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5권 - 11화
치링, 치링, 치링...
사리엘의 전용 무기는 그리드의 예상과 크게 달랐다.
빛의 고리와 연결 된 사슬.
정확히는 빛의 고리를 축소시켜서 엮은 사슬이다.
골반 위까지 길게 늘어진 귀걸이 같다.
사리엘이 움직일 때마다 찰랑이며 맑은 마찰음을 울렸다.
금속성이라기엔 지나치게 맑고 다소 벼락이 튀기는 듯한 느낌. 혹시 빛과 빛이 부딪치는 소리인가 싶었다.
<정화 된 빛의 고리>
등급:유일
내구력:무한
공격력/마법공격력:21,871~???
★모든 능력치 +500.
버프를 적용 받을 때마다 100씩 추가 상승. 최대 상승치 2,000. 버프 지속 시간 동안 유지.
★자신, 혹은 아군에게 버프 스킬을 사용할 때마다 공격력과 마법공격력 추가 상승.
★각 고리 <확장>과 <축소> 가능. 고리의 규격에 따라서 <징벌 광선>의 위력과 효과 변경.
★스킬 <죄인 구속> 활성화.
유일신 그리드가 죄를 밝히는 천사 사리엘과 심상합일을 이룬 상태로 만든 천사의 고리입니다.
염룡 트라우카의 의념이 잔재하는 뼈와 비늘을 사리엘의 신성이 단련하였습니다.
짙은 불신과 원망으로 오염 되었다가 그리드에게 품은 신뢰를 계기로 정화 된 신성입니다. 천상의 신들이 다루는 신성과 달리 순수하여 축복에 최적화 되었습니다.
단, 적으로 규정하는 대상의 죄를 밝히는 순간에는 돌변하여 강력한 살상력을 발휘할 것입니다.
착용 조건:사리엘, 그리드
무게:없음
“네 심성처럼 예쁘다.”
솔직히 아름다움만 놓고 따지면 그리드가 여태껏 만든 모든 작품을 통틀어서 최고였다.
메르세데스가 보면 경쟁심을 품을 수도 있을 것 같단 생각을 하면서 순수하게 감탄하는 그리드 탓에 사리엘이 다소 머뭇거렸다.
여성체의 모습을 했어야 옳았을 분위기로 느꼈기 때문이다.
명백한 오해다.
그리드는 비록 다수의 부인과 애인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그건 색욕에 눈이 멀어서가 아니었다. 순수한 사랑을 나눌 뿐.
어쩌면 상대방의 마음을 존중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라고 해석할 여지도 있었다. 전문용어로 ‘오는 여자 안 막았을 뿐’이란 말이다. 막기엔 너무 많은 관계가 얽혀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아이린과 바사라와의 관계가 정략적으로 얽혔다.
물론 어디까지나 시작이 그랬다는 이야기다.
그리드는 부인들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단순히 예의상 사랑하려고 노력한 게 아니라, 그녀들 전부가 너무 매력적이라 세월에 걸쳐서 자연히 빠져들었다.
사리엘도 사정을 헤아리고 있었다.
그래서 색욕에 빠진 천상의 죄인을 증오하면서도 그리드는 마냥 신뢰해온 거다.
“나가자.”
사리엘의 심상세계는 그리드가 감당하기에도 다소 벅찬 부분이 있었다.
가상의 아스가르드에 도사리는 가상의 신격들.
진짜가 아닌 가짜라는 사실을 뻔히 아는데도 압박감이 대단했다.
만약 사리엘의 적이 이곳에 발을 들이게 된다면.
특히 저 가상의 신격의 주인공들이 발을 들이게 될 경우 상당한 곤욕을 치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앞으론 전장에 세워도 되니까 정말로 큰 도움이 되겠어.’
시스템은 사리엘의 신성이 정화되었다고 표현했다.
템빨계를 벗어나도 폭주할 가능성이 없다고 해석할 여지가 충분한 것이다.
실제로 확인해 본 사리엘의 상태창에서 폭주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내용이 삭제됐다.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
흡족한 미소를 짓는 그리드의 정신이 다시금 현실로 복귀했다.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술렁인다.
사리엘의 머리 위로 떠올라있는 빛의 고리와 연결되어 찰랑이는 빛의 사슬에 현혹 된 눈치였다.
“빛으로 엮은 액세서리 같네. 별사탕보단 확실하게 예쁜... 컥.”
