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4권 - 21화
‘아니... 불꽃이 아니군.’
메타트론의 기감은 극도로 발달해 있다.
6장의 날개로 눈과 귀, 코를 가린 채 영겁의 세월을 견뎌온 까닭이다.
안 그래도 권능과도 같은 절대자의 감각을 의도치 않게 극한까지 단련했다.
““검...인가.””
온통 새카만 메타트론의 시야를 강렬한 존재감이 서서히 침식해온다.
고룡의 기운을 품은 신.
어째선지 화염처럼 느껴지는 검을 손에 쥔 지상의 신이다.
“그리드...!”
가브리엘의 탄식이 신의 정체를 알렸다.
아주 먼 옛날.
지도자의 자격을 박탈당한 이후 쭉 세상과 단절되어 있던 메타트론의 입장에선 몹시 흥미로운 대사건이었다.
““두려워하고 있군.””
천사는 빛의 여신 레베카를 섬긴다.
세상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위대한 존재 말이다.
당연히 기준점이 높았다.
레베카 외의 존재에게 어떤 특별한 감상을 느낀다는 게 구조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한데 두려워한다?
““치우처럼 순전히 숭배 받아 탄생한 존재구나.””
파작!
메타트론이 그리드에게 집중하는 사이 마법을 전개한 브라함이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처참하게 찢겨나간 손목을 마력으로 감싸 지혈한 채다.
“미...”
브라함은 사죄를 하려고 했다.
목적을 이루기는커녕 지상에 새로운 위기를 몰고 왔으니까.
하지만 그리드가 조금 더 빨랐다.
“죄송합니다.”
“...?”
“매번 위험하다는 핑계로 당신을 버려두고 혼자 싸워온 일들. 제가 당신의 입장이었어도 신뢰 받지 못한단 생각이 들어 서운했을 겁니다.”
“...흥, 알면 됐다.”
미안해서 그리드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던 브라함이 금세 기고만장해졌다.
그리드가 여태껏 자신에게 저질러온 잘못이 내가 저지른 잘못보다 훨씬 더 크고 많다는 생각에서였다. 죄책감이 거짓말처럼 옅어졌다.
브라함의 기분이 풀어진 것 같아 마음이 한결 편해진 그리드가 이틈에 얼른 말했다.
“하지만 마리로즈에게 청혼한 일을 사과하진 않을 겁니다. 저를 아끼는 그녀의 마음은 사실이고, 제겐 그녀의 마음에 보답해야 할 의무가 있으니까요.”
마리로즈에겐 너무 큰 은혜를 입어왔다.
그리드는 그녀를 구원하고 싶었다.
눈살을 찌푸린 채 그리드를 노려보던 브라함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네 멋대로 해라. 의무감으로 맺은 부부의 연이 어디까지 가나 보자.”
숫제 저주에 가까운 말처럼 들리지만.
브라함은 도리어 조언하는 것이다.
그딴 값싼 마음가짐으로 혼인해봤자 행복할 리 없다고.
그리드에게 충분히 전해졌다.
“진정으로 사랑하게 될 거라고 믿습니다. 일단 예쁘잖아요. 의외로 마음씨도 곱고.”
“마음씨가 고와...? 핫! 콩깍지가 씌어도 단단히 씌었군.”
황당해서 혀를 내두르는 브라함의 잘린 손이 재생을 마쳤다.
죽음을 극복하는 직계의 육신답게 엄청난 회복력이었다.
“뭐 됐다. 네 혼사에 대해선 나중에 따로 의논하도록 하고 일단은 물건부터 돌려받도록 하지.”
브라함이 메타트론이 손에 쥐고 있는 날개를 시선으로 가리켰다.
“리파엘의 날개다. 내가 친히 거두었지.”
“제1위 대천사의 날개...”
브라함은 무슨 이유로 천상에 올라 또 어떤 경위로 날개를 얻게 됐는가.
그리드는 굳이 궁금해 하지 않기로 했다.
순전히 날개의 가치에 주목했다.
‘사리엘을 강화시킬 수 있다.’
제3위 대천사 미카엘의 날개만 해도 사리엘에게 ‘학살’의 권능을 주고 대폭 강화시켰다.
제1위 대천사의 날개가 갖는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클 것이다.
