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5권 - 18화
“지금부터 우리는 동료다.”
[악룡 번헬리어의 용언이 세계에 새로운 법칙을 세웁니다.]
동료.
믿고 의지해야 할 관계다.
최소한 적대하지 않겠다는 뜻이 담겼다.
번헬리어가 세운 새로운 법칙은,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들의 입을 통해 오르내리는 서사시처럼 그리드에게 무조건 이로웠다.
[악룡 번헬리어가 당신과 인간들을 적대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물론 너희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붙는다.”
용언이 발동하자 번헬리어 본인이 더 당황하는 눈치였다.
다급히 덧붙여서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했다.
스스로가 무력해질 수도 있는 상황을 방지하는 수준이었다.
자신이 먼저 그리드를 배신할 일은 없을 것임을 재차 못 박는 태도에 가깝다.
“우리의 뜻은?”
당황하는 그리드를 대신해서 비반이 물었다.
“동료라는 건... 한쪽이 일방적으로 원해서 될 수 있는 관계가 아닌데?”
“알고 있다. 서로 신뢰할 수 있어야겠지.”
번헬리어는 그리드 일행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태도를 지적하는 비반에게 고개까지 끄덕이며 호응해주었다.
무척 당당했다.
“그러므로 문제가 없다. 나는 너희에게 충분한 신뢰를 주었다. 이 세상에 용언보다 신뢰할 만한 게 또 있다고 생각하나?”
“...”
“...”
그리드도, 비반도 반박하지 못했다.
상대가 동족마저 배신해온 악룡 번헬리어라는 사실을 상기하면서도 그를 의심할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순전히 용언의 힘이다.
번헬리어가 내심 안도했다.
일전에 그리드가 광룡의 딸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면서다.
“내가 번헬리어와 손을 잡은 건 맞지만 친구가 된 건 아니라고. 나중에 꼭 같이 죽이자. 응?”
다시 돌이켜 봐도 어이가 없었다.
당사자가 뻔히 지켜보는 앞에서 죽이네 마네 하는 헛소리를.
심지어 방금 힘을 합쳐 위기를 극복했던 상황이었는데.
‘감각이 비틀린 놈이다.’
상식이라는 것에 얽매이지 않는 고룡의 시각으로 봐도 그리드는 다소 미친 구석이 있었다.
굳이 상종하고 싶지 않았다.
바알만 아니었어도 영원히 두 번 다시는 마주칠 일이 없도록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번헬리어는 바알을 해치워야만 했다.
내키지 않아도 그리드와 협력해야 했다.
그러던 차에 명분까지 생겼다.
인간들이 급격히 강해지고 있다는 명분이다.
번헬리어는 이 기회를 잘 활용하기로 했다.
언젠가 자신의 위협이 될 그리드를 차라리 아군으로 삼겠노라 결정했다.
그리드가 거부할 리 없다는 믿음을 품은 채다.
하지만 의외로 그리드는 망설였다.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다.
당연히 네펠리나가 마음에 걸려서다.
‘네펠리나는 성룡이 되는 즉시 번헬리어에게 복수할 거라고 했다.’
광룡 네바르탄.
네펠리나의 부친이 광증을 겪게 된 이유는 번헬리어에게 있다.
번헬리어가 바알과 협력해서 네바르탄을 함정에 빠뜨리고 광증를 안겼다.
네펠리나에겐 부모의 원수인 것이다. 반드시 복수해야 할 대상이었다.
하지만 문득 의문을 품었다.
‘과연 그게 네펠리나가 원하는 삶일까?’
그리드는 부친과 재회했던 순간의 네펠리나를 떠올려보았다.
아파했었다.
부친이 입을 열 때마다 괴로운 표정을 짓고 간신히 울음을 삼켰다.
네바르탄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녀의 마음을 난도질했던 까닭이다.
[네펠리나, 아쉽게도 너는 내 알을 낳지 못할 확률이 높구나. 네가 정 위험할 것 같으면 성룡이 되기 전에 내가 너를 잡아먹겠다. 그날이 왔을 때 손색이 적도록 최대한 힘을 키워 놓아라.]
[자식의 기분을 헤아린다? 불필요한 행위다. 저 아이는 내가 낳았으니 나의 소유물이며 내 뜻대로 다룸이 옳다.]
