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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699화 (1,698/1,794)

템빨 84권 - 9화

“빛의 여신 레베카여! 당신이 잠든 틈에 당신의 충실한 신하가 온갖 모욕을 당하고 있소이다!!”

영원의 감옥.

죄 지은 신들의 종착지로, 제아무리 전능에 가까운 신일지라도 이곳에서 자력으로 탈출하는 건 불가능했다.

애초부터 신을 가두기 위해 만든 감옥이니까.

환경 자체가 신에게 상극으로 작용했다.

“어서 깨어나 나를 구출하고 당신의 권위와 영예를 지키소서! 당신이 자리를 비운 틈에 제멋대로 활개 치는 저 간악한 무리로부터 아스가르드를 수호할 나, 무신 제라툴을 당신의 보검으로 삼아 휘두르소서!!”

무신 제라툴은 자신의 힘과 권위가 실시간으로 약해지고 있음을 실감하고 있었다.

감옥에 갇혀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끝 모를 상실감에 빠졌다.

하여 체면을 불고하고 외치는 중이다.

제발 살려달라고.

“...헥세타이아 님께선 어찌 괜찮으실 수 있는 겁니까?”

대장장이의 신 헥세타이아.

그는 벌써 ‘몇 년 째’ 발광 중인 제라툴과 달랐다.

훨씬 앞서 감옥에 갇혀놓고도 동요하지 않고 차분하게 명상하며 시간을 보냈다.

정신 수양의 경지가 극한에 이른 느낌.

늙은 천사는 헥세타이아에게 절로 존경심을 품었다.

자신이 대장장이인 탓에 대장장이의 신에게 매료 됐다, 이런 단순한 이유가 아니다.

영원의 감옥.

늙은 천사가 체험하기로 이곳은 굉장히 기이하고 무서운 공간이었다.

시간이 엿가락처럼 늘어난다.

처음엔 1초가 1분처럼 느껴진다 싶더니 이제는 1초가 하루 같았다. 사실 시간의 단위를 헷갈리기 시작한지 오래다. 그냥 지금 이 순간이 항상 길었다.

가장 먼저 이곳에 갇힌 헥세타이아에겐 1초가 1년 같을 수도 있었다.

한데 한결같이 차분한 것이다.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으며 단순히 캄캄할 뿐인 이 영겁의 공간에서, 그는 어떤 외력에 의지하지 않고도 심상을 굳건하게 다졌다.

“자네야말로 놀랍군.”

헥세타이아의 반개한 눈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

그의 양쪽 젖꼭지에 맺힌 푸르고 붉은 불꽃이 동공에 반사되는 여파였다.

그 눈에 늙은 천사의 지친 몰골이 투영된다.

“인간 시절의 기억을 되찾았다고 들었네. 현재 자네는 한없이 인간에 가까운 존재일 텐데 당최 무슨 수로 온전한 정신을 지켜내고 있는 건가?”

기억을 되찾은 천사.

그건 인간과 다름이 없다.

겉모습과 별개로 인간처럼 사고하니까.

그리고 인간이란 100년이 채 안 되는 시간에 갇혀 영원을 논하는 나약한 존재였다.

진짜로 무한하게 늘어나는 시간의 흐름을 견뎌낼 재간이 없는 것이다.

한데 늙은 천사는 견디고 있었다.

“그건...”

천사의 초췌한 얼굴에 차츰 미소가 번졌다.

“추억할 일이 많은 덕분인 듯합니다.”

천사가 되찾은 기억 중에는 물론 슬프고 괴로운 기억도 많았다.

하지만 즐겁고, 행복하고, 감사한 기억이 훨씬 더 많았다.

대부분 말년에 얻은 기억.

기억의 중심엔 늘 그리드라는 청년이 존재했다.

은인이었고, 벗이었으며, 가족이었다.

“그런가...”

칸의 표정에 담긴 진심을 읽은 헥세타이아의 마음이 복잡해졌다.

이곳 영원의 감옥에서 장시간 온전한 정신을 유지한다는 게 썩 좋은 일은 아니었던 까닭이다.

더욱 더 생생한 고통을 오래토록 느끼게 된단 뜻이었으니까.

인간의 정신력으론 감당하기 힘들다.

차라리 제라툴처럼 일찍부터 정신줄을 놓는 편이 나을 수도 있었다.

