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5권 - 10화
“별사탕을 묻혀놓은 것 같기도 하고...”
극검의 감상이었다.
눈의 결정처럼 아름다운 가시를 세우고 있는 메르세데스의 철퇴, <이노센트>를 보면서다.
메르세데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간 머리카락이 쇄골 위로 찰랑이자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어째선지 한층 더 아름다워진 모습. 그리드와 단둘이 심상세계를 다녀왔다더니 사랑의 힘인가 싶었다.
“별사탕이 뭐죠?”
레가스가 메르세데스를 대신해서 물었다.
극검이 어깨를 으쓱였다.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 사람들은 잘 모르겠군. 군대에서 보급하는 건빵에 들어있는 별미인데, 설탕을 녹여서 만든 별 모양의 사탕이다. 부국강병의 비결 중 하나랄까. 대한민국 장병들의 사기를 올려주는 전통 간식이라고 볼 수 있지.”
“전통? 별사탕 그거 일본이 원조잖아요?”
“...뭐? 라우엘 넌 한국으로 이민까지 온 주제에 그새 친일파가 된 거냐? 쓸데없이 굳이 원조를 따지자면 일본이 아니라 포르투칼이 원조다!!”
“아니 뭔...”
자기는 라이트 노벨 작가면서 왜 매번 일본이란 말만 나오면 과민하게 반응하는 거지?
‘사실은 일본을 좋아한다는 걸 들켰다간 대한애국협회가 망하기라도 할까봐 걱정하는 건가?’
대한애국협회.
본래 시골동네 노인정마냥 작은 소모임에 불과했다.
말 그대로 극검의 공신력 없는 명함 역할이나 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Satisfy의 인기가 나날이 커지고 극검이 랭커가 되면서 협회의 인지도 또한 수직상승했다.
극검이 템빨단에 합류한 뒤로는 방점을 찍어서 현재는 진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모임 중 하나가 됐다.
회장인 극검의 책임감도 꽤나 무거운 것이다...
‘애초에 협회는 왜 만든 걸까.’
라우엘은 문득 궁금해졌지만 굳이 질문을 꺼내진 않았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물답게 무가치한 것에 심력을 낭비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튼... 이제 사리엘 님의 심상세계만 확인하면 사도들의 전용 무기 제작은 끝나는 겁니까?”
“응, 사리엘을 만난 뒤에 탑에 오를 예정이야.”
“나는 왜 무시하는 것이냐?”
대화를 나누는 그리드와 라우엘 사이로 작은 머리가 솟아올랐다.
광룡의 딸 네펠리나였다.
늘 그렇듯 소녀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하고 있는 그녀의 양 뺨이 풍선처럼 부풀어 있었다.
“왜 내 무기는 만들어주지 않는 것이야?”
“응...? 그거야 당연히... 너 무기 안 쓰잖아?”
그리드가 생각하는 네펠리나는 탈 것에 가깝다.
드래곤 나이트의 힘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수단일 뿐, 그녀를 직접 전선에 세울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리드가 상대하는 적들의 격이 너무 높다는 게 문제였다.
해츨링답게 자연히 섭리를 깨우친 네펠리나는 그리드가 싸우는 적들에게 지레 겁을 먹는 경우가 많다. 그리드가 싸우라고 등을 떠밀어도 무시하고 숨어버릴 녀석인데 굳이 뭔 무기를 만들어준단 말인가?
‘자원 낭비지.’
물론 네펠리나도 직접 싸울 때가 있긴 하다. 아주 가끔이긴 했지만 마법과 용언으로 도움을 줬다. 그래, 무기는 필요 없다.
“애초에 심상세계도 없지 않나?”
사실 드래곤에겐 심상세계가 불필요하다.
무엇이든 뜻하는 바를 현실로 만드는 생물이니까.
어떤 기적을 염원할 필요가 없이 직접 행사한단 말이다.
의식과 무의식이 별개로 나뉠 이유가 없었다.
“나를 잘 알고 있구나?”
뾰로통해져 있던 네펠리나의 얼굴이 거짓말처럼 밝아졌다.
그리드가 자신에게 무관심해서 등한시했던 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너무 잘 알고 있단 사실을 알자 기뻤다.
“...후에에?”
싱글벙글 웃던 네펠리나가 다소 우스꽝스러운 헛숨을 토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날아온 기습적인 살기에 놀란 탓이다.
메르세데스가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
어안이 벙벙해져선 딱딱하게 굳은 네펠리나의 머릿속에 의문부호 수십 개가 떠올랐다가 사라지길 반복한다.
