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4권 - 15화
“황도를 통째로 옮길 셈인가?”
신들의 무덤은 단순히 거대하기만 할 뿐이 아니었다.
온갖 인프라가 구축되어가는 중이었고 높은 첨탑을 자랑하는 궁전이 여러 채 건설되고 있었다. 라인하르트보다 규모는 작지만 신식의 도시가 세워지는 느낌이었다.
하물며 상공 높이 떠오른 채 움직이는 도시다.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요새이므로 새로운 황도로 삼기에 적합해 보였다.
하지만 그리드의 답변은 예상 밖이었다.
“옮기는 건 아니고 분할시킬 계획이라고 하더군요. 아무래도 전장에 투입되는 경우가 많을 거라 민간인을 거주시키기엔 현실적인 문제가 있고, 현장을 시찰해야 능률이 오르는 행정 기관들이 있다면서. 움직이는 도시의 이점을 살린 전진 기지이자 행정수도로 삼을 거라는 것 같던데.”
“...?”
내심 감탄하며 은근히 질문을 던지던 헥세타이아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자네가 황제 아닌가?”
“맞습니다만...”
“이 비행선의 주인도 자네 아닌가?”
“맞습니다만...?”
“한데 말투가 묘하군. 자네가 아닌 다른 이가 이곳을 통치하는 느낌으로 다가오는데.”
“아, 제가 정치와 관련해선 젬병이라 다른 친구들에게 온전히 맡기고 있습니다.”
Satisfy에서 통치란 단순히 지식과 경험으로 행해지는 게 아니다.
정치와 관련 된 스탯과 스킬을 다량으로 보유해야 효과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드가 정치와 경제 등을 열심히 공부하면서도 결국 대부분의 일을 라우엘 등에게 맡기는 이유다.
‘나름 노력은 하고 있지만 쉽지 않아.’
현실에서 그리드의 하루일과는 대부분 체력과 컨디션 관리에 집중되어 있다.
최소한의 지식은 갖춰야한다는 의무감을 갖고 유라의 도움을 받아 틈틈이 정치와 경제를 공부하긴 했지만 한참 부족했다.
애초에 Satisfy에 접속해 있는 시간이 너무 길어서 공부에 쏟을 여력이 적었다.
‘라우엘처럼 똑똑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금도 옛날하고 비교하면 이해력이나 암기력이 수백 배는 좋아진 느낌이지만.
라우엘처럼 하나를 배우면 열을 깨우치는 천재들이 여전히 부러운 건 사실이다.
‘...하긴, 이 얼굴에 똑똑하기까지 했으면 그건 범죄지.’
이성에게 사랑받는 것에 익숙해진 그리드의 최근 자신감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전무후무한 미녀 마리로즈의 연달은 고백이 기폭제가 됐다.
브라함과 동화했던 시절보다 현재의 자신이 조금 더 멋지지 않나, 그런 생각을 품을 정도로 그리드는 스스로에게 긍정적이었다.
“...?”
장발처럼 흩날리는 신성을 쓸어 넘기며 그윽한 표정을 짓는 그리드를 잠시 의아하게 바라보던 헥세타이아가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대장간의 구조가 가장 마음에 드는군. 규모가 크고 굴뚝이 많아 열기가 갇히는 불상사는 없겠어. 고열을 필요로 하는 금속을 제련하다가 대장간을 날려먹는 얼간이들을 종종 목격한 까닭에 내심 걱정했는데 과연 자네는 다르군.”
“...그들이 얼간이라기 보단, 다만 경험이 없다보니 저지른 실수였겠죠.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성장통이랄까요.”
“옳은 말일세. 내 발언이 경솔했어.”
헥세타이아가 깊이 반성했다.
신으로 태어난 덕분에 많은 걸 자연히 깨우쳤던 자신과 인간들의 입장이 다르단 사실을 상기한 것이다.
또 다시 아무렇지 않게 인간들을 상처 입힐 뻔했다...
죄책감을 느끼는 헥세타이아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지자 그리드가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자, 이만하고 들어가시죠. 일을 시작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쿠웅!!
축구장 10개를 붙여놓은 것보다 더 큰 면적을 자랑하는 대장간이 미세한 진동을 일으켰다.
수백 개의 갓 핸드가 내려놓은 트라우카의 팔이 그만큼 묵직했다.
‘이쯤 되면 거의 검성인데?’
살점과 깔끔하게 분리되어 있는 가죽과 비늘을 살펴본 그리드가 혀를 내둘렀다.
절세의 검객이 만들어낸 듯한 진풍경.
이것은 이단의 작품이다.
오직 드래곤에게만 인정받는 요리의 흔적이었다.
드래곤 셰프.