대천사들이 날개를 회수하기 위해 직접 브라함을 뒤쫓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놓쳐선 안 됐다.
“우선 그것부터 돌려받도록 하지.”
그리드가 날개를 쥔 천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메타트론.
‘엘’로 끝나는 다른 대천사들과 달리 낯선 이름을 지닌 존재.
생김새부터 범상치 않았지만 그리드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대악마와 비교하면 대천사의 전력이 다소 뒤떨어진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아온 까닭이다.
반드시 숨겨진 전력이 존재할 거라고 예측했었다.
가브리엘이 끼어들었다.
“돌려받겠다? 마치 제 물건인 양 말하는 군요.”
세상에 저런 몰염치한 날강도가 있다니.
가브리엘은 그리드가 몹시 마음에 안 들었지만, 차마 적의를 드러내진 못했다. 자칫 비위를 거스르지 않도록 조심스레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리파엘의 날개는 우리가 가져가겠습니다. 그게 당연한 이치이니까요. 당신의 사도에게 죗값을 무는 일도 없을 테니 당신께서도 납득해주시길 바랄게요.”
힐끔.
가브리엘이 메타트론에게 눈짓했다.
어서 계단에 오르라는 신호였다.
한데 메타트론은 제자리에 꼼짝도 않고 서서 그리드를 바라볼 뿐이었다.
“왜 가만히...”
““최소 열 장짜리 계약이 필요하다.””
“...”
메타트론을 재촉하려던 가브리엘이 문득 입을 다물었다. 다른 대천사들의 안색도 대번에 굳었다. 메타트론의 말뜻을 헤아렸기 때문이다.
““그 이하로는 탈출 불가다.””
메타트론은 그리드의 힘을 가늠하고 있었다.
제 몸을 구속하고 있는 날개를 최소 12장 펼쳐야 대항할 수 있는 강적으로 평가했다.
무려 세 명의 대천사가 함께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도 그랬다.
라구엘이 중얼거렸다.
“진심으로 고룡급이라고 평가하는 건가...?”
그리드가 등장하는 순간 염룡 트라우카의 기척을 느끼긴 했다.
하지만 이젠 안다.
처음 느꼈던 기척의 근원은 그리드가 아닌 그리드가 무장하고 있는 검과 갑옷이었다.
주황색 신성과 붉은 화염이 어렴풋이 일렁이는 장검과 갑옷.
놀랍게도 트라우카의 뼈와 비늘을 제련해서 만든 것으로 추정됐다.
비교적 평범한 구조를 지녔지만 엄청난 위력을 내포하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리드 자체를 고룡과 동격으로 치부하는 것은 납득이 잘 안 됐다.
급기야 고개를 갸웃거리는 천사들에게 메타트론이 덧붙였다.
““그나마 드래곤 웨폰이 무던해서 열두 장이다.””
메타트론의 감각이 그리드의 검을 더듬고 있었다. 눈으로 보지 않고, 손을 대지 않고도 철저하게 분석했다.
칼날의 길이가 세 척을 약간 넘기는 검.
직선으로 곧게 뻗은 양날 검으로, 손잡이가 두 손으로 쥘 수 있을 정도로 살짝 길다는 점을 제외하면 전혀 특기할 부분이 없다.
‘저 검으로 구사하는 검술의 종류는 모조리 상정 범위 내다. 드래곤 피어, 레이지, 브레스 정도를 구현하는 게 그나마 변수겠지.’
메타트론이 지도자로 있던 시절의 천사들은 당대의 천사들과 달랐다.
단순히 전생의 기억을 무위의 기반으로 삼는 게 아니라 온갖 기예를 추가로 습득하고 연마했다.
메타트론이 직접 가르쳤다.
창이나 검을 장식품 취급하며 신성, 날개, 고리 따위에 의존하는 다른 대천사들과 메타트론은 결이 달랐다.
치우가 떠났을 때.
메타트론을 해방하지 않고 굳이 제라툴을 빚은 여신의 선택에 일부 신들이 의문을 품었을 정도로, 메타트론은 무위에 통달했다.
“혹시 사리엘과 동류인가?”
메타트론을 빤히 응시하던 그리드가 물었다.
브라함의 심장을 꿰뚫고 손을 뽑은 상대에게 의외로 차분하고 조심스러운 언행을 보였다.
