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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724화 (1,723/1,794)

템빨 85권 - 13화

장소를 옮긴 그리드가 찾아온 용건을 밝혔다.

“의념 제작이라...”

귀 기울여 듣는 하야테와 비반의 얼굴에 연신 감탄이 스친다.

고룡의 신체를 재료로 삼아 만든 무구.

멸망한 세계를 몇 개나 돌이켜봐도 황혼이 최초였다.

황혼 이전까진 그런 무구는 존재한 적도 없었고, 존재할 수도 없었다.

한데 이젠 황혼보다 더욱 강력한 무구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더 나은 재료에 제작자와 사용자의 심상을 더해서.

이론상 더할 나위 없는 궁극의 무구였다.

“무척 기대 되는군. 하지만 하야테 님께는 검과 갑옷이 필요가 없다네.”

비반이 다소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용살검.

드래곤이라는 종 전체가 경계해온 하야테의 병기는 실체하나 개념이다.

하야테의 심상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주인의 의지에 실시간으로 호응하여 적을 참하는 검이 되거나 주인을 지키는 갑주가 됐다.

“애초에 나의 심상은 드래곤 웨폰과 상성이 맞질 않소.”

용살검의 가장 큰 특징이자 강점은 드래곤의 권능을 삭제한다는 점에 있다.

드래곤의 권능을 구현하는 드래곤 웨폰, 아머와 추구하는 바가 완전히 다른 것이다.

당연히 충돌했다.

당장 하야테가 쥐고 휘두르는 드래곤 웨폰은 그저 ‘잘 드는 칼’ 수준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었다.

물론 용살의 기운을 억누르고 휘두르면 드래곤 웨폰의 성능을 온전히 이끌어낼 수 있겠지만, 용살의 기운을 쓰지 않는 하야테는 용살자가 아니게 된다. 고유의 강점을 다수 상실할 터였다.

“의뢰인의 사정에 맞춰 보완하고 개선하는 게 대장장이의 역량 아니겠습니까? 갑옷. 적어도 갑옷만큼은 제게 맡겨주십시오.”

사실 그리드는.

하야테에게 반드시 검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다.

용살검의 위력을 이미 수차례 목격하고 도움을 받아온 입장에서 용살검을 대체할 만한 무기를 만들겠다는 고집을 부린다?

무지에서 비롯한 용기가 없는 이상 불가능했다.

물론 용살검을 대체하는 게 아니라 용살검과 함께 사용할 만한 무기를 만들 의욕은 충만했었지만, 어느 순간부턴 그조차도 사그라졌다.

드래곤 웨폰과 하야테의 상성이 나쁠 거라는 추측이 가능했던 시점부터다.

애초에 이미 용살검을 잘 써먹고 있는 하야테의 무기에 대해 고민해봤자 심력 낭비라는 판단에 이르렀다.

다만 갑옷에서 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다.

용살의 기운이 이루는 호신강기엔 명백한 한계가 있었으니까.

크라우젤이 하야테, 마리로즈와 함께 번헬리어와 싸웠을 당시 녹화한 영상을 수차례 돌려보면서 파악한 사실이다.

첫째, 하야테가 호신강기를 빚을 때면 용살검의 기운이 약해졌다.

검에 집약시킨 용살의 기운을 양분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사태였다.

둘째, 용살검을 희생시키는 것치고 호신강기의 강도에는 한도가 있다.

애초에 양분시킨 용살의 기운을 활용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 되었는데, 만약 하야테가 용살의 기운을 모조리 갑주에 쏟아 붓는다 해도 크게 개선 될 것 같진 않았다.

‘하야테 님이 용갑주에 자신이 있었다면... 그토록 긴 세월 동안 드래곤을 두려워하진 않았겠지.’

하야테는 절대자이나 순수한 인간이다.

그러므로 더욱 더 존중 받아 마땅한, 몹시 위대한 인물이었지만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한계를 지녔다.

드래곤 슬레이어.

세계에서 유일한 신분을 지니고도 숨어 지내온 이유다.

불완전했다.

불완전함의 배경엔 낮은 생존력이 있었고.

“제가 당신을,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적게나마 해방시켜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그리드라고 해서 대상을 무적이나 불사로 만드는 갑옷을 만들 순 없다.

하지만 적에게 ‘저 새끼 바퀴벌레인가?’라는 의문을 심어줄 수준의 갑옷을 만들 순 있었다.

헥세타이아와 칸에게 배웠다.

순전히 불꽃의 열기를 이용해 트라우카의 비늘을 수백, 수천 갈래로 나눈 뒤 엮어내는 기술.

현재 그리드가 무장하고 있는 염룡의 갑옷에 그 신기술이 집약되어 있다.

‘비늘을 서서히 녹이는 게 아니라 타기 직전까지의 고열을 순식간에 일으켜 깨뜨리는 게 관건이다.’

폭발적인 화력이 비늘을 유리처럼 깨뜨릴 때.

