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5권 - 15화
“그건 좀...”
“그건 아니오.”
심상합일의 여파일까.
그리드와 하야테가 동시에 말했다.
고뇌 중인 고룡.
악룡 번헬리어를 숫제 사냥감 취급하는 비반을 진정시키고자 애썼다.
“신뢰할 만한 아군으로 거듭나려는 중인 자를 굳이 자극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소. 그대는 그리드 님의 노력을 수포로 만들 셈이오?”
“꼭 실제로 큰 검이 아니어도 되지 않습니까? 비반 님의 심상세계에 존재하는 거검. 그거 결국 비반 님의 의념이잖아요? 새로운 드래곤 웨폰에 그 의념을 담을 수만 있다면 충분히 무겁고 비대해질 겁니다. 비반 님이 뜻하면 드래곤을 쉽게 참수할 수 있을 정도로.”
“흐음... 쉬운 길을 놔두고 굳이 어려운 길로 돌아 간다라... 절대자가 품어야하는 마음가짐인가 보군요. 오늘 하야테 님과 그리드 두 분께 큰 가르침을 얻습니다.”
근래에 절대자가 된 비반이다.
인간의 신분으로 검의 신(神)이라 불리게 됐지만 자만하지 않고 겸손했다. 스스로를 신이 아닌 신인으로 자각하고 매사에 배우는 자세로 임했다.
“어떤 일이든 시련으로 삼고, 그 시련을 극복하며 스스로를 단련한다... 잘 알았습니다. 앞으로는 식사하고 잠자는 일도 구태여 시련으로 삼도록 하지요. 음... 잠자리를 드래곤 레어에 마련해야 하나...”
“...?”
혹시 비꼬는 건가?
그리드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비반이 비록 치매를 극복했다곤 하나, 성격은 여전하단 사실을 파악한 상태이기에 품는 의심이었다.
오해다.
비반은 순수하게 말하고 있었다.
“제대로 해석하셨구려.”
하야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반의 잘못 된 해석을 굳이 정정해주지 않았다.
몹시 강직한 성품을 지닌 탓에 양심에 가책을 느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현재로썬 이게 최선이라는 판단이었다.
“때로는 힘든 길로 돌아가는 것이 최선일 수도 있소.”
“알겠습니다.”
건너편 방에 고정됐던 비반의 시선이 드디어 그리드와 하야테에게 복귀했다.
그리드가 흠칫 놀랐다.
반박귀진.
방금 전까지 드래곤의 참수를 논하며 번헬리어를 사냥할 생각을 품었던 사람이라곤 믿기지 않게도 비반의 눈빛은 고요하고 평온했다.
일상을 영위하는 사람과 같았다.
살의와 투지 따위의 자극적인 감정은 흔적조차 없었다.
‘그래서 번헬리어가 잠잠한 거구나.’
번헬리어는 고룡이다.
의식을 여러 개로 분산시켜 대륙 전역을 실시간으로 감지하는 감각을 지녔다.
바로 근처에서 자신을 향하는 악감정을 느끼지 못할 리 만무한 것이다.
그리드는 조마조마했었다.
혹 번헬리어가 비반의 의도를 읽고 날뛰진 않을까.
가스라이팅이 무용해지는 건 아닐까.
기껏 악룡을 교화시키는가 싶었는데...
자꾸 걱정이 생겼다.
한데 다행히도.
번헬리어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 눈치였다.
비반의 높은 경지가 평화를 지켜냈다.
“그리드.”
“네.”
“분명히 힘든 길일세. 단순히 싸워서 적의 목을 베고 대가리를 깨뜨리는... 머리를 부수는 일쯤이야 자네에겐 손쉬운 일이겠으나, 과연 자네가 이런 일도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일세.”
안도하고 있는 그리드에게 비반이 경고했다.
“자네가 일전에 직접 겪어보았듯이 심상 속 내 검은 망가진 상태일세. 정신적인 측면을 논하는 걸세. 단순히 깨어지고 잘려나간 것쯤이야 당연히 금방 복구되니까.”
비반의 심상 속 거검.
그것은 당연히 비반의 일부였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비반을 부정하는 존재였다. 비반을 집어삼키고자 했었다.
차라리 검이 되길 바랐던 비반의 염원이 탄생시킨 괴물인 것이다.
“여전히 망가진 상태라고요? 그때 제압하고 온전히 품으셨기에 검신으로 거듭나셨던 게 아닙니까?”
