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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718화 (1,717/1,794)

템빨 85권 - 7화

“심상을 봅시다.”

말에 어렴풋한 음률이 실린다.

그리드의 들뜬 마음을 대변했다.

브라함에 이어 지크까지.

사도들의 전용무기를 연달아 만드는데 성공한 그리드는 몹시 큰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여태껏 겪어온 모든 고난과 역경에 대한 보답이 한꺼번에 몰려온 것 같다고 생각할 지경이었다.

의념 제작의 성공 가능성이 그만큼 미약했었다.

사실 최초에 그리드는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사도들과 심상합일을 이룬 채로 만드는 아이템.

브라함이 제시하고 실천해낸 가능성은 실로 이상적이었지만 현실적으로 이루기가 힘들었다.

일단 사도가 심상세계를 보유하고 있어야했고, 그 심상이 그리드의 심상과 융화돼야 하는 등.

전제 조건들이 너무 까다롭기 때문이다.

한데 다행히 연속해서 성공했다.

이대로 쭉쭉 나아가길 바랄 뿐이다.

“심상 좀 보자니까?”

그리드의 음성이 순식간에 딱딱해졌다.

어울리지 않는 면갑을 뒤집어 쓴 미르의 꼴이 영 거슬렸다.

어린 지크의 뺨을 때렸다는 소식을 그새 누구한테 듣고 나름의 대책을 세운 꼴 아닌가?

누가 보면 함부로 사도들을 폭행하는 나쁜 신이라고 오해할 광경이었다.

‘미르의 귀가 얇은 것도 얇은 건데, 의외로 지크의 입이 가볍네.’

검에 심상을 담은 뒤로.

지크는 자신의 심상 속에 봉인했던 기억들을 똑바로 마주하게 됐다.

이젠 상시 심상을 개방한 상태라고 봐도 옳았다.

하여 어린 지크 상태에서 겪었던 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소문이나 퍼뜨리고 다니는 것이다...

그리드가 다소의 실망감을 느끼는 사이.

두꺼운 면갑을 슬그머니 벗은 미르가 고즈넉한 표정으로 말했다.

“브라함 공께서 말씀하시길, 제가 이것을 쓴 모습을 신께서 보신다면 기뻐하실 거라 하였는데... 눈치를 보아하니 속은 듯하군요.”

“...”

그리드가 문득 떠올렸다.

지크와 함께 만든 검을 확인하는 브라함의 얼굴이 일그러지다 못해 거의 썩기 직전까지 갔었단 사실을.

명백히 불쾌해하는 모습이었다.

‘종종 나잇값을 못한단 말이지.’

브라함의 심정이야 이해한다.

자신이 고안한 방법으로 다른 사도들도 똑같은 이득을 보는 게 마음에 안 드는 거겠지. 박탈감을 느낄 법도 했다.

‘이해는 하겠는데... 고작 그런 걸로 토라질 거면 왜 천상에 오르는 위험을 무릅썼던 거야?’

사리엘을 위해 리파엘의 날개를 구해다 줬을 땐 언제고 별 시답잖은 걸로 참... 종잡기 힘든 늙은이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그리드가 바위에 걸터앉았다.

미르가 기거하는 저택은 무소유를 실천하는 노승의 절마냥 허름했다. 딱히 이렇다 할 가재도구가 없었고 칼에 깎인 커다란 바위가 의자를 대신했다.

“브라함의 추태는 내가 대신 사죄하지.”

“부주의로 신을 불쾌하게 만든 저야말로 깊이 사죄드립니다. 그리고 요구하신 심상에 대해서 말인데... 저의 심상은 어쩌면 신께 불쾌감을 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어째서냐는 질문을 억누른 그리드가 미르를 안심시켰다.

어차피 마주해야 할 심상에 대해서 미리 캘 이유도 없었고, 미르의 심상이 어떤 형태를 지녔든 그리드가 불쾌해하거나 실망할 일도 없었다.

어차피 심상이란 무의식에 가깝다.

무의식의 형성엔 너무 많은 요소가 개입한다.

누구에게나 있을 어두운 면이 당연하게 표출된단 말이다.

그걸 보고 일일이 실망할 거였다면.

소중한 벗들에게 심상세계를 창조하라는 공지도 내리지 않았을 거다.

‘사람들의 어두운 면엔 익숙하기도 하고.’

깨끗한 사람은 드물다.

상처 없는 사람조차 적었다.

그리드 본인이 그랬고, 여태껏 그리드가 만들어온 인연의 주인공들 역시 모두 그랬다.

그들의 심상에 못 박히고 덧칠되어 있을 온갖 것들을, 그리드는 혐오하고 외면할 게 아니라 이해하고 보듬어줘야 옳다.