비늘 속 세포들은 일시에 경직되며 한층 더 단단해진다.

결을 따라 얇게 ‘찢어진’ 단단한 비늘의 실들이 그대로 굳어버리거나 타버리기 전에 엮기 위해선 고도의 집중력과 순발력, 손재주가 필요한 탓에 헥세타이아도 수십 장의 비늘을 날려 먹고 말았지만.

그래서 끝내 그리드와 칸의 도움을 받아서 염룡의 갑옷을 완성시켰지만...

‘할 수 있어.’

그리드는 그 모든 작업을 혼자서 해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

‘모든 능력치’를 3배 상승시키는 <드래곤 나이트>의 효과를 믿는 것이다.

그렇다.

드래곤 나이트 상태의 그리드는 손재주조차 3배가 된다.

대장장이의 신인 헥세타이아의 손재주를 명백히 초월한단 말이다.

혼자서 세 사람 몫을 해내는 게 가능했다.

따로 보험도 있었다.

<염룡의 갑옷>을 이미 한 번 완성해본 경험이 ‘아이템 오토 제작’에 저장됐다는 점이다.

만약 3배 상승한 손재주로도 트라우카의 비늘을 시간 내에 엮어내지 못할 경우.

아이템 오토 제작을 틈틈이 활성화시키는 식으로 시간을 단축시켜 사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물론 차선책이다.

오토 제작을 쓰는 시점부터 아이템의 완성도가 떨어지니까.

‘그냥 간단하게 헥세타이아를 초빙하는 방법도 있지만.’

심상세계란 그 사람의 내면이다.

너무 많은 것이 담겨있다.

좁게 보면 그 사람의 치부라고 표현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전부라고 표현해야 더 정확했다.

그러므로 필살기다.

적에게 심상세계를 개방한다는 건.

너를 반드시 죽이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그리드가 사도들의 심상세계에 들어갈 때마다 정중히 양해를 구했던 것은, 그것이 대단히 큰 실례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결국 하야테의 심상세계에 발을 들인다는 건 그리드에게도 엄청난 부담이었다.

헥세타이아도 데려가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이유가 어찌됐든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야테 입장에선 완전히 남인 놈을 뭘 믿고?

‘기껏 쌓아온 호감도 다 날려먹을라.’

...아무튼.

“알겠소... 귀하의 호의를 영광으로 알고 감사히 받아들이겠소.”

하야테의 허락이 떨어졌다.

용갑주에 의존할 필요가 없어지게 만드는 갑옷.

누구보다 하야테가 오랫동안 염원해온 일이다.

게다가 그는 그리드를 존경하고 신뢰했다.

그리드에게 심상세계를 개방하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단,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다만 주의하시오. 나의 심상세계를 감당하기가 쉽지 않을 거요.”

“각오하고 있습니다.”

하야테는 그리드에게 무한의 검기를 하사한 적이 있다.

하야테의 심상에서 비롯한 검기였다.

하지만 이젠 안다.

무한의 검기조차도 하야테의 심상세계에선 지극히 일부에 불과할 것이란 사실을.

그리드가 장담컨대, 하야테의 심상세계에는 반드시 용이 있다.

어떤 형태로 도사리고 있을지 추측할 수 없을 뿐.

하야테의 심상세계 안에서 드래곤 나이트를 활성화시킬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하는 배경이다.

‘어떤 상황에서든 드래곤 나이트를 활성화시키면 버틸 수 있다.’

쏴아아아아...

그리드의 머리카락이 너울거리기 시작했다.

주황색 신성 또한 함께 펄럭이며 그리드의 깔끔한 흑발을 총천연색 장발처럼 보이게 만든다.

하야테를 발원지로 삼아 범람하는 검기의 파장이었다.

마치 바다와도 같은 무한한 검기의 파도가 넓은 실내를 어느새 가득 채우고 뒤흔들었다.

그리드가 파도 저편에 도사리는 용살의 기운을 포착하는 순간이었다.

[하야테의 심상 <용의 무덤>에 입장하였습니다.]

[<염룡검>의 옵션 일부가 봉인됩니다.]

[<구젤의 도>의 옵션 일부가 봉인됩니다.]

[<황혼>의 옵션 일부가 봉인됩니다.]

[<역천>의 옵션 일부가 봉인됩니다.]

[<화룡 이프리트의 팔>의 옵션 일부가 봉인됩니다.]

[<목단룡 크란벨의 머리>의 옵션 일부가 봉인됩니다.]

[<염룡의 갑옷>의 옵션 일부가 봉인...]

...

..

그리드가 보는 풍경이 대번에 바뀜과 동시에 수많은 알림창이 그리드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적색 경고등에 가깝다.

드래곤과 관련 된 모든 아이템의 옵션이 비활성화 됐다.

용을 죽이는 자의 심상이 용의 권능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실로 놀라운... 직접 체험하고도 믿기지 않는 위력의 심상이었다.