눈치 없이 지껄이는 극검의 옆구리를 폰의 창대가 후려치면서 소란이 커질 무렵.
“탑에 다녀올 거지?”
지슈카가 그리드의 옷매무새를 정돈해주며 물었다.
사이좋은 부부를 연상시키는 모양새였지만, 어째선지 그녀에겐 메르세데스의 적의가 향하지 않았다. 네펠리나의 뺨이 풍선처럼 부풀었다.
“응, 다른 결사들은 어떨지 몰라도 하야테 공과 비반 공의 심상세계는 확실하게 존재하니까.”
“조심히 잘 다녀와. 그동안 우리도 심상세계를 여는 방법을 최대한 연구해 볼게.”
“조급해 할 필요 없어. 심상을 열기 전까진 평범한 드래곤 웨폰을 사용하면 되는 거고, 그것도 충분히 강력하니까.”
역천과 사도들의 전용 무기가 워낙 강력해서 그렇지 황혼 또한 여전히 최강의 무기다.
물론 탐욕을 재료로 쓰지 못하는 일반적인 드래곤 웨폰은 황혼보다 한 등급 아래의 무기라고 봐야 옳았지만, 전부 성장형 아이템으로 만들 경우 미래가 기대되는 건 똑같았다.
템빨단원들의 개성이 워낙 특출해서 말이지.
“다녀올게.”
그리드는 지체하지 않았다.
곧바로 지혜의 탑으로 이동했다.
하야테와 비반.
무력 면에서 현재의 그리드와 비견되는 유이한 ‘인간’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들을 발전시키는 건 인류사 전체로 봐도 몹시 중요한 일인 것이다. 그리드가 반드시 책임져야하는 의무였으며, 의무와 별개로 강한 호기심도 생겼다.
그들이 어디까지 강해질 수 있을지, 그리드는 궁금해서 며칠 동안 제대로 잠을 못 이뤘을 정도다.
“어서오시게.”
그리드에겐 열 번째 결사라는 명예직이 있다.
지혜의 탑의 위치를 늘 실시간으로 전달 받았고 출입도 자유자재였다.
“뭘 굳이 마중까지 나와요? 설마 손님 취급하시는 겁니까?”
그리드가 웃었다.
버선발로 뛰쳐나온 비반을 보면서다.
물론 뛰쳐나왔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 검신이라는, 여태껏 없던 지위를 얻은 그의 두 발은 지면에 닿지 않고 있었다. 허공에 둥실둥실 떠있단 말이다. 상시 활성화 된 채로 둘러친 검기가 행사하는 이적 중 하나였다.
“가족이 왔는데 마중하지 않으면 정감 없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웃으며 대답하는 비반의 두 눈엔 현기가 있었다.
긴 세월 켜켜이 쌓아온 경험과 지혜가 가득 담긴 눈빛이다.
저절로 의지하고 싶어졌다.
[당신이 소유 중인 검들이 검신 비반에게 반응합니다.]
[비반의 검기가 검들을 어루만집니다.]
[당신이 소유 중인 검들의 예기가 한층 더 날카로워집니다. 무기 공격력과 함께 이로운 효과가 발생할 확률이 상승합니다.]
[<염룡검>의 에고가 황홀경에 빠집니다. 한층 더 강화됩니다.]
‘...진짜로 의지할 수밖에 없구나.’
검신의 ‘패시브 스킬’에 그리드가 감탄하는 사이, 인벤토리 속 역천이 움찔거린다 싶더니 그리드의 허락도 없이 스스로 허공에 떠올랐다.
비반의 의지가 그렇게 만들었다.
코앞으로 다가온 역천을 살피는 비반의 입가에 번진 미소가 점차로 짙어졌다.
“자네를 담았군.”
“네, 헥세타이아 신과 칸이 도와준 덕분에 가능했습니다.”
“귀중한 인연이로구만. 그들에게 잘 하게.”
내가 자네에게 잘하리라 다짐했듯이.
뒷말은 삼킨 비반이 고개를 끄덕이는 그리드를 탑의 상층으로 인도했다.
하야테의 집무실이 있는 곳이다.
‘하야테 공과 동격이 되고도 여전히 깍듯하구나.’
비반은 자신보다 어른인 하야테를 각별히 존중하고 있었다.
자신보단 하야테가 먼저 그리드와 대화를 나누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단지 그뿐인 줄 알았다.
“...응?”
하야테의 집무실에 가까워진 순간 그리드의 미간이 좁아졌다.
