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4권 - 17화
의념(意念).
그리드는 양반 가람을 통해서 처음 접했던 개념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가람 덕분에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게 됐었다.
무형지기에 복날 개처럼 얻어 터져보기 전까진 기와 마나의 제어, 심상 따위의 개념들이 너무 추상적이고 난해했으니까.
여전히 그런 면이 없잖아 있긴 했다.
그리드는 의념이 Satisfy와 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개념 중 하나라고 본다.
시스템이 플레이어의 관념을 들여다보고 물리적인 결과물을 내놓는다는 것 자체가 초월적인 현상이었으니까.
예를 들어 <금의 성역> 말이다.
그리드가 걸어온 길뿐만 아닌 무의식까지 고스란히 반영 된 심상세계를 시스템은 구축해냈다.
진정으로 전능하게 다가왔다.
‘...아이템 제작에 의념을 반영하는 것도 쉬운 일일 거란 말이지.’
그래, 특별한 일이 아니다.
도리어 너무 늦은 감이 있었다.
그간 그리드의 의념은 너무 전투 관련으로 치중 됐으니까.
명색이 대장장이 출신이건만 제작과 관련해선 의념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했다.
종종 의아하고 서운했던 부분인데 헥세타이아가 단숨에 해결시켜준 것이다.
대장장이 신의 축복으로.
마치 온전한 검사마냥 성장해오던 그리드의 꽉 막혀있던 제작 능력을 절대지경으로 끌어올렸다.
놀랍고 감사한 일이었다.
“아...”
도대체 뭐라고 말해야 이 감사한 마음을 온전히 전달할 수 있을까.
잠시 넋을 잃은 채 고민하는 그리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헥세타이아가 끝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받는 것에도 익숙해지게.”
헥세타이아의 커다란 손이 그리드의 양어깨를 붙잡는다.
“베푸는 것에만 익숙해서야 주변 사람들이 꽤 껄끄럽겠어. 지금 내가 그렇다네. 민망하군.”
“아닙니다. 저는 주는 것보다 받는 게 더 많고 익숙한 사람으로...”
“높은 자의 고해는 주변을 불편하게 만드는 법이지.”
그리드의 겸손을 일축시키는 헥세타이아의 얼굴이 문득 쓸쓸해졌다.
레베카 여신을 떠올린 까닭이다.
늘 아무런 말도 없이 우리 곁에 나타났다가 떠나시곤 했던 그분은, 우리들 천상의 신들과 동등한 입장으로 대화를 나눴던 적이 없다.
대부분 침묵으로 일관한 채 지켜보실 뿐이었고 우리의 선택을 존중해주셨다.
그런 게 높은 자가 짊어진 책임이라면...
“...아니, 방금 말은 취소일세. 높은 자라고 해서 자신의 속내를 밝히지 말라는 건 낮은 자들의 이기적인 잣대지. 형평성에 어긋나. 그냥 마음껏 말씀하시게. 무조건 솔직하게 자신의 뜻을 밝히시게. 설령 그것이 헛된 것일지언정 경청할 테니 망설이지 말게. 우리 서로에게 많이 참견하도록 하세.”
“...”
혼자 어두운 얼굴이 되었다가 다시 밝은 얼굴이 되길 반복하며 말을 바꾸는 헥세타이아의 모습이 그리드를 걱정시켰다.
‘역시 온전한 정신이 아니셔.’
조울증은 조기 치료가 중요하다고 들었다.
헥세타이아의 마음에 들러붙은 죄책감의 크기가 얼마나 거대할지 가늠해본 그리드가 진지하게 결정했다.
‘아그너스와 만나실 수 있도록 주선하자.’
마음의 상처를 어떻게든 씻어내고 정신병을 이겨낸 귀중한 선례.
그리드는 아그너스를 진심으로 존경했다. 그가 반드시 헥세타이아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믿었다.
“...?”
이유 모를 불쾌함을 느낀 헥세타이아가 얼굴을 구기고.
“...”
지상의 새로운 미개척 구역을 멤피스와 함께 탐사 중인 아그너스가 귀를 후벼 파는 그때.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말씀 새겨듣겠습니다. 이만 심상을 열어도 괜찮겠습니까?”
