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706화 (1,705/1,794)

템빨 84권 - 16화

“몹시 소중히 여기는군.”

푸른 달빛이 드리운 바위에 걸터앉아 장검을 손질하던 사내가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송아지의 것처럼 큼지막하고 맑은 눈을 지닌 중년의 사내가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역대 최강의 검성이었던 자.

최근 바뀐 지형에 의해 난립하기 시작한 미개척 구역을 함께 탐사 중인 뮐러였다.

“자네 정도의 검사가 애지중지하기엔 다소 손색이 있어 보이는데 말이야.”

“존귀한 사람이 선물해준 검이니까요. 설령 최강의 검은 아닐지언정 제게는 가장 귀중한 물건입니다.”

황혼.

그리드제 수리 키트를 이용해 크라우젤이 손질 중인 장검의 이름이다.

그리드의 황혼과 똑같은 형태를 지녔으나 예기는 많이 부족했다.

소재의 차이다.

하위룡의 비늘을 제련해서 만든 크라우젤의 황혼을 고룡의 이빨로 만든 그리드의 황혼과 비교한다는 건 전혀 이치에 맞지 않았다.

하지만 크라우젤은 일말의 아쉬움도 느끼지 못했다.

어머니께 당당히 ‘벗’이라고 소개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자신을 위해 만들어준 검이니까.

“자네의 취향과 사상이 듬뿍 담긴 물건이기는 해. 사용함에 있어서 아쉬움보단 만족감이 크긴 하겠어.”

“황혼의 형태에 제 사견이 많이 개입했다고 보시는 겁니까?”

“변화무쌍한 검술을 온전히 감당할 만한 형태 아닌가. 번뜩이는 재능을 밑천으로 삼는 자네 같은 검사에게 딱 어울리는 검이라고 보는데.”

“곡해하시는군요. 제가 그리드와 논의하며 황혼을 구상할 때 초점을 맞춘 부분은 ‘이상적인 검’이었습니다. 지극히 객관적인 의견을 내놨을 뿐,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진 않았노라 자부할 수 있습니다.”

“자네야말로 오해하는군. 난 자네의 사견을 욕심이라고 비하할 의도가 전혀 없네.”

“누차 말씀드리지만 사견이 아니라...”

“객관적인 의견이었다고? 그건 너무 오만한데.”

“...오만하다?”

달빛이 만드는 음영은 크라우젤의 얼굴선을 한층 더 부각시키고 있었다. 흑색 장포와 대비되는 흰 얼굴은 구겨져도 아름다웠다.

“자네가 모든 검술의 어버이도 아니면서 어찌 자네의 해석을 객관적이라 할 수 있나?”

“황혼이 이상과 동떨어진 검이라고 주장하고 싶으신 겁니까?”

“자네의 이상엔 부합할지언정 누군가의 이상과는 거리가 멀지.”

크라우젤의 곁에는 제대로 된 조언자가 없었다.

밑바닥에서부터 차근차근 위로 올라온 그리드와 달리 그는 처음부터 정상에 섰던 자니까.

늘 혼자였다.

하여 갈구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눈앞에 나타난 경쟁자 그리드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더욱 더.

급기야 검이 아닌 창을 쓰는 은둔자에게까지 자신의 세월을 맡겼을 정도로.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어느새 그리드의 등만을 쫓게 됐다.

여전히 외톨이인 채였다.

그의 눈앞에 드디어 나타난 것이다.

“나는 자네가 무척 대단한 검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네. 자각하지 못한 틈에 협소해진 시야로도 검성이 되어 수많은 대적들을 베어오지 않았나. 자네가 걸어온 길 또한 결코 틀리지 않았네. 하지만 정답에 가까운 길일 뿐, 정답은 아니었다고 나는 감히 생각하네.”

크라우젤의 흔들리는 시야에 알림창이 떠오르고 있었다.

“더욱 많은 검술을 몸에 익혀보게. 비록 자네가 생각하기엔 결점이 많은 검술일지언정 외면하지 말고 극의에 도달한다면, 그동안 자네가 보지 못했던 것들을 새로이 볼 수 있게 되리라고 믿네.”

크라우젤을 반드시 따라다니는 말이 있다.

아집.

조언자가 없기에 켜켜이 쌓일 수밖에 없던 고집이다.

