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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709화 (1,708/1,794)

템빨 84권 - 19화

천사들은 낯선 당혹감에 휩싸였다.

제2위 대천사 가브리엘이 침입자의 도주를 막아내지 못한데 이어서 리파엘이 행방불명 된 탓이다.

상상해보지 못한 사태를 연달아 겪은 격.

긴 무료함을 견디며 신들의 세계를 보위해온 그들의 명경지수가 처참히 깨졌다.

“영원의 감옥에 갇혔다?”

드문 소란에 빠졌던 아스가르드 전역이 순식간에 적막에 잠겼다.

리파엘의 행방을 금세 밝혀낸 천사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여파다. 대천사의 눈치를 살피는 그들의 행색은 사냥꾼의 덫에 걸린 사슴과 닮아서 다소 측은했다.

“죄수들을 놓친 걸로 모자라 스스로 갇혀버렸다고...?”

늘 무표정하던 대천사들의 얼굴이 미세하게 변모했다. 그리드에게 낭패를 겪은 뒤로 자주 얼굴을 구겨온 가브리엘처럼.

영원의 감옥.

무려 신을 감금하기 위해 만든 감옥이다. 열쇠가 없이는 문을 개방할 도리가 없었고 다름 아닌 리파엘이 열쇠의 관리를 도맡아왔다.

한데 리파엘 본인이 감옥에 갇혔다는 것이다.

“설마 그리드에게 열쇠를 빼앗긴 건가?”

“정황상 그렇게 해석해야 옳겠지.”

“아스가르드에서조차 리파엘을 이겼다고...? 유일신... 치우와 동격인 존재답다.”

“억측이다. 제라툴이 변수로 작용했을 가능성을 잊지 마라.”

“그거야말로 과도한 억측 같은데. 제라툴이 미치지 않은 이상에야 여신을 배신하고 그리드의 편을 들었을 리가...?”

반박하던 대천사가 입을 다물었다.

제라툴이 미쳤을 리 없다고 주장할 만한 근거가 없었으니까.

하물며 리파엘이 쌓아온 업보가 너무 많았다.

“...아무튼 리파엘을 구출해야한다. 지상으로 내려가 그리드에게 열쇠를 되찾아오는 건 힘들다는 전제로 방법을 모색해라.”

대천사란 여신의 뜻을 헤아리고 이행하는 존재다.

여신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리파엘을 감옥에서 꺼내야만 했다.

명령이 떨어지자 잠자코 고개를 조아리는 천사들과 달리 몇 명의 천사가 손을 들었다.

그들의 면면을 살펴본 가브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할 자격이 있는 자들이군요. 뭐가 궁금한 건가요?”

“감옥 문을 부수면 안 되는 겁니까? 이미 한 번 붕괴된 흔적을 보았습니다만.”

“그대만한 검력을 다루는 자라면 응당 품을 만한 의문이네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불가능해요. 이미 문이 열린 상태가 아닌 이상에야 봉인의 술식이 모든 물리적인 개입을 차단하니까요.”

“제가 본 흔적은 문이 열린 상태에서 발생한 전투의 흔적이라는 말씀이시군요.”

“또 모르죠. 괴팍한 미카엘이 홧김에 부순 걸 수도. 어차피 문은 재생하니까.”

“봉인의 술식을 풀어볼까 싶습니다만.”

다른 천사가 끼어들었다.

형형색색의 마력을 몸에 두른 까닭에 유독 눈에 띄는 천사였다.

마력의 줄기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것처럼 너울지는데 무척 화려한 장삼이 바람에 흩날리는 느낌이었다.

어둡고 병약해 보이는 얼굴과 다소 안 어울린다.

“그대의 마법적 재능이라면 응당 품을 자신감이네요. 하지만 공교롭게도 영원의 감옥에 새겨진 술식은 마법이 아닌 권능이에요. 오롯한 신의 영역으로 마법으론 개입할 수 없어요.”

“옳게 말하고 계십니까?”

유약한 인상의 천사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가브리엘의 말만 들어선 감옥을 열 도리가 없는 듯했으니까.

‘전생에 이름이 특히 높았던 자들은 영 버릇이 없네. 오만함은 영혼에 새겨지는 건가.’

한낱 천사 따위가 따지고 들다니.

가브리엘은 황당했지만 애써 무표정을 유지했다. 안 그래도 죄수들과 침입자를 놓친 마당이다. 경거망동 해봤자 스스로의 권위를 떨어뜨릴 터였다.

