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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700화 (1,699/1,794)

템빨 84권 - 10화

“고작 너 따위를 해치겠다는 선언이 반역의 증좌라면.”

제라툴의 가장 큰 강점은 모든 무예에 통달했다는 점에 있다.

무기의 유무와 종류에 관계없이 지고한 무위를 떨쳤다.

그의 양손을 구속하고 있는 마력의 사슬조차도 제약이 아니란 말이다. 그가 휘두르는 즉시 무지막지한 흉기로 변모할 테니까.

“그간 나를 수차례 모욕해온 네놈은 당최 몇 번의 반역을 저지른 것이냐?”

숨죽인 채 상황을 지켜보던 그리드가 문득 떠올렸다.

언젠가 리파엘이 제라툴을 논했을 때.

가짜, 복제품 따위를 운운하며 비웃던 모습을.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해.’

누군가의 원한을 살 만한 짓을 해선 안 된다.

이 순간의 리파엘처럼 중요한 타이밍에 발목을 붙잡히는 수가 있으니까.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빛의 여신이 나의 탄생에 일조했다. 너의 논리대로라면, 나를 존중하지 않음은 여신을 존중하지 않는단 말과 같지 않나?”

“엑? 평소엔 순전히 사람들의 숭배로 탄생한 무신으로 행세하더니, 불리할 때만 진실을 인정하는 건가요?”

“말 돌리지 마라, 이 깃털 달린 잡종아.”

“...”

힘이 봉인 된 지상에서 온갖 수모를 겪었을 때도.

여유를 잃지 않고 짓궂게 굴던 리파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니, 정색하는 모습이야 지상에서도 가끔 보여줬지만 지금은 눈빛까지 차갑게 식어있었다.

진정으로 분노한 눈치다.

“나 또한 당신이 오래 전부터 싫었어요. 치우를 대신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 따위가 나를 비둘기 취급 했었죠.”

“닭이라고 했던 기억은 있다만.”

“...잘 됐어요. 완전히 미쳐버린 당신을 이참에 처분해야겠네요. 기대와 달리 무능해서 치우의 대체제로 적합하지 않은 당신을 굳이 살려둘 필요가 없잖아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오물인데.”

철그럭, 철그럭.

고등한 얼개를 이룬 마력의 사슬에 손목을 구속당한 제라툴의 모습은 영락없는 죄인이다.

관리가 전혀 안 된 수염과 왜소해진 체격, 낡은 옷차림새가 그를 볼품없게 만들었다.

하지만 무신이 아닌 무언가로 영락했다고 보긴 힘든 수준이다.

그가 발산하는 기세가 굉장했기에.

지상에 강림했을 때완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

촤르르륵!

리파엘을 필두로 삼은 천사 군단의 위세도 엄청났다.

마력이 주입되는 순간 찬란하게 빛나는 갑주로 전신을 감싼 그들의 기도는 완벽하게 정제되어 있었다.

수백이 하나인 느낌.

매 순간의 선택과 행동이 서로와 협동을 이룬다.

능력치를 강화하는 버프마법의 주문조차 각자 한 글자씩 읊조리는 것으로 겹쳐 완성시켰다. 수십 종류의 마법이 말 그대로 찰나에 완성됐다.

‘범상한 자가 없다. 한 명, 한 명이 십공신급인가?’

아스가르드는 태초부터 존재해온 신계다.

갓 탄생한 템빨계가 소속 신들의 스킬 쿨타임과 스킬 자원 소모량을 삭제시켜준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또한 그리드가 허락한 대상이 템빨계에 진입할 경우 모든 능력치가 30퍼센트 상승하고, 허락하지 않은 대상은 모든 능력치가 절반 깎여나가며 격이 하락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스가르드의 차원 효과는 그리드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일 터였다.

고룡처럼 ‘차원 효과를 무력화’시키는 권능을 지니지 않은 이상에야.

침입자가 이곳에서 싸운다는 건 자살 행위밖에 안 됐다.

‘아니... 십공신이 아니라 사도들과 같은 수준일 수도.’

한 명, 한 명의 실력이 메르세데스나 브라함과 닮은 군단이라니?

