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5권 - 14화
초월자가 다수 모여도 드래곤을 레이드하지 못하는 이유.
드래곤의 절대방어와 비늘을 꿰뚫지 못해서다.
타격을 입히지 못하므로 싸움 자체가 성립하질 않았다.
‘무지막지한 위력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야테는 차원이 다른 인물이었다.
드래곤 슬레이어.
하야테가 빚는 용살검은 드래곤의 절대방어를 손쉽게 허물고 비늘마저 갈라버린다.
고룡의 비늘도 예외가 아니었다.
굳이 용살검을 빚을 필요도 없이, 그의 의지가 벼락처럼 떨군 용살의 기운이 트라우카의 비늘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정확히 말하면 ‘트라우카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비늘’이고, 이곳은 하야테의 심상세계라는 점을 감안해야 했지만.
그런 부분들을 고려해도 대단했다.
그리드가 트라우카의 비늘을 처음으로 제련했을 때 헥세타이아와 주작의 불꽃에 도움을 받아야했단 점을 생각하면 더욱 더.
‘솔방울 오징어... 제길.’
메르세데스의 전용 무기 <이노센트>를 보고 별사탕 운운한 극검을 내심 비웃었던 그리드다.
표현력이 고작 저것밖에 안 되냐면서였다.
그래서 이 순간 더더욱 자존심이 상했다.
용살의 기운에 갈기갈기 찢겨진 트라우카의 비늘이 꼭 짬뽕에 들어있는 솔방울 오징어 같단 감상을 품고 말았으니까.
‘위력이 필요 이상으로 강했어. 그나마 비늘이 갖고 있는 고유 성질까지 박살난 건 아니라 다행이긴 한데...’
“이걸로 된 것입니까?”
“아니요. 이 상태로는 갑옷을 만들기 힘듭니다.”
물론 만들 수야 있다.
하지만 실용성이 부족했고 무엇보다 외관상 다소 흉측할 우려가 있었다.
“혹시 위력을 좀... 음...”
“더 높이면 되겠습니까?”
“...아니요. 낮춰주십시오. 한 20퍼센트만...”
이게 최대 출력이 아니었다고?
경악하면서 새로운 비늘을 모루 위에 올린 그리드가 재차 부탁하자.
“알겠습니다. 해보겠소.”
고개를 끄덕인 하야테가 명상하듯 눈을 감았다.
호흡이 변한다.
그에게 호응하는 용살의 기운 또한 덩달아 느려지고, 옅어져갔다.
꽈아앙!!
모루 위 비늘이 거세게 요동쳤다.
하야테가 눈을 뜸과 동시에 떨어진 용살의 기운에 의해서다.
이번에도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조금 더 약하게 부탁드립니다.”
“음.”
“조금 더 약하게. 더, 더 약하게. 타격점을 중앙으로 잡을 게 아니라 사선으로 5센티미터만 위로 높여보죠. 여기가 ‘결’의 중심이라. 네, 위력은 조금 전과 같이요.”
“음.”
“좀 나아지긴 했지만 애매하군요...”
“‘찢었다.’는 결과를 얻기 위해 벼락의 형상을 빚은 것입니다만... 차라리 다른 형상을 빚는 게 낫겠소?”
“아닙니다. 지금 아주 좋아요. 혹시 여러 개의 타격점을 동시에 타격하시는 것도 가능하겠습니까? 오, 역시 하야테 님이십니다! 제가 위치를 따로 체크하도록 하죠. 좋습니다! 이거에요! 이 방향으로 가보죠!”
자각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순전히 ‘타격’으로 단련과 제련의 결과를 얻으려는 작업이다.
당연히 쉽지 않았고 조율할 부분이 생각보다 더 많았다. 수십 번의 시행착오가 반복됐다.
“됐다! 됐어요! 성공입니다!!”
“허.”
노력 끝에 얻는 보상만큼 달콤한 것도 없다.
하물며 하야테에게 무구를 만든다는 것은 완전히 별세계의 일이다.
자신이 그 과정에 일조했다는 사실에 큰 감명을 받았다.
결을 따라 갈기갈기 찢겨져 실타래처럼 얽힌 고룡의 비늘.
세계에서 유일한, 가장 위대한 신이 원했던 이 놀라운 결과물을 자신의 손으로 만든 것이다...
몹시 신비하고 감격스러운 경험이었다.
“규격이 일정하지 않구려. 거듭 도전해야 옳을 것 같은데...”
하야테의 성격이 드러났다.
드디어 맛본 성공에 기쁨을 누리기는커녕 흠결부터 찾고 개선하려고 했다.
그리드가 고개를 저었다.
“아쉬워할 부분이 아닙니다. 차라리 잘 됐어요.”
갑옷이라는 물체는 직사각형 따위가 아니다. 사람의 체형에 맞춰서 만들어야했고 당연히 부위별로 길이도, 두께도 달랐다.