“하면 기꺼이...”

무척 깊고 따스한 눈동자.

그리드의 사도가 된 뒤로 미르가 큰 행복을 느껴온 이유는, 자신을 바라봐주는 그리드의 저 눈빛에 있었다.

모든 걸 이해한다는 듯이, 무조건 믿는다는 듯이.

그리드의 눈빛은 한없이 상냥했다.

청룡의 분노가 내린 눈에 뒤덮여가는 도시에서.

자식에게 제 옷을 벗어 입혀주던 부모들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오를 정도로.

그렇다.

미르에게 그리드란 없는 부모를 떠올리게 만드는 존재였다.

처음부터 도구로 쓰이기 위해 만들어진 미르의 입장에선 영영 느낄 수 없으리라 믿었던 감정들이 그리드로 인해 샘솟곤 했다.

푸욱...

심상세계를 열 때는 전조가 있다.

그리드 심상의 전조는 고요하나 뜨거운 열기이고 지크 심상의 전조는 어린아이의 흐느낌이며, 브라함 심상의 전조는 마력의 소용돌이가 만드는 파란인 식이다.

미르의 심상은 자해를 통해서 열렸다.

제 심장에 칼을 꽂아 박음으로써, 미르는 세계와 단절 된 자신만의 공간을 개방했다.

[미르의 심상세계 <망가진 태엽>에 진입합니다.]

촤르르륵!!

딸칵, 딸칵, 딸칵...

그리드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너무나도 의외였다.

어떤 거대한 기계의 내부일까.

수천수만 개의 태엽이 맞물린 채 돌아가고 있다.

예스러운 복식과 말투를 고수하는 양반이 이런 심상을 지녔다니,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

그리드가 거슬리는 사실을 눈치 챘다.

태엽들이 제대로 맞물리지 못하고 있단 사실이다.

각자 따로 놀며 제대로 헛돌거나 삐걱댔다.

저마다 다른 색깔만큼이나 톱니의 모양도 달라 서로 맞물리질 못했다.

“만년설에 뒤덮이고 주민들이 떠난 도시에서.”

건물처럼 커다란 태엽들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미르가 입을 열었다. 작은 태엽들을 발판 삼아 선 까닭에 몸이 천천히 회전한다. 그럼에도 도포는 흩날리지 않고 칼날처럼 빳빳이 섰다. 흔히 말하는 ‘기’로 육신과 더불어 의복까지 다스리는 것이다.

“듣는 이 없음에도 시간마다 울리는 괘종시계의 종소리가 유독 가엾다고 생각했습니다. 버려졌음을 모르고 여전히 만든 이의 바람에 부응하는 모양새가 꼭 훗날의 우리네를 보는 듯했지요.”

양반은 한울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만들어진 도구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양반들은 그 사실을 부정하거나 자각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미르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한울이 목적을 이루는 과정에서 망가지면 버려질 것을 알았고, 한울이 목적을 이룬 후에는 쓸모가 없어져 버려질 것을 알았다.

홀로 남겨진 괘종시계가 재차 상기시켜줬다.

그러므로 더욱 더 열망했던 것이다.

무신을 베고 운명을 바꾸겠노라고.

물론 요원하단 사실을 알기에 이토록 절망적인 심상을 켜켜이 쌓아왔다.

아침마다 눈 쌓인 장독대에 놓인 씨앗을 먹으러 찾아왔던 작은 참새들은, 미르에게 구원 받았던 게 아니다. 도리어 참새들이 미르를 구원했다. 신들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위해서도 존재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해주었기에.

만약 참새들이 없었다면, 미르의 심상은 지금보다 더 처참하게 망가져 있었을 것이다.

‘...스스로를 고장난, 혹은 반드시 고장 날 도구쯤으로 생각해온 건가.’

미르의 입장을 어렴풋이 헤아리는 그리드의 가슴이 무거워졌다.

속이 답답해서 터져버릴 지경이었다.

오로지 자신들을 위해 양반들을 만들어온 환국의 신들을 새삼 경멸하게 됐다.

‘에고 아이템을 만들지 않기를 잘했어.’

만약 내 손으로 직접 탈수 같은 아이템을 만들었다면.

녀석에겐 내가 한울과 같은 존재였을 테니까.

문득 그런 무서운 생각까지 하게 된 그리드가 고개를 저어 상념을 털어냈다.

늘 그랬듯이,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였다.

“나만 믿어. 나와 함께하게 된 이상 모든 게 바뀔 테니까.”

“이토록 망가진 저를 고쳐주실 수 있는 겁니까?”

“물건도 아니고 고치긴 뭘 고쳐? 고치는 게 아니라 바뀌는 거야.”