그리드도 의아하긴 마찬가지였다.
“뭐야? 아빠라도 본 것처럼 갑자기 왜 그래?”
설마 네바르탄이 침입할 조짐을 느꼈나?
그리드가 주위를 경계하는 사이 정신을 차린 네펠리나가 떨리는 손가락으로 메르세데스를 가리켰다.
“쟤, 쟤가...”
“제가 뭐요?”
메르세데스의 눈빛에 담겼던 살기는 흔적도 없이 지워져 있었다.
상냥한 미소를 짓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의 태도엔 정말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뜻이 담겨있었다.
“?”
“??”
“???”
네펠리나와 그리드,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의아해하는 사이.
“신의 부름에 응답하였나이다.”
사리엘이 현장에 도착했다.
처음엔 여성체의 모습이었다.
그녀가 남성의 모습을 할 때면 그리드의 반응이 늘 나빴으니까.
너무 잘생긴 까닭이다.
그리드로 하여금 내 여자를 지켜야한다는 본능을 샘솟게 만드는 탓에 그리드의 경계를 사곤 했다.
하여 되도록 그리드를 만날 때면 여성의 모습을 고수했던 사리엘이 자연스럽게 남성체로 바뀌어갔다.
다소의 경악이 담긴 시선을 메르세데스에게 고정한 채다.
“미, 미친 게야.”
네펠리나가 일침을 놓았다.
어이가 없어서 메르세데스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그녀는, 사리엘이 나타난 순간 메르세데스의 눈에 또 다시 피어오른 살기를 똑똑히 목격했다.
메르세데스는 재차 미소 짓고 있었다.
“왜 그래요?”
“괴, 괴물이 되어서는...!”
“진정하세요, 네펠리나.”
점차로 사색이 되어가는 네펠리나를 사리엘이 진정시켰다.
그리드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단 사실을 눈치 채면서다.
“그대 또한 느끼고 있듯이 저자가 아주 지독한 한기를 품었습니다. 설녀라는 존재가 얼어붙은 심장을 지녀 아무런 감정이 없단 소문을 언젠가 접한 기억이 있는데, 숫제 그 괴력난신이 떠오를 지경이군요. 제가 판단하기로 상종하지 않는 편이 좋아요. 우리와 같은 사도가 아닌 냉혹한 병기로 구분해야 옳습니다.”
속닥속닥.
분해서 덜덜 떠는 네펠리나의 귀에 대고 속삭이는 사리엘의 목소리는 무척 작았다.
하지만 절대자인 그리드에겐 충분히 닿을 만한 목소리였다.
사리엘도 알고 있었다.
메르세데스도 알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사리엘이 네펠리나의 귓가로 입을 가져가는 시점부터 메르세데스는 붉은 눈꽃을 움직여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사리엘 님의 심상세계에는 이보다 아름다운 개념이 존재하고 있겠죠? 사리엘 님은 보통의 천사들과 달리 마음씨가 고우시잖아요.”
“확실히...”
템빨단원들의 기대감이 증폭됐다.
이노센트.
그것은 검일 때보다 철퇴일 때 오히려 더 아름다웠다.
철퇴에 달라붙어 있는 붉은 눈의 결정 하나하나가 장인의 공예품처럼 예뻤기 때문이다.
공감 능력 떨어지는 어떤 인간은 별사탕을 운운했지만 아무튼 저 눈꽃은 메르세데스의 심상세계에서 피어난 개념이었다.
메르세데스의 평소 이미지를 고려하면 몹시 고결했을 심상.
무기에 이노센트라는 이름이 괜히 붙은 게 아니다.
사리엘의 심상 또한 몹시 아름다운 결과물을 탄생시킬 것 같다는 기대감이 생겼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리드도 기대했다.
사실 기대보단 바람이다.
내색하지 않고 있지만, 사도들의 심상세계를 연달아 체험한 그리드는 무척 지친 상태였다.
사도들의 심상은 대부분 어두웠으니까.
아닌 척하는 메르세데스의 심상 또한 밝음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리드가 그들과 교감하는 과정에서 얻은 마이너스 감정들이 너무 많았다.
오죽하면 멍 때리면서 샤워할 때처럼 아영이의 얼굴과 이름이 자꾸만 생각났겠는가.
정확히는 아영이에게 프러포즈했던 횟집에서의 나 자신이...
고작 밥 한 번 같이 먹었다고 결혼까지 생각하다니...
