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4권 - 13화
라인하르트에 몹시 많은 사람이 모였다.
그리드가 만들어온 인연 전부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하나 같이 함박웃음을 그린 채다.
칸.
그리드에게 가장 소중했던 사람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모두가 순수하게 축복해주었다.
심지어 타르마와 백요 자매, 샤이, 커브, 스니퍼 어쌔신 트리오 같은 다크 게이머들까지도.
“베라딘이 거하게 싸지른 똥이 뒤늦게나마 수습돼서 다행이네.”
“그놈 때문에 겪었던 고통의 세월을 돌이켜보면 아직도 치가 떨린다...”
그리드가 베라딘에게 척살령을 내리고 임모탈을 궤멸시키겠노라 선언했을 당시.
수많은 다크 게이머가 직간접적인 피해를 입었다.
샤이, 커브, 스니퍼 어쌔신 트리오는 긴 악연인 카심에게 붙잡혀 온종일 천장에 거꾸로 매달렸을 정도다.
다크 게이머는 상호 교류할 거라는 편견 탓에 억울한 고문을 당했던 것이다.
별 생각 없이 임모탈에 가입했던 백요 자매와 달리 임모탈과 전혀 관계가 없었던 어쌔신 트리오 입장에선 그날의 사건이 아직도 억울하고 분해서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우린 베라딘 그 새끼랑 말 한 번 섞어본 적 없는데 어디에 있냐고 물어보면 무슨 수로 대답 하냐고...”
“정확히 말해선 우리가 감히 말을 걸어볼 만한 상대가 아니었지...”
“맞아, 우린 상대적으로 허접이었으니까.”
“패배자 의식 버리라니까? 우리가 암흑기를 거쳤던 이유는 순전히 그리드와 카심한테 연달아 찍혔기 때문이다! 그 둘만 아니었으면 우리가 어쌔신 랭킹을 지배했을 거라고!! 타르마보다도 우리가 위였겠지!!”
“어이가 없네? 네깟 놈들이 지금 나를 운운하는 거냐?”
“히, 히익! 타르마!”
“쪼, 쫄지마! 어차피 저놈도 우리랑 똑같다! 그리드하고 페이커한테 쥐어터지던 놈이야!!”
“별 버러지들이...”
“...쟤넨 왜 여기에 모여서 시끄럽게 구는 거야?”
“좋은 날이니까 그냥 놔둬. 인마대전 당시부터 쭉 활약해오기도 했고.”
“이미 쥬드가 가는데.”
“저런. 쫓겨나겠네.”
연회는 시끌벅적할수록 분위기가 사는 법이다.
다크 게이머들의 성향이 바뀐 지 오래이기도 했다.
이제 그들은 악행을 저지르지 않는다. 정확히 말해선 악행을 저지를 필요가 없었다.
인마대전 이후 범람하기 시작한 악마, 마물 토벌 관련 퀘스트를 진행하는 편이 사람들 등 처먹는 것보다 훨씬 더 쉽고 짭짤했으니까.
사람을 해치고 쾌락을 얻는 ‘진짜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상에야 바뀐 사회에서 잘 적응하고 살아갔다.
그리고 진정한 미친놈은 의외로 드문 법이다.
그 아그너스조차도 사실은 평범하고 가엾은 사내에 불과했으니.
다크 게이머들 사이에선 손속에 자비가 없는 그리드를 가장 미친놈 취급 할 정도였다.
“그럼 천국에서도 쭉 대장일을 하신 건가요?”
칸에겐 질문공세가 쏟아지고 있었다.
타이칸을 통치하는 바사라 왕과 그녀를 보좌하는 공작들이 어느새 칸의 곁에 나란히 둘러앉았다.
충분히 회포를 푼 템빨단원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양보해주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템빨단원들은 끝까지 칸의 곁에 있고 싶었지만 칸을 반기는 사람이 워낙 많았다.
“아스가르드는 호수와 연못에서 물이 아닌 포도주가 샘솟는다던데, 그럼 포도주에 담금질을 하신 겁니까?”
