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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704화 (1,703/1,794)

템빨 84권 - 14화

“헥세타이아 님을 삼위일체의 대상으로 삼을 순 없는 겁니까?”

칸이 회복하기 위해선 삼위일체를 이룰 천사가 필요하다.

사리엘의 주장을 되새기며 골똘히 생각해보던 피아로가 재차 질문했다.

템빨마탑과 연금술시설에서 만든 레시피를 참고해서 재배한 약초들을 주섬주섬 꺼내면서다.

이단이 가져온 덜 익은 고기를 먹은 사람들을 구재할 약초였다.

“잔혹한 말이지만 신과 천사의 입장은 크게 다릅니다. 신은 아스가르드의 통치에 관여하는 존재로 비교적 자유로운 반면 천사란 아스가르드를 위해 쓰이는 존재로 철저하게 구속당하죠. 특히 아스가르드의 주신이셨던 헥세타이아 신의 자유의지는 아스가르드의 구속력보다 강해서 스스로 아스가르드를 떠나실 수 있었지만 칸 님은 다릅니다.”

사리엘의 얼굴이 차츰 어두워졌다.

이단의 요리를 먹고 쓰러진 사람들을 신성력으로 보듬으면서다.

이단이 전설이 됐다는 이유로 그가 포이즌 마스터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신뢰한 사람들을 그녀는 가엾게 여겼다.

지옥의 악마들에게 매번 현혹당하고 천상의 신들에게 매번 배신당해왔으면서도 쉽사리 타인을 믿는가.

과연 대부분의 인간들은 순진하고 우매하니 잘 보살필 필요가 있다는 책임감을 느꼈다.

“쉽게 말해서, 현재 헥세타이아 신께선 아스가르드 소속이 아닙니다. 아스가르드에서 만들어진 천사라는 신분에 여전히 얽매이고 있는 칸 님과 삼위일체를 이룰 권한이 없으신 거죠.”

피아로는 단번에 이해했다.

이미 간단한 예시가 눈앞에 있었으니까.

사리엘은 템빨계의 신들과 삼위일체를 이루지 못한다.

“당신의 신분 역시 여전히 아스가르드에 얽매여 있는 겁니까?”

“공교롭게도 그렇습니다. 아스가르드에서 추방을 당한 걸로 모자라 그리드 신께서 저를 친히 사도로 삼아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제 영혼에 찍힌 노예의 낙인은 여전히 희미하게 남아있지요.”

아마도 여신께서 직접 만드신 종인 탓에 더욱 강한 구속력에 얽매이는 게 아닐까...

사리엘이 씁쓸하게 읊조리는 사이 장내의 분위기는 진정되고 있었다.

피아로가 꺼낸 약재를 아스모펠이 루비에게 전달한 여파다.

약재와 결합해 강화 된 루비의 힐과 정화 스킬이 식중독에 걸린 환자들을 빠르게 회복시켰다. 사리엘의 신성력이 환자들의 병세를 억제하고 있었던 덕분에 수월하게 가능했다.

일종의 삼위일체다.

농부와 성녀와 천사가 이룬 삼위일체.

이 순간 사리엘은 엄청난 깨달음을 얻었다.

“...문득 떠올랐습니다.”

“무엇이요?”

피아로가 상당히 놀랐다.

사리엘이 드물게도 흥분한 기색을 보인 까닭이다.

그녀의 새하얀 얼굴이 옅게 달아올라 있었다.

“칸 님의 근원은 저와 다릅니다. 천사이기에 앞서 인간이셨죠. 하물며 전설이 됐던 인간. 대천사와 달리 보통의 천사가 도리어 아스가르드의 구속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겁니다.”

“음.”

“물론 그것만으로 칸 님을 아스가르드에서 해방시킬 순 없겠지요. 아마 대부분의 천사는 저처럼 영원히 아스가르드에 얽매일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몹시 좋습니다.”

“상황이 좋다?”

“칸 님은 전설의 대장장이셨고, 그리드 신께서도 전설의 대장장이셨으며, 헥세타이아 신은 대장장이의 신 아닙니까?”

“...설마?”

“맞습니다. 삼위일체의 기준을 다르게 잡는 겁니다. 그럼 칸 님께선 당장에라도 건강을 회복하실 수도...”

마침 그리드가 제자리로 돌아와 앉는 모습이 보였다.

사리엘과 피아로는 즉시 그에게 상황을 설명했고 그리드는 헥세타이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좋은 생각이군. 안 그래도 마음에 걸리던 부분이었는데 잘 해결되겠어.”

“제가 새로운 천사를 임명했어도 해결이 안 될 부분이었습니까?”

