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708화 (1,707/1,794)

템빨 84권 - 18화

따앙, 따앙, 따아앙...

수만 번의 망치질로 단련한 육체와 정신.

세계가 그리드를 서술할 때 쓰는 말로, 그리드의 심상을 이루는 기본 얼개 중 하나이기도 했다.

수만 번.

그리드의 입장에선 너무 적다.

고작 수만 번?

떠오르는 메시지를 보며 처음엔 다소 황당했을 정도다.

대개 업적이란 과장되게 마련인데 유독 자신의 서사만 과소평가 된다는 느낌을 받으면서였다.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느꼈다.

그리드를 바로 곁에서 지켜보는 템빨단원들도, 한 발 멀리서 지켜봐온 제국의 신민들도, 아예 먼 곳에서 소식만 들어온 타인조차도 그리드의 서사가 너무 축약 됐다고 생각했다.

그리드가 여태껏 만들어온 아이템의 숫자가 족히 수천 개가 넘는단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하물며 하나의 아이템을 만들 때 며칠을 소모한다는 것도 익히 알려진 이야기였다.

그리드의 망치질이 고작 수만 번에 그칠 리 없단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단 말이다.

이때부터였다.

그리드의 서사시가 실제보다 과장되게 해석되기 시작한 것은.

사람들은 그리드의 위업을 보고, 들을 때마다 자연히 과대평가했다.

그리드의 망치질을 고작 수만 번으로 서술했던 서사시의 실수를 상기하면서.

그리드를 평가하는 서사시의 안목을 의심하거나 반발을 품은 채 무조건 서사시보다 그리드를 높이 평가했다.

제라툴과 바알 등의 피해자가 발생한 이유다.

인류가 그리드를 신뢰하고 사랑한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아무튼.

따앙, 따앙, 따아앙...

그리드에게 단조란 밥 먹는 것보다 익숙한 일이었다.

하지만 늘 새롭고 짜릿했다.

망치로 두드릴 때마다 금속의 형태가 변해가는 것이다.

급기야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갖출 때면 엄청난 쾌감을 느꼈다.

갓 태어난 아이를 마주보는 부모의 마음과 어느 정도 닮았다.

기본적으로 신기했으니까.

단순히 ‘제작’ 버튼을 클릭해서 아이템을 오토로 제작해온 플레이어들은 느끼기 힘든 감상이다.

그리드는 진정한 의미의 창조자였다.

‘듣기 좋아.’

트라우카의 뼈와 비늘을 단조하는 그리드의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따앙!

망치로 금속을 두드리는 소리.

본래부터 변수가 많다.

금속의 재질, 강도, 두께, 온도, 망치질의 각도와 세기 등에 따라서 매번 다른 소리가 울려 퍼졌으니까.

때로는 깊은 산중의 새소리처럼 맑게 메아리 쳐서 어지간한 선율보다 감미롭게 들리는 경우도 있었다.

오늘 그리드가 듣는 망치질 소리가 유독 아름다웠다.

따앙, 따앙, 따아앙...

기본적으로 세 번 울린다.

금속의 울림으로 소리가 번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세 번의 망치질이 합일해서 발생하는 여파였다.

따앙!

길게 이어지는 모루 앞에 나란히 선 그리드와 칸, 그리고 헥세타이아.

그들의 망치가 거대한 드래곤의 뼈를 동시에 두들겼다.

검을 오랫동안 휘둘러온 검사들의 검로가 저마다 다른 삶의 궤적을 담아 다르듯이, 그들의 망치질 또한 각자 달랐다.

전원 똑같이 헥세타이아의 심상이 빚은 망치를 이용하고 있음에도 손에 쥐는 법도, 휘두르는 법도 달랐고 추구하는 바도 달랐다.

결과물에도 차이가 생겼다.

그리드가 두드리는 트라우카의 뼈는 극한으로 날카로워지는 반면 칸이 두드리는 트라우카의 뼈는 널찍하고 두껍게 무게감을 더해갔다.

‘대검...’

그리드의 마음이 재차 따뜻해졌다.

칸이 만드는 작품.

조상 알바티노의 <다인슬레이프>를 닮았기 때문이다.

칸은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도 사용할 수 없어 켜켜이 먼지만 쌓여갔던 집안의 가보를 휘둘러 자신을 지켜줬던 그리드와의 첫 만남을.

그때부터 한동안 그리드를 상징하는 무기는 대검이 되었고, 대검은 의외로 공격보다 방어에 더 특화 된 무기이기도 했다.

워낙 크고 두꺼운 검신을 방패처럼 활용하는 게 가능했으니까.

칸은 그리드의 근본을 상기함과 동시에 그리드의 안전을 기원하는 것이다.

