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698화 (1,697/1,794)

템빨 84권 - 8화

‘일단 진정시키는 편이 좋겠군.’

금일.

레이더스와 만나고 천상에 오르기까지.

그리드는 상당히 불안한 기색을 보였다.

물론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다.

적야의 대도가 생각하기론 레이더스조차 그리드의 동요를 읽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대도는 너무 많은 사람들을 만나왔다.

종말을 맞이하고 황폐화 된 세계에서 긴 세월을 견뎌내고, 불쑥 다시 시작되는 세계를 재차 살아가길 수차례 반복하면서, 그는 온갖 군상을 보았다.

진정한 군왕과 영웅의 자질 또한 수차례 목격했단 말이다.

그리드의 불안을 ‘추측’하고 이해하는 게 가능했다.

‘드래곤과 거래하는 일이었다.’

드래곤은 예측이 힘든 존재다.

기질 자체가 인간과 전혀 달랐다.

한데 뜻하는 즉시 대륙을 멸망시킬 무위를 지녔다.

예측불가의 괴물, 재앙으로 받아들여야하는 것이다.

자칫 잘못 건드렸다간 종말을 불러오는.

당대의 인류를 책임지는 그리드 입장에선 드래곤과의 거래에서 엄청난 압박감을 느꼈을 터였다.

‘일이 잘못 돌아간다 싶었을 때 이단이라는 요리사의 목을 베지 않은 게 대단한 것이지.’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것.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 어떤 영웅이 온갖 명분을 논해도 용서받기 힘들다.

하지만 때로는 필요한 결단이었다.

파그마의 실체를 아는 사람들이 그를 비난하면서도 영웅임을 부정하지 못하는 이유다.

앞서 무신의 유적지에서.

레이더스가 이단의 요리 실력에 의문을 품은 눈치였을 때.

대도는 그리드가 이단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목을 베었어도 묵인했을 것이다.

드래곤의 분노를 가라앉힌 대가로는 싸다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그리드는 잠자코 상황을 지켜봤다.

몹시 초조할 게 분명하면서도 인간을 배신하지 못했다.

당연히 큰 불안에 시달렸으리라.

“더 이상 불안해 할 필요 없네.”

대도가 뒤쫓아 오는 그리드에게 말했다.

“레이더스와의 거래를 성공적으로 성사시킨 시점부터 그대가 할 일은 대부분 끝났다고 봐야 옳아. 내 호법을 서줘야 한다는 것도 가능성 낮은 최악의 변수를 감안한 요청이었을 뿐, 일이 어지간히 틀어지지 않는 이상 신들과 싸울 일은 없을 걸세.”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그리드가 안도했다.

애써 숨겨온 불안을 인정하는 반응이다.

그는 신계의 위력을 안다.

자신이 템빨계에서 얻는 혜택을 고려했을 때, 아스가르드에서 천상의 신들은 무지막지하게 강력할 것이 분명했다.

아스가르드의 레벨은 갓 탄생한 템빨계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높을 테고 당연히 더 많은 권능을 신들에게 내릴 테니까.

전장으로 삼기엔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 것으론 신들의 기감을 속이지 못해.”

그리드가 어느새 챙겨 입은 투명후드를 힐끔 살핀 대도가 커다란 녹색 보석이 박힌 브로치를 꺼내 그리드에게 건네주었다.

[<궁명왕(窮命王)의 브로치>를 획득하였습니다.]

<궁명왕(窮命王)의 브로치>

등급:신화

이 시대의 지식과 정보로는 파악이 불가능한 재료와 마법을 결합시켜 만든 궁극의 보물입니다.

타고나길 초월자였으나 하필 종말을 앞둔 세계에 태어났던 어느 왕이 마지막 순간까지 의지했습니다.

착용자의 존재감을 완벽하게 지웁니다.

단, 목소리를 내거나 다른 대상을 공격할 경우 효과가 사라집니다.

효과가 강제로 풀릴 경우 3일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발생합니다.

무게:0.1

‘누군가를 공격하지만 않으면 어떤 스킬을 써도 은신이 유지된다는 건가?’

투명후드짚업의 완벽한 상위 호환.

엄청난 아티팩트의 효과를 보고 감탄하는 그리드에게 대도가 씁쓸히 말했다.

“그것에는 수천만 인간의 넋이 깃들어 있네.”

“...예?”

“궁명왕. 궁한 운명을 타고나 종말에 쫓기는 신세였던 희대의 권력자가 자신의 백성을 모조리 제물로 바쳐 굴절룡과 거래한 결과물이 바로 그 브로치일세.”

“그런 말도 안 되는 역사... 들어본 적 없습니다. 애초에 굴절룡이라는 게 존재하는 겁니까?”