“흐음, 듣고 보니 일을 할 때마다 취기가 올랐던 것 같기도...”
“하하하! 칸 님은 입담도 참 좋으십니다!”
공작들의 질문은 다소 민감한 구석이 있었다.
대부분 죽은 뒤 어떤 경로로 천사가 됐는지, 아스가르드에서의 생활은 어땠는지에 대해서 질문했다.
비난할 부분은 아니었다.
사후세계를 궁금해 하는 건 인간의 지극히 당연한 본능이니까.
하물며 이 세계의 인간들에게 아스가르드란 긴 세월 천국으로 통했다.
칸이 아스가르드에서 어떤 취급을 당했는지 모르는 공작들 입장에선 그가 적어도 불행하진 않았을 거라고 믿었다.
지옥에서 고통 받는 영혼들보단 나았을 거라고 믿는 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앞으론 다시 인간으로 살아가시는 건가요.”
유쾌하게 떠드는 공작들을 침묵시킨 인물은 바사라였다.
늘 감겨있는 듯했던 실눈이 어느새 또렷하게 뜨여있었다.
황제가 아닌 여왕이자 황비가 된 지금도 여전히 현명하고 지혜로운 인물.
깊은 사려가 담긴 그녀의 맑은 눈동자가 칸이 외투로 애써 가리고 있는 등에 못 박혀 있었다.
“드물게 평온했던 어느 동야의 달빛 아래서 그리드 폐하께 듣기로, 천사란 삼위일체를 이뤄야 비로소 온전한 존재라고 들었습니다. 만약 칸 님께서 천사로 살아가셔야한다면 지상에서 너무 많은 제약을 얻으시는 게 아닐까 염려되옵니다.”
“귀하가 그리드의 셋째... 아니, 둘째 부인이라고 하셨나?”
칸은 이미 죽음을 겪었다.
인간이 아닌 천사가 되어 신들의 세계를 살다 왔다.
새삼 속세의 신분에 얽매이는 것도 이상한 것이다.
자식과도 같은 그리드가 황제가 됐기 때문이 아니라, 황자인 로드와 황후인 아이린이 그를 공대해서도 아니라, 그의 입장 자체가 타인을 대함에 있어서 평등함이 옳았다.
한데 바사라를 상대론 자연히 말을 조심하게 됐다.
사하란 황족이라는 핏줄이 대단한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바사라 개인이 지닌 능력의 영향이 컸다.
몹시 고매한 태도와 상대방을 존중함으로서 존중 받는 능력이 결합되어 그녀를 자연히 높은 사람으로 가꿨다.
“후훗, 순서는 상관이 없답니다. 개인적으론 막내인 편이 좋겠군요. 막내 아가라고 불러주시면 여한이 없겠습니다.”
그리드보다 많은 나이를 은근히 신경 쓰는 바사라였다.
칸을 숫제 시부모처럼 대하는 그녀를 보고 내심 당황한 공작들이 복잡한 심경으로 술잔을 기울이는 가운데.
“내 육신은 이미 흙이 되어 사라졌네. 두 번 다신 인간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지상에서 살아가는 천사의 삶을 감수해야겠지.”
칸이 씁쓸하게 말했다.
그리드가 잠시 자리를 비웠단 사실에 안도하며, 곁에 있는 바사라와 공작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듣지 못하도록 작게 속삭이듯이.
사실 그는 지상에 내려온 직후부터 느끼고 있었다.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있다.
단순히 근력을 말하는 게 아니라 원기가 사라져갔다.
병들어 죽기 직전의 몸처럼 실시간으로 쇠약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럴 수가...”
공작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특히 맹수왕 모르이즈의 반응이 격했다.
“기껏 소중한 사람들과 재회하셨는데 마냥 기뻐할 수 없다니 이 무슨 봉변이오? 뭔가 방법이 있을 거요! 내 모든 권한을 써서라도 반드시 방법을 찾아내겠소!”
모르이즈가 호전적인 이유는 감정적이기 때문이다. 좋게 말하면 감수성이 예민해서 칸을 몹시 걱정했다. 평소에 한 몸처럼 지내는 늑대들과 함께 울부짖기라도 할 기세였다.