헥세타이아의 심상과 그리드의 심상의 도움을 받아 칸 또한 만들 수 있게 된 드래곤 웨폰은 아마 그리드가 만드는 작품들과 결이 다를 가능성이 높았다.

손재주와 스킬 등의 차이 때문에 칸의 실력은 분명히 그리드보다 아래였지만.

그러므로 칸의 작품은 그리드의 작품과 비교해서 성능이 다소 떨어질 수밖에 없었지만, 그리드의 작품은 갖지 못하는 장점을 지닐 가능성이 생겼다.

헥세타이아는 그것이 철저한 계산의 영역임을 알았다.

‘실력의 차이를 다름으로 메우는 것.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일단 자신의 실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어야한다.

또한 ‘다름’이란 정도에서 살짝 벗어남을 뜻한다. 쉽게 떠올릴 수 없어 수많은 고뇌가 선행되어야만 했다.

칸이 만드는 대검은 즉흥적으로 탄생한 결과물이 아닌 것이다.

단순한 무의식의 발현이라기엔 너무 많은 고민의 흔적이 담겨있었다.

‘그리드의 의념이 금속의 성질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마지막 퍼즐 조각과도 같은 영감을 떠올린 것이로군.’

칸의 대검은 대검이 갖는 단점을 고스란히 계승하고 있었다.

투박하다.

크고 긴 탓에 검로에 필연적인 제한을 준다.

최근의 대장장이들이 만드는 대검과 비교해서 몹시 예스럽고 단순했다.

대신 대검의 고유 강점이 극한까지 부각됐다.

저것은 그리드도 쉽게 접해보지 못했을 아주 옛 시대의 대검으로, 검의 형상을 한 재앙이었다. 사용자의 전력을 쏟아 붓는 게 가능하므로 검력에 제한이 없다.

칸은 그리드의 의념 제작을 믿기로 결정한 것이다.

대검의 단점을 변검이라는 형태로 해결해줄 거라고.

애초에 제작의 주체는 그리드였다.

<의념 제작>이 없는 이상 심상에서 만든 물건은 개념에 그치며 외부로 반출되지 않는다.

현재 칸은 다만 그리드에게 영감을 주기 위해 노력할 뿐이었다.

한낱 나 따위가 그리드에게 도움이 될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이 아직 부족했던 시절의 그리드에게 영감을 얻었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최선을 다했다.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그의 마음, 그리드가 온전히 받아들였다.

심상이 결합 된 지금.

그리드는 칸과 헥세타이아의 생각과 마음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따아아아앙!!

망치질에 담기는 그리드의 의념이 추가된다.

변검의 변칙성을 궤도에 한정하지 않고 부피까지 추가시켰다.

따아아아앙!!

그리드가 두드리는 트라우카의 뼈가 일순 부피를 키웠다가 다시 날카롭게 변하길 반복했다.

장검이다가 대검이 되고, 대검이다가 장검이 되는 환상 같은 광경.

‘검에는 더 이상 내가 보탤 부분이 없다.’

잠자코 지켜보던 헥세타이아가 망치질을 관뒀다.

트라우카의 뼈는 순전히 그리드와 칸의 몫으로 맡기고 자신은 비늘에 관심을 가졌다.

‘갑옷.’

헥세타이아는 그리드가 무장하고 있는 갑옷이 처음부터 거슬렸다.

오래되고 낡은 갑옷.

성능이 썩 뛰어난 것도 아니다.

드래곤 건틀릿과 각반까지 만든 자가 어째서 저런 갑옷을 입고 있는지 도통 이해가 안 될 정도였다.

물론 그 의문은 금의 협곡에 발을 들인 순간 풀렸다.

칸의 마음이 담긴 갑옷.

그리드의 심상을 지탱하는 근원이었다.

그리드가 어째서 저것을 버리지 못하고 고수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앞으로 영원히 그렇겠지.’

칸이 만든 그리드의 갑옷은 앞으로도 쭉 그리드의 심상을 지탱할 것이다.

하지만 그리드가 실제로 무장하는 갑옷까지 그럴 필욘 없었다.

헥세타이아가 바꿔놓을 생각이었다.

‘반드시 내가 만들어야 한다.’

헥세타이아는 태어나서부터 대장장이 신이었다.

처음부터 신화가 될 무구들을 당연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경험의 중요성을 잘 안다.

그리드를 만나기 한참 전부터 알고 있었다.

부끄럽게도 인간 대장장이를 질투하고 경계하며 깨달았다.

그것이 악마들을 부추겨 지상을 침략케 만든 대죄의 원흉이었다.

‘그리드와 칸이 만드는 갑옷은 필연적으로 손색이 있을 수밖에 없어.’

그리드가 칸이 만든 갑옷을 고수해온 탓에 경험이 멈췄으니까.