무려 고룡의 신체를 식재로 활용하는 검력을 구사한다...
‘파그마의 후예처럼 공격 스킬도 여럿 보유하고 있던데.’
자신의 요리사가 스스로 보위하길 바라는 레이더스의 마음이 만든 결과일까.
이단은 요리사라는 명칭이 무색하게도 다수의 공격 스킬과 마법을 습득하고 있었다.
며칠 전 들여다본 이단의 상태창을 떠올린 그리드가 진지하게 고민했다.
‘주방에 머무르게 하지 말고 수련용 던전으로 보내는 게 옳지 않을까.’
포식이불족발이 만든 수련용 던전은 여전히 요긴하게 쓰이는 중이다.
포식이불족발의 레벨이 오른 것에 비례해서 더 높은 난이도의 던전들이 속속들이 탄생해왔다.
사도들과 십공신이 이용하기엔 손색이 클지언정 아직 햇병아리에 불과한 이단이 이용하기엔 적합한 사냥터가 많은 것이다.
‘공교롭게도 원한을 사기 쉬운 이단의 입장을 고려하면 수련을 보내는 편이 맞다.’
그리드가 결론을 내렸을 무렵엔 헥세타이아의 멘탈도 회복되어 있었다.
칠대죄 중 하나를 저지른 여파로 조울증 초기 증세를 보이는 신.
깨지기 쉬운 유리와 닮은 헥세타이아의 정신력도 그리드의 새로운 고민거리였다.
오직 그리드만 믿고 템빨계의 신이 되어준 그를 온전하게 회복시키는 것 또한 그리드의 의무였으니까.
‘정신병과 관련해선 아그너스에게 의논하는 게 좋지 않을까?’
요즘 꽤 사람다워진 눈치던데.
베티의 입을 통해 접한 아그너스의 근황을 떠올리던 그리드가 문득 웃었다.
대장간의 상태를 점검하는 칸과 헥세타이아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자연히 피어나는 미소였다.
현실적인 문제들이야 어찌됐든.
두 번 다신 만나지 못할 줄 알았던 이들과 함께하는 지금 이 순간이 그는 너무 행복했다.
***
“난 이것이 결국 무던한 검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네.”
염룡 트라우카의 팔을 완벽하게 제련하기 위해 필요한 도구론 뭐가 있을까.
그리드는 몇날 며칠을 고민했던 문제를 헥세타이아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자신의 유두와 주작 신이 함께 있는 이상 고룡의 팔은커녕 뿔조차 수월하게 제련할 수 있을 거라면서, 그는 바로 제작의 첫 단계로 일을 진행시켰다.
구상이다.
“무던하다...?”
그리드의 얼굴이 굳었다.
자신과 크라우젤의 최신작이자 역대 최고의 작품인 황혼을 살펴본 헥세타이아의 입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감상이 흘러나왔으니까.
헥세타이아는 개의치 않고 말했다.
“규격, 형태, 무게를 종합했을 때 ‘모든 종류의 검술’을 구사함에 적합한 이 검을 무던하다하지 않으면 달리 뭐라고 표현하겠나? 손색을 논하기엔 쓰임새가 많고 최고를 논하기엔 깊이가 얕은데.”
황혼은 그리드 혼자서 만든 작품이 아니다.
그 형태를 정한 건 사실상 크라우젤이었고, 당연히 ‘검성의 사견’이 많이 들어갔다.
또한 검성이란, 모든 검술에 통달한 존재였다.
“하나의 검술에 특화 된 검이야말로 최고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건 너무 일차원적인 생각이다.
이미 그리드가 거친 과정이었다.
구젤의 검과 도.
각각 베기와 찌르기에 특화 된 한 쌍의 무기를, 그리드는 진즉에 만든 바 있다.
하지만 끝내 황혼이 가장 훌륭한 무기라는 결론을 내렸다.
실전에서 겪는 변수가 워낙 많은 까닭이다.
개성이 뚜렷한 무기로는 변화무쌍한 적의 공격을 막아내고 흘려내며 반격함에 있어서 한계가 컸다.
두 자루의 검을 한 자루의 검처럼 다룬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헥세타이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 또한 아닐세.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검이란... 자네가 무장하고 있는 그 건틀렛에서 얻은 영감을 기반으로 하네.”
“이프리트의 팔을...?”
그리드의 시선이 자신의 양팔로 내려갔다.
하나의 비늘을 수천 개로 쪼개 용의 팔을 재현한 건틀렛.
마치 살아서 숨 쉬듯, 흡착과 발산을 반복하며 착용자의 움직임에 호응하는 그것의 모습은 실시간으로 미세하게 변모하고 있었다.
“변검...”
헥세타이아가 생각하는 최고의 검은 무엇인가.