죄인처럼 몸이 구속되어 있는 메타트론의 모습에서 사리엘을 떠올린 것이다.
그 또한 신들의 원죄를 들추다가 타락했다는 누명을 쓴 것은 아닐까 걱정했다. 아니, 걱정보단 기대에 가깝다.
같은 편이 새로 생기는 건 아닐까, 하는 기대.
““그대에게 맞서는 걸 어리석다고 비난할 요량인가. 응당 품어 마땅할 자신감이긴 하다.””
그리드의 기대를 처참히 박살낸 메타트론이 가브리엘을 재촉했다.
““계약의 대가를 제시해라.””
“큭...! 우리 셋의 날개를...”
““부족하다.””
“...고리를 더하도록 하죠.”
““그냥 죽어라. 어차피 예비 육체야 많을 텐데.””
천사들을 통치하는 수준을 넘어 지배했던 지도자.
리파엘과는 비교가 안 되는 폭군으로 결국 탄핵을 당한 메타트론의 본질은 계약의 대천사다. 지도자의 권한을 잃은 그를 움직이기 위해선 반드시 계약이 선행되어야만 했고 계약엔 충분한 대가가 따랐다.
메타트론이 스스로를 구속하고 있는 건 어떤 죄의 증거 따위가 아닌 것이다.
레베카가 그를 빚을 때 만든 최소한의 안전장치일 뿐이었다.
“치우의... 치우의 행방을 알려드리죠.”
고개를 떨어뜨린 가브리엘이 최종안을 내놨다.
순간.
““대가로 충분하군.””
메타트론의 거체가 들썩였다. 마치 웃은 듯했다.
가브리엘이 다급히 말을 이었다.
“어디까지나 위치를 알려드리는 것뿐입니다. 그곳까지 찾아갈 자유를 드리진 않을 거예요.”
““애초에 네겐 자유를 논할 권한이 없을 텐데? 그럼에도 족하다는 것이다.””
펄럭!
영겁의 세월 동안 꽁꽁 말려있던 날개 중 10장이 동시에 펼쳐지며 희고 검은 깃털이 나부꼈다.
바깥쪽의 날개는 다른 천사들의 날개처럼 순백이되 안쪽의 날개는 검다.
실시간으로 템빨계의 차원 효과를 저항 중인 메타트론은 자신이 일정한 법칙에 얽매이지 않는단 사실을 외견으로도 증명하고 있었다.
“치우의 행방에 집착하는 이유가 뭐지?”
몹시 강력한 마력과 신성이 동시에 느껴진다.
힘을 개방하는 메타트론을 보고 범상치 않다는 사실을 재차 실감한 그리드가 경계심을 품고 물었다.
치우를 무책임한 신이라고 비난하는 자들이 많단 사실을 차차 알아가는 단계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드는 여전히 치우에게 큰 호감을 품고 있었다.
양반들 틈에서 홀로 고독했던 파그마를 해방시켜주고 자신에겐 가호를 내려준 신을 싫어할 도리가 없었으니까.
메타트론은 속이지 않고 대답했다.
““여신께 슬픔을 드리지 않는 선에서 신살(神殺)을 시험해 보고 싶어서다.””
파지직!!
그리드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메타트론이 켜켜이 둘러친 마력과 신성이 벼락처럼 튀어 오른다 싶더니 순백의 광채를 띄기 시작한 까닭이다.
어느새 얼굴이 파랗게 질린 브라함이 중얼거렸다.
“저건... 위험하군.”
뇌리에 죽음을 각인시키는 힘.
죽음을 초월한 브라함조차도 한 순간 두려움에 휩싸이게 만드는 그 힘의 정체는 바로 신살의 자격이었다.
그리드도 느꼈다.
‘가람이 보여줬던 자격과는 비교가 안 돼.’
강적이다.
그리드가 확신하는 순간.
주르륵.
벗겨진 날개 틈새로 드러난 메타트론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내 언젠가 기필코 야탄을 소멸시켜 여신의 가혹한 운명을 끝내리라.””
번쩍!!
광선이 쏘아졌다.
쏨과 동시에 시야의 끝에 도달하며 부채꼴로 퍼지는 광선이었다.
순보와 같은 원리를 지닌 대단위 스킬.