“감옥 문을 여는 방법은 많아요. 간단한 예로 열쇠의 도안을 찾는 것이죠. 우리는 비록 헥세타이아와 칸을 잃었지만 열쇠를 재현하는 일쯤이야 당신의 마법으로도 가능할 테니까.”

그걸로 끝이었다.

가브리엘이 더 할 말 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수백 명의 천사가 즉시 산개했다. 아스가르드 전역으로 뻗어나갔다.

당연히 영원의 감옥은 텅텅 비었다.

굳이 감옥을 지키고 있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새로운 침입자가 무사히 감옥 앞에 도착한 경위다.

“허술하다. 비 맞은 생쥐마냥 싸돌아다니는 통에 제 영역조차 제대로 지켜내질 못하는군.”

침입자는 자신 외의 존재들을 대부분 하찮게 취급하는 경향이 있었다.

마법과 지혜의 신답게 남들보다 높은 기준점을 지녀서다.

성스러운 존재로 군림해온 천사들조차도 그의 눈엔 미물과 동격이었다.

물론 마법 저항력이 높은 천사의 기본적인 특성에 애를 먹던 시절엔 감히 내색하지 못했지만... 다 옛날 이야기였다.

전설이던 시절엔 상상으로 그칠 수밖에 없던 마법들을 창조할 수 있게 된 그에게 천사의 권한은 이제 큰 위협이 아니었기에.

“...흠.”

오만한 표정으로 천사들을 비웃던 침입자의 표정이 차츰 굳었다.

감옥에 고립 된 천사들.

표적으로 삼기에 딱 좋았지만 공교롭게도 감옥에 걸린 술식의 수준이 몹시 높았다.

‘마법이 아니다. 해체하기 위해선 법칙을 지킬 필요가 있어.’

강제 해체 불가.

판단하고 궁리하는 브라함의 시선은 문에 걸려있는 자물쇠에 못 박혀 있었다.

아스가르드의 물건이라기엔 매우 낡고 투박한 자물쇠.

천사들이 찾는 열쇠가 아닌 이상에야 열 도리가 없다.

한데 브라함의 표정은 의외로 심각하지 않았다. 어떤 물건을 떠올리며 굳었던 얼굴을 금세 풀었다.

‘만능열쇠.’

그리드가 만든 물건이다.

여러모로 애용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었다.

브라함은 늘 그리드를 지켜봤으니까.

파지직!

브라함이 손끝에 피어올린 자색의 마력이 불꽃처럼 일렁이다가 벼락처럼 튀기길 반복하며 형상을 갖춰갔다.

브라함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만능열쇠와 똑같은 모습으로.

‘이걸로 해결할 수 있다.’

그리드는 위대한 전설과 신화를 써내려왔다.

그가 만든 물건들 또한 영향을 받아 덩달아 가치를 높여왔다.

하물며 만능열쇠는 처음부터 지고한 영역의 보물이 될 잠재력을 지닌 물건이었다.

정작 그리드 본인은 만능열쇠의 기능을 완전하게 신뢰하지 못했지만, 브라함은 단 한 번도 그리드를 의심해본 적이 없다.

물론 마법적 재능은 심각하게 의심했었지만 그건 애초에 그리드의 영역이 아니니 종합적인 평가에서 제외해도 좋았다.

딸칵!

위대한 존재를 섬기는 지고한 자의 믿음이 천상의 법칙을 속인다.

자물쇠가 아무런 저항도 없이 풀렸고 영원의 감옥의 높고 두꺼운 철문이 서서히 개방되어갔다.

“...?”

“...?”

“...?”

본래 짙은 어둠에 물들어 있어야할 감옥은 의외로 밝았다.

천사의 머리 위에 달린 고리 덕분이다.

덕분에 브라함은 문을 열자마자 감옥 안의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초췌해진 몰골의 무신 제라툴과 제1위 대천사 리파엘이 근접박투를 펼치는 중이었다.

주변에 잔뜩 널브러진 깃털이 치열한 전투의 흔적으로 남았다.

“하... 하핫, 그리드가 확인 사살용으로 당신을 보냈나보죠? 살아온 세월이 짧은 탓인지 안목이 형편없군요. 마법과 지혜의 신 브라함. 그대의 위명이 꽤나 높아진 건 알고 있지만 그대 혼자선 나를 어찌하지 못할 텐데요?”

“그리드 그놈... 빚지고는 못 사는 성품이라 이거군. 거만한 것이.”

