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4권 - 11화
‘이런 날이 올 줄이야.’
그리드와 제라툴은 악연이다.
그들이 직간접적으로 충돌한 횟수가 어느덧 여러 차례였고, 그때마다 큰 손해를 입은 제라툴은 그리드를 노골적으로 증오해왔다.
특히 라인하르트의 ‘관’에서.
만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치명적인 패배를 겪은 제라툴은 신격이 크게 훼손되는 최악의 결과를 맞이했다.
제라툴 입장에선 그리드가 철천지원수와도 같은 것이다.
한데 이 순간 그리드를 돕는다.
퇴로를 열어준 걸로 부족해 막아주고 섰다.
물론 그리드와 화해하고 싶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단순히 그리드보다 리파엘을 혐오하는 마음이 더 커서 리파엘의 발목을 붙잡은 것에 불과했다.
결과적으로 그리드에겐 엄청난 도움이 됐다.
제라툴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그리드는 칸과 헥세타이아를 구출하지 못했을 테니까.
‘돌이켜 보면 제라툴은 내게 항상 큰 도움을 줬구나.’
새삼 깨닫는 그리드의 심경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제라툴에게 어렴풋한 호감을 품은 것이다.
물론 제라툴에겐 로드와 동료들을 해치려했던 전력이 있다.
하지만 결국 해치지 못했다.
하야테 덕분이긴 했지만 아무튼... 그리드가 ‘용서 못할’ 대상은 아닌 것이다.
“어서 도망치지 않고 뭐하는가?”
기껏 감옥을 탈출해 놓고 멀뚱히 선 그리드에게 헥세타이아가 재촉했다.
“...”
그리드는 섣불리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앞서 리파엘에 의해 무너졌던 감옥의 문이 귀속 된 마법진에 의해 수복되는 광경을 가만히 지켜봤다.
문 너머로 보이는 제라툴의 등에 꽂힌 시선을 함부로 거두지 못했다.
‘...이럴 때가 아니야.’
잡념을 털어낸 그리드가 손에 느껴지는 온기에 집중했다.
여기서 다시 놓쳤다간 앞으로 영원히 재회하지 못할 수도 있는 칸과 헥세타이아의 체온이었다.
굳은살 가득 박인 대장장이들의 손을 있는 힘껏 거머쥔 그리드가 소리쳤다.
“제라툴!!”
“...?”
점차로 온전한 형태를 갖춰가는 문 너머에서.
어째선지 웃고 있던 제라툴이 시선을 돌린다.
“오늘의 은혜를 언젠간 반드시 갚겠습니다! 그러니까 당신도 부디 무사히 탈출하십시오!!”
“...저 미친놈이?”
왜지?
왜 얼굴까지 시뻘겋게 붉히며 화를 내는 걸까?
제라툴의 예상과 다른 반응에 살짝 당황하는 그리드였지만, 원체 괴팍한 성정을 지닌 탓에 그런가보다 넘기며 말을 이었다.
“잊지 마쇼! 무신인 당신이 당연하게 무위를 떨치듯이 나 또한 당연하게 약속을 지키니까!!”
“...”
그리드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던 제라툴의 두 눈에서 살기가 희미해졌다.
“흥, 네놈 멋대로 해라.”
휙!
툴툴거리듯 말하며 무언가를 던져주는 제라툴.
그것을 낚아챈 그리드가 살짝 놀랐다.
영원의 감옥의 열쇠.
리파엘이 등장하며 일으킨 폭발에 휩쓸렸을 당시 손에서 놓쳤던 물건이다.
“미쳐도 곱게 미칠 것이지! 나와 함께 영원히 이곳에 갇히겠다는 겁니까?!”
리파엘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내부에 ‘갇히는’ 형국이 되는 이상, 아스가르드의 치안을 책임지는 제1위 대천사도 영원의 감옥을 탈출하는 건 요원한 눈치였다.
“네놈이 믿는 여신께서 구원해주지 않겠느냐?”
제라툴의 빈정거림을 끝으로.
쿠우웅...
수복을 마친 문이 감옥과 외부를 완벽하게 단절시켰다.
수백의 천사들과 홀로 남은 제라툴을 통째로 삼켜버린 채.
거짓말처럼 찾아온 적막을 깨뜨린 존재는 의외로 노에였다.
“서두... 서두르라냥.”
지옥 제일 마수 노에에겐 아스가르드를 구성하는 모든 것이 독으로 작용했다.
물론 펫 인벤토리에 틀어박혀 있으면 괜찮았지만 심리적인 압박이 엄청나서 그리드를 재촉하는 것이다.
“그래.”
여운을 느끼기엔 시간이 촉박하다.