안 그래도 스스로를 도구라고 여겨온 미르다.

의식해서 일침을 가한 그리드가 말을 이었다.

“바뀌기 위해선 온전한 스스로를 마주해야 할 필요가 있고.”

그리드가 의념 제작을 활성화시켰다.

“지금부터 만들 검에 이곳을 담자. 망가진 태엽들이 제대로 맞물릴 때까지 매 순간 지켜볼 수 있도록. 혹시 또 알아? 태엽들이 맞물리고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하면 당신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할 수도.”

그때 스스로가 바라는 심상을 새로이 채워 넣으면 된다...

그리드는 말재주가 없어서 자신의 의도가 제대로 전해질지 걱정했지만, 걱정과 달리 제대로 전달 됐다.

미르의 입가에 번진 작은 미소가 증거였다.

“예.”

따아아아앙!!

대답이 신호였다.

그리드가 트라우카의 뼈를 두드렸고 망가진 태엽들이 미르의 의지를 따라 최대한 호응했다. 비록 대부분의 움직임이 엇갈렸으나 일부는 분명하게 그리드를 도왔다. 트라우카의 비늘과 뼈에 똑바로 맞물려 엄청난 일체감을 선사했다.

마치 트라우카의 팔이 처음의 형태 그대로 복원되어가는 느낌.

신명난 그리드의 망치질이 점차 빨라졌다.

곧 완성 된 검의 형태는 여태껏 그리드도 본 적 없는 것이었다.

<하나>

등급:유일

내구력:5,900/5,900 공격력:36,770~???

★근력 +1,000.

★공격 속도 최대치로 상승.

★내구력이 떨어질 때마다 <태엽 감기> 효과 발생.

★<태엽 감기>가 발생할 때마다 무기 공격력이 추가 상승하고 보통 확률로 스킬의 재사용 대기 시간 초기화.

★<태엽 감기>가 5회 발생할 때마다 <맞물림> 효과 발생.

★<맞물림> 효과 발생 시 잃은 내구력을 전부 회복하고 공격과 피격 시 무조건 이로운 효과가 발생. 크리티컬, 약점 공격, 회피, 막기, 반격 등.

★<염룡 트라우카의 미약한 가호> 획득.

★‘염룡 트라우카의 팔’로 대체 가능.

유일신 그리드가 사도 미르와 심상합일을 이룬 상태로 만든 검입니다.

태엽의 형태를 이루는 미르의 심상이 염룡 트라우카의 뼈와 비늘을 완전하게 결착시켰습니다. 형태는 비록 검이나 트라우카의 팔과 동격의 판정을 받습니다.

염룡 트라우카가 몹시 큰 흥미를 보일 것이며, 이 검을 훼손하는 자를 자신에게 도전한 것으로 간주할 것입니다.

착용 조건:미르, 그리드

무게:16,000

“...허.”

여러모로 이프리트의 뿔을 만들었을 때가 떠오르는 그리드였다.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의 진정한 가치는 위력보다 가능성에 있었으니까.

트라우카와의 관계에 대한 가능성 말이다.

물론 위력 또한 다른 사도들의 전용 무기들만큼이나 대단했고.

‘설마 진짜 나중엔 고룡들하고 편먹게 되는 거 아니야?’

근거 없는 추측이 아니다.

레이더스의 태도에 이은 하나의 가능성.

무엇보다 <드래곤 나이트>의 기능 자체가 고룡과의 관계에 많은 여지를 주고 있었다.

그리드는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었다.

만약 정말로 고룡들이 아군이 되어준다면.

빌어먹을 종말을 막을 수도 있을 테니까.

내 가족과 벗들이 나 없이도 안전을 보장 받는 세계가 도래하게 될 거란 말이다.

‘반드시 그렇게 만들고 싶다.’

그래서 가끔은 두렵고 진절머리 나는 책임들로부터 해방되고 싶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그리드가 흠칫 놀라선 정신을 차렸다.

미르가 근심어린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이 작품이 만족스럽지 않으신 겁니까?”

“그럴 리가. 잠시 다른 생각을 했을 뿐이야.”

환한 얼굴로 대답한 그리드가 미르와 함께 현실로 복귀했다.

아마도 피아로와 메르세데스의 심상은 존재하지 않을 확률이 높은 탓에 사리엘과의 작업을 끝으로 지혜의 탑에 오를 계획을 짰다.

역시나.

“공교롭게도 저는 아직...”

“저 또한...”

피아로와 메르세데스는 아직 심상세계를 만들지 못했다.

한데 메르세데스의 반응이 묘했다. 무척 분해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굉장히 차분했던 까닭이다.

“메르 너... 심상 있지?”

“딸꾹!”

눈꽃처럼 흰 메르세데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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