“긴 것과 짧은 것, 얇은 것과 두꺼운 것. 두루 활용할 수 있습니다. 이 상태로도 훌륭한 재료라는 거죠. 괘념치 마십시오.”
금의 성역을 개방해서 심상합일을 이룬 그리드의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구슬처럼 투명하고 맑은 하야테의 푸른 눈동자가 점차 흥미로 물들어갔다.
실처럼 뽑힌 비늘이 그리드의 손끝에서 엮이고, 잘리고, 덧붙여지기를 반복하는 과정이 그에겐 너무 신기하게만 보였다.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실이 갑옷의 뼈대가 되어있었다. 내피로 삼은 트라우카의 가죽에 외골격을 더한 상태였다.
“...”
그리드의 신성은 미동조차 안 하고 있었다.
오롯이 집중하는 주인의 심경을 대변하듯 조각마냥 굳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룡’의 눈은 계속 좌우로 움직이며 주변을 살폈다.
마치 살아있는 생물 같은 모양새.
몹시 기이했다.
‘단순히 신성이 이룬 형태가 아니었나...?’
당장 하야테가 다루는 용살의 기운만 해도 온갖 형태를 이룬다. 용의 형상을 빚는 것도 쉬웠다.
하지만 그 용을 살아 숨 쉬는 생물처럼 보이게 만드는 건 다른 영역의 문제였다.
‘깊이 생각할 문제는 아니다.’
아무튼 저 황룡의 형상은 생김새만 저럴 뿐 생물이 아니었다.
생물 비슷한 것이기만 했어도 <용의 무덤>의 적의를 한 몸에 받고 표적이 됐을 테니까.
단순한 신성을, 그리드가 자신의 위엄을 위해 공들여 가꾼 거라고 해석하는 게 가장 현명했다.
그리드의 저 무지막지한 손재주라면 신성을 다듬는 것이 가능할 것도 같았다.
따앙, 따앙, 따앙...
맑은 망치질 소리가 메아리친다.
뼈대 위에 엮은 비늘 실들을 완전히 결착시키는 과정이다.
빛의 각도에 따라 주황색으로, 적색으로 물들어 은은하게 일렁이는 불꽃을 연상시키는 갑옷이 완성되어가고 있었다.
그리드가 무장하고 있는 염룡의 갑옷과 닮은 것이다.
‘달라야 해.’
그리드는 착용자가 하야테라는 점을 고려했다.
누구보다 귀족적으로 생긴 인물.
밝은 금발에 흰 피부를 지닌 하야테에게 이처럼 화려한 붉은 갑옷을 입히는 건 하책이란 생각이 들었다.
너무 화려해서 역으로 촌티나 보일 우려가 있었으니까.
‘염료를 쓰자.’
본래 염료는 천이나 가죽계열 방어구를 물들일 때 이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금속계열 무구엔 색이 잘 먹지 않는 까닭이다.
코팅하는 느낌에 가까워서 원하는 색감이 제대로 안 나오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물론 평범한 기술자들 사이에서의 이야기다.
그리드의 손재주면 어떤 금속이든 원하는 색상을 뽑아낼 수 있다.
인벤토리에서 염료 목록을 연 그리드가 색 배합을 어떻게 짜면 좋을지 고민하는 순간이었다.
“이 관 같은 것들은 뭡니까?”
하야테가 질문했다.
그리드가 디바인스톤으로 만든 얇은 관이 갑옷의 어깨선부터 가슴, 허리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라 안쪽으로.
“용살의 기운을 호신강기로 운용하실 때 이 관을 이용하시라고 만든 겁니다.”
용살의 기운은 드래곤의 권능을 부정한다.
하야테가 기껏 만든 드래곤 아머에 용갑주를 덧씌우면 드래곤 아머의 고유 옵션들이 봉인 될 우려가 있었다.
더 높은 방어력을 원해서 용갑주를 덧씌웠다가 도리어 방어력이 약화될 수도 있단 말이다.
이 관들은 그때를 대비해서 설치한 것이다.
디바인스톤.
헥세타이에게 얻은 귀중한 광물을 재료로 썼다.
드래곤 아머에 용살의 기운이 녹아드는 불상사를 막아주리라.
“한 번 시험해 봐도 되겠습니까? 되겠소?”
“예, 기꺼이요.”
그리드가 허락하자.
우웅, 우우웅...
하야테가 관을 따라 용살의 기운을 흘려보냈다.
“...!!”
그리드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내부에서부터 서서히 백색으로 물들어가는 갑옷의 모습에 감탄하는 것이다.
무척 아름다웠다.
하야테가 입은 모습을 저절로 상상하게 될 정도로 하야테와 잘 어울리는 색감이었다.
그리드가 인벤토리를 닫아버린 그때.
[<용살자의 용갑주>가 완성되었습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용살의 기운이 비로소 갑옷을 완성시킨 것이다.