‘내가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다.’

행복한 기억?

헥세타이아에겐 특별히 없다.

신으로 태어나 많은 걸 당연하게 누려온 까닭에 행복의 기준을 제대로 몰랐다.

하여 늙은 천사의 입장을 함부로 재단하지 못하는 것이다.

애초에 헥세타이아에겐 여력이 적었다.

그는 본인에게 집중했다.

한낱 질투심에 눈이 멀어 인류를 해치려했던 기억.

모든 시대를 통틀어서 가장 큰 대죄 중 하나로 꼽히는 과오를 떠올리고 반성하길 반복하며 제정신을 유지했다.

“거기 천사.”

“예, 무신이시여.”

“설마 네놈 헥세타이아를 믿는 거냐? 아서라. 자신이 없는 틈에 빈자리를 꿰찼던 네놈을 저놈이 용서할 리 없으니까. 언제 갑자기 등에 비수가 꽂힐 줄도 모르고 농락당하는 꼴이 우습다.”

제라툴이 불쑥 끼어들었다.

단순히 비꼬는 것이었지만, 늙은 천사는 제라툴의 성격을 잘 모른다.

“보잘 것 없는 저를 신경 써주시는 겁니까. 과연 만인에게 숭배 받는 무신답게 훌륭하신 성품이십니다. 저는 일개 대장장이에 불과하지만 당신을 깊이 존경하고 큰 감사를 느낍니다.”

“...”

제라툴의 얼굴이 구겨졌다.

순전히 미친놈 보듯이 칸을 노려보다가, 영 반응이 없는 헥세타이아를 힐끗 돌아보더니 콧방귀 뀌었다.

“빛의 여신이여!! 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계심을 알고 있소! 부디 내게 권력에 눈이 먼 미치광이 천사가 아닌 진정한 사도를 내리시어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고 다시 캄캄한 천장을 향해서 소리치는 모습.

빛 한 점 들지 않아 어렴풋하게 보이는 제라툴의 그림자는 무신이 아닌 인간 노인과 닮았다.

격의 연속적인 하락과 봉인의 여파로 작아진 신전만큼이나 신체(神體) 또한 왜소해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작은지 큰지 분간이 안 되는 감옥에 쉬지 않고 메아리쳤다.

***

-도대체 어떻게 하신 겁니까?

적야의 대도가 찾던 열쇠는 리파엘의 허리춤에 묶여있었다.

도무지 손에 넣을 수 없는 위치였단 말이다.

그리드는 <만능열쇠>의 이야기를 꺼내야할지 고민했다.

과연 그것이 아스가르드에서도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확신은 없었으나, 리파엘의 물건을 훔치려고 시도했다가 개죽음을 당하느니 시도해볼 가치는 충분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리드가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

대도는 리파엘의 허리춤에서 열쇠 묶음을 몰래 낚아챘다.

두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본래 절대자의 기감이란 속일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설마 리파엘은 절대자가 아닌 겁니까?

-아니, 절대자 중에서도 아주 상위의 존재가 맞네. 그의 무위를 지상에서밖에 목격하지 못한 그대는 도무지 믿기지 않겠으나, 리파엘은 태초신 중 하나인 한울과 동급으로 추정되는 격과 무력을 지녔으니까.

그리드도 들어본 적 있다.

-그런 자를 상대로 어떻게 들키지 않고 열쇠를 훔치신 겁니까?

-굴절룡이 리파엘보단 상위의 개념으로 인정받는단 의미겠지.

파스슥!

대도의 팔목에서 미세한 균열음이 울렸다.

힐끗 보니 낯선 금속 재질의 팔찌가 수만 년의 세월을 직격으로 맞은 듯 풍화하고 있었다.

그 또한 언젠가 종말을 앞둔 세상에서 탄생한 굴절룡이 남긴 보물일 터.

-하나를 소모하고 말았으니, 우리는 최소 둘 이상을 얻어서 돌아가야 수지가 맞아.

결단이 필요했다.

갈림길을 앞에 두고 잠시 멈춰선 대도가 그리드에게 열쇠 하나를 건네주었다.

영원의 감옥의 자물쇠를 푸는 열쇠였다.

-본래 내 계획은 일단 보물을 훔친 뒤에 헥세타이아 신을 훔치는 거였네만, 자네도 알다시피 상황이 여의치 않아졌네.