“필시 그랬었지. 하지만 내가 강해지면서 놈 또한 덩달아 강해지고 말았네. 나로부터 재차 떨어져나갔어. 전과 달리 심상세계의 주체가 되진 못하고 있지만, 수풀에 도사리는 도적놈처럼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다네.”
“제가 심상세계에 입장하는 순간 적대하겠군요?”
“그런 단순한 방법은 위협이 아니지. 놈이 자네를 적대해봤자 무슨 수로 자네에게 위해를 입히겠나? 하물며 내가 자네의 곁에 함께 있을 터인데.”
비반이 걱정하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오히려 놈이 숨어서 안 나오는 사태를 걱정해야 하네. 한때 나의 심상세계를 지배했던 놈답게 나도 모르는 구역을 파악하고 있거든. 놈이 작정하고 숨어버리면 나조차도 찾을 도리가 없네.”
심상세계에서 ‘구역’이란 무의식의 일부를 뜻한다.
비반 본인이 인지하지 못하는 무의식이 존재하는 건 당연했다.
반면 거검은 애초에 심상세계에서 태어나 심상세계를 지배했던 존재다. 비반은 모르는 무의식을 모조리 꿰뚫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자네와 협력해서 설령 찾아낸다 한들 이후의 일이 더 문제지. 놈이 전혀 협조를 해주지 않을 테니까.”
비반이 원하는 검은 심상세계 속 거검이다.
한정 된 자원으로 그것과 똑같은 검을 만들기 위해선 당연히 거검을 통째로 재료로 사용해야한다.
심상세계 속 거검의 정체는 ‘거검의 형상을 한 의념 덩어리’니까.
트라우카의 뼈와 비늘을 비반과 함께 제련하고 단련해서 일반적인 크기의 검을 만든 뒤.
그것에 거검의 형상을 한 의념 덩어리를 담아야 비로소 비반이 원하는 검은 완성되는 것이다.
비반의 의지에 호응해서 크기와 무게를 키우는 거검 말이다.
“...음, 그 거검이야말로 당연히 비반 님께서 생각하시는 가장 이상적인 검인 거겠죠?”
“맞네. 다른 모두가 부정한다 해도 나에게 있어선 그것이 가장 이상적이고 최강인 검일세.”
그리드의 작품들을 무시하는 발언이 아니다.
비반의 심상세계 속 거검은 ‘최강의 생물을 베는 최강의 검’이 되기를 소망했던 비반의 염원이 만든 결과물이다.
적어도 비반의 손에서만큼은 최강의 검으로 거듭나야 옳았다.
‘그게 맞아. 설령 거검의 위력이 역천보단 못할지언정 비반은 역천보다 그 거검을 더 잘 다룰 거다.’
궁합이라는 것이다.
비반 스스로 만든 운명에 가까운 궁합.
‘...난처하군.’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한 그리드의 시선이 한쪽으로 돌아갔다.
건너편 방이 있는 방향이다.
고뇌 중인 번헬리어가 있는 하야테의 집무실이었다.
‘그냥 팔 하나 달라고 할까? 어차피 금방 재생하잖아?’
비반이 원하는 거검을 만드는 또 하나의 방법은 ‘물질적인 승부’를 보는 것이다.
심상세계 속 거검과 완전히 똑같은 크기와 형태의 거검을 실제로 만들어버리는 식이다. 거기에 비반의 염원을 조금만 담아 비반에게 특화 된 무기로 거듭나게 만들면 된다.
물론 세련되진 않고 무식한 방법이었다.
평소엔 보통의 검과 같다가 필요에 따라 크기를 늘리는 검이 아닌, 상시 태산 같은 크기를 유지하는 검이 탄생할 테니까.
실용적인 측면에서 문제가 많았다.
엄밀히 말해서 졸작.
그런 걸 만드는 건 그리드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그리드 공?”
하야테의 눈빛에 불안감이 스칠 무렵에서야.
건너편 방에 고정시켜뒀던 시선을 거둔 그리드가 결심을 마쳤다.
“도전해보죠. 안 되면 될 때까지. 어디 누가 이기나 한 번 해보자고 합시다.”
그리드의 가장 큰 무기는 집념과 끈기다.
심상세계.
1초가 영겁으로 늘어날 수도 있는, 현실과 단절 된 그곳에서 아무리 긴 세월을 헤맬지언정.