“천사라는 신분으로 묶으면 해결 됐겠지. 다만 그때까지 칸이 버틸 수 있었느냐가 관건이겠지만.”

“...”

템빨계의 천사는 아스가르드의 천사와 결이 다르다.

천사라는 종(種)을 만드는 게 아니라 지위를 부여하는 식으로, 대상이 3개 이상의 신화급 아이템을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붙었다.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란 말이다.

그리드가 곧 새롭게 만들 드래곤 웨폰과 아머를 갖게 될 템빨단원을 천사로 임명하면 해결 될 문제였다.

한데 헥세타이아는 그마저도 촉박하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었다.

칸의 상태가 보기보다 훨씬 더 위중하다는 뜻이거나, 새로운 드래곤 웨폰을 만들기까지 의외로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일 수도 있었다.

‘둘 다일 수도 있고.’

아무튼 그리드의 마음은 편치 못했다.

기껏 되찾은 소중한 사람에게 새로운 고통을 안기고 있었단 사실을 알게 됐으니까.

‘지상으로 모셔오면 마냥 다 좋아질 줄 알았는데, 일을 대책 없이 저지른 셈이 되고 말았어.’

부족한 나를 대신해서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곁에 있어줘서 다행이다.

새삼 큰 감사를 느낀 그가 헥세타이아에게 간청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칸 님을 살려주세요.”

“이미 해결됐네.”

“...”

“거창한 계획을 세울 필요 없이 내가 자네와 칸을 대장장이로 인식하면 그만인 문제였네. 물론 내 인식 따위가 자네에게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칸에겐 다르지. 자네는 자네가 걸어온 길에 감사하게. 매우 많은 경험을 쌓아온 덕분에 자네를 상징하는 개념이 몹시 많아. 자네를 섬기는 자들이 자네에게 부여할 수 있는 이로운 의미가 무궁무진하다네.”

아스가르드의 신들은 대부분 태어날 때부터 역할이 정해져있다.

예를 들어 대장장이의 신인 헥세타이아는 그에게 기도를 올리는 대장장이들에게 축복이나 신벌을 내리는 게 가능했다.

헥세타이아가 사람들의 기도를 일일이 듣고 직접 반응할 수도 있었지만, 그보단 대개 자연계의 법칙처럼 자연히 발생하는 상호작용이었다.

아무튼.

대부분의 신은 기도에 응답할 수 있는 대상이 한정되어 있었다.

반면 그리드는 달랐다.

워낙 많은 상징을 지닌 까닭에 거의 모든 존재가 그에게 기도를 올리고 축복을 얻을 수 있었다.

방금 헥세타이아도 그랬다.

그리드에게 대장장이로서 응답해달라고 기원했고, 덕분에 칸과 삼위일체를 이룰 수 있었다. 자신과 칸, 그리고 그리드를 ‘가장 많은 존경을 받는 대장장이’라는 범주로 묶어 유도한 삼위일체는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정확히 어떤 원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큰 자부심으로 삼겠습니다.”

“그걸로 족하네.”

얼떨떨한 반응을 보이는 그리드에게 헥세타이아가 미소로 화답했다.

새로이 탄생한 유일신의 위대함을 절실히 느끼고 전율하면서다.

태초신들과 치우를 곁에서 목격했던 헥세타이아는 그리드의 잠재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간파하고 있었다.

그리드에게 기도하면서, 그리드를 염원의 대상으로 삼은 존재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엿본 까닭이다.

자신 외에도 여러 신들이 있었다.

신들 외에도 여러 드래곤이 있었다.

‘...특히 번헬리어가 의외로군.’

악룡 번헬리어.

놈은 엉덩이가 무거운 다른 고룡들과 다르다.

하루살이마냥 쉬지 않고 날갯짓하며 온 세상을 돌아다녔고 매번 패악질을 저질렀다.

자존감이 낮아서였다.

먼 과거의 헥세타이아처럼 말이다.

번헬리어는 고룡 중에서 유일하게 스스로에게 확신을 품지 못하고 방황하는 처지였다. 매일 불안에 떨면서 자신의 신세를 상승시키고자 발버둥 쳤다.

그 과정에서 피해를 입은 대표적인 존재가 네바르탄이다.

바알과 신들의 협력을 얻은 번헬리어의 함정에 빠져서 광증에 시달리게 된...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만큼 남을 믿지 않는 놈이 그리드에게 염원을 품었다라.’

단순히 그리드가 대단하단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었지만, 헥세타이아는 영 찝찝했다.

번헬리어는 해로운 생물이다.

당연히 신뢰해선 안 됐고 엮이는 일 자체가 없어야 좋았다.