“...시작할까?”
자신도 모르게 내지를 뻔한 비명을 간신히 삼킨 그리드가 사리엘에게 말했다.
사리엘은 여전히 남성의 모습이었지만 그리드는 그것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애초에 남성일 때나 여성일 때나 똑같이 아름답기는 매한가지라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구분도 힘들었다.
“네.”
사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망설이는 기색은 없었다.
쏴아아아아...
몸이 붕 뜨는 듯한 감각이 느껴진다 싶더니 그리드의 시야 가득 황금색의 물결이 펼쳐졌다.
신성을 머금은 구름.
아스가르드의 상징이었다.
[사리엘의 심상 <자격 없는 자들의 세계>에 입장하였습니다.]
“신께서도 아시다시피 저의 기억은 온전하지가 않습니다.”
사리엘은 타락을 연달아 겪었다.
첫째, 아스가르드에서 추방당해 천사의 자격을 박탈당했고 둘째, 기억을 봉인당한 채 악마가 되어 날뛰다가 죽음을 겪었으며 셋째,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잃은 채 무저갱에서 허송세월했다.
그 과정에서 영혼이 몇 번이나 쪼개지길 반복했다.
기억이 온전할 리가 없는 것이다.
본래의 자아를 되찾은 것만 해도 기적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란한 빛의 고리와 날개를 펼친 채.
그리드의 곁에 나란히 선 사리엘의 동공이 넓게 확장됐다.
동시에 그리드의 시야가 함께 넓어졌다.
황금구름 너머에 도사리고 있는 거대한 그림자들이 보였다.
신들의 형상이다.
“저들의 죄만큼은 기억합니다.”
사리엘의 길고 가는 손가락이 가장 높은 곳을 가리켰다.
“자신이 만든 생명을, 세계를 책임지지 않는 자.”
다음은 그 아래를 지목한다.
“가장 높은 자가 외면하는 틈을 이용해 자신이야말로 존귀하다고 행세하는 자.”
또 아래를,
“커다란 권한을 쥐고 있음에도 인색한 자.”
또 아래를,
“색욕에 빠져 사리분별을 못하는 지경에 이른 자.”
또 또 아래를.
“지켜야할 존재들을 시기하는 자. 탐욕하는 자. 분노하는 자.”
일곱 신의 형상을 차례대로 지목한 사리엘이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하나 같이 무익한 자들입니다. 교정하지 못한다면 존재할 가치가 없습니다. 하지만 저들은 이미 교정되길 거부했죠.”
사안.
사리엘의 눈은 대상의 죄를 밝힌다.
가장 높은 신이 그렇게 만들었다.
하지만 정작 사리엘이 신들의 죄를 밝혔을 때.
그녀를 만든 가장 높은 신은 다른 모든 것들을 외면해온 것과 같이 그녀를 외면했다.
“죄송합니다. 저의 심상은 겉보기에만 환하고 찬란할 뿐, 온통 증오와 원망만이 가득한 세계입니다.”
“...네가 미안할 이유가 어디에 있어.”
얼굴이 하얗게 질린 그리드가 애써 웃었다.
분노, 증오, 원망, 탄식.
온갖 괴로운 감정이 그의 마음을 후벼 팠지만, 그는 힘들다고 내색하지 않았다.
“질투하는 자의 그림자는 흐릿하네. 헥세타이아가 교화된 것과 관련이 있는 건가?”
“...아마도 그렇습니다. 헥세타이아 신이 스스로의 죄를 반성하고 당신을 쫓아 템빨계에 내려왔을 때, 저는 제 몸과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 사리엘 너를 위해서라도 나머지 여섯 신을 없애거나 교화할 때까지 최선을 다해야겠네.”
“네? 아, 아니요. 꼭 그러실 필요까진...”
“아니, 이건 나의 의무다.”
그리드가 모루와 망치를 꺼냈다.
가상의 신격들이 불결한 힘의 파동을 불러일으키는 이곳은 다른 사도들의 심상과 비교해도 유독 고통스러운 장소였다.
허락 받지 못한 자가 침입할 경우엔 반드시 죽어버릴 거란 확신이 들 정도로.
어서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그리드는 서둘러 의념 제작을 활성화시켰다.
“의무를 행사하기 위해선 네게도 합당한 힘이 있어야하고. 맞지?”
“...네.”
두 사람의 심상이 합일했다.
오늘에야 비로소 그리드의 사도들이 완전해진다.
세상에서 유일한 신의 사도임을 자부할 수 있을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