그리드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애초에 난 그것밖에 없는 놈이니까.’
“...!”
하야테의 두 눈이 미세하게 치켜떠졌다.
각오를 다지는 그리드의 의지를 엿보고 경악하는 것이다.
천 년 이상을 살아온 하야테다.
한데 그런 자신조차도 가늠하기 힘든 세월을 그리드가 감수하려하고 있었다.
‘물론 실천과 다짐은 엄연히 다르지만... 그리드 님은 진심으로 실천하시려하고 있다. 알아갈수록 존경하게 되는구나.’
그리드는 무슨 수로 세월이 무색하게 성장해왔는가.
그 비결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 하야테가 거듭 감탄하는 그때.
“...대신 준비할 시간이 좀 필요합니다.”
그리드는 양해를 구한 뒤 로그아웃했다.
깨끗하게 목욕하고 유라와 지슈카를 만나 든든히 배를 채웠다. 두 사람과 함께 운동하고 사랑을 나누며 체력과 정신력을 가다듬었다.
깊은 밤.
마지막 술잔을 기울이면서는 나 없는 동안에도 부디 행복해야 한다는 주사를 부리고 말았지만.
아무튼 그리드는 충분히 충전했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나서 곧바로 다시 로그인했다.
비반의 심상에서 수십 년, 수백 년, 혹은 그 이상도 버텨내리란 각오를 재차 다지면서다.
“나... 어쩌면 다시 돌아왔을 때 너희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 지도 몰라. 그때 서운해 하기보단 잘 지켜봐줘. 내가 기억을 떠올릴 수 있도록 천천히 시간을 갖고 도와줘.”
“???”
로그인해서는 템빨단원들을 모아놓고 부탁했다.
아이린과 메르세데스, 바사라에겐 따로 찾아가 전날 밤 유라와 지슈카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말을 했다.
“나를 잊을지언정, 그대만은 잊지 않겠소.”
“...낭군님?”
아들 로드도 찾아갔다.
“바깥으론 사도들과 템빨단원들을 의지하고 안쪽으론 모친과 라우엘을 믿고 따르면 된다.”
“아버님...?”
칸 앞에선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제가 아무 것도 모르는 백치가 되어 돌아올지라도 믿고 기다려주세요. 반드시 회복해서 당신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칸.”
“그리드... 자네 대체 왜 그러나? 나에게만큼은 속 시원하게 털어놔보시게.”
마치 긴 여행을 떠나는 사람처럼.
소중한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가 인사하는 그리드 탓에 제국 전체의 분위기가 뒤숭숭해지고 말았다.
그리드에게 어떤 큰 일이 벌어진 게 아니냐며 걱정했다.
가장 놀란 사람은 S.A그룹의 임철호 회장이었다.
‘...진심이었다고?’
그리드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 중인 그는 엄청난 사실을 눈치 채고 말았다.
그리드가 비반의 심상세계에서 영겁의 세월을 견딜 각오를 다졌단 사실 말이다.
‘그런 일이 벌어지게 놔둘 리 없잖나?’
그리드는 심상세계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게 맞았다.
이론적으로 심상세계에서 헤매게 될 경우, 정말 영겁의 세월을 헤맬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플레이어다.
최소한의 안전장치에 보호를 받아야 할 대상이었다.
정말로 그런 일이 벌어질 리 없는 것이다...
‘정말... 정말이지 여러 가지 의미로 놀라운 청년이다.’
진심으로 영겁의 세월을 견디려 했다니.
그것도 순전히 비반의 염원을 이뤄주기 위해서.
저건 이미 보통의 인간이 아니다.
‘저쯤 되면 실제로도 초월자가 아닌가.’
물론 정신적인 측면을 말하는 거다.
초월자.
그렇게 생각해야 옳다.
그게 아니면 단순히 미친놈밖에 안 되니까.
“...이번에도 응원하겠네.”
임철호 회장은 진심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오랫동안 그리드를 지켜봐온 그는, 당연히 그리드의 가장 큰 팬일 수밖에 없다.
세계관을 어긋나게 만든 레베카의 입장을 누구보다 이해하고 안타깝게 여기면서도, 그는 진정으로 그리드를 응원했다.
[...]
임철호 회장의 태도를 지적해야 할 모르페우스가 침묵한다.
마치 자신도 함께 그리드를 응원하듯이.
화면 속 그리드는 비반의 심상세계에 진입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