네바르탄은 제 딸을 오로지 자신을 위한 보험 따위로 취급했다.
자신을 향한 딸의 애정을 당연하게 느끼면서도 잔악한 말을 일삼았다.
드래곤의 생리에선 그게 상식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인간들의 손에 자라온 네펠리나는 그것을 상식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감히 부친을 원망하진 못했지만, 너무 슬프고 괴로워했다.
끝내 싫다고 거역했었다.
그리드와 함께 살아가겠노라 말했다.
어쩌면 지금의 그녀에게 있어서 부친의 복수는 크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부디 그러길 바랐다.
“시간이 필요하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리드가 입을 열었다.
번헬리어가 귀를 의심했다.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더니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진심이냐?”
번헬리어는 고룡이다.
고룡의 신분으로 그리드와 인간들을 적대하지 않겠노라 선언했다.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그리드는 무조건 감격해야 옳았다.
한데 고민해 볼 시간이 필요하다고...?
번헬리어 입장에선 몹시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화가 치밀어 올라서 순간 네바르탄처럼 미쳐 날뛸 뻔했다.
그리드가 그의 입장을 충분히 헤아렸다.
“당신이 불쾌해하는 건 당연해. 나 또한 이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워. 하지만 동료 위에 벗이라는 관계가 있어.”
“...”
“언젠가 당신이 보았던 광룡의 딸이 내 오랜 친구다. 당신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지. 그 아이의 입장도 들어봐야 해.”
“...하찮은 해츨링 따위를 고룡보다 우선한다고?”
“해츨링이냐, 고룡이냐는 중요한 게 아니야. 친구니까 우선하겠다는 거지.”
“...”
번헬리어의 표정이 점차로 복잡 미묘해졌다.
친구라는 개념이 무엇인지.
머리로는 알아도 마음으론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연하다.
고룡은 태초부터 함께했던 동족을 포식하는 걸 궁극의 목적으로 삼는 존재다.
필요에 의해 협력하는 관계는 이해할 수 있어도,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지켜야 할 관계를 이해하진 못했다.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에게 그리드가 말했다.
“이 순간의 나를, 언젠가 당신이 이해하는 날이 온다면. 그때 우리는 용언 따위가 없어도 서로를 신뢰할 수 있겠지.”
“...용언을 쓰지 않는 고룡을 신뢰한다? 헛소리를 남발하는군.”
“...?”
자학 개그인가?
고룡이면서도 제대로 된 용언을 쓰지 못하는 번헬리어가 할 말로 적합하지 않다.
‘용언 한 번 썼다고 기고만장하긴.’
그리드가 헛웃음을 흘렸다.
웃음이 절로 나온다.
날아갈 듯이 기뻐서다.
번헬리어가 비록 하자가 많다곤 하나, 아무튼 고룡 아닌가.
고룡이 용언까지 써가며 아군이 되기를 자처하는데 기쁘지 않으면 사이코패스다.
들뜬 마음을 간신히 진정시킨 그리드가 하야테와 비반에게 양해를 구했다.
“잠시 라인하르트에 다녀오겠습니다.”
번헬리어와의 관계를 결정하기 위해선 네펠리나를 만나는 게 우선이다.
그것이 존중이고 예의였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번헬리어가 돌변할 가능성도 없다.’
동료가 되겠다는 용언을 써놓고 돌변한다?
번헬리어가 제 용언의 가치를 영구히 깎아내릴 게 아닌 이상에야, 절대로 그럴 일은 없다.
***
라인하르트엔 템빨단 전원이 모여 있었다.
너희를 기억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떠난 그리드를 걱정해서다.
지난 반나절 동안.
템빨단원들은 하염없이 그리드만 기다렸다.
사도들과 아이린, 로드도 마찬가지였다. 타이탄에 있어야 할 바사라도 라인하르트에 머무는 중이었다.
“뭔데 다들 모여 있어?”
사람들의 근심이 깊어지는 가운데.
노을이 밤하늘을 물들인다 싶더니 그리드가 귀환했다.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은 채다.
“...괜찮아?”
걱정스레 묻는 사람들.
그제야 그리드가 반나절 전의 자신을 떠올렸다.
‘내가 대체 왜 그랬을까.’
몹시 민망하다.
메르세데스의 심상세계 귀퉁이에 생긴 쥐구멍으로 숨고 싶을 지경이었다.