검성이 되고도 무쌍검을 외면했던 그는, 당연히 무쌍검 외의 검술들은 아예 하찮은 것으로 치부해왔다. 언젠가부터는 <검술 창조>에 오롯이 의지했다.

“...질문이 있습니다.”

뒤늦게 생긴 조언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한참을 생각하던 크라우젤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뭐든 묻게. 위대한 자네와 달리 못난 이 선배에겐 실패와 후회라는 양분이 있네. 부끄럽게도 덕분에 자네에게 해줄 수 있는 조언이 반드시 있을 걸세.”

“당신께서 생각하시는 이상적인 검이란 그럼 무엇입니까?”

크라우젤의 맑은 음성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리드에게 미안해서였다.

황혼에 담긴 것이 이상이 아닌 자신의 편견과 욕심이었다니.

깨닫고 나자 피어오른 강렬한 죄책감이 그를 짓눌렀다.

화아악!!

맑은 바람이 불어와 비단 같은 흑발을 나부낀다.

훤히 드러난 크라우젤의 이마 위로 얹어지는 뮐러의 손이 계곡물처럼 시원했다.

덕분에 온갖 잡념을 털어내고 크게 뜨인 크라우젤의 눈동자에 뮐러의 입모양이 명확하게 각인 됐다.

“사실 전부를 만족시키는 이상이란 존재하지 않다고 보네. 아까도 말했듯이 자네에겐 황혼이 이상적인 검이 맞아.”

뮐러는 애초부터 황혼을 부정할 생각이 없었다.

다만, 크라우젤이 황혼으로 만족할 수 없는 검사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주책없는 수다를 늘어놨을 뿐이다.

그의 뜻을 눈치 챈 크라우젤이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는 사이 뮐러의 말이 이어졌다.

“다만 최고의 검이 무엇인진 확실히 말할 수 있지.”

일순 세상이 검어졌다.

대륙을 횡단 중인 신들의 무덤이 달빛을 가린 여파다.

어둠 속에서도 주황색 빛을 잃지 않은 황혼이 뮐러의 손가락을 비춘다.

굳은살 가득 베긴 손가락은 분명히 하늘을 가리키고 있었다.

“유일신 그리드가 만들 검.”

“...!”

“그분께서 새로이 만드실 검을 손색없이 다루기 위해서라도, 자네는 정진해야할 걸세.”

크라우젤이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조언하는 뮐러에게 하는 대답이기도 했고, 눈앞에 떠올라 있는 퀘스트를 수락하는 행동이기도 했다.

100가지의 검술을 습득할 것.

뮐러가 준 돌발 퀘스트는 첫 번째 단계부터 매우 거창했지만, 오히려 그래서 크라우젤의 의욕에 불을 지폈다.

***

[<염룡 트라우카의 비늘>과 <염룡 트라우카의 뼈>의 제련에 성공하였습니다!]

[대장장이의 신 ‘헥세타이아’와 전설의 대장장이 ‘칸’의 도움을 받아 이룬 위대한 업적입니다!]

[전설의 대장장이 ‘칸’ 역시 당신과 ‘헥세타이아’의 도움을 받아 똑같은 업적을 이뤘습니다.]

[대장장이의 신 ‘헥세타이아’ 또한 당신과 ‘칸’으로부터 얻은 영감을 귀중하게 여기는 눈치입니다.]

[위대한 순간을 함께하고 있는 대장장이들의 유대가 끈끈해집니다.]

[대장장이들을 연결하고 있는 <삼위일체>에 특수한 효과가 더해집니다.]

<삼위일체>의 기본 효과는 ‘삼위일체의 대상이 불완전한 환경에서 얻는 각종 페널티를 삭제하는 것’이다.

현재 그 수혜는 칸이 입고 있었다.

아스가르드를 떠난 여파로 잃었던 원기를 회복하고 하락했던 모든 능력치가 정상 수치로 복구되는 식으로.

그것만으로 족했다.

그리드에겐 더 바랄 나위가 없을 정도로 감사한 일이었다.

한데 이 순간 새로운 효과가 추가 된 것이다.

[앞으로 칸, 헥세타이아와 함께 삼위일체를 이룰 경우 <드래곤 웨폰>과 <드래곤 아머> 제작에 보정 효과를 얻습니다.]