천사들의 기도에 위축 된 그리드가 마른 침을 삼키는 순간이었다.

“기회를 틈타서 도망치게.”

헥세타이아가 그리드의 상념을 깨뜨렸다.

단호한 음성.

어째서 상황에 집중하지 못하고 허튼 생각 따위를 하느냐고 책망하는 듯했다.

“리파엘이 전군을 대동하지 않았다는 점이 그나마 희망적일세. 내가 제라툴을 도우며 충분한 시선을 끌 테니, 자네는 틈을 노리다가 칸을 데리고 떠나게.”

“헥세타이아 님...”

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비록 지금은 감옥에 갇힌 신세가 됐을지언정.

높은 신 중 하나인 헥세타이아가 일개 천사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다. 하물며 아스가르드를 배신한 천사의 이름을. 감동이었다.

칸의 애틋한 시선을 외면하는 헥세타이아를 빤히 바라보던 그리드가 고개를 저었다.

“싫습니다.”

“뭣이?”

헥세타이아의 얼굴이 왈칵 구겨졌다.

“아스가르드에서 객기를 부리겠다고? 지상에서 객기를 부렸던 제라툴과 지금의 자네가 다를 게 뭔가?”

“책임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객기와 다를 텐데요.”

“책임?”

“저는 당신을 구할 겁니다.”

“...!”

“제가 위험을 무릅쓰고 천상에 오른 이유는 칸과 당신을 구하기 위해서였으니까요.”

트라우카의 팔을 얻기 전부터.

그리드의 목표는 헥세타이아의 구출이었다.

심지어 칸이 천사가 됐다는 사실을 몰랐을 때부터 품어왔던 목표였다.

맹금류의 것처럼 날카로운 그리드의 새카만 눈동자에 오직 진실만이 담겼음을 엿본 헥세타이아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우습군... 자네가 인류를 위해 싸우는 이상 내겐 자네의 호의를 얻을 자격이 없네.”

헥세타이아는 인류를 배신한 전력이 있다.

그의 하찮고 역겨운 질투심이 악마들을 지상으로 인도했고 그리드의 스승과도 같은 파그마를 바알의 아가리로 밀어 넣는 계기가 됐다.

인류를 위해 싸워온 그리드를 부정하는 죄악을 저질렀던 셈.

감히 그리드의 호의를 얻어선 안 되는 입장인 것이다.

생각하는 헥세타이아에게 그리드가 질문했다.

“깊이 후회하며 반성해오셨음에도 여전히 과거의 죄에 얽매이시는 겁니까?”

“값싼 반성으로 씻어낼 죄가 아닐세.”

“정녕 그리 생각하신다면 오히려 말이 잘 통하겠군요. 저와 함께 이곳을 떠나시죠.”

“그게 무슨 억지...”

“지상으로 내려갑시다. 사람들의 곁에서, 사람들을 위해서 봉사하며 반성하십시오.”

“...”

꽈아아앙!!

그리드가 헥세타이아를 설득하는 사이 제라툴과 천사 군단이 격돌하고 있었다.

온갖 파괴적인 마법을 겹겹이 둘러친 천사들의 무구가 가치 없는 파편으로 전락해 비산한다.

제라툴이 휘두르는 쇠사슬에 의해서였다.

닥쳐오는 검과 창을 묶어 조이고 분쇄시키길 반복하는 제라툴의 전진엔 거침이 없었다. 질풍처럼 쾌속하게 나아가며 천사들의 진영을 붕괴시켜갔다.

“브라함급의 전력을 단신으로 농락하다니?”

[브라함? 여기서 누가 그놈과 같은 전력을 지녔단 말이지?]

너무 놀라 감탄하는 그리드에게 제라툴이 반문했다.

적진 한복판에서 날뛰는 중이라곤 믿기지 않게도 즉각적인 반응.

말이 아닌 의념으로 의문을 해소하고자 시도하는 그에게 그리드가 대답했다.

“그야 그 천사들... 말입니다만.”

[제 가치를 높인답시고 적으로 만난 닭을 주작이라 평하는가... 희대의 사기꾼답다.]