그것의 정체가 칸의 입을 통해서 흘러나왔다.
변검(變劍).
사용자의 의도에 따라서 모습을 바꾸는 검을 뜻한다.
그리드도 수차례 만들어봤다.
“변검의 한계는 명확하지 않습니까?”
그리드가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변검은 ‘여러 개의 작은 검날을 엮어서’ 만드는 검이다.
사용자가 힘을 줄 때면 곧추서 검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만, 단순히 휘두를 때는 채찍처럼 휘길 반복했다. 온전한 검술을 구사하기 힘든 것이다.
“이프리트의 팔을 완전하게 통제할 수 있는 건 제 신체와 밀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독립 된 도구로 분리하는 순간 뜻대로 조종하기가 힘들어지죠. 물론 탐욕을 섞어서 원격 제어가 가능하도록 유도할 수도 있지만, 그것 또한 제가 실시간으로 명령을 내려야한다는 문제점이...”
“지극히 평범한 근심을 품는군.”
헥세타이아가 피식 웃었다.
“변검의 단점은 가동 범위를 조율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보네. 물론 쉽게 해결되지 않는 탓에 변검이 늘 홀대를 받아온 것이겠지만... 우리 셋의 면면을 확인하시게.”
전설의 대장장이들과 대장장이 신.
이 셋이 머리를 맞댔는데 만들지 못할 무기가 있다?
그건 거의 불가능하다.
“하물며 고룡의 신체를 재료로 쓰는 일일세. 괜한 걱정을 품을 시간에 일단 시도부터 해보는 게 옳아.”
설령 실패한들 다시 도전하면 그만일 문제이기도 했다.
트라우카가 워낙 거대한 덕분에 재료는 차고도 넘쳤으니까.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제가 잠시 편견에 사로잡혀 쓸데없는 걱정만 늘어놨군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리드 혼자서 일한 세월이 너무 길었으니까.
그리드는 칸이 세상을 떠난 순간부터 조언자를 잃었다.
헥세타이아가 감옥에 갇힌 이후부턴 경쟁자마저 없었다.
가끔 크라우젤이 ‘검’에 관한 의견을 내주었던 것을 제외하면.
그리드는 늘 홀로 모루 앞에 섰다.
용광로가 내뿜는 뜨거운 불길이 무색하게도 고독감에 몸을 떨었다.
매번 홀로 궁리하며 스스로 만든 편견에 자신도 모르게 갇혀갔다.
보이지 않는 철창을 부술 때였다.
칸에게 의지하고, 헥세타이아를 보고 배우면서.
“일단 뭐든 해봅시다.”
그리드의 선언과 동시에 대장장이 트리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의외로 일체감은 적었다.
셋은 일단 각자의 판단대로 움직였다.
저마다 다른 타이밍에 트라우카의 비늘과 뼈를 제련했다.
제련에 필요한 용광로의 온도를 다르게 해석한 영향이었다.
그로 인해 맞이하는 실패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실패를 공부로 삼아 실시간으로 문제점을 교정했다.
실패 없는 성공을 맛본 헥세타이아조차도 그리드와 칸을 통해 무언가를 배웠다.
‘비늘이 녹기 전에 결의 방향을 따른 균열이 발생했다? 저건 잘만 이용하면 쓸모가 있겠어. 그리드와 칸이 굳이 저 온도에서 제련을 시도해본 이유를 알겠군.’
꽈르르릉!!
용광로와 연결 된 굴뚝을 통해서 불기둥이 연신 솟구쳐댔다.
화산이 폭발한 걸로 착각해서 대피하는 사람들이 지상에 즐비할 지경이었다.
만약 신들의 무덤이 없었다면.
이날 몇 개의 도시가 지도에서 사라졌을 수도 있었다.
“...”
고고히 비행하는 신들의 무덤에서 연달아 솟구치는 불기둥에 위축 된 존재는 비단 인간뿐만이 아니었다.
악룡 번헬리어.
그리드가 바알 토벌에 나설 것을 뻔히 알고 합류하기 위해 찾아온 그가 놀라서 머뭇거렸다.
최근 새로운 레어로 피신한 줄 알았던 염룡 트라우카의 기운이 신들의 무덤에서 용솟음치고 있었으니까.
도무지 가까이 다가갈 용기가 생기질 않았다...
‘어중이떠중이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트라우카와 최근에 쌓았다는 친분을 이용하는 건가? 물론 트라우카가 저곳에 있을 가능성은 낮지만... 당분간 손님을 맞이하고 싶지 않은 눈치이니 훗날을 도모하는 편이 옳겠다.’
등돌려 떠나는 번헬리어의 뒷모습이 고룡답지 않게 작고 쓸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