‘역시... 역시 내 곁엔 칸이 있어야 돼.’

정말로 오랫동안.

시스템은 그리드의 아이템 제작에 호응하지 않았었다.

템빨신, 유일신이 되는 과정에서 제작 관련 스킬의 효과가 강화되긴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리드가 별도로 얻은 깨달음엔 대부분 묵묵부답으로 일관했고, 그 탓에 ‘대장장이 그리드’의 성장은 지식과 경험의 축적 수준으로 끝나기 일쑤였다.

시스템적으로 보정을 얻은 지금과 달랐단 말이다.

플레이어의 한계였다.

Satisfy는 더불어 살아가야 옳은 세상이었다.

이 세계의 모두가 행복하길 바라며 싸워온 그리드의 믿음이, 해석이 정답이었음이 칸이라는 존재를 통해서 명확하게 증명됐다.

‘그럼 결국 레베카도.’

이 세계의 가장 높은 존재인 그녀 또한 사실은 자신을 지지하고 있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해보던 그리드가 고개를 저어 상념을 털어냈다.

‘헛된 근거로 김칫국 마실 필요는 없지.’

섣부른 억측은 독일뿐더러 지금은 집중해야할 순간이다.

그리드는 자신이 만든 칼날의 파편들을 보았다.

화살촉의 모습을 닮았다.

비늘보다 단단한 뼈를 기둥으로 삼아, 뼈보다 날카롭게 벼를 수 있는 비늘을 좌우에 날로 세웠다.

총 일곱 개.

가죽과 탐욕으로 엮어 하나의 검으로 만들 것이다.

다음으로 칸의 작품을 살펴보았다.

칼날 하나의 크기를 반 뼘 지름으로 잡은 그리드와 달리, 칸이 만든 칼날은 하나하나가 손가락 마디 수준에 불과했다. 형태는 끝 날을 제외하고 사각을 이뤘다.

뼈로 중심을 잡고 비늘을 날로 삼았다는 점은 그리드와 같았지만 전체적으로 조금 더 견고한 느낌. 대신 다소 둔중하게도 느껴졌다.

‘완성 됐을 때 가동 범위가 좁아 베기의 위력을 극대화시키진 못할 것 같지만 안정감은 일품일 것 같다.’

그리드가 로브 안쪽에 무장하고 있는 발할라를 어루만졌다.

항상 그리드의 안전을 기원하는 칸의 심상을 새삼 느낀 까닭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안타깝게도 자네들의 작품은 실패작에 가깝군.”

헥세타이아가 그리드의 의식을 현실로 끄집어냈다.

트라우카의 비늘과 뼈를 제련하는 내내 꺼지지 않았던 유두의 불꽃을 비틀어 끄면서 다가온 그가 아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조악해.”

“...!”

예상치 못한 혹평.

조악하다니?

전설의 대장장이들, 특히 드래곤 웨폰마저 제작한 전력이 있는 그리드의 작품을 보고 나올 만한 평가가 아니었다.

“어딜 봐서 조악하다는 겁니까?”

그리드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칸이 나섰다.

헥세타이아를 쭉 공손한 태도로 섬겨온 그가 처음으로 날 선 반응을 보였다. 아무리 힘들어도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얼굴을 살짝 찌푸린 채다.

짐짓 당황하는 헥세타이아였지만 불쾌함을 느끼진 못했다.

칸의 태도에서 장인의 자부심을 엿보았으니까.

알량한 자신감 따위가 아닌, 경험과 실력으로 쌓아올린 자부심이다.

존중해야 마땅했다.

“그 정도 혹평을 받는 건 납득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그리드의 작품은 제 작품과 비교해서 훨씬 더 뛰어난데 같은 취급이시라니요?”

‘...장인의 자부심이라기보단 그리드 때문에 화난 거였나.’

황당해서 코웃음 친 헥세타이아가 자신의 작품을 선보였다.

작품의 결이 달랐다.

칼날 파편 하나하나마다 기둥을 세우고 날을 부착시킨 그리드와 칸의 작품과 달리 커다란 기둥 하나에 다수의 날을 부착시킨 형태다.

칸이 의문에 휩싸였다.

“그게 뭡니까...?”

변검은 말 그대로 형태가 변화하는 검을 뜻한다.

