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5권 - 5화
브라함의 지팡이를 만든 뒤로.
그리드는 사도들과 긴밀한 대화를 나눴다.
특히 지크와 미르에 대해선 아는 게 적다고 생각하면서다.
물론 그들의 아픈 과거야 알고 있다.
예를 들어서 지크는 신들의 종으로 살다가 배신당했고 미르는 애초에 신들을 위해 만들어진 인형이다.
그리드가 궁금한 건 모두가 뻔히 아는 배경 따위가 아니었다.
“신들의 축복을 받기 이전... 평범했던 인간 시절 말씀입니까?”
매끄러운 턱을 쓰다듬는 지크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운다.
골똘히 생각해보는 모양새.
표정에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하루하루 연명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남들과 같았던 거지요. 제가 살던 시대는 경제와 문화가 발달하지 못해 많은 게 열약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가족이라... 글쎄요. 형제가 있었는지 모르겠군요. 혼인은 아마 안 하지 않았을까 싶고.”
지크의 기억은 무척 편향되어 있었다.
신들과 대적하기를 결심했던 무렵에 태어난 사람처럼, 그때부터의 기억만 또렷했다.
‘방어기제에 의한 건가?’
지크는 멸망한 세계의 생존자다.
그의 가족들은 진즉에 모두 죽었단 말이다. 기억하는 것만으로 지크에겐 고통이었으리라.
생각하며 안타까워하는 그리드의 속내를 어렴풋이 읽은 지크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 가엾게 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소중한 사람들을 추억하며 그리워하던 시절은 이미 수천 년 전에 끝났으니까요.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부모님의 얼굴과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게 된지 오래다.
설명하는 지크에게 그리드가 말했다.
“하지만 동료들은 기억하고 있지 않소?”
“그건... 아마도 죄책감 때문이겠지요.”
일곱 선인이 신들과의 전쟁에서 무참히 패배한 것은.
지크가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잠들어있었던 까닭이다.
나태의 저주 때문이라곤 하나 지크는 명백히 동료들을 배신했다.
“물론 제가 참전했다고 해서 신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을 가능성은 없지만 말입니다.”
“...?”
씁쓸하게 웃는 지크를 바라보던 그리드가 문득 의구심을 느꼈다.
“생각해보니 이상하군. 어째서 신들은 당신에게 나태의 저주를 내린 거지?”
과거에야 지크가 무지막지하게 강한 까닭에 경계 받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젠 안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지크의 무위는 천상의 신들에겐 큰 위협이 아니었다.
지크의 룬어가 한울의 아들인 소별왕의 힘을 빼앗는 기적을 행사했단 점을 감안해도 그랬다.
당장 지크도 말하지 않았나.
자신이 있어봤자 신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을 가능성은 없었을 거라고.
한데 왜 굳이 저주까지 내려가면서 지크가 전쟁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막은 걸까.
그리드는 두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첫째, 여전히 물음표로 표기되어 있는 지크의 ‘칠악성 스킬’이 그리드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력하다거나.
둘째, 신들 중 누군가가 지크만큼은 보호하려고 했다거나.
‘굳이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당연히 후자겠지.’
그리드는 대놓고 물어보진 못했다.
지크는 신들에게 복수할 일념으로 살아온 존재다.
그에게 사실은 어떤 신이 당신을 지켜준 거 아니냐는 가능성을 제기한다?
공감능력 없는 사이코패스나 할 짓이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묻지 않으려고 했지만...
“둘 중 뭐라고 생각하시오...?”
그리드는 결국 물어보고 말았다.
그래야만 대화가 진척됐으니까.
그리드가 확인하고 싶은 건 지크의 칠악성 스킬, 더 나아가 심상세계의 보유 여부였다.
“...굳이 둘 중 하나를 골라야한다면 후자겠지요.”
안 그래도 무표정한 지크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만약 둘의 관계가 신과 사도라는 절대적인 갑과 을로 엮여있지 않았다면.
호감도가 대폭 하락했다는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을 듯했다.
“레베카에게 얻은 저의 고유 능력은... 신께서 보유하고 계신 신장이나 당대의 검성이 다루는 비장 등과 성향이 많이 다릅니다. 전투력에 기여하지 못합니다.”
“어떤 기능이기에? 지발의 강운과 같은 계열인가?”
“그것과도 다릅니다. 공교롭게도 자세히 말씀드릴 순 없지만 안목과 관련이 있지요.”
“안목...? 아, 그래서...”
그리드가 새삼 깨달았다.
지크는 처음부터 내게 호감(?)을 갖고 접근했었다. 사하란의 황제로 만들어주겠노라 약조했을 정도다.
‘언젠간 내가 황제가 될 거란 사실을 처음부터 알아봤던 건가.’
