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5권 - 2화
[불완전한 상태의 제7위 대천사 메타트론을 패퇴시켰습니다.]
[메타트론의 영혼이 성녀 ‘루비’의 신성에 저항하여 소멸을 모면합니다.]
[메타트론의 영혼이 경고합니다.]
-자칫 치우와 상종 하지마라. 여신께서 놈의 염원을 외면하고 떠나보낸 것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대의 위계에 해악을 끼칠 수도 있다.
[<계약의 날개 파편>을 얻었습니다.]
[<통치의 날개 파편>을 얻었습니다.]
[레벨이 5 올랐습니다.]
“어? 소멸시킬 수 없어...?”
거듭 단련되어온 그리드의 순발력은 몹시 빠르다. 메타트론에게 최후의 일격을 날림과 동시에 기사 소환을 전개, 동생 루비를 곁으로 불러들였다.
메타트론의 윤회를 막기 위해서였는데 무산 된 것이다.
루비가 당황했다.
“영혼을 소멸시킬 수 없는 대상이라고 떠. 시스템이 막은 느낌이야.”
“그래.”
그리드가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예상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이름, 성향, 생김새, 힘.
메타트론은 다른 대천사들과 모조리 다르다.
그리드가 생각했을 때 메타트론은 아직 숨겨진 이야기가 남은 존재였다. 이브와 닮았다. 퇴장하기엔 시점이 너무 일렀다.
‘강했어. 출현이 딱 3시간만 빨랐어도...’
나는 이토록 쉽게 이기지 못했을 거다.
손에 쥔 역천을 내려 보며 생각하는 그리드의 의식이 점차 과거로 침잠했다.
꽤 깊었다.
처음으로 아이템을 만들었던 순간을 떠올리는 지경에 이르렀으니까.
‘그때 다짐했었지.’
언젠가 반드시 최강의 무기를 만들겠다고.
무지했기에 품을 수 있었던 꿈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헛된 것임을 깨달아갔던 꿈.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력해왔다.
종국에는 황혼을 만들게 됐을 정도로.
황혼.
적에게는 종말을 선고하는 황혼으로, 아군에게는 희망을 안기는 여명으로 비추는 검.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운 그 검은 그리드의 둘도 없는 자부심이었다.
적을 난도할 때면 떨어지는 빛의 창과 메테오를 보면서 그래, 이 정도면 충분하다. 더 이상 바랄 나위가 없다고 생각해왔다. 드디어 꿈을 이뤘다고 믿었다.
한데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 대장장이가 품었던 허황된 꿈은, 오늘 이 순간에야 비로소 완전하게 이뤄졌다.
역천이라는 형태로.
‘포기하지 않길 잘했어.’
정확히는 포기할 수가 없었다.
주변에서 도와주는 이들 때문에라도 그리드는 노력을 멈추지 못했다.
역천에 담긴 흔적들이 그리드의 입장을 알려준다.
그리드는 마리로즈와 결사들의 도움을 받았기에 트라우카의 팔을 얻을 수 있었고, 헥세타이아와 칸, 그리고 주작의 도움을 받았기에 트라우카의 팔을 제련할 수 있었다.
헥세타이아와 칸이 그리드의 곁에 있는 건 적야의 대도와 레이더스 덕분이다. 이단이 없었다면 레이더스의 호감을 얻지도 못했을 거고.
여기서 더 세세하게 따지면 템빨단원들도 일일이 언급해야한다. 그동안 그들이 제공해준 재료와 도안들 덕분에 그리드는 지금의 기술을 쌓을 수 있었으니까.
‘파브라늄을 쉽게 모았던 것도 동료들 덕분이었지. 탐욕을 마법으로 단련해준 브라함의 도움도 빠뜨릴 순 없고. 그리고 또...’
한도 끝도 없다.
그래 역천은, 그리드의 꿈은, 인연이 엮여 만든 결과였다.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고마움.
그리드의 마음 한쪽에 자리 잡은 거대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어마어마한 고양감이 걷잡을 수 없이 밀려왔다.
“...아자아아아아앗!!”
“꺅!”
감정의 격랑을 이겨내지 못한 그리드가 환호했다. 갑작스러운 외침에 놀란 동생을 와락 끌어안으면서.
행복해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칸을 되찾고 최강의 무기와 갑옷을 만들었다는 실감이 그를 전율시키고 있었다.
“...?”
한동안 넋을 잃고 있던 브라함이 소란에 정신을 차렸다.
그리드와 루비.
자신들 남매와는 달리 사이가 무척 좋은 두 사람을 빤히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질문한다.
“앞으로 만드는 드래곤 웨폰은... 모두 그런 건가?”