“이번 세계의 역사가 아니니 들어보지 못했어야 옳지. 굴절룡은... 존재하나 괘념치 말게. 그건 생물이 아닌 개념일세. 천지의 모든 인간이 숭배해야 비로소 실체를 갖게 될 정도로 효율이 나쁜 개념. 자네가 볼 일은 평생 없을 걸세.”

드래곤이라는 종을 신격화한 존재가 굴절룡이다.

태초의 신들이 머잖아 인류를 멸망시킬 거란 사실을 알게 된 종말 직전 세계의 인간들이 태초신의 면역제로 탄생시키는 용신.

대도의 말대로 효율은 굉장히 나쁘다.

여태껏 단 한 번의 종말도 막아내지 못했음이 증거다.

단, 숭배의 주체가 된 소수의 인간에겐 확정적인 생존을 선사했다.

“다만 이 브로치처럼 세상 어딘가에 굴절룡의 흔적이 남아있을 가능성은 높고 나는 그것들을 찾아 헤매왔다네.”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초월자.

“종말을 피하고자 했던 사람들의 염원이 담긴 보물들. 매번 세계의 끝자락에서 피어올랐던 그것들을 닥치는 대로 모으다 보면 언젠간 종말을 막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단순한 바람을 품은 게지.”

타인에게 기대하지 않는다.

종말을 막을 수 있는 인간은 어차피 없으므로.

타인과 교류하지 않는다.

어차피 도둑놈에 불과한 내가 언젠간 반드시 그들을 배신할 테니까.

그러므로 사람들이 불길하여 기피하는 적야에만 활동한다는 제약을 스스로 짊어진 채 다른 인간들을 멀리해온 그가, 타인 앞에서 최초로 목적을 밝혔다.

그리드에게 기대를 품었다는 증거였다.

그리드를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선언이었다.

그리드는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세월과 감정이 깃든 노인의 깊은 눈동자가, 그리드에게 진실과 진심을 전달하고 있었다.

신뢰.

그리드를 움직이는 원동력 중 하나다.

“바로 그게 온갖 진귀한 보물들을 훔쳐 오신 이유였습니까.”

오래 전 사라진 세계에서 태어난 보물들.

용신의 의지가 담겨 여전히 견고하게 작동 중일 그것들을 찾아내기 위해서, 눈앞의 노인은 도둑이 되었다.

“당신 역시 저의 동반자였군요.”

선과 악의 구분은 모호하다.

그리드의 행적 또한 항상 선하진 못했었다.

그러므로 대도에게 어떤 편견을 품지 않았다.

오직 자신과 같은 뜻을 품은 사람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서두르죠. 앞장서시면 놓치지 않고 뒤따르겠습니다.”

그리드가 여러 가지 이유로 흔들렸던 마음을 다잡았다.

일말의 망설임조차 버리고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칸과 헥세타이아를 구출하고 적야의 대도와 함께 무사히 탈출하리라...

그들을 새로운 동료로 삼아 다가올 종말을 억제할 것이다.

다짐하는 그리드에게 대도가 호응했다.

즉시 전력으로 질주했다. 황금의 구름이 빚어낸 길과 계단의 형상에 현혹되지 않고 꿰뚫으며 나아갔다.

체력을 안배하기 위해 순보의 사용을 억제하면서도 엄청난 쾌속.

그리드 또한 계속 전력에 가깝게 달려야했다.

이동 거리는 예상보다 더 길었다.

황금 구름이 깔린 대로가 아무리 나아가도 끝없이 펼쳐져있어 적해를 연상시켰다.

눈이 피로했다.

아스가르드의 하늘은 새카만 우주인 반면 지상은 황금의 구름이 환히 밝혔기에.

급기야 꼬박 하루가 지났을 무렵.

“허...”

다소 침침해진 그리드의 시야에 거대한 신전의 윤곽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말 큰 신전들이었다.

템빨궁전의 가장 높은 첨탑조차 신전을 지탱하는 기둥 하나의 크기를 따라가질 못했다.

그런 신전들이 황금 구름으로 만든 동산 위마다 우뚝 서 웅장함과 위압감을 뽐냈다.

-높은 언덕 위에 있는 신전일수록 높은 신이 기거하는 공간인 겁니까?

-그렇다네.

두 사람은 전음으로 대화를 나눴다.

-한데 저 작은 신전은 뭐죠?

대부분의 신전이 그리스식 유적지와 모습이 닮은 반면.

다섯 번째로 높은 언덕에 있는 신전은 절을 닮았다.

심지어 작고 아담했다.

-나 또한 확실히 알 수는 없네만... 아마도 제라툴의 신전이 아닐까 싶군. 치우를 따라한 거겠지. 하지만 너무 작은데. 제라툴의 성격과 맞지 않아.

-음...

그리드가 그제야 눈치 챘다.