돌이켜보면 제국의 시조 사하란 또한 지크의 선택을 받았었다.
“자세히 말해줄 수 없는 이유는?”
“만약을 대비해서입니다. 언젠간 말씀드릴 테니 믿고 기다려주십시오.”
“당연히 믿소. 한데 혹시 심상세계의 보유 여부도 비밀이오? 귀공이 심상을 다루는 장면을 목격한 적이 없어서 말이오.”
바알조차도 지크를 굉장히 높이 평가한 바 있다.
당연하다.
이전 세계의 최강자 아닌가.
지크의 포지션은 하야테와 같다.
그만한 인물이 심상을 보유하지 못했을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고 봐야 옳았다.
한데 여태껏 심상을 드러낸 적이 없는 것이다.
거기에도 어떤 사연이 있을까 싶어 조심스레 묻는 그리드에게 지크가 대답했다.
“지니고 있습니다.”
표정이 여전히 어둡다.
비밀은 아니지만 굳이 밝히고 싶지 않은 눈치.
하지만 그리드는 들어야만 했다.
아니, 단순히 듣는 수준을 넘어서 직접 체험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곳에 나를 초대해줄 순 없겠소? 이것 때문이오.”
그리드가 망설이는 지크에게 역천과 염룡의 갑옷을 차례대로 보여줬다.
지크의 두 눈이 흔들렸다.
사하란의 검에 있는 ‘적기’와 상성이 몹시 좋은 탓에 그리드의 신검을 굳이 탐하지 않던 그가 드문 욕심을 품은 것이다.
의념 제작으로 만드는 무구의 위력이란 그만큼 대단했다.
“브라함이 벨리알의 지팡이를 갖다 버렸을 정도요.”
“...!”
그리드가 쐐기를 박았다.
벨리알의 지팡이.
브라함이 무려 10년을 넘게 애용해온 무기다.
그걸 갖다 버렸다고?
끝내 망설임을 버린 지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끄럽지만 알겠습니다. 부디 신께서 제게 실망하지 않으시길 바라며 호의를 받아들이겠나이다.”
쏴아아아...
어둠이 몰려왔다.
어린아이의 슬픈 흐느낌이 그리드의 귓전에 스며들었다.
‘애?’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짐짓 당황하는 그리드의 눈앞에.
[지크의 심상세계 <고독과 고통>에 진입하였습니다.]
희미한 빛이 번지며 알림창이 떠올랐다.
동시에 어둠에 먹혔던 시야가 회복되어 그리드는 주변의 풍경을 살필 수 있었다.
거대하고 황량한 광야.
곳곳에 붉고 검게 덧칠 된 핏자국들이 보였다.
중심에는 한 아이가 웅크려 있었다.
피와 땀에 젖은 채 헝클어진 금발.
비라도 내리면 다시금 찬란하게 빛날 것만 같은 그 머리카락은 지크의 것과 닮았다.
“...지크?”
그리드가 설마하며 묻자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예상대로 지크와 꼭 닮은 이목구비를 가진 아이였다.
표정은 많이 달랐다.
닭똥 같은 눈물을 쏟아내며 울음소리를 참으려고 부풀린 뺨.
그리드가 알고 있는 지크는 절대로 저런 표정을 짓지 않는다.
‘지크가 아니야. 지크일 리가 없다.’
이 아이가 지크라면 지크는 두 명이라는 뜻이 된다.
현실에서 함께 나와 함께 이곳에 입장한 지크를 포함해서...
“...응?”
당연히 곁에 있을 거라고 생각한 지크가 보이지 않자 그리드가 당황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황야 어디에서도 지크를 찾을 수가 없었다.
이곳에 존재하는 건 자신과 눈앞의 어린아이 둘 뿐이었다.
‘어디 간 거야?’
분명히 같이 입장했는데?
그리드가 당황하는 사이.
“훌쩍... 네, 지크 맞아요. 나의 신님... 신님께선 저를 알아봐 주시는군요.”
콧물을 삼키며 간신히 울음을 멈춘 아이가 그리드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
그리드는 좀처럼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드의 심상엔 협곡이, 칸의 심상에는 대장간이, 헥세타이아의 심상엔 망치와 모루가, 비반의 심상엔 거대한 검이.
또한 브라함의 심상엔 서재와 실험실 등이 존재하고 있다.
심상세계란 어디까지나 주인의 마음을 뜻하는 것으로, 마음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어떤 요소를 형상화했다.
그뿐이다.
주인의 형상을 바꾸진 않는다.
한데 지크의 심상은 너무 황량했고 지크 본인의 모습이 바뀌어 있었다.
어린 지크가 설명했다.