물론 다른 동료들의 갑옷을 만든 경험은 많겠지만, ‘그리드 본인을 위한 갑옷’을 제작한 경험은 벌써 수 년 째 멈췄단 말이다.

헥세타이아가 충족해야 할 부분이었다.

현재로썬 오직 헥세타이아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자네가 경험을 쌓을 때까지. 한동안은 내가 자네를 수호하도록 하겠네.’

따아아아앙!!

그리드, 칸의 심상에 도움을 받아 순식간에 비늘의 제련을 마친 헥세타이아가 단조를 시작하자.

“...!”

그리드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염룡 트라우카의 뼈와 비늘, 그리고 가죽과 탐욕을 섞은 검.

칸의 경험과 조언, 자신의 실력과 경험을 모조리 집약시킨 졸업 무기의 탄생을 기대하고 있던 그리드의 관심을 분산시킬 정도로 헥세타이아의 기술이 놀라웠다.

트라우카의 크고 두꺼운 비늘을 순식간에 여러 결로 나눠 줄기줄기 엮는 게 아닌가?

저건 숫제 금속으로 뜨개질을 하는 수준이다.

감탄을 넘어 경악하는 그리드에게 헥세타이아가 고백했다.

“자네들을 보고 배운 걸세.”

비늘을 녹이지 않고 결을 따라 ‘파열’시키는 불꽃의 온도를 찾았다.

그리드와 칸은 ‘실패’라고 생각했던 부분을 헥세타이아는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마무리는 자네가 해야 돼.”

헥세타이아의 판단이 실시간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리드의 새로운 갑옷을 자신이 홀로 만들 게 아니라 그리드의 기술이 보태져야 한다고 판단했다.

디바인스톤보단 탐욕을 높이 평가해서다.

물론 단순히 강도와 위력만 놓고 보면 디바인스톤이 탐욕보다 조금 더 뛰어났지만, 그리드와의 상성은 디바인스톤보다 탐욕이 훨씬 더 좋았다.

탐욕은 그리드의 의지에 실시간으로 호응하는 신병이기니까.

브라함의 마법이 귀속되어 부가적인 효과를 발생시키는 건 물론이고 광룡철이 함유되어 있기도 했다. 네바르탄의 마력이 트라우카의 비늘과 뼈와 좋은 궁합을 보여 한층 더 강화시킬 가능성이 있었다.

“...알겠습니다.”

흥분을 간신히 억누른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를 믿고 의지하는 대장장이들의 심상이 한층 더 강하게 결합되어갔다.

그들의 손끝에서 빚어지는 검과 갑옷이 점차로 신비로운 빛을 내뿜었다.

물론 수월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중간중간 피어오르는 염룡의 불꽃이 세 사람을 위협했다.

트라우카의 비늘과 뼈에는 여전히 트라우카의 의념이 잔재로 남아있었으니까.

고작

너희 따위가 내게 수작을 부리느냐...

주인을 닮아 오만한 느낌으로 날뛰어댔다.

하지만 괜찮다.

주작이 지켜줬다.

대장장이들을 덮치는 염룡의 불꽃을 주작의 불꽃이 실시간으로 막아냈다.

[크음...]

급기야 한계를 느낀 주작이 신음을 흘렸을 무렵에.

따앙!

세 사람의 망치질 소리가 동시에 멈췄다.

옛 윈스톤의 대장간에 불시에 적막이 찾아왔고 그것은 그리드가 추억하는 풍경과 온전히 닮아있었다.

손님들을 돌려보낸 뒤 칸과 마주보고 앉아 웃으며 하루를 마감했던 순간의 풍경 말이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헥세타이아와 주작이 함께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끝났...다.”

“수고했네.”

“꽤 좋군.”

쏴아아아아...

풍경이 벗겨진다.

대장장이들이 손에 쥐고 있던 망치가 모래알처럼 흩어져가고, 대장간이 희미해지고, 금의 협곡이 사라지면서.

일행은 곧 현실로 돌아왔다.

알림창이 떠오르고 있었다.

[유일신 그리드와 대장장이의 신 헥세타이아, 그리고 전설의 대장장이 칸이 위대한 작품을 탄생시켰습니다!]

지옥과 천상까지 전해지는 소식이었다.

천상의 브라함이 십년감수했다.

‘덕분에 살았군.’

묘한 이질감을 느끼고 경계를 강화하던 천사들이 놀라서 호들갑을 떨기 시작한 덕분이다.

그리드와 헥세타이아가 함께 작품을 만들었다고?

놀란 천사들이 소란을 피우는 틈에 브라함은 이동할 수 있었다.

영원의 감옥이 목적지였다.

‘열쇠’를 잃어버려 감옥에 갇힌 천사를 꺼내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직후다.

고립 된 천사.

브라함이 표적으로 삼기 딱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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