‘...내가 걱정할 부분이 아니지. 드래곤에 대해선 이제 나보다 그리드가 더 잘 알 테니까.’

헥세타이아의 관심사가 바뀌었다.

기쁨과 행복으로 충만했던 연회장의 분위기를 순식간에 냉각시킨 인간.

예사롭지 않은 요리사 이단의 등 뒤로 무지막지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트라우카의 팔에 집중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까지 온기가 남아있는 고룡의 신체를 제련하는 일이다. 쉽지 않을 거야.’

트라우카의 팔엔 여전히 의념이 깃들어 있었다.

사실상 온전하단 의미로 트라우카 그 자체로 받아들여도 손색이 없다.

그것을 소재로 무구를 만든다?

헥세타이아에게도 낯선 경험이었다.

하물며 트라우카는 여신이 친히 나서서 협약을 맺게 만들었던 괴물이다.

아스가르드 근처를 배회하며 신들을 사냥했던 놈의 절대적인 무력을 헥세타이아는 똑똑히 기억했다.

자꾸 뒤에서 수작을 부리는 번헬리어와는 격이 다른 존재.

레이더스가 드래곤의 고고함을 상징하고, 네바르탄이 드래곤의 전능함을 상징한다면, 트라우카는 드래곤의 힘을 상징했다.

‘소름이 돋는군...’

마른 침을 삼키는 헥세타이아의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번졌다.

보면 볼수록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기괴했다.

무시무시한 고룡의 팔을 장식품마냥 걸어둔 채 연회를 즐기는 인간들이라니.

심지어 식재료로 사용하기까지...

‘이번 세상은 확실히 미쳤다.’

여신의 태도가 갑자기 바뀐 이유와 어떤 관련이 있지 않을까.

진지하게 생각해본 헥세타이아가 궁리 끝에 말했다.

“지상에서 저것을 제련할 장소는 딱 한곳밖에 없네.”

“그게 어딥니까?”

“신들의... 무덤.”

헥세타이아 본인이 입에 담기엔 영 꺼림칙한 이름이었다.

하여 다소 머뭇거리는 그를 보면서 그리드는 한탄했다.

‘역시 템빨함이어야 옳았어.’

***

“메르세데스 경과는 오해를 잘 푸셨나요?”

“음... 화가 풀린 기색이긴 하던데...”

장장 3일 동안 이어졌던 연회가 끝났다.

대륙 일통에 납득하지 못한 전 사하란 제국의 잔당들이 만든 도적단과 인마대전의 후유증으로 범람한 마물들 따위가 다시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접한 템빨단원들이 즉시 각자의 위치로 복귀했다.

유라 역시 지옥문을 열었다.

현재 지옥에서 바알의 세력 확장을 저지할 만한 인물은 그녀밖에 없었다. 레라지에 등과 협력해서 아수라와 관련 된 흔적들을 쫓느라 연회 마지막 날에나 잠깐 모습을 비추더니 또 곧장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녀를 이해해줘요. 메르세데스 경은 영우 씨의 기사이자 사도잖아요? 당신을 위해서 싸우고 죽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탓에 그녀가 안전하길 바라는 당신의 마음을 마냥 기쁘게 받아들이기 힘들 거예요.”

메르세데스가 그리드의 부름을 받지 못하는 것에 서운해 하는 이유를 유라는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 그래서였군...”

결국 이 또한 자연히 해결 될 문제였다.

새로운 드래곤 웨폰과 아머만 만들면 그리드는 메르세데스와 사도들이 싫다고 해도 철저히 굴릴 계획이었으니까.

“알았어. 메르는 내가 원 없이 굴려... 아니, 세심하게 챙기도록 할게. 유라 넌 걱정 말고 네 일에 집중하도록 해. 머잖아 새로운 무기를 선물로 들고 합류할 테니까 그때까지 절대로 무리하지 말고.”

곧 유라까지 떠난 뒤.

“우리도 시작하죠?”

그리드가 멀찍이서 기다리고 있던 칸과 헥세타이아를 호출했다.

동시에 태풍이 불어왔다.

상공 높이 떠올라 있던 신들의 무덤이 서서히 하강하는 여파다.

“삼위일체 대장장이 트리오, 다녀오마.”

“아니 뭔.”

왜 매번 쓸데없이 이름을 갖다 붙이는 거야?

신나서 떠드는 그리드를 라우엘이 툴툴 거리면서 배웅했다.

한편...

“음...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야겠군.”

새로운 침입자가 아스가르드에 도착했다.

마법과 지혜의 신답게 차원을 금세 넘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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