칼날이 유기적으로 움직일 필요성이 있었다.

헥세타이아가 만든 작품은 변검이 아닌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물질 중 하나인 트라우카의 뼈를 기둥으로 삼은 검이 무슨 수로 유기적으로 움직이겠느냔 말이다.

저건 그냥 검이다.

불필요하게 날을 여러 개로 쪼개 만든 뒤 부착시킨 검.

조악하다는 표현은 헥세타이아의 작품을 평가할 때 써야 옳았다.

물론 그리드도, 칸도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진 못했다.

“단단하다고 해서 휘지 말라는 법은 없건만.”

천상의 남신들은 죄다 어깨가 저렇게 넓은 걸까.

그런 생각이 들게 만들 정도로 넓은 어깨를 으쓱인 헥세타이아가 자신의 작품을 손으로 꾹 눌렀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분명히 트라우카의 뼈를 기둥으로 삼은 검이 활대처럼 휘는 게 아닌가?

이내 헥세타이아가 손을 떼자 파르르르! 두꺼운 고무처럼 탄력적으로 날뛰어댔다.

“...어떻게 하신 겁니까?”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에 잠시 넋이 나갔던 그리드가 재촉했다.

“도대체 무슨 수를 쓰셨기에 트라우카의 뼈가 활어마냥 팔팔하게 날뛰는 거죠?”

“혹시 영혼을 부여하신 겁니까?”

에고 아이템을 떠올린 칸이 덩달아 묻자 헥세타이아가 고개를 저었다.

“무기에 영혼을 부여한다고 해서 소재의 성질까지 바꿀 수 있다면 세상의 이름난 보검들은 죄다 에고 소드였겠지.”

헥세타이아는 선문답을 즐기는 성격이 아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누군가와 동등한 위치에서 대화를 나눠본 경험 자체가 적은 탓에 대화를 길게 이끌어나가는 게 어색했다.

하여 곧장 정답을 말했다.

“의념의 활용일세.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지. 의념의 물리적인 활용은 제라툴 같은 폭력배들이 무형지기 따위의 폭력으로 자주 선보이지 않았나.”

“폭력배...”

명색이 무신을 급기야 폭력배로 전락시키는가.

순수한 대장장이의 관점이라는 것은, 제라툴과 치고받고 싸운 경험이 무척 많은 그리드까지 덩달아 뜨끔하게 만드는 면이 없잖아 있었다.

헥세타이아가 아차해선 수습했다.

“제라툴에게 사적인 감정이 남아있는 까닭에 표현이 과격했군. 자네처럼 용맹한 투사들까지 덩달아 비하할 생각은 아니었네. 간단히 다른 예를 들지. 드래곤의 용언 또한 결국은 의념의 활용일세. 대장장이의 의념이 소재에 영향을 행사하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고 말하고 싶은 걸세.”

이미 그리드는 무형지기와 심상을 습득하고 있다.

둘 다 의념이라는 개념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스킬들이었다.

관련 스킬이 추가로 생긴다고 해서 이상할 게 없는 것이다.

“개안하게나.”

쏴아아아아!

그리드의 머리 위로 손을 얹은 헥세타이아가 축복을 내렸다.

대장장이 신이기에 내릴 수 있는 축복이었고, 위대한 대장장이이기에 받을 수 있는 축복이었다.

[당신의 심상이 한층 더 강력해집니다!]

[앞으로 <금의 성역>에서 아이템을 제작할 수 있습니다. 이때 특수한 일이 발생하며 강력한 보정 효과를 얻습니다.]

아이템에 영혼을 부여하는 등의 기술은 그리드의 성향과 맞지 않아 사실상 반봉인 상태로 방치되어 왔다.

그리드가 만든 에고 아이템은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했고 많은 사람들이 그에 대해서 아쉬움을 토로하곤 했다.

하지만 앞으론 다를 것이다.

타인의 영혼, 혹은 만들어진 정신체에 의존하는 것에 불과한 에고 아이템과는 격이 다른 아이템이 그리드의 손끝에서 만들어질 테니까.

무려 유일신 그리드의 의념인 담긴 아이템 말이다.

“그것을 잘만 활용하면 드래곤의 용언마저 대체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어디까지나 가능성을 말하는 걸세.”

헥세타이아의 조언이 그리드를 흥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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