그리드를 비호하고 있는 <황금의 가호>의 지속 시간은 이제 9분이 채 안 남았다.
“꽉 잡으십쇼.”
두 어르신과 맞잡은 손에 힘을 준 그리드가 순보를 전개했다.
칸은 두 눈이 휘둥그레져선 어이쿠 놀라는 반면 헥세타이아는 태연했다. 공간을 접어 이동하는 순보의 속도에 어떤 거부감을 보이기는커녕 도리어 훈수를 두는 여유를 보였다.
주신인 그에게 순보는 기본 소양인 것이다.
그 또한 절대자였다.
그의 양쪽 유두에 맺혀있는 푸르고 붉은 불꽃이 증거 중 하나다.
리파엘을 압박하는 한편 천사 군단을 반으로 가르는 무지막지한 위력을 발휘하지 않았던가.
‘절대자라고 해서 무조건 싸움에 능하진 않구나.’
헥세타이아가 보여준 저력은 불꽃의 강화 외에 없었다.
절대자답게 여러 소양은 갖춘 반면 싸움 자체엔 문외한인 느낌.
순수한 대장장이 신이기 때문이다.
만약 헥세타이아의 스킬 목록을 볼 수 있다면, 그가 보유 중인 스킬은 모조리 제작과 관련되어 있으리라.
“자네의 목적지는 아무래도 수백의 갈림길인 듯하군. 그렇다면 여기선 남서쪽으로 향하는 편이 낫네. 그쪽이 조금 더 빠르고 방비가 허술할 확률이 높아. 쥬다르가 담당하는 구역이기 때문인데, 매사에 무관심한 그자의 성미에 기대를 걸어보세.”
“매사에 무관심하다? 레베카의 직계답게 레베카와 닮았군요.”
“좀 다르네. 자네가 여신에 대해서 오해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겠지만... 실제로 여신의 성격은 몹시 적극적인 편으로 만물에 늘 관심을 기울였다네. 자네도 알지 않나? 자네에게 남아있는 여신의 축복이 증거 중 하나이니.”
“...확실히.”
과거.
레베카 여신은 인간들과 직접적으로 교류했었다.
데미안을 자신의 대행자로 삼아 그리드를 돕게 만들고, 그리드에게 레베카교의 명운을 맡기며 대가로 축복을 내리는 등.
교인들의 기도에 응답할 뿐만 아니라 플레이어와도 여러 형태의 인연을 맺었었다.
다만 언젠가부터 갑자기 침묵했다.
사람들의 기도를 외면했다.
“여신의 성격은 왜 갑자기 변한 겁니까?”
“글쎄... 성격이 변했다고 단정 짓기엔 근거가 한참 부족하지 않나? 나도 뭐라고 함부로 말할 수가 없군.”
주신이라고 해봤자.
결국은 레베카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들이다.
사람이 우주를 헤아리기 힘들어하는 것 이상으로 헥세타이아에게 레베카는 미지의 영역과도 같았다.
“그렇습니까...”
그리드가 걸음을 서둘렀다.
궁명왕의 브로치에는 더 이상 의지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오직 착용자에게만 효과를 부여하는 까닭에 헥세타이아와 칸의 위치는 어차피 노출되기 때문이다. 헥세타이아의 조언을 따라 경로를 수정하고 나아가는 게 최선이었다.
‘대도께서 무사하셔야할 텐데.’
리파엘 외의 대천사들은 모조리 대도가 있는 방향으로 향한 듯했다.
그리드조차 혼자서는 감당 못할 전력이다.
‘무사할 거다.’
그리드는 대도의 성향을 떠올렸다.
굳이 싸우지 않는다.
기가 막힌 잠행술로 대상을 쉽게 기만했다.
또한 굴절룡의 보물을 다수 보유하고 있었다.
‘어떤 위기에 처하든 쉽사리 고립당할 만한 인물이 아니야. 대천사들의 포위망도 반드시 돌파할 수 있을 거다.’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 현장에 도착한 그리드는 잠시 후.
“너무 늦은 거 아닌가?”
약속했던 장소에서 적야의 대도와 재회했다.
산발이 된 대도는 포승으로 묶인 채였다.
제라툴마냥 영락없는 죄인의 몰골로 천사 군단에게 포위당해 있었다.
제2위 대천사 가브리엘이 이끄는 군단이었다. 숫자는 리파엘의 군단과 비교해서 적었지만 기세만큼은 밀리지 않았다.
“...뭡니까?”
황당해서 묻는 그리드에게 적야의 대도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고 말했다.
“나는 원하던 물건을 확실히 얻었네. 탈출도 무사히 성공했어. 하지만 이곳에서 자네를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진 까닭에 덜미를 잡히고 말았지.”
“오랜만이네요.”
