 행방은 여울랑이 파악하고 있는 거고?”
“네, 교신 수단이 있나보더군요. 여울랑 님께는 페이커 님을 붙일 생각입니다. 워낙 말씀이 많으신 분이라 명경지수를 유지하는 게 관건이니까요.”
대화가 진행되는 중에 지슈카가 회의장에 도착했다.
방금 막 완성 된 드래곤 웨폰과 아머를 무장한 채다.
붉은 대궁과 갑주가 그녀의 구릿빛 피부와 몹시 잘 어울렸다.
“무장을 갖추신 분들부터 순차적으로 임무에 투입하겠습니다. 임무 기간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그리드 님께서 바알 원정대 전원의 드래곤 웨폰을 만들기까지 약 보름이면 충분하다는 계산이니까요.”
호위 임무 기간은 최대 보름.
원정대가 지옥으로 출정해서 바알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전까지다.
“최우선 호위대상은 앙트리노 님과 카벨론입니다. 현재 탈리마에 계신 앙트리노 님은 의지할 사람이 없는 실정이고, 카벨론은 뮐러 님께서 등장하신 이후 행방이 묘연해진 까닭에 수색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한시가 급해요.”
여유 병력 대부분을 이미 카벨론 수색에 쏟고 있었다.
뮐러의 제자를 자처했던 맹인 검객.
정작 뮐러가 나타나자 흔적도 없이 증발해버리는 등 수상한 구석이 많았지만, 바알에게 사냥당하도록 놔둘 순 없었다.
“서두르자.”
조건을 갖춘 십공신부터 하나둘씩 회의실을 떠났다.
전설 혹은 초월의 격을 쌓은 채 드래곤 웨폰을 무장한 그들의 위엄은, 아직 신이 되기 전의 그리드와 충분히 비견됐다.
든든했다.
덕분에 그리드는 자신의 역할에 집중할 수 있었다.
(85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