“이곳에 발을 들일 때마다 잊고 있던 기억들이 떠올라요. 슬프고 무서워요. 너무 아파요...”
망각.
얼마 전 적야의 대도가 레이더스에게 말했듯이.
인간은 불필요한 기억들을 잊어야만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지크는 무언가를 잊기엔 너무나도 똑똑했다. 그러므로 자신이 살아가던 시대의 지혜를 모조리 수집할 수 있었고 끝내 레베카 여신에게 배움을 얻었던 것이다.
망각할 수 없기에 봉인했단 말이다.
현실과 단절 된 이곳 심상세계에.
아마도 지크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심상을 여는 것에 대해서 단순히 ‘부끄럽다’고 말한 거겠지.
만약 자신이 심상을 열 때마다 잊었던 기억을 되찾는단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지크는 심상을 여는 것을 부끄러워하기보다 두려워했을 것이다.
“레베카 여신이 미워요. 그분을 위해서 싸우는 일이 곧 인간들을 위한 일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그분의 의지를 대행하는 자들이 온갖 재앙을 일으켰고 제 자손들도 모조리 죽었어요. 저는 그 누구도 지키지 못했어요. 아니, 제가 모두를 죽였어요...”
“지크...”
“동료들과 함께 천상에 올라 복수하기로 했는데 그조차도 못했어요. 여신의 자장가가 들려온다 싶더니 저절로 눈이 감겼어요.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모두가 죽은 뒤였어요. 저도 함께 죽었어야하는데...”
어린 지크의 지친 눈에 증오와 살기가 깃들기 시작했다.
마주보고 선 그리드가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해 품는 살의다.
당장 제 목을 꿰뚫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기세였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정확히는 하지 못했다. 책임감 때문이다. 지크가 바라는 건 ‘어쩔 수 없는 죽음’이었다.
“너무 괴로워요. 살고 싶지 않아요. 죽여주세요. 제발 신님께서 저를 죽여주세요.”
다시금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는 어린 지크의 주변으로 온갖 룬어가 떠올라 회오리쳤다. 거대한 마력과 소별왕에게 빼앗은 신력이 함께 솟구쳤다.
‘룬어가 저렇게까지 길어질 수 있나?’
룬어의 위력은 단어를 이루고 문장을 이룰 때마다 수직상승한다.
하지만 지크는 대부분 별개의 글자, 혹은 단어로 룬어를 활용했다. 문장까지 이루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었으며 그조차도 짧았다.
단순히 어렵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긴 문장일수록 조합하기 힘들고 정신력의 소모도 크다면서.
한데 어린 지크는 손쉽게 해냈다.
어른 지크와 비교해 온전한 기억 덕분에 룬어를 다루는 실력이 월등히 탁월한 것이다.
‘엄청나게 강하다.’
이게 지크의 온전한 실력이구나.
만약 지크가 일곱 선인들과 함께 천상에 올랐다면.
전쟁에서 승리하진 못했을지언정 여러 신들이 수차례 패배를 겪고 위엄을 상실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그리드가 확신했다.
신들이 지크에게 나태의 저주를 건 이유는 그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두려워서가 맞았다는 사실을.
“아무튼.”
그리드가 어린 지크를 향해서 손을 뻗었다. 슬픔과 고통으로 일그러진 안타까운 얼굴을 주먹으로 힘껏 때렸다. 감정은 없었다. 폭주하기 직전의 지크를 진정시키기 위해서였을 뿐.
고통의 확산.
그리드가 추측하기로 지크의 심상은 어린 지크가 폭주할수록 강력해지는 형태였다.
“죽고 싶다는 헛소리 그만하고 검이나 만듭시다. 죽긴 왜 죽어? 죽여야지.”
금의 협곡을 소환하는 그리드의 얼굴에 근심은 없었다.
피아로가 사막에 논밭을 만들 듯이 지크 또한 기적을 행사하는 유형의 인물이다.
하물며 심상 덕분에 룬어로 저만큼 긴 문장을 쓸 정도라면, 심상합일을 이루는 방법도 손쉽게 구상할 수 있을 터였다.
[<금의 협곡>이 지크의 심상 <고독과 고통>에 동화합니다!]
과연 지크는 그리드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룬어를 써서 황량한 광야에 우뚝 서는 협곡에 호응했다.
“결코 쉽지 않을 거요. 끝까지 집중해서 도와주시오.”
그리드가 재차 당부했다.
이번 의념 제작은 그에게도 낯선 도전이 될 테니까.
사하란의 검에서 적기를 추출한 뒤 재료에 포함시킬 계획이기 때문이다. 어린 지크의 도움을 받으면 해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훌쩍... 네엡...”
간신히 대답하는 지크의 뺨은 퉁퉁 부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