온 세상을 통틀어 이 공격에 반응하거나 피할 수 있는 존재는 손에 꼽을 것이다.
실제로 브라함도 당했던 그 강력한 공격을, 메타트론은 기본 스킬로 남발했다.
““지금 도망쳐라.””
메타트론이 가브리엘에게 턱짓했다.
광선에 휩쓸린 그리드의 위치를 감각으로 실시간 파악하고 재차 또 광선을 쏴대면서.
‘위대하긴 하나 치우와 비교하기엔 손색이 크다. 내가 집착할 상대는 아니야.’
메타트론은 그리드와 길게 싸울 생각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리드를 해치는 게 아닌 가브리엘을 피신시킨다는 내용의 계약을 맺은 것이다.
애초에 가브리엘이 제시할 수 있는 조건으론 그리드를 해치는 게 불가능하기도 했고, 메타트론은 그리드에게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치우라는 좋은 실험대상이 존재하는 마당에 그보다 못한 존재에게 집착하는 건 생리에 맞지 않았으니까.
““...틀렸나?””
뭐가 그토록 슬프고 괴로운 건지.
처음부터 내내 일그러져 있던 메타트론의 눈매가 한 순간 위로 솟구쳤다.
광선을 꿰뚫고 다가오는 그리드를 보면서다.
아니, 저건 단순히 ‘밀어내는 것’이다.
태산을 녹이는 메타트론의 광선이 그리드의 갑옷을 녹이지 못하고 겉에서만 맴돌고 있었다. 그리드의 전진을 속절없이 허용했다.
““트라우카도 그러긴 힘들 텐데?””
트라우카의 비늘을 재료로 삼아 만든 갑옷이, 정작 트라우카의 본체보다 단단하단 말인가?
메타트론은 보고도 믿기 힘들다는 반응을 보였고,
“헥세타이아 그자가 기어코...!”
구름이 빚은 계단을 뛰어오르면서 상황을 엿보던 가브리엘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고룡의 비늘과 대장장이의 신을 동시에 손에 넣은 그리드가 전보다 훨씬 더 강력해졌단 사실을 파악하면서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며 직접 듣고,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믿기지 않는 성장세.
그리드에게 경외심마저 느끼기 시작하던 가브리엘이 이내 침음했다.
메타트론이 베이는 광경을 목격한 여파다.
그것은, 일방적인 도륙에 가까웠다.
그리드가 횡으로 벨 때는 초승달 같은 곡선을 그리고, 종으로 떨어뜨릴 때는 부피를 크게 키우며, 앞으로 찌를 때는 다시 날카롭게 변모하는 드래곤 웨폰이 메타트론의 저항을 대부분 무력화시키고 있었다.
““의지에 호응하는 검...!””
메타트론의 감탄사는 흡사 단말마 같았다. 핏물이 울대에 걸려 울컥울컥 끊기는 음성이 듣기만 해도 소름 돋았다.
가브리엘의 걸음은 어느새 멈춰 있었다.
다른 대천사들도 마찬가지로 석상처럼 굳은 채 그리드를 주시했다.
꽈아아앙!!
마침 메타트론이 직접 손을 휘둘러서 날린 반격이 허망하게 가로막혔다.
그리드가 측면으로 기울인 검이 즉시 부피를 키운 까닭이다.
마치 성벽을 축소시켜 몸에 두른 느낌.
단 한 자루의 검이 기적을 행사하고 있었다.
““혹시 그대가 치우인가?””
“제대로 노망이 들었군.”
메타트론이 진지하게 제시한 의혹을 일축시킨 그리드가 검에 의념을 담았다.
키이이이이이이잉!!
주황색 신성이 한층 더 짙어진다. 매끄러운 검의 표면이 여름날의 대기처럼 일렁였다.
템빨.
그리드의 세월과 경험, 그리고 인연이 고스란히 녹아든 종결 무기가 파(派), 제(制), 연(聯), 살(殺), 초(超), 극(極), 회(回), 락(落), 화(花), 용(龍), 위(爲)의 경로를 따를 때마다 시시각각 형태를 바꾸며 메타트론이 기껏 펼친 날개를 조각냈다.
대적 불가.
대천사들에게 공포를 안기는 검의 이름, <역천(逆天)>이다.
하늘을 끌어내릴 검이었다.
(84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