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5권 - 16화
[비반의 심상세계 <심중무검>에 입장하였습니다.]
본래 수중무검 심중유검이다.
손에 검이 없어도 마음의 검으로 적을 베어 죽이는 경지.
즉, 비반이 이미 오래 전에 이뤘던 경지를 뜻했다.
한데 검신이 된 비반의 바뀐 심상세계가 심중무검이라는 황당한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거검이 숨어버린 여파인가.’
태산보다 거대한 거검.
비반의 심상세계에 우뚝 선 채 하늘과 대지를 관통했던 그것은 정말로 많은 걸 상징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검과 검술의 총체였고, 비반의 굳센 심지를 뜻했으며, 드래곤을 베겠다는 염원이기도 했다.
비반의 심상세계를 통째로 지탱하는 느낌이었다.
한데 사라지고 없다.
수풀 너머 펼쳐지는 광야가 온전히 시야에 들어왔다.
광야의 중심에 박혀있던 거검도, 허공에서 거검의 주위를 배회하던 수십 만 자루의 작은 검들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다.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겪었던 병증의 원인은 검기의 공전에 있었네.”
맞다.
비반이 망령이 들었던 이유는 순전히 검기의 공전 탓이었다.
무한에 가깝게 샘솟는 검기를 마치 전기톱마냥 상시 진동시켰던 그는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온전할 수가 없었다.
체내에서, 심상에서 한시도 멈추지 않고 진동하는 검기가 날카로운 파동을 일으키며 그의 육체와 정신을 실시간으로 파괴했으니까.
그것은, 일종의 예열 과정이었다.
언젠가 반드시 드래곤의 목을 베기 위해 검기를 날카롭게 연마하고 유지하는 과정.
실제로 그것은 고룡의 의념마저 베어버렸다.
한없이 무적에 가까운, 결코 꺾일 리 없는 의지를 단칼에 베어 트라우카를 물러나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파장이 컸다.
무한히 진동해온 검기가 목적을 이루고 멈춰버린 순간.
비반의 육신과 정신은 실 끊어진 인형처럼 허물어졌다.
폐인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아니, 검으로 거듭나는 과정이었다고 표현함이 옳다.
그때의 비반을 통째로 집어삼키려고 했던 것이 바로 거검이다.
놈을 제압함으로써 그리드는 비반을 구원했고, 그리드의 도움을 받아 시련을 이겨낸 비반은 검이 아닌 검신으로 거듭났다.
“나는 아주 오랜 세월 동안 검기를 조율해왔네. 어느 시점부턴 의식하지 않아도 숨 쉬듯 자연스럽게 검기를 진동시켰지. 무의식으로 행했단 말일세. 내 심상세계 속 거검이 그 무의식의 주체가 되면서 나를 위협할 정도로 비대해졌던 거고... 아니, 위협했던 게 아니야. 녀석은 내 바람을 이뤄주기 위해 노력했던 거지.”
정확한 과정을 설명하는 비반의 표정이 씁쓸했다.
“사실 나는 녀석을 미워할 수가 없다네. 반드시 드래곤을 베겠다. 차라리 검이 되겠다는 나의 가장 큰 바람이 빚어낸 존재가 바로 녀석이니까. 녀석은 내 기원의 형상일세. 녀석의 적의와 생존욕구는 결국 나의 의지를 실천하고자하는 책임감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적이라고 볼 수 없네.”
“그래서 품으셨죠. 한데 이젠 잃어버리셨고.”
그리드는 냉정했다.
“놈의 근원이 당신의 염원일지언정, 지금의 놈은 당신을 적대하고 부정하고 있습니다. 당신과 하나가 되어 인간성을 상실시키고 병기로 거듭나게 만들려는 놈에게 언제까지 호의를 품을 작정이십니까? 이젠 그만 놓아주십시오.”
거검이 품은 의념의 총량은 매우 높다.
비반의 일면쯤으로 해석해야 옳았기에 경계해야하는 것이다.
놈은 기회만 오면 비반을 집어삼킬 불안요소다.
물론 비반의 격이 워낙 높아 영원히 집어삼키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절대자의 의식과 육신을 1분, 1초라도 빼앗을 수 있다는 건 세상 전체에 큰 위협이었다.
‘기껏 치매를 극복했더니 이번엔 다중인격자가 될 수도...’
“알고 있네.”