저 작은 신전을 둘러치고 입구를 봉쇄 중인 두꺼운 쇠사슬과 거대한 자물쇠가 현재 제라툴의 신세를 증명하는 것임을.

‘역시 내 예상대로 징벌을 받고 있나보군. 아예 가둬놓고 못 나오게 만들었나 보지?’

십분 이해되는 처사다.

툭하면 지상에 내려와 신들을 망신시키는 제라툴을 아스가르드에서 언제까지 용서할 리 없었다.

‘쌤통이긴 한데...’

속이 시원하기보단 아쉬움이 더 컸다.

제라툴은 늘 그리드에게 큰 이득을 안겨줬던 호구니까.

고객 하나를 잃은 기분.

동시에 깊은 근심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주신 중 하나인 제라툴조차 저런 신세인데.

일개 천사인 칸은 대체 어떤 형벌을 받고 있단 말인가...

-우선 저곳으로 잠입해야하네.

대도는 높이 있는 신전들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신전들 중 유독 큰 곳을 지목했다.

-천사들의 병영일세. 저곳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열쇠들을 보관하고 있을 확률이 높아. 아스가르드의 치안은 리파엘이 관장하니까.

대도가 원하는 보물창고의 열쇠와 헥세타이아가 갇혀있는 감옥 열쇠.

두 사람은 서둘러 병영으로 잠입했다.

웅성웅성.

고요한 바깥과 달리 병영 내부는 몹시 소란스러웠다.

머리 위로 저마다 다른 형상의 황금색 고리를 단 천사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하나 같이 고집이 강한 모습.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는 전대 전설들다웠다.

“...”

대도의 걸음이 중간 중간 멈췄다.

천사들 중에 낯익은 얼굴이 많은 눈치였다.

어떤 여성형 천사를 보고선 얼굴을 왈칵 구기기도 했다.

옛 연인이었을까...

그리드가 저자도 구출하는 게 어떠냐고 말하려는 순간.

-서두르세.

대도가 걸음을 재촉했다.

저기에 있는 천사들은 과거에 자신이 알던 사람들과 이제 완전히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덕분에 자신을 기억해낸 칸의 경우가 매우 특수한 것임을, 그리드는 알게 됐다.

‘칸.’

진실을 알게 되자 그리움이 커진다.

두 사람은 병영을 철저히 수색했다.

때로는 천사들이 등지고 앉은 의자 바닥까지 수색하는 대범함을 보였다.

각자 지니고 있는 굴절룡의 보물들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쥐새끼가 숨어들었나.”

문득.

그리드와 대도의 동작이 멈췄다.

석상처럼 굳어버린 그들이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천천히 시선을 들렸다.

병영에 막 들어서는 천사가 보였다.

제1위 대천사 리파엘.

레베카가 태초에 빚은 일곱 천사의 필두로, 천사임에도 불구하고 어지간한 주신보다 위에 있다는 존재다.

절대자인 것이다.

물론 지상에선 제대로 된 위용을 보여주지 못했었지만 이곳은 아스가르드.

그리드는 리파엘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았다.

어쩌면 놈이 우리의 기척을 읽었을 수도 있다고 판단한 채 숨을 죽였다.

“감옥 말이야. 안에서 어찌나 소란을 피우는 건지 바깥까지 요란할 지경이라니까.”

“생쥐 잡는 무신이라. 그거 재밌네. 진짜로 지상에 내려가서 쥐 몇 마리 잡아올까?”

“아서라. 제라툴을 필요 이상으로 자극했다간 분풀이로 헥세타이아와 그 천사를 해치는 수가 있어. 그럼 여러모로 난감해진다고.”

예상치 못한 정보가 흘러들어온다.

헥세타이아와 제라툴이 현재 같은 감옥에 갇혀있다는 정보.

게다가 어떤 천사도 함께인 눈치였다.

당연히 칸일 확률이 높았다.

‘저 자식들이 감히 칸을 감옥에...’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하게.

솟구치는 분노에 휩싸인 그리드를 대도가 진정시켰다.

-훔쳐야할 대상들이 모여있으면 차라리 편하지.템빨 84권 - 8화

‘일단 진정시키는 편이 좋겠군.’

금일.

레이더스와 만나고 천상에 오르기까지.

그리드는 상당히 불안한 기색을 보였다.

물론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다.

적야의 대도가 생각하기론 레이더스조차 그리드의 동요를 읽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대도는 너무 많은 사람들을 만나왔다.

종말을 맞이하고 황폐화 된 세계에서 긴 세월을 견뎌내고, 불쑥 다시 시작되는 세계를 재차 살아가길 수차례 반복하면서, 그는 온갖 군상을 보았다.

진정한 군왕과 영웅의 자질 또한 수차례 목격했단 말이다.

그리드의 불안을 ‘추측’하고 이해하는 게 가능했다.