왜곡 된 서사시를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린 제라툴의 의념엔 황당, 분노, 조소 따위가 담겨있었다.

높은 신을 상대로 싸우려니 짐짓 망설이고 있던 천사들의 낯빛을 사늘하게 식히는 태도였다.

“여신의 군세를 재차 조롱하시는 건 명백히 선을 넘으신 행위 아닙니까?”

이곳에 대천사는 리파엘 하나뿐이다.

어째선지 2위 이하의 대천사들은 자리에 없었다.

설마 다른 곳에도 침입자가 나타난 건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억측을 가능하게 만드는 전력의 분산.

무신답게 ‘싸움’에 능한 제라툴은 현재 상황이 엄청난 호재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본래라면 대천사 앞에서 숨소리도 내지 못할 일개 천사들이 발끈하는 모습을 보고 흡족하게 웃었다.

“병아리도 지저귈 줄 아는군.”

“...!”

투구 틈새로 비치는 천사들의 안광에서 지독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싸움꾼의 도발이 제대로 먹힌 것이다.

천사들은 문답무용으로 임했다.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적극적으로 연계하여 제라툴에게 살수를 펼쳐댔다.

자신들의 소임이 신이 아닌 아스가르드의 수호에 있음을 재차 상기했다.

하찮은 분노를 계기로 상기한 같잖은 소임.

그리드는 불쑥 솟구치는 화를 느꼈다.

‘지상이 위험에 빠졌을 때도 그렇게 열심히 싸워주면 안 됐던 거냐.’

Satisfy의 인간들은 너무 가엾다.

천상의 신들을 숭배하여 그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제공하지만 아무런 보답도 받지 못한다.

대다수의 인간이 죽어서 떨어지는 곳은 오로지 지옥.

생전에 쌓은 공덕과 관계없이 영원불멸 고통 받는다.

극히 소수의 선택 받은 인간만큼은 천상에 오른다지만 생전의 기억을 잃은 채 신들의 병사로 소모 될 뿐이었다.

왜.

어째서 그들이 그런 취급을 받아야하지?

칸, 아이린, 피아로, 로드, 메르세데스, 바사라, 아스모펠, 쥬드, 이사벨, 한속봉과 수애 등등.

소중히 엮어온 인연들의 면면을 떠올리는 그리드의 신성이 점차로 짙어져갔다.

아스가르드를 지배하고 있는 빛에 뒤섞여 희미해졌던 황룡의 형상이 감옥의 어둠을 물리치며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 기세가 어찌나 장엄한지 제라툴에게 집중하던 리파엘과 천사들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이끌렸을 정도다.

“드래곤...?”

비록 형태뿐일지언정 신성과 결합 된 드래곤이라고?

“용신의 재림이라도 된다는 겁니까?”

불쾌하다는 듯이 눈살을 구긴 리파엘이 처음으로 자신의 권한을 썼다.

템빨계와는 비교를 불허하는 강력한 차원의 힘이 그리드를 짓눌렀다.

[아스가르드의 치안을 수호하는 제1위 대천사 리파엘이 당신을 침입자로 규정합니다.]

[아스가르드가 당신의 자취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모든 능력치가 70퍼센트 하락하고 격이 크게 훼손되어 초월의 격으로 쌓아올린 이로운 효과를 대부분 상실합니다.]

[순보의 사용이 불가능해집니다.]

리파엘은 권능이 아닌 권한을 썼을 뿐이다.

이건 기본적인 디버프에 불과했다.

아스가르드를 허락도 없이 침입한 대가로 얻은 페널티.

“공교롭게도 이곳은 녹록하지 않네.”

헥세타이아가 씁쓸히 말했다.

그리드가 제 한 몸조차 건사하기 힘들 거란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자신은 이곳에서 벗어날 수 없다...

쿠와아아앙!!

헥세타이아의 양쪽 유두에서 두 갈래의 불길이 솟구쳤다.

푸른 불길은 얼핏 지옥불강의 줄기와 닮아 천사들의 포위망을 반으로 갈라버렸고 붉은 불길은 염룡의 브레스를 흉내 내어 리파엘의 고리가 방어 태세를 짜도록 만들었다.