비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녀석을 나와 동격으로 아끼며, 녀석이 나의 적이 아니란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지금 이 순간부터 철저히 적대하겠네. 완전하게 제압해서 이번에야말로 온전히 나의 것으로 삼겠네.”
그제야 그리드는 눈치 챘다.
비반의 말은 처음부터 그리드를 향했던 게 아니다.
어딘가에 숨죽인 채 엿듣고 있을 거검에게 들려주는 선언이었다.
들어라.
나는 너를 아끼고 신뢰한다.
하지만 결국 너는 나의 일부이고, 너는 내가 될 수 없으니, 나는 너를 제압해 온전한 나의 것으로 삼겠다...
깔끔한 선전포고.
비반은 거검에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네가 두렵지 않다고.
하지만 너는 나를 두려워해야 옳다고.
“출발하지.”
“예.”
비반이 먼저 순보를 사용하고 그리드가 그 뒤를 따르는 식으로 두 사람은 탐사를 시작했다.
순보.
단 한 번의 보폭으로 시야의 끝자락까지 도달하는 권능이다.
만약 이 기술을 현실에서 사용한다면, 대한민국에서 남아공까지 도착하는 것도 순식간일 터였다.
하지만 심상세계에서 순보의 권능은 절대적이지 않다.
심상세계의 면적이 무한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의식이란 무한하게 확장되므로 심상세계 또한 같은 것이다.
순보를 수백 번, 수천 번 연달아 사용해봤자 광야는 끝없이 펼쳐졌다.
“...별 생각 없이 살아오신 세월이 한참인 것에 반해 심상세계는 쓸데없이 넓군요.”
얼마나 헤맨 걸까.
낮과 밤의 구분이 없어 시간의 흐름을 감지할 수 없는 공간.
그곳을 한참 동안 헤맨 끝에 초조해진 그리드가 결국 불만을 토로하고 말았다.
비반이 피식 웃었다.
“자네가 오해하는군. 병증을 알았던 시절의 내가 생각 없이 살았다는 건 지나친 비약일세. 그 시절의 나는 생각을 해도 잊었을 뿐이고 내가 잊은 생각들은 모두 이곳에 축적됐을 테니 도리어 넓은 것이 당연해. 내가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고 살아갔는지 저 광활한 땅이 증명하는 셈이지.”
“자랑하듯이 말하실 건 아닌 거 같습니다만...”
“명색이 신이란 자가 어지간히도 궁시렁대는군. 떠들 시간에 주변이나 잘 살피게.”
“...네.”
하다하다 비반에게 잔소리를 듣다니.
그리드는 현재 자신의 상태가 온전치 못하단 사실을 자각했다.
‘위험하다.’
각오했던 것보다 너무 힘들다.
시간의 흐름을 인지하지 못한단 점이 치명적이었다.
몇 달에 걸쳐서 파그마의 기서를 찾아 헤맸던 시절과는 비교 자체가 불허한 수준.
상황에 집중할 만한 환경이 아니다...
그리드의 초조함이 극에 달할 때였다.
“생각해보니 황당하군. 쉬운 길을 놔두고 굳이 어려운 길로 돌아오게 만든 건 자네면서 왜 나한테 화풀이인가? 스스로의 못난 판단력을 원망하며 사죄해도 부족할 판국에 감히 누가 누굴 원망해?”
도끼눈 뜬 비반이 노려보며 힐난했다.
이곳이 비록 비반의 심상세계라고는 하나.
비반 역시 그리드와 마찬가지로 정처 없이 떠도는 입장인지라 멘탈이 온전치 못한 눈치였다.
일을 크게 키우기 싫었던 그리드가 사과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잘못 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이제 와서 사과하면 뭣 하는가? 애초에 이게 미안해서 끝날 일인가? 빌어먹을! 미안할 짓 자체를 만들지 말았어야지!!”
급기야 성을 내는 비반이 어렴풋한 적의마저 드러냈다.
이쯤 되자 그리드도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아니 왜 자꾸 호통을 치십니까? 말투도 꼭 옛날처럼 극혐... 응?”
덩달아 으르렁거리던 그리드가 문득 입을 닫았다.
그걸 왜 이제야 말하는가.
그 지긋지긋한 헛소리를 거듭 지껄여대던 시절과 닮은 비반의 모습을 납득하기 힘들었으니까.
비반의 성격이 여전하다고는 하지만.
지금 상황이 매우 특수하다는 점까지 고려해도...