리파엘은 곧 눈치 챌 것이다.

제 수중에서 사라진 물건이 있단 사실을.

머잖아 아스가르드 전역에 천사 군단이 깔리게 될 거란 의미다.

시간이 촉박했다.

-각자 원하는 물건을 손에 넣은 뒤 여기서 다시 만나도록 하세. 그 과정에서 위기가 찾아오면 힘을 안배할 필요 없이 전력으로 싸우게. 이곳에서 무조건 탈출할 수단이 내겐 있으니 그대는 어떻게든 나와 합류하기만 하면 돼.

-알겠습니다.

그리드가 신뢰에 신뢰로 보답했다.

대도가 알려준 감옥의 위치를 쫓아 무작정 질주했다.

대도와 함께 이동할 때보다 몇 배는 빨랐다.

그는 순보의 연속 사용이 가능했으니까.

궁명왕의 브로치가 있는 이상 은신이 풀릴 걱정도 없었다.

심지어 단순한 은신도 아니다.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는 개념으로, 종말마저 피하게 만든다. 종말의 대상으로 지정되지 않는 식이다.

‘여기다.’

황금색 구름의 길을 쫓아 달리길 얼마나 지났을까.

그리드의 시야에 담겼다가 지나치는 우주의 별자리가 수십 개 단위를 넘겼을 무렵에야 그리드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비구름처럼 흐린 잿빛 구름이 깔린 지역이었다.

더 깊은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아스가르드와는 어울리지 않는 어둠이 밀려왔고 그 끝에 크고 낡은 철문이 우뚝 서있었다.

거칠고 쓸쓸한 광경.

그리드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내게 호의를 보낸 탓에 저런 곳에 갇히게 된 칸과 헥세타이아에게 죄책감을 느꼈다.

물론 감정에 흔들리진 않았다.

심호흡하고 차분하게 철문 앞에 다가선 그가 열쇠를 꺼내 차가운 자물쇠에 꽂았다.

딸칵.

[<영원의 감옥>에 입장합니다.]

[플레이어 최초의 업적입니다!]

[숨겨진 장소를 찾은 보상으로 <아스가르드 지도>가 활성화됩니다!]

<아스가르드 지도>

등급:신화

천상의 구조를 알 수 있다.

특수한 기능이 있는 것도 같다.

무게:0.1

한때는 꿈꾸지 못했던 재회.

세계의 진실을 깨우치고, 신이 된 후에야 비로소 ‘훗날’을 논할 수 있었던 재회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저벅.

터질 것처럼 뛰는 심장을 간신히 억누른 그리드가 감옥에 발을 들인 순간.

“여신께서 나의 기도에 응답하셨군.”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리드가 한없이 그리워했던 음성과 명백히 다르다. 쩌렁쩌렁 울려대는 것이 다소의 불쾌감을 유발했다.

“제라툴...”

왜 하필 네가 나를 마중 나온 거냐...

짙은 어둠으로 물든 탓에 규모를 가늠하기 힘든 감옥.

그 안쪽의 어렴풋한 광경을 제 몸으로 가린 채 점차 다가오는 제라툴을 그리드가 노려보는 가운데.

“구원자가 아닌 암살자를 보냈다고?”

제라툴은 몹시 큰 충격을 받은 얼굴이 됐다.

일대의 기류가 순식간에 냉각되어간다.

“그것도 하필 네놈을... 오호라, 이제야 확신하겠다. 그간 내가 겪어온 모든 시련의 흑막은 역시 레베카였던 거군.”

쿠와아아앙!!

제라툴로부터 강대한 기파가 발생했다.

단전까지 내려오는 백색의 긴 수염이 거대한 문어의 다리처럼 너울댔다.

여태껏 단 한 번 체험해본 엄청난 기운.

염룡 트라우카의 전력 해방과 닮았다.

지상에서 보여줬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무신’의 위용.

이곳이 적진 한가운데라는 사실을 새삼 실감한 그리드가 침음했다.

‘겉모습만 보면 전보다 훨씬 더 약해진 것 같은데... 그래도 이 정도인가?’

“레베카라는 뒷배를 둔 덕분에 나 이후로 탄생할 수 있었던 유일신 그리드여. 내 오늘 너를 단단히 요절내어 왜곡 된 신화를 올바르게 고쳐 쓸 것이다.”