대충 고개를 끄덕인 그리드가 헥세타이아의 동의를 구했다.
심상세계는 주변의 환경을 강제로 바꿔버린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주변에 있는 타인을 강제로 자신의 심상으로 끌어들인다.
의도치 않게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는 것이다.
하여 조심스레 묻는 그리드에게 칸과 헥세타이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 됐네.”
칸은 다소 긴장한 기색이었다.
초월자와 절대자의 세계가 낯선 그는 심상 세계를 직접 체험해보지 못했으니까. 어렴풋이 개념만 알 뿐이었다.
“그럼...”
그리드가 조심스럽게 금의 성역을 전개했다.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보는 풍경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개벽이다.
건설 중인 도시의 풍경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흑금색의 협곡이 세워진다.
하늘을 찌를 기세로 높이 솟구친 양쪽의 절벽을 가로지르는 광야는 뜨거웠다.
[나의 불꽃...]
신들의 무덤에 탑승한 이후 내내 잠자코 있던 주작이 중얼거렸다.
주작은 사실 천상의 신이 어색했다.
경계하는 것에 가깝다.
천상에서 쫓겨난 신들에게 모든 걸 빼앗겨 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헥세타이아가 그리드의 호의를 얻을지언정 영 꺼림칙했다.
본래부터 신중하고 과묵한 성격인 주작은 헥세타이아 앞에서 굳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묵묵히 아이템 제작에만 협조했다.
한데 이 순간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흘린 것이다.
감격을 드러냈다.
금의 성역.
그리드의 심상세계에 떠도는 열기가 자신의 불꽃에서 발생하는 열기를 꼭 닮았기에.
단순히 그리드가 주작의 심장을 지녔기 때문에 그런 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주작은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리드의 심상을 이룬 얼개 중에 자신을 향한 감사와 찬사가 섞여있다는 사실을.
당사자만 느낄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크게 감격하는 건 당연히 칸이었다.
“이건...”
금의 성역의 가장 큰 골조는 무한한 애정의 발할라다.
그리드의 안전을 기원하는 칸의 바람이 무한의 갑옷을 생성하는 금속의 절벽을 세운 것이다.
칸을 향한 그리드의 신뢰가 무의식중에 묻어난 것이기도 했고, 이 세계가 그리드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칸을 꼽은 것이기도 했다.
급기야 눈물을 흘리는 칸을, 그리드는 잠자코 지켜보지 못했다.
“감사합니다, 칸.”
칸을 꽉 끌어안은 그리드가 말한다.
헥세타이아의 조언대로 솔직하게 털어놨다.
“당신이 저를 만들었어요.”
“...허, 허허. 큰일 날 소리를!”
잘못 들었는가.
멍한 표정으로 헛웃음을 흘리던 칸이 버럭 언성을 높였다.
“자네는 오롯이 자네일세. 그런 말을 함부로 하지 말게.”
그리드는 독보적인 존재다.
인간의 몸으로 유일한 신이 되어 천상의 신들마저 위협하는.
그 위업이 조금이라도 폄훼되어선 안 된단 말이다.
“자네는 스스로 위대하여 지금의 자네가 된 걸세.”
단호히 말한 칸이 이어서 지적했다.
“정 따위에 휘둘려서 자칫 스스로를 격하하지 말게. 당장 입고 있는 갑옷만 해도 그래. 그게 뭔가? 내가 형편없는 실력으로 만들었던 조악한 갑옷을 아직까지 입고 다녔다고? 단순히 내가 그리워서 그랬던 거라면 실망일세. 만약 자네가 그 갑옷 탓에 실패를 겪었다면 나는... 나는...”
“칸.”
그리드는 칸을 놔주지 않았다. 자신보다 한참 작은 칸의 어깨 위에 턱을 괸 채 평온한 얼굴로 속삭였다.
“당신을 만나지 못했다면. 저는 사람을 좋아하는 방법을 끝내 깨우치지 못했을 겁니다.”
“...”
“그 누구도 믿지 못하고, 무작정 원망하고 증오하며 기껏 얻은 힘을 어리석게 휘둘러댔겠죠.”