대도의 말을 가브리엘이 도중에 잘랐다.
과거.
대지의 신 가리온을 처분하려다가 실패하고 역으로 육신을 잃는 등.
그리드에게 엄청난 수모를 겪었던 그녀는 그리드가 굉장히 반가웠다. 둥근 안경을 고쳐 쓰며 빙그레 웃는다.
“범상치 않더라니 급기야 유일신의 위계에 오르셨네요. 물론 유일신은 치우의 동의어가 아닌지라 무게감은 다르지만요.”
유일신이라고 해서 다 같은 유일신이 아니다...
가브리엘은 그리드를 명백히 격하했다.
정상적인 태도다.
초월자 이상의 위계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가 바로 격이니까.
적의 격을 깎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상위 서열 전투의 기본이었다.
물론 격이라는 건 말 몇 마디에 깎이지 않는다. 그리드처럼 만인을 이용해서 사기를 치지 않는 이상에야.
‘설마 또 다른 침입자의 정체가 그리드였을 줄이야. 동료들보다 먼저 이곳에 도착한 게 큰 행운이었어.’
가브리엘은 여태껏 없던 운명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임무를 훼방 놓고 수모를 안겼던 대적에게 복수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심지어 지상이 아닌 천상에서.
상황이 너무 좋았다.
‘죄수들을 데리고 감옥에서 탈출한 걸 보면 제라툴이 변수로 작용한 거겠지.’
가브리엘은 그리드가 리파엘을 따돌리고 여기까지 도착한 점에 대해선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순전히 제라툴 덕분일 거라고 추측했다.
리파엘과 제라툴의 평소 관계를 고려하는 것이다.
안 그래도 감옥에 갇혀 원한이 한층 더 깊어졌을 제라툴의 분노가 리파엘에게 쏟아진 틈에 그리드를 살리는 퇴로가 열렸으리라.
‘바보 같아.’
그토록 증오해온 그리드를 살려버린 제라툴은 지금쯤 얼마나 악에 받쳐 있을까.
피식 새나오는 비웃음을 우아한 손짓으로 가린 가브리엘이 양손에 빛을 집결시켰다. 찰나지간에 검과 방패의 형상을 갖추는 빛이었다.
“허락도 없이 천상을 침범한 죄. 신들의 결정으로 감옥에 갇힌 죄수들을 탈출시킨 죄. 판결이야 당연히 즉결 처형이네요. 당신과 이 인간은 여기서 죽을 테고 죄수들은 자신들이 있어야할 곳으로 되돌아가겠죠.”
지상에서 네가 내게 그러했듯이.
나 또한 너의 일을 망치리라.
선언하는 가브리엘의 신형이 순식간에 그리드에게 도달했다.
리파엘과 달리 신중한 그녀는 그리드의 저력을 이해하고 있었다.
차원의 억압을 받는 그리드가 크게 약화된 상태일 것을 뻔히 알고도 그리드를 무력화시킬 방편을 철저하게 마련했다.
우선 머리 위 빛의 고리를 수백 개로 분절시켜 광선을 쏘는 포신으로 삼았다. 다각도에서 훼방을 놓는 갓 핸드를 출현 즉시 요격하고 무력화시킬 병기였다.
방패를 세워 그리드에게 깊숙이 파고든 이유는 검무의 위력을 저해하기 위함이었다. 동작이 연계될수록 고강해지는 융합 검무의 경로를 초근접전을 펼쳐 차단할 의도였다.
물론 권능은 아꼈다.
필승을 논하는 상황에서 굳이 패를 꺼내봤자 손해였으니까.
지금의 그리드처럼 훗날 다른 상황에서 자신의 강점을 공략당할 수도 있으니 패는 아껴야 옳았다.
‘여기서 죽이는 건 내 역량 밖의 일이니.’
아쉽지만 오늘은 장대하게 토벌하여 격을 훼손시키는 것에 집중하도록 하자.
그리드가 핏물을 뿌리며 추락하는 광경을 천사들의 성가를 통해 지상에 전파하자.
가브리엘의 생각이 잠시 경직됐다.
종횡무진을 전개해서 그녀를 돌파한 그리드가 어느새 천사들 사이로 난입해버린 것이다.
차원의 억압을 받고 있다곤 믿기지 않게도 쾌속한 움직임.
심지어 강력했다.
천사들을 힘으로 압도하고 떨쳐내더니 급기야 대도를 손아귀에 쥐었다.
“천사들은 의외로 별거 없네...”
진심이 담긴 중얼거림.
그리드가 끝으로 남긴 감상이 가브리엘의 분노를 격발시켰지만 이미 늦었다.
대도가 소모한 굴절룡의 보물이 일행을 현장에서 탈출시킨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