비반이 치매에 시달리던 시절로 회귀할 필요가 굳이 있을까?
“...마침 빡치던 차에 잘 됐다.”
스릉.
그리드의 주변 대기가 여름날의 열기에 시달리는 것처럼 일그러졌다.
허리춤에서 뽑혀 나온 역천에 의해서다.
역천에 담긴 신성과 예기를 대기가 감당 못했다.
비반이 눈살을 구겼다.
“자네, 무슨 속셈인가?”
“너를 죽... 벤다.”
“진심이군. 자네가 급기야 돌아버린 게야.”
혀를 내두른 비반이 마찬가지로 검을 뽑았다.
구젤의 어금니.
그리드에게 선물 받았던 검이다.
적을 겨눠야할 칼날이 그리드의 목덜미에 드리웠다.
“지금이라도 진정하게. 현실에서도 검술로는 내 상대가 되지 못할 자네가 이곳에서 날 감당할 심산은 아니겠지? 그 검을 내게 순순히 바친다면 한 번쯤은 용서해주겠네.”
“...반대야.”
“반대? 용서를 구할 건 자네가 아니라 나라고? 오만한.”
“칼날의 결도, 손잡이의 장식도.”
“...?”
“모든 게 마치 거울에 비친 듯이 반대라고.”
“...!”
비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고 그리드의 입가엔 점차 짙은 미소가 번졌다. 버프 스킬을 중첩시키기 시작하는 그의 두 눈에 적의를 넘어서는 살의가 피어올랐다.
“따라할 거면 제대로 따라했어야지.”
“끅...!”
역천의 검로를 저지한 여파로 지상까지 추락한 비반이 한참을 뒤로 밀려난 후에야.
━쩌어어어어어어어어어엉!!
폭발음과도 같은 금속의 마찰음이 세계를 격동시켰다.
다급히 고개를 들어 그리드의 위치를 찾는 비반의 양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무슨 위력이?”
“그걸 순전히 힘으로 막아? 진짜 비반 님이었으면 검술로 쉽게 막았을 텐데.”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온다.
비반.
정확히는 비반의 모습을 한 ‘거검’이 황소 같은 콧김을 내뿜었다.
아래서 위로 솟구치는 무형검을 줄기줄기 내뿜으며 다가오는 역천에 대항하기 위해 배에 힘을 꽉 준 것이다.
콰아아아아앙!!
이번엔 포탄이 연달아 쏘아지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역천에 담긴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광야를 역으로 질주하는 거검의 몸이 몇 개의 바위를 꿰뚫으며 발생시킨 소음이었다.
“...역시 인간의 몸은 하찮군.”
천천히 일어서는 거검의 몸은 만신창이였다.
무형검에 사정없이 찔린 하반신은 검붉은 피에 젖었고 검을 쥔 두 손은 처참하게 부러져 군데군데 잘라진 뼈가 튀어나와 있었다.
꽈드득!
반대로 꺾인 팔목을 강제로 비틀어 고정시킨 거검이 일그러진 비반의 얼굴로 웃었다.
“역시 ‘나’는 검이 되어야 옳다. 부러지지 않고 모든 걸 베어내는.”
“비반 님은 어디에 계시지?”
그리드가 다가서며 물었다.
복부에서부터 올라오는 아릿한 통증을 간신히 삼켜내면서다.
공격하는 순간 반격 당했다.
하여 곧바로 추적하지 못하고 일어날 틈을 줬다.
‘처음 기습을 막아낸 것도 그렇고... 비반 님의 스탯만큼은 온전히 구현한 건가?’
더럽게 빠르고 강력하다.
그나마 인간의 신체를 재현하고 있는 탓에 단단하진 못했지만.
“글쎄다. 이미 한참 먼 곳에 있겠지. 멍청한 네놈이 자신을 놓쳤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을 테니까.”
“...”
그리드가 반박하지 못했다.
몇 시간.
혹은 몇날며칠을 비반의 등을 쫓아 순보를 사용해온 그는 어느 순간 집중력을 잃었다.
비반의 등이 아닌, 비반의 모습을 한 거검의 등을 쫓았을 정도로.
‘내 실수다.’
사실 집중력을 잃은 건 찰나에 불과했을 것이다.
하지만 거검의 위장술이 워낙 뛰어났고 개입한 타이밍이 절묘했다.
애초에 이곳은 심상세계다.
어떤 이적이 펼쳐져도 이상하지 않다.