드래곤의 기감마저 속이는 탑의 결계들이 완전히 감추지 못할 정도로 강렬한 마력.
고작 문 하나를 사이에 둘 정도로 가까워지자 비로소 느껴지는 불길한 마력을 감지한 것이다.
‘어떻게 여길 습격한 거지?’
아니, 방법은 궁금하지 않다.
당최 무슨 배짱인지가 의문일 따름.
그리드가 역천을 뽑아 쥔 순간이었다.
“허억.”
문 너머에서 누군가가 헛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드에게도 익숙한 목소리.
불길한 마력의 주인이 내는 목소리였다.
“진정하게.”
그리드의 어깨를 두드려준 비반이 천천히 문을 열었고,
“한층 더 현양해지셨구려.”
하야테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평소와 같은 인사말을 건넸다.
단순히 예의상 하는 인사치레가 아니다.
그리드의 명성은 실제로도 하루가 멀다 하고 상승하는지라, 하야테 입장에선 가장 적합한 인사말을 신중하게 골라도 그 내용이 늘 똑같은 것이다.
그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여 화답한 그리드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하야테와 마주보고 앉은 사내의 발부터 얼굴에 이르기까지.
눈을 단 한 번도 깜빡이지 않고 똑똑히 살펴본다.
빛을 삼켜버릴 정도로 새카만 흑발을 허리까지 기른 사내.
머리 위로 번헬리어라는 이름을 띄우고 있다.
그리드가 느낀 대로 악룡 번헬리어가 맞는 것이다.
전에 봤을 때보다 얼굴이 더 하얗게 질려있다는 차이점이 있었지만 말이다.
“너, 무슨 배짱으로 탑을 노리고...”
그리드는 번헬리어를 우습게보지 않는다.
하필 바알의 함정에 빠진 까닭에 다른 고룡과 비교해서 손색이 크다지만 고룡은 고룡이니까.
가능한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고룡 중 유일하게 ‘죽여야 한다.’고 판단하는 대상이기도 했다.
네펠리나를 위해서도, 세계의 질서와 안전을 위해서도 저 예측 불가능한 악당을 살려둘 순 없는 노릇이었다.
심지어 이곳은 지혜의 탑이다.
협공을 펼칠 수 있는 절대자가 곁에 둘이나 있었다.
절호의 기회라고 여긴 그리드가 짙은 살기를 피어 올리는 순간이었다.
“이것부터 봐라.”
번헬리어가 제 목을 가리켰다.
길고 흰 목에 개 목줄을 닮은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번헬리어는 당당했다.
“나는, 침략한 게 아니라 포로로 잡힌 거다. 그러므로 유일신 그리드여, 너는 진정해도 좋다.”
“...”
뭣 때문에 당당한 거지?
그리드의 머리가 사건의 흐름을 잠시 따라가지 못하는 그때 하야테와 비반이 설명했다.
“바알 토벌에 협력하고 싶다는 뜻을 밝히며 스스로 투항했소.”
“번헬리어와의 협력은 그리드 자네도 예상했겠지. 예상이 꽤 우스꽝스러운 형태로 실현 된 거라고 보면 옳네.”
“...왜 나한테 직접 안 찾아오고?”
“이곳이나 라인하르트나 어차피 똑같은 템빨계 아니더냐? 별 뜻 없이 그냥 이렇게 됐을 뿐이다.”
끝없이 샘솟는 트라우카의 기운이 두려워 차마 라인하르트엔 찾아갈 수 없었다...
차마 솔직하게 고백하지 못하는 번헬리어의 불안한 눈동자가 잠깐씩 역천을 힐끗거렸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라는 듯이, 어렴풋한 경악을 담은 채다.
“어서 협상을 시작하지.”
급기야 참지 못한 번헬리어가 재촉했다.
하야테와 비반은 그리드에게 시선을 보냈다.
협상의 주체는 당연히 그리드가 되어야 했으니까.
한데 예상과 달리 그리드가 고개를 저었다.
“협상은 없어.”
“...?”
비반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고, 하야테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는 가운데.
“...왜지!?”
두 눈이 찢어져라 커진 번헬리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벼락에 맞아 감전되기라도 한 것처럼 큰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그리드가 부연했다.
“당신의 도움 없이도 바알을 잡을 수 있다는 판단이다. 당신 자체가 불필요하단 말이야.”
“그럴 수가?”
번헬리어가 경악성을 터뜨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