아그너스는 결국 되지 못했던 개새끼가 되지 않았을까.
무조건 그랬다.
칸을 만나기 전까지 나는 늘 세상에 배신당하는 느낌을 받았고 독기로 충만했으니까.
지금보다도 타인을 해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서 타인을 해칠 때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했다. 나 또한 당해왔으니 남들도 똑같이 당해야 마땅하다는 믿음으로.
“끝내 아이린도 사랑하지 못하고 이용하기만 했을 걸요. 로드가 어떻게 되든 관심도 없었겠죠.”
“자네... 무슨 그런 말을. 그럴 리가 없네.”
“아니요, 분명히 그랬을 겁니다.”
“...”
칸을 만나 그의 사연을 알기 전까지, 그리드는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불행한 사람인 줄 알았다.
그토록 많은 슬픔과 아픔을 겪고도 자신을 믿어주는 칸을 마냥 호구 취급하며 위안을 얻었을 정도다.
답 없는 놈이었던 거다.
그리드는 과거의 자신이 어땠는지 똑똑히 기억한다.
부정하지 못한다.
그리드의 고백에서 진심을 읽은 헥세타이아가 중얼거렸다.
“...칸 저자가 지상을 구원했군.”
[...]
덩달아 고개를 끄덕이던 주작이 민망해서 딴청을 부리자 헥세타이아가 머리를 긁적였다.
“미안하네.”
[...?]
“우리들의 욕심과 다툼이 자네들의 세상을 망쳤음을 나라도 뒤늦게 사죄함세.”
[...]
협곡의 열기가 강해지기 시작했다.
헥세타이아의 예상치 못한 태도에 놀란 주작의 당황이 피어올린 불꽃에 호응하는 것이다.
헥세타이아 역시 힘을 보탰다.
그리드가 최초로 의념을 이용해 무구를 만드는 순간이다.
그리드라는 신화를 탄생시킨 칸과 주작이 나란히 지켜보는 순간이다.
두 번 다신 없을 귀중한 순간인 것이다.
헥세타이아는 이 순간을 망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자신의 모든 걸 걸고 그리드를 보조할 각오였다.
‘나를 쓰게, 그리드.’
그대가 칸을 만나 지금의 그대가 되었듯이.
나 또한 그대를 만나지 못했다면 영원토록 무가치한 존재였으리라.
쿠르르르르...
탐욕으로 이루어진 금속의 협곡이 서서히 흘러내린다.
주작과 헥세타이아의 불꽃에 의해서다.
그리드의 뜻에 따라 언제든 새로운 형태를 갖출 준비를 마쳤다.
[<의념 제작>이 활성화됩니다.]
알림창이 떠올랐고 그리드는 즉시 반응했다.
모루를 꺼내 세우고 망치를 손에 쥐었다.
녹아흐른 탐욕이 알아서 모루를 향해 모였다.
그때였다.
나를 쓰게, 그리드.
헥세타이아의 의념이 그리드의 심상세계에 메아리치면서 변화가 일어났다.
[대장장이의 신 헥세타이아의 심상 <망치와 모루>가 <금의 협곡>과 동화합니다!]
[<헥세타이아의 망치>를 획득합니다.]
[<헥세타이아의 모루>를 획득합니다.]
나 또한 그리드에게 도움이 되기를...
이어서 칸의 심상이 메아리치면서 변화가 추가됐다.
[전설의 대장장이 칸이 심상 세계를 습득합니다.]
[칸의 심상은, <그날의 대장간>입니다.]
따앙, 따앙, 따앙...
누군가의 망치질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온다.
문득 정신을 차린 그리드의 주변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칸과 처음으로 만났던, 윈스톤의 대장간이다.
그곳에 나란히 선 칸과 헥세타이아, 그리고 주작이 그리드를 맞이하고 있었다.
“어서 오게.”
[전설의 대장장이 칸의 심상 <그날의 대장간>이 <금의 협곡>과 동화합니다!]
[이곳에서 당신의 <의념 제작>은 반드시 최고의 결과물을 탄생시킬 것입니다!]
“아...”
꿈결 같다.
눈시울을 붉힌 그리드가 소중한 이들의 곁으로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