“이틈에 도망치게.”

살 길을 포기한 신의 저력.

헥세타이아는 대장장이의 신이 아닌 전쟁의 신처럼 용맹한 활약을 펼쳤다. 그리드에게 퇴로를 열어주겠다는 일념으로 후환을 괘념치 않고 자신의 모든 신성을 쏟아냈다.

진기가 급격히 소진되어 덜덜 떨리는 그의 손을, 그리드가 덥썩 붙잡았다.

깜짝 놀란 헥세타이아가 반사적으로 뿌리치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악력이 어찌나 강한지 저항할 수가 없었다.

아스가르드라는 차원에 억눌린 상태라곤 도무지 믿기지 않는 힘.

“자네... 뭔가?”

헥세타이아의 의문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머저리들! 피해라!”

제라툴의 다급한 외침 탓이었다.

순식간에 불길을 꿰뚫고 다가온 리파엘이 창을 찔러오고 있었다.

그리드의 등과 헥세타이아의 심장을 일직선으로 관통하는 동선을 그리는 창격.

말 그대로 빛살 같았다.

그리드가 수차례 체험해본 절대자들의 공격 중에서도 상위에 꼽히는 쾌속으로, 고룡들의 출수를 연상시켰다.

드래곤 나이트의 효과가 없이는 즉시 반응하기 힘든 수준이란 말이다. 기습 형태로 다가오면 최소 살을 내줘야하는.

실제로 리파엘의 표정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자신의 공격이 뜻하는 성과를 이루리라고 의심하지 않는 눈치였다.

헥세타이아가 낭패어린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가운데.

“너무 평온하신 거 아닙니까?”

그리드가 칸에게 물었다.

칸이 슬며시 웃었다.

“자네와 함께이지 않나.”

칸의 대답이 끝맺어질 무렵에는.

파차차차차차창!!

“...!?”

리파엘의 창이 굉음을 내며 미끄러지고 있었다.

어느새 쏘아진 그리드의 황혼이 창대의 궤도를 비틀며 나아간 여파다.

“어찌?”

순식간에 목덜미까지 다가온 주황색 신성을 아슬아슬하게 회피한 리파엘이 체면을 신경 쓰지 못하고 묻는다. 경악성에 가까웠다.

[저항하였습니다.]

[미식룡 ‘레이더스’가 내린 <황금의 가호>가 당신을 억압하는 차원 효과를 일시적으로 무력화시키고 있습니다. 남은 시간 9분 56초.]

[<황금의 가호>에 깃든 고룡의 기운이 <드래곤 나이트> 효과를 활성화시켰습니다.]

“내가 누군지 잊었나?”

누구보다 당황한 건 그리드 본인이었다.

하지만 당연히 내색하지 않는다.

태연하게 반문하며 자신이 유일한 신임을 천사들에게 상기시켰다.

절대적으로 불리한 아스가르드에서 제1위 대천사에게 맞서는 모습.

천사들은 물론이고 헥세타이아까지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적막이 깃든 현장에 제라툴의 조소가 울렸다.

“그놈에게 내가 괜히 당해왔을까.”

꽈아앙!!

리파엘은 그래도 명색이 무신인 제라툴 앞에서 한 눈을 판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만 했다.

그리드에게 기습을 실패하고 도리어 반격을 당하며 강제 된 행동을 정확히 노린 제라툴의 주먹에 정수리를 찍히더니 피를 쏟았다.

덕분에 완벽하게 열린 퇴로.

헥세타이아와 칸의 손을 맞잡은 그리드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감옥을 탈출했다.

“막아요! 막으라고!!”

리파엘이 다급히 외쳤지만 효과가 없었다.

그가 몸을 추스르는 사이에 제라툴이 입구를 봉쇄하고 선 까닭이다. 천사들의 힘만으로 넘기엔 너무 높은 벽이었다.

“나처럼 똑같이 당했을 놈이 입만 살아서는.”

제라툴의 입 꼬리가 연신 씰룩였다. 엄청난 통쾌함을 느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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