당할 수밖에 없는 함정에 당한 셈.
하지만 그리드는 자책했다.
앞으론 더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다짐하는 계기로 삼았다.
“뭐, 아무튼 잘 됐어.”
그리드가 몇 개의 물병을 주섬주섬 꺼냈다.
거검이 보지 못하는 각도에서다.
거검 입장에선 도무지 볼 수 없는 방향에서 물약을 단숨에 삼켜버린 뒤, 아무 것도 모르는 표정을 짓고 말을 이었다.
“얼마나 더 찾아 헤매야할지 몰라 초조했었는데 제 발로 나타나줘서 고맙다.”
“기고만장할 필요 없다.”
뿌득, 뿌드드드득!
거검이 탈피를 시작했다.
비반의 모습을 벗고 본연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림자가 드리운다.
고룡이 지상에 강림했을 때처럼 거대한 그림자.
어느새 하늘의 한쪽 면을 완전히 가린 거검이 광야에 우뚝 섰다.
광야를 반으로 갈라놓은 느낌이다.
-이곳에서 나는 무적이다.
선언한 거검이 그리드를 향해서 그 큰 몸을 휘둘렀다.
드래곤을 베기 위해 태어난 검.
당연히 부러지지 않는다.
그리드의 역천과 몇 번을 맞부딪쳐도 결국 그리드의 몸이 먼저 납작해질 것이었다.
상식적으론 그랬다.
쩌어어어어어어엉!!
-...!?
연신 시끄럽게 떠들던 거검이 침묵했다.
그리드와 충돌한 순간, 제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오름을 자각하면서다.
피아로가 재배한 황금호두를 재료로, 템빨마탑과 레이단의 연금술 시설이 합심해서 만든 특제 버프물약.
그것을 종류별로 복용해 모든 스탯을 최소 20퍼센트 이상씩 상승시킨 상태인 그리드의 근력은 심상세계의 강제력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아스가르드의 차원 효과를 무시해버리는 고룡의 권능을 물리적으로 구사한 느낌에 가깝다.
‘고룡도, 신도 무적이 아닌 마당에 무적은 염병.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르는군.’
꽈르르르르릉!!
벼락처럼 쏘아진 그리드가 융합 검무를 연속해서 전개했다.
거검의 면적이 워낙 큰 까닭에 100퍼센트 명중률을 자랑했다.
물론 거검은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
순간순간 쓰러질 듯이 휘청거릴 뿐, 세계수의 허리마냥 두꺼운 칼날을 굳건하게 유지했다. 역천이 내뿜는 온갖 파괴의 기운을 흡수하듯 버텼다.
-언제까지 날뛰나 보자! 네놈이 지쳐 떨어져나가는 순간이 네놈의 최후가 될 것이다!!
거검이 호기롭게 외쳤다.
계속해서 밀려나면서도 자신의 승리를 자명하게 여겼다.
그것이 당연했으니까.
착각이다.
정신적으론 몰라도, 그리드가 체력적으로 지칠 리 없다.
이곳은 비반의 심상세계다.
비반은 겉으로 보이는 태도와 달리 그리드를 섬긴다.
유일신 그리드의 신도였다.
그러므로 비반의 심상세계는 템빨계와 닮은 판정을 받았다.
쿨타임 없이 무한히 연계되는 6융합 검무가 증명했다.
심지어 이곳엔 그리드 혼자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늦어서 미안하네.”
명색이 절대자간의 전투다.
무척 큰 소란이 발생했다.
아득히 먼 곳에 있는 비반이 어렴풋하게나마 감지할 정도로.
-‘나’여...! 너는 내가 되어야 한다!!
비반이 도착할 때까지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버텼다고?
어느새 도착한 비반과 그리드의 멀쩡한 얼굴을 번갈아 살펴본 거검이 경악성을 담아 외쳤고,
“아니, 네가 내가 된다.”
비반의 강력한 의지가 거검을 집어삼켰다.
쿵! 쿵!! 쿠르르르르르르르릉!!!
무한히 펼쳐진 광야가 통째로 흔들렸다.
비반이 ‘손에 쥔’ 거검으로 지면을 내려 친 여파다.
[비반의 심상세계가 회복을 시작합니다.]
반가운 알림창이 떠올랐다.
2개로 나뉜 주인의 자아에 혼란을 겪고 흩어졌던 수십만 자루의 작은 검들이 지평선 너머에서부터 몰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