궤변이 동시에 쏟아졌다.

둘이 뭐라고 지껄이는 건지 전혀 궁금하지 않았던 브라함은 잠자코 문을 다시 닫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자물쇠를 채우려고 했지만 한 발 늦었다.

이미 개방 된 문은 봉인의 술식을 상실한 채니까.

리파엘이 쾌속하게 투척한 창에 의해 처참하게 붕괴됐다.

“돌이킬 수 없어요.”

살았다는 안도감이 리파엘을 웃게 만들었다.

시간의 흐름을 느리게 만드는 이곳에서.

그는 장장 수십 년을 갇힌 채 제라툴과 싸웠다. 방패로 세울 천사들이 많았고 제라툴이 약해진 상태였던 탓에 큰 위기를 겪진 않았지만 정말이지 지긋지긋했다.

이러다간 정말로 영원히 제라툴과 단둘이 지내는 게 아닐까 걱정했다.

마음속으로 여신께 구원을 바라는 기도를 올렸을 정도다.

그리고 이 순간 여신께서 화답하셨다...

‘역시 여신께선 나를 가장 아끼신다.’

큰 감격을 느끼며.

리파엘은 쾌속하게 질주했다.

문을 가로막고 선 브라함을 전혀 경계하지 않았다.

마법을 힘의 근원으로 삼는 존재니까.

리파엘이 상성상 절대적인 우위에 있었다.

“놓칠 것 같으냐!”

제라툴이 날개를 붙잡고 늘어졌지만 허용 범위 내였다.

북 찢어지는 날개를 버리고, 리파엘은 브라함의 지척까지 다가섰다.

벽에 꽂혀있는 창을 회수하여 휘두르기까지 찰나지간이었다.

브라함은 반응하지 못했다.

애초에 이곳은 아스가르드다.

온전한 상태의 제1위 대천사가 발휘하는 육체능력을 감당하기엔 브라함이 상대적인 약자였다.

하지만 브라함에겐 지혜가 있다.

리파엘의 움직임을 비록 두 눈으로 쫓지는 못했으나, 어떻게 움직일지 예측은 했다.

미리 주먹을 뻗었다.

마법과도 같은 영역.

과연 마법사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회심의 카운터 펀치였다.

뻐어어어억!!

“...!?”

리파엘의 고운 얼굴이 출렁였다. 얼굴 가죽이 거의 벗겨질 기세로 강력한 힘의 저항을 받은 것이다.

그가 휘청거리는 틈에 쇠사슬로 목을 옥죄 끌어당긴 제라툴이 혀를 내둘렀다.

“신의 경지에 오른 마법으로 한다는 짓이 근력 운동이었나?”

“...”

브라함은 부정하지 않았다.

체질을 살리기 위해 노력해온 게 사실이니까.

마리로즈에게 피를 되찾은 뒤로 효율적인 운동을 병행해왔다.

“아무튼 여기까지다. 나는 그리드의 호의를 받을 생각이 추호도 없어.”

끼이이익...

쇠사슬로 목줄이 채워진 리파엘을 안쪽으로 끌고 들어가면서.

제라툴은 막 재생을 마친 감옥의 문을 스스로 닫았다.

“...뭐, 원한을 잊지 않듯이 은혜 또한 잊진 않으마.”

말끝을 히리는 뒷말이 두꺼운 철문 너머로 사라진다.

브라함 입장에선 영 꺼림칙한 개소리였다.

스스로 감옥에 갇히는 제라툴의 모습은 광인에 가까웠으니까.

산발이 된 머리카락과 깡말라 신경질적으로 변한 인상이 의심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어줬다.

‘연달아 낭패를 겪은 후유증으로 단단히 미쳤군.’

슬며시 고개를 저은 브라함이 감옥의 자물쇠를 다시 단단히 채웠다. 옆에 떨어져있는 리파엘의 찢어진 날개를 주섬주섬 챙기면서다.

‘제1위 대천사의 날개다. 칸에게 도움이 될지도 몰라.’

하지만 원하던 성과에 비하면 미흡한 게 사실이다.

도무지 만족할 수 없었던 브라함은 한참을 고민해본 끝에 자물쇠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봉인 술식에 간섭하지 않는 방향으로 마법의 결계를 겹겹이 둘렀다.

‘해로운 것은 되도록 오랫동안 가둬두어야지.’

리파엘의 구출 난이도가 급격히 상승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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