“음...? 사용자의 의지에 호응해서 변하는 검이냐고 묻는 거라면 아쉽게도 아닙니다. 자주 만들 수 없는 물건인데다가 애초에 나밖에 못 다루기도 하고.”
“그래.”
브라함이 십년감수했다.
이제 와서 검사로 전향하기엔 막막했으니까.
그렇다.
역천은 마법과 지혜의 신에게 새로운 진로를 고민하게 만들 정도로 대단한 무기였다.
만약 사도들이 그리드와 똑같은 검을 무기로 다루게 된다면.
브라함은 진심으로 검사로 전향하기 위해서 노력했을 것이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그보다 브라함, 대체 뭡니까?”
안도하던 브라함이 눈살을 구겼다.
또 그놈에 트롤 소리를 듣게 생겼으니 울컥 화가 치솟았다. 하지만 어쩌겠나. 자업자득인걸.
아무 말도 못하고 급기야 부들부들 떨기 시작하는 그의 두 손을 그리드가 맞잡았다. 초롱초롱. 별처럼 빛나는 눈길을 보내면서다.
“대체 어디까지 읽고 이런 선물을 마련해주신 건가요.”
“잔소리라면 관...”
어련히 반성할 테니까 적당히 해라.
그와 같은 뜻을 품고 겸손하게 말하던 브라함이 문득 입을 다물었다.
그리드가 뜻밖의 반응을 보였기에.
“이 날개, 리파엘의 날개잖아요? 리파엘이 감옥에 갇혀있단 사실은 어떻게 알고 찾아가신 거죠?”
“그건...”
“됐습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삐져서... 아니, 요즘 영 두문불출하기에 어디서 뭐하고 있나 궁금했는데 역시나 평소처럼 늘 나를 지켜봐주고 계셨던 거겠죠.”
“...”
“하지만 설마 적야의 대도와 레이더스의 도움 없이도 홀로 천상에 올라 허를 찌를 줄은 정말로 몰랐습니다. 사리엘을... 동료를 위해서 위험을 감수하고 리파엘의 날개를...”
“그딴 것을 위해서가 아니...”
“새삼 존경하게 됩니다.”
“...흥, 네가 존경할 만한 상대가 나 외엔 없긴 하지.”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오해하는 걸까.
브라함은 궁금했지만 깊이 파고들지 않기로 했다.
그냥 이대로 놔두는 편이 여러모로 유익하다는 판단이었다.
‘결과적으로 다 잘되기도 했다.’
사실 메타트론에게 추격당했을 땐 등골이 오싹했다.
이 괴물을 감당하기엔 지상에 여러 피해가 발생할 거라고 봤다.
한데 예상과 달리 손쉽게 물리쳤다.
언제나처럼 대수롭지 않게 경천동지를 일으킨 그리드가 처단했다.
‘마법하고 정치하고 작명 빼곤 다 잘하는군. 애 낳는 것도 잘 못하던가.’
의외로 다재다능하진 않다.
하지만 그건 그리드의 결점이 되지 못했다.
그리드는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지하고 개선하기 위해 항시 노력했으니까.
오만한 천상의 신들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빌어먹을 놈들.’
자신이 잠입했단 사실을 뻔히 눈치 채고도 방관했던 몇몇 신들의 기척을 떠올린 브라함이 수치심에 이를 갈았다. 동족혐오에 가깝다.
그리드의 질문 공세가 쏟아졌다.
“그런데 무슨 수로 허를 찌른 겁니까? 제라툴하고 리파엘 둘 다 지랄맞기가 보통이 아닌데.”
“누구든 내 앞에선 겸손해지게 마련이지.”
“아, 네...”
충분한 대답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
브라함이 이런 식으로 나올 땐 원하는 대답을 얻기 힘들단 사실을 경험으로 체득한 까닭이다.
‘어차피 뻔하다. 둘이 싸우느라 정신 팔려서 브라함을 좌시했겠지.’
아무튼 다 잘 풀렸으니 됐다.
메타트론을 상대로 한눈을 팔 수가 없어 가브리엘 일당을 놓친 건 아쉬웠지만, 메타트론의 존재를 알게 된 것만 해도 충분한 수확이었다. 게다가 메타트론의 날개와 리파엘의 날개를 얻었다.
‘학살의 날개와 달리 소유권자들이 살아있긴 하지만 사리엘에게 어떻게든 도움이 될 거다.’
학살의 날개를 사리엘에게 이식할 수 있었던 이유는 미카엘이 소멸했기 때문이었다.
주인이 멀쩡히 살아있는 계약의 날개와 통치의 날개를 사리엘에게 이식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뜻.
하지만 브라함의 마음이 담긴 선물이라는 사실만으로 엄청난 가치를 지녔다.