그간 수많은 드래곤들이 하야테에게 집착해온 이유를 절실히 깨닫게 됐다.

크롸라라라라...

높은 산의 봉우리가 끝없이 펼쳐진 산맥.

산 중턱 아래로 보이는 건 땅이 아닌 구름이다.

여울랑마냥 초월적인 신선들이 수행할 때나 찾아올 것처럼 높고 협소한 지형이었다.

그곳 어딘가에서 어떤 용의 울음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그리드가 시선을 돌리자.

거리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먼 곳에 하늘의 한 면을 완전히 뒤덮고 있는 거대한 드래곤의 그림자가 보였다.

억압된 채 참수당하는 모습이다.

작두의 형상을 이룬 용살의 기운이 드래곤의 길고 두꺼운 목을 싹둑 잘라냈고, 비명을 내지른 드래곤의 목은 곧 다시 재생되었으며, 재차 장전 된 작두는 같은 작업을 되풀이했다.

살의나 증오 등의 감정이 느껴지진 않는다.

무척 기계적이라고 느껴질 뿐.

‘의무... 용살자가 짊어진 책임인가.’

압박감을 견디기 위해 무한히 되풀이하는 용살 시뮬레이션.

크롸라라라라라...

그리드가 멀리 보이는 광경의 의미를 해석해보는 사이 또 다른 곳에서 새로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드의 시선이 소리를 쫓았다.

정말로 많은 드래곤의 그림자가 보였다.

하늘 곳곳을 가득 채운 그림자들이다.

각자 다른 방법으로 도살당하고 있었다.

빗발치는 비명이 어찌나 끔찍한지 그리드는 심상이 옥죄여지는 듯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아니... 단순한 기분이 아니야.’

용의 무덤.

하야테의 심상이 그리드를 부정하고 있다.

정확히는 드래곤 나이트를 부정하는 것이다.

심상의 근원이 그리드를 적대하려는 조짐을 보이며 억압했다.

만약 곁에 하야테가 없었다면.

온갖 형태를 이룬 채 드래곤의 그림자를 베고 있는 저 용살의 기운들이 일제히 그리드에게 쏟아졌으리라.

실제로.

[칭호 <드래곤 나이트>가 봉인됩니다.]

드래곤 나이트의 효과마저 봉인되고 말았다.

“내가 무엇을 도우면 되겠소?”

거칠게 요동치기 시작하는 용살의 기운을 진정시킨 하야테가 묻는다.

그리드가 간신히 대답했다.

“그냥... 가만히 계십시오.”

“...”

그리드가 사도들과 함께 행했던 의념 제작은 당연히 사도들의 도움을 받았다.

사도들의 심상을 구성하는 기운을 이용해서 트라우카의 뼈와 비늘을 제련하고 단련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하야테는 취급을 달리해야 옳았다.

용살의 기운으로 트라우카의 뼈와 비늘을 제련하고 단련한다?

그건 창조가 아닌 파괴가 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하야테의 도움을 아예 받지 않는다면 그건 함께 만드는 것이 아니게 된다.

“일단 가만히 계시다가... 제가 부탁드릴 때...”

그리드는 철저한 계획을 짜왔다.

용살의 기운으로 트라우카의 뼈와 비늘을 제련하고 단련할 게 아니라, 뼈와 비늘과 같은 재료로 취급해서 갑옷 일부분에 축적, 활용할 수 있도록 유도할 계획이었다.

갑옷을 만들 땐 드래곤 나이트의 힘을 활성화시킬 계획이기도 했다.

한데 시작부터 일이 거하게 꼬였다.

드래곤 나이트가 봉인되다니...

“역시... 많이 불편하신 겝니까...?”

당혹감에 휩싸여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그리드에게 하야테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이와 같은 상황을 예측했던 그는 그리드를 크게 걱정했다.

“그것이... 가만?”

잠시 망설이다가 입장을 설명하려던 그리드가 문득 어떤 생각을 떠올렸다.

‘트라우카의 비늘을 찢는 거. 굳이 내가 직접 할 필요는 없지 않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떠오른다.

“하야테 님.”

“예... 음, 왜 그러시오?”

“용살검으로 고룡의 권능까지 단칼에 봉인할 수 있으십니까?”

“그건 불가능하오. 고룡의 위계는 나보다 훨씬 높으니 용살의 기운을 제대로 적용시키려면 충분한 사전 작업이 필요하오. 대상의 몸에 상처를 입히거나 심적인 타격을 입히는 식으로 말이오.”

“그럼, 이걸 한 번 공격해봐 주시겠습니까?”

그리드가 트라우카의 비늘을 꺼냈고,

“음.”

심상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던 용살의 기운들이 일제히 하야테의 의지에 반응했다.

즉각 벼락의 형상을 이루더니 커다란 모루 위에 놓인 트라우카의 비늘을 가격했다.

‘이거다.’

처참하게 갈라진 트라우카의 비늘을 확인하는 그리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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