“...나는 괜찮다.”
뭐라고 설명해야할까.
한참을 고민하던 그리드가 그냥 설명을 안 하기로 했다.
구차하게 설명해봤자 부끄럽기만 했으니, 그냥 없던 일로 치부하고 싶었다.
‘필시 큰 고생을 한 모양인데.’
‘이번에도 혼자서 모든 걸 떠안는 건가...’
‘도대체 이 세계를 몇 번째 구해내는 거냐, 그리드!’
때로는 침묵이 최선일 때도 있었다.
사람들이 제멋대로 해석하며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마침 네펠리나를 발견한 그리드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번헬리어가 아군이 되길 희망하고 있어.”
“...!”
“...!!”
곳곳에서 침음이 터졌다.
악룡 번헬리어.
사람들에게 최초로 드래곤의 위대함을 각인시킨 존재다.
제3회 국가대항전에 난입해 그리드와 크라우젤을 압도했던 놈의 위용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회자됐다.
최근 종종 그리드와 얽히며 건재함을 과시하기도 했다.
아무튼 별세계의 존재인 것이다.
한데 그런 괴물이 아군이 되길 희망한다고?
‘도대체 뭔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 거야?’
모두가 경악어린 얼굴로 그리드를 지켜보는 가운데.
“그것 참 잘 된 일이구나.”
네펠리나가 입을 열었다.
“번헬리어가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만 있다면, 무조건 곁에 두는 게 이롭다고 생각한다. 눈에 안 보이면 뒤에서 무슨 일을 벌일지 불안한 존재니까. 물론 무력적인 측면에서도 큰 도움이 될 테고.”
“...넌 괜찮은 거야?”
“번헬리어가 내 아버지의 원수라는 점을 신경 쓰는 것이냐? 당연히 괜찮다. 개인적인 원한 관계로 그리드 네 발목을 붙잡고 싶지도 않고, 애초에 천 년 후에나 해결할 수 있는 문제야. 당장 집착해봤자 불필요한 낭비라는 것이다.”
아버지의 원수를 꼭 내가 갚아야하는 건지도 의문이다.
얼마 전에 아버지를 직접 만났을 때.
너무 많은 것이 예상과 달랐다.
무엇보다 확실한 사실은.
“아버지보단 여기에 모인 너희가 더 소중하기도 해.”
마냥 혈육에게 집착하기엔, 네펠리나에게도 소중한 인연이 너무 많았다.
번헬리어와의 관계는 긴 세월이 흘러 성룡이 되면.
즉, 여기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사라졌을 무렵에야 새롭게 규정해야 옳다고 판단했다.
“네펠리나! 어쩜 이렇게 기특해?”
지슈카가 네펠리나의 작은 몸을 꽉 끌어안았다.
네펠리나가 무엄하다고 한 소리 했지만 개의치 않고 뺨까지 비벼댔다.
네펠리나는 노에와 함께 템빨단의 마스코트다.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아꼈다.
한 시름 놓은 그리드가 따뜻한 미소를 머금은 채 두 사람을 지켜봤다.
잠시 후.
“네펠리나가 허락했어.”
지혜의 탑으로 돌아온 그리드가 번헬리어를 앉혀놓고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하지. 앞으로 서로 신뢰하고 의지하며 잘 지내보자고.”
“...그래.”
대답하는 번헬리어의 표정이 영 떨떠름했다.
바람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해츨링의 허락이 전제가 된 덕분이었다.
이게 맞는 건가 싶었다.
‘고룡인 이 몸께서 동료가 될 기회를 주었는데 왜, 하찮은 해츨링 따위의 허락을 구하냔 말이다...’
‘백날 설명해봐야 소용없겠지.’
생각할수록 황당한 걸까.
끝내 눈살을 찌푸리는 번헬리어를 보면서, 그리드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번헬리어의 관념으론 위계보다 우선시되는 관계를 아직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충분히 이해했다.
‘차차 배워나가길 바란다.’
[유일신 그리드가 26번째 서사시를 써내려갑니다.]
[서사의 시작은, 그와 함께하길 소망하는 고룡의 염원에서 비롯합니다.]
바알.
지옥을 왜곡시킨 제1위 대악마.
인간들에게 영원한 고통을 안기는 원흉 중 하나를 제거할 원정대가 완성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