다른 사도들과 달리 활약하지 못해 죄인의 심정으로 살아가는 사리엘에게 큰 격려가 될 터였다.
‘쌀쌀맞던 동료가 사실은 자신을 걱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얻는 감동은 꽤 크지. 이거 어쩌면... 대천사와 직계 뱀파이어의 혼혈이 태어날 수도 있는 건가?’
아니, 사리엘은 양성체라 잉태가 불가능할 수도...
‘애초에 브라함에겐 성욕이 없는 것 같... 설마? 이런...’
혼자서 기대하다가, 실망하다가, 안타까워하는 그리드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왠지 모를 불쾌감에 휩싸인 브라함이 화제를 돌렸다.
“네 친구의 상태는 어떻지?”
“친구 누구요? 친구가 한둘도 아니고... 그렇게 말하면 못 알아듣습니다.”
나 친구 많다.
이젠 당당히 말할 수 있게 된 그리드였다.
브라함의 동공이 흔들렸다. 드물게도 동요하는 기색.
생각 없이 던진 돌에 얻어맞은 개구리와 같은 반응이었다.
“미안합니다...”
누구에게나 마음의 상처가 있게 마련이다.
브라함에겐 인간관계가 그랬다.
파그마에게 배신당했던 일, 제자들을 배신했던 일.
브라함의 깊은 상처와 후회가 그리드에 의해서 끄집어졌다. 마력이 역류를 일으켰다.
아차 싶어서 사죄하는 그리드에게 브라함이 재차 물었다.
“네가 꽤나 아끼는 그 배불뚝이 말이다.”
“아, 칸이요? 잘 적응하고 있어요. 다행이죠.”
“...건강엔 문제없나?”
“네, 아주 멀쩡합니다. 본래 삼위일체를 이루지 못해서 문제였는데 잘 해결... 어? 알고 있었어요? 천상에 오른 이유가 사리엘 뿐만 아니라 칸도 걱정해서...?”
“헛소리 지껄이지 마라.”
“그쵸? 난 또 당신이 천사라도 납치해오려던 건가 싶어서 순간 등골이 오싹했습니다. 옛날의 비반도 아니고 당신이 설마 노망이 들었을 리가.”
“...돌아가자. 사리엘에게 메타트론에 대해서 채근해야겠다. 그 요망한 것이 중요한 정보를 우리에게 알리지 않고 숨겨왔다는 거 아니냐. 징벌을 염두에 둬라.”
“굳이 비뚤게 보지 마요. 사리엘은 기억을 몇 번이나 잃었던 탓에 온전하지 못한 거 아시잖습니까.”
그리드는 마침 잘 됐다 싶었다.
다음으로 만들고 싶었던 드래곤 웨폰은 브라함의 지팡이였으니까.
찬사를 만든 경험에 헥세타이아와 브라함의 도움을 보태면 엄청난 작품이 탄생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건 그렇고 이젠 브라함의 레벨도 따라잡았네.’
브라함은 사도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레벨을 자랑했다.
히드라를 잡고 대형 신화의 일부가 됐을 때 한 번, 마리로즈에게 피를 돌려받고 직계의 체질을 되찾았을 때 또 한 번, 신이 됐을 때 또 한 번.
무려 3번의 각성 이벤트를 겪은 여파다.
물론 그 외에도 셀 수 없이 많은 활약을 펼쳤다.
안 그래도 사기적인 성장세를 자랑하는 초네임드가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했으니 800레벨을 진즉에 돌파해버렸는데 지금 막 그리드가 따라잡았다.
840레벨.
뭔가 끝에 다다르는 느낌이다.
아무래도 999레벨이 플레이어의 만렙이 아닐까 생각해오던 차다.
‘분명히 레벨 한도가 있을 거야. 적들의 위엄을 지키는 동시에 밸런스를 조절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니까.’
기본적으로 Satisfy는 플레이어에게 불친절하다.
플레이어의 레벨이 네임드보다 높은 상황을 잘 주려고 하지 않는다.
플레이어들의 평균 레벨, 그리고 시간과 사건 등에 따라서 급격히 상승하는 네임드들의 레벨이 증거다.
강제적인 페널티인 셈.
플레이어의 레벨에 제한이 있다고 추측하는 건 몹시 자연스러웠다.
물론 제한에 도달할 만한 사람이 현재로썬 그리드가 유일했지만.
그리드는 모른다.
다른 플레이어들은 적의 위엄이나 게임 밸런스 따위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단 사실을.
그리드를 제외한 플레이어들에겐 여전히 넘보지 못할 적들이 도처에 산재해 있었다. 항상 도전자의 입장인 것이다. 게임의 밸런스 따위를 걱정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돌아갑시다.”
그리드의 허락이 떨어지고 나서야.
파지직!
브라함의 텔레포트가 작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