“일단 루비 성녀님께 기도합시다! 어지간한 일은 그분께서 다 해결해주실 테니!!”
급기야 술판을 뒤집어엎고 기도를 올리기 시작한 그를 창성 레이첼과 불사왕 그렌할이 조용히 끌어냈다.
그들이 비운 자리에 착석한 건 그리드의 사도들이다.
“당신이 대천사셨던...”
칸이 사리엘을 한 눈에 알아봤다.
자신의 것과는 격이 다르게 거대한 빛의 고리와 날개를 본 것이다.
사리엘이 슬픈 미소를 지었다.
“신들의 욕심이 당신께 매번 새로운 고통을 안기는군요.”
“칸 님의 용태를 해결할 방법은 없는 겁니까?”
피아로가 재촉했다.
초창기 템빨단원들과 마찬가지로 칸과 오랫동안 교류했던 그는 칸을 유독 반겼었다.
한데 우연히 바사라와의 대화를 엿듣고 만 거다.
사실 엿들었다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다.
대자연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에게 전달했을 뿐이다.
“천사를 인간으로 되돌리는 방법을 적어도 저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칸 님의 원기를 회복시키는 방법만큼은 알고 있죠. 그야 당연히 삼위일체를 이루고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겁니다.”
“삼위일체를...”
“마침 이곳엔 제가 있습니다. 단 한 명의 천사만 확보해도 칸 님께선 삼위일체를 이루고 건강을 회복하시겠죠.”
“천사를 확보해야한다는 말은..”
“현재 상황에선 직접 아스가르드로 찾아가는 수밖에 없겠죠. 본래 천사들은 간혹 소임을 이루기 위해 지상을 찾아왔지만 템빨계가 생긴 이후론 그럴 수 없게 됐으니까요.”
“...”
피아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앞으론 아스가르드가 있는 방향에 오줌도 싸지 않겠다던 그리드의 선언을 떠올린 까닭이다.
점차 심각해지는 장내의 분위기를 수정구를 통해 은밀히 지켜보는 존재가 있었다.
“천사라...”
깊은 산속에 처박혀 있는 마법과 지혜의 신 브라함이다.
마리로즈.
나의 모든 것을 빼앗아갔던 그 증오의 대상에게 그리드가 진정어린 애정을 보이고 있단 사실을 눈치 챘을 때.
브라함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그리드를 잠시, 아주 조금이나마 원망하게 됐을 정도다.
어쩌면 최근의 사건들이 겹쳐서 그런 걸 수도 있다.
중요한 순간마다 자신을 불러주지 않던 그리드.
그에게 쌓였던 서운한 감정이 일제히 폭발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외면할 수도 없는 법이다.
수백 년 전.
나태의 저주를 풀겠다는 염원을 이루고자 여러 사람을 해쳤던 자신을 그리드가 이해해주었듯이, 자신 역시 그리드를 이해해줘야 한다고 브라함은 생각했다.
너를 비난하고 원망해서 미안했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의 성격상 그리드 앞에 서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하여 난감하던 차에 좋은 정보를 손에 얻은 것이다.
천사.
아스가르드에 올라 천사를 한 마리 납치해오자...
‘사과의 의미로 딱 좋겠지.’
계획하는 브라함의 얼굴에 일그러진 미소가 번졌다.
***
“그... 화 풀어주면 안 될까?”
그리드가 연회 도중 자리를 비운 이유는 메르세데스에게 있었다.
모두가 웃고 떠드는 가운데 홀로 슬픈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가 불쑥 자리를 떠나기에 뒤쫓아 왔다.
그리드는 그녀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일곱 사도.
그리드가 가장 믿고 의지해야 할 존재들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매번 중요한 순간마다 사도들을 억압하고 홀로 활동했다.
순전히 사도들을 위해서였지만, 사도들 입장에선 당연히 큰 회의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해볼 지경으로.
사도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던 건 아마도 염룡 트라우카와 격전을 치른 직후였다.