그리드를 향한 제라툴의 원한은 무척 깊다.

일단 그리드와 엮이면 전후사정을 떠나서 결과가 항상 자신에게 해롭게 작용했던 까닭이다.

그 결정적인 이유는 서사시에 있었다.

온전한 진실이 적히는 것이 아닌, 어디까지나 목격자들의 주관적인 시선을 바탕으로 왜곡 된 신화를 써 내리는 권능.

주신이라면 반드시 하나 이상씩 지니고 있는 ‘불합리한 힘’과 맞먹는 개념이었다.

“네놈이 치사한 방법으로 쌓아올린 신화를 모조리 나의 것으로 흡수하면 도미니언을 상대로도 승산이 생길 터. 내가 아스가르드의 새로운 왕이 되는 포석으로 삼으리라.”

하물며 현재 제라툴은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다.

대놓고 반란을 입에 담을 지경으로.

‘눈이... 완전히 뒤집혔군.’

본래부터 제라툴의 전투태세는 동공을 감춘다.

오로지 흰자위만 드러낸 채로 자신의 의도와 감정 따위를 상대방이 추측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이번엔 특히 심했다.

흰자위만 남은 두 눈에서 백색 안광이 마구잡이로 뿜어져대는데, 마치 유형화 된 살기를 보는 듯했다.

“...그리드?”

소란 속에서.

긴장하는 그리드의 귓전에 새로운 인물의 음성이 스며들었다.

단 한 번도 잊어본 적 없는 목소리.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그리워하게 될 목소리였다.

“칸...”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가까이 다가오는 늙은 천사가 그리드를 눈물 짓게 만들었고,

“어디서 한눈을 파느냐!”

눈 뒤집힌 제라툴이 출수하여 두 사람의 재회를 훼방 놓는 순간.

꽈아아아앙!!

그리드가 등지고 선 감옥의 입구에서 강력한 폭발이 발생했다.

폭발에 휩쓸려 깊은 어둠으로 빨려 들어가는 그리드를 인도하는 건 푸르고 붉은 한 쌍의 불꽃.

대장장이 신의 젖꼭지에서 피어오르는 몹시 신성한 불꽃이었다.

“오랜만일세.”

그리드를 부축하는 헥세타이아의 표정이 결연했다.

미소 지을 여유조차 없다는 듯이 굳은 얼굴로 폭발이 일어난 방향을 쳐다봤다.

그곳에 천사들이 있었다.

필두로 제1위 대천사 리파엘을 세운.

“정말로 쥐새끼가 침입했을 줄이야. 이래 뵈도 천상인데 이토록 많은 오물이 득실거려도 되는 겁니까?”

악취가 난다는 듯이.

손으로 코를 집은 리파엘이 찡그린 채 말했다.

그리드뿐만 아니라 감옥 안에 있는 모두를 더러운 오물 취급했다.

“그 배나온 천사가 당신을 이곳으로 인도하는 열쇠가 될 거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만... 최소 수백 년이 흐른 뒤의 이야기일 줄 알았는데요. 저능해서 두려움을 모르는 건가요? 참으로 대범해요.”

리파엘.

빛의 여신 레베카의 최측근이 그리드를 힐난한다.

새로운 상황을 전개시키는 방아쇠였다.

“...그렇군. 내가 잠시 착각했던 건가.”

중얼거리는 제라툴의 살기가 그리드가 아닌 리파엘에게 향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눈이 뒤집힌 채다.

“감히 나를 감옥에 가두고 조롱해온 리파엘 네놈을 먼저 요절내는 게 순서상 맞겠다.”

“네에?! 저를 요절내겠다고요? 레베카 여신의 심복인 저를요? 그거 완전히 반역이잖아요? 급기야 완전히 미쳤습니까?”

“...”

“...”

노골적인 반역 선언.

당황하는 건 리파엘과 천사들뿐만이 아니었다.

그리드와 헥세타이아 또한 흘러가는 상황을 황당하게 바라봤다.

다만 칸만큼은 침착했다.

마치 이렇게 될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는 듯이.

“과연 위대하신 무신이십니다...”

인간과 다름없는 늙은 천사의 속삭임이.

“리파엘! 나는 예전부터 네놈이 가장 싫었다!!”

사람들의 숭배를 바라며 진짜 무신이 되기를 소망해온 제라툴의 투기에 불을 지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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