등급은 당연히 유일.
유일할 수밖에 없다.
드래곤 슬레이어를 위한 드래곤 아머라니.
이런 게 여태껏 존재했을 리 없었으니까.
“입어보시죠.”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보물을 다루듯이.
용갑주를 조심스레 들어 올린 그리드가 그것을 하야테에게 정중히 건넸다.
하야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충분했다.
용갑주 내부에서 흐르는 용살의 기운이 주인의 의지에 호응해버렸으니까.
‘입는 과정’ 따위를 생략하고, 하야테는 전신에 갑옷을 무장했다.
“...허허.”
몇 번 몸을 움직여본 하야테가 이내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드래곤 슬레이어가 된 이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영겁의 세월을 시한부의 감각으로 연명해온 자신이 이 순간 안락함을 느꼈으니까.
마치 요람에 누운 듯한 감각이다.
두 번 다신 느끼지 못할 거라고 믿었던 편안함이었다.
“비로소 살아 숨 쉬는 것 같구려.”
너무 많은 뜻이 담긴 말이었다.
그리드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가슴이 감격으로 벅차올랐다.
“앞으로는... 앞으로는 바퀴벌레처럼 살아가십시오...”
뭔가 좋은 말을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라우엘과 후로이의 도움 없이는 쉽지가 않았다.
그래서 말이 헛나왔다. 하야테에게 바퀴벌레처럼 질긴 생명력을 안겨주고 싶었던 염원이 만든 헛소리였다.
“...귀하의 소중한 호의, 영원불멸 간직하겠소.”
꼭 말을 잘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마음이란 게 있다.
다행히 하야테는 미소지어 주었고, 그리드는 안도하며 공손히 읍했다.
“존경합니다.”
진실 된 마음을, 이번에는 제대로 전달하면서다.
하야테의 미소와 함께.
쏴아아아아...
그리드의 의식이 현실로 돌아왔다.
“어서 오시게.”
비반이 마중해주었다.
처음 그 자리에 한 치의 미동도 없이 서있는 모습이었다.
심상세계로 들어간 그리드와 하야테.
지상에서 가장 위대한 절대자들이 심상합일을 이루고 있는 동안 묵묵히 호위를 서준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호위였다.
“다녀왔습니다.”
대답하는 그리드의 얼굴에 만감이 교차했다.
너무 기쁘고 흥분 됐다.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이 무언가를 해줄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너무 감사했다.
그가 깊은 여운에 휩싸인 사이, 하야테의 갑옷을 꼼꼼히 살펴본 비반이 하야테에게 공손히 물어보고 있었다.
“한 대만 때려 봐도 되겠습니까?”
“...”
역시.
비반은 비반이구나.
황당해서 웃음을 터뜨린 그리드가 드디어 여운을 떨쳐냈다.
난처해하는 하야테를 대신해서 비반의 관심을 돌렸다.
“이번엔 비반 당신의 차례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검.”
비반은 이미 생각해놓은 것이 있었다.
제작자인 그리드를 고민시킬 생각 없다는 듯이, 자신이 원하는 물건을 명확하게 요구했다.
“드래곤의 목을 단칼에 벨 수 있을 정도로 크고 무거운 검을 원하네.”
비반은 검신이다.
어떤 형태와 무게를 지닌 검이든 뜻하는 대로 다루는 게 가능했다.
제약이 없단 말이다.
설령 태산을 짊어질지언정 그것이 ‘검’이라는 판정을 받게 만들 수만 있다면, 그는 태산을 휘둘러 검술을 구사할 위인이었다.
그리드 또한 이해하고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어디 한 번 해보죠.”
마침 비반의 심상엔 거대한 검이 존재했다.
비반이 염원해온 검이다.
제작자 입장에서 고스란히 참고할 만한 대상이 있다는 건 무척 반가운 일이었다. 마음이 가벼웠다.
‘...아니, 기뻐해야 할 일이 아닌 거 같은데?’
비반의 심상 속에 있는 거대한 검을 실제로 만들기 위해선.
남은 트라우카의 뼈와 비늘을 모조리 다 쏟아 부어도 한참 부족하다.
현실적인 문제에 가로막혀 정색하는 그리드의 표정을 비반은 놓치지 않았다.
“왜? 어떤 문제라도 있나?”
“원하시는 검을 만들기엔 재료가... 턱없이 부족할 것 같은데요.”
“흠... 그런가? 재료가 부족하다라...”
실망을 감추지 못한 비반이 턱을 쓰다듬었다.
생각에 잠긴 듯한 모양새.
천장을 향해있던 그의 회색 눈동자가 곧 서서히 돌아갔다.
건너편 방이 있는 방향이다.
하야테의 집무실.
악룡 번헬리어가 홀로 앉아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공간이었다.
“재료... 고룡의 뼈와 비늘 말이지...”
“...”
그리드와 하야테의 얼굴이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