신들의 무덤에 오른 그리드를 맞이하는 사도들의 표정이 하나 같이 허망하고 씁쓸했다. 드물게도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오직 메르세데스만이 의외로 담담했는데,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게 진정으로 화난 그녀의 모습이었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매번 같은 말씀만 하시는군요.”
“...미안.”
“사과하지 마세요. 저는 주군의 마음에 짐을 얹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으니까요. 기사된 자로써 감히 주군의 뜻을 거스를 생각도 없습니다. 다만 저는 오늘 확실하게 마음을 정리했을 뿐이에요.”
“정리라니?”
“주군의 기사이자 사도임에도 불구하고 기대 받지 못하는 제 신세를, 이해하고 받아들였단 이야기예요. 다른 사도들의 입장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앞으론 적어도 제 눈치는 살피지 않으셔도 됩니다.”
“메르세데스 난 네게 기대하지 않는 게 아니야. 단지 너를 잃고 싶지 않을 뿐이라고.”
“알고 있어요.”
대답하는 메르세데스의 표정이 슬펐다. 다른 사도들과 같은 반응.
그리드를 걱정시키는 스스로의 나약함을 원망하는 눈치였다.
“예전부터 여러 번 말씀드렸듯이 주군의 마음을 백번 이해해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스가르드에 홀로 오르신 건 너무했어요...”
메르세데스는 아스가르드가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헤아리고 있었다.
혜안의 힘을 빌릴 것도 없이 신의 사도이기에 알 수 있는 진실이다.
템빨계의 효과를 온전히 누리는 그녀 입장에서 아스가르드의 차원 효과가 얼마나 막강할지 추측하는 건 쉬웠으니까.
“앞으로는.”
끝내 속내를 드러낸 그녀에게, 그리드가 선언했다.
칸과 헥세타이아가 곁에 있기에 할 수 있는 선언이었다.
“그러니까 새로운 드래곤 웨폰과 아머를 만든 뒤엔, 이번 같은 사태가 두 번 다신 없을 거야.”
그리드의 사도들은 결코 약하지 않다.
순수한 레벨과 스탯만 놓고 보면 대부분 그리드보다 강력했다.
다만 충분한 템빨을 갖추지 못했을 뿐이다.
새로운 드래곤 웨폰과 아머를 만들면 해결 될 문제란 말이다.
“그때부턴 사도들이 싫다고 해도 철저히 의지할 생각이니까 부디 믿고 기다려주지 않을래?”
“...싫다고 할 사도는 없을 거예요.”
메르세데스가 드디어 미소를 되찾는 그때.
꺄아악...
멀찍이 떨어져있는 연회장에서 비명소리가 빗발쳤다. 거리가 거리인지라 그리드도 간신히 들었다.
“뭐지?”
깜짝 놀란 그리드와 메르세데스가 황급히 연회장으로 향했다.
“정신 차려! 반트너! 죽지 말라고!!”
곧 도착해서 본 광경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일반인과 전설, 혹은 초월자를 가리지 않고 입에 게거품을 문 사람들이 테이블 곳곳에 얼굴을 묻고 쓰러져 있었다.
‘테러라고?’
하필 칸이 돌아온 날을 노린 테러라니?
만약 플레이어의 소행이라면 천번만번 죽여서 죗값을 치르게 만드리라...
“...?”
차가운 분노를 품은 채 주변을 살피던 그리드가 문득 이단과 시선이 마주쳤다.
몹시 난감한 표정을 짓고 서있던 이단이 겁에 질려선 말했다.
“그... 폐, 폐하께서 살코기는 사용해도 된다고 하셔서 만찬을 준비한 것인데, 이게 당최...”
“...”
“레이더스 님께서는 필시 맛있게 드셔주셨는데 이 무슨 황당한 일인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설마 드래곤의 고기도 상하는가...?”
수식어가 좀 붙긴 하지만 아무튼 전설의 요리사로 전직한 이단.
그의 요리를 손꼽아 기다렸던 사람들이 단체로 봉변을 당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