‘드래곤과 거래하는 일이었다.’

드래곤은 예측이 힘든 존재다.

기질 자체가 인간과 전혀 달랐다.

한데 뜻하는 즉시 대륙을 멸망시킬 무위를 지녔다.

예측불가의 괴물, 재앙으로 받아들여야하는 것이다.

자칫 잘못 건드렸다간 종말을 불러오는.

당대의 인류를 책임지는 그리드 입장에선 드래곤과의 거래에서 엄청난 압박감을 느꼈을 터였다.

‘일이 잘못 돌아간다 싶었을 때 이단이라는 요리사의 목을 베지 않은 게 대단한 것이지.’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것.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 어떤 영웅이 온갖 명분을 논해도 용서받기 힘들다.

하지만 때로는 필요한 결단이었다.

파그마의 실체를 아는 사람들이 그를 비난하면서도 영웅임을 부정하지 못하는 이유다.

앞서 무신의 유적지에서.

레이더스가 이단의 요리 실력에 의문을 품은 눈치였을 때.

대도는 그리드가 이단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목을 베었어도 묵인했을 것이다.

드래곤의 분노를 가라앉힌 대가로는 싸다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그리드는 잠자코 상황을 지켜봤다.

몹시 초조할 게 분명하면서도 인간을 배신하지 못했다.

당연히 큰 불안에 시달렸으리라.

“더 이상 불안해 할 필요 없네.”

대도가 뒤쫓아 오는 그리드에게 말했다.

“레이더스와의 거래를 성공적으로 성사시킨 시점부터 그대가 할 일은 대부분 끝났다고 봐야 옳아. 내 호법을 서줘야 한다는 것도 가능성 낮은 최악의 변수를 감안한 요청이었을 뿐, 일이 어지간히 틀어지지 않는 이상 신들과 싸울 일은 없을 걸세.”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그리드가 안도했다.

애써 숨겨온 불안을 인정하는 반응이다.

그는 신계의 위력을 안다.

자신이 템빨계에서 얻는 혜택을 고려했을 때, 아스가르드에서 천상의 신들은 무지막지하게 강력할 것이 분명했다.

아스가르드의 레벨은 갓 탄생한 템빨계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높을 테고 당연히 더 많은 권능을 신들에게 내릴 테니까.

전장으로 삼기엔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 것으론 신들의 기감을 속이지 못해.”

그리드가 어느새 챙겨 입은 투명후드를 힐끔 살핀 대도가 커다란 녹색 보석이 박힌 브로치를 꺼내 그리드에게 건네주었다.

[<궁명왕(窮命王)의 브로치>를 획득하였습니다.]

<궁명왕(窮命王)의 브로치>

등급:신화

이 시대의 지식과 정보로는 파악이 불가능한 재료와 마법을 결합시켜 만든 궁극의 보물입니다.

타고나길 초월자였으나 하필 종말을 앞둔 세계에 태어났던 어느 왕이 마지막 순간까지 의지했습니다.

착용자의 존재감을 완벽하게 지웁니다.

단, 목소리를 내거나 다른 대상을 공격할 경우 효과가 사라집니다.

효과가 강제로 풀릴 경우 3일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발생합니다.

무게:0.1

‘누군가를 공격하지만 않으면 어떤 스킬을 써도 은신이 유지된다는 건가?’

투명후드짚업의 완벽한 상위 호환.

엄청난 아티팩트의 효과를 보고 감탄하는 그리드에게 대도가 씁쓸히 말했다.

“그것에는 수천만 인간의 넋이 깃들어 있네.”

“...예?”

“궁명왕. 궁한 운명을 타고나 종말에 쫓기는 신세였던 희대의 권력자가 자신의 백성을 모조리 제물로 바쳐 굴절룡과 거래한 결과물이 바로 그 브로치일세.”

“그런 말도 안 되는 역사... 들어본 적 없습니다. 애초에 굴절룡이라는 게 존재하는 겁니까?”

“이번 세계의 역사가 아니니 들어보지 못했어야 옳지. 굴절룡은... 존재하나 괘념치 말게. 그건 생물이 아닌 개념일세. 천지의 모든 인간이 숭배해야 비로소 실체를 갖게 될 정도로 효율이 나쁜 개념. 자네가 볼 일은 평생 없을 걸세.”

드래곤이라는 종을 신격화한 존재가 굴절룡이다.

태초의 신들이 머잖아 인류를 멸망시킬 거란 사실을 알게 된 종말 직전 세계의 인간들이 태초신의 면역제로 탄생시키는 용신.

대도의 말대로 효율은 굉장히 나쁘다.

여태껏 단 한 번의 종말도 막아내지 못했음이 증거다.

단, 숭배의 주체가 된 소수의 인간에겐 확정적인 생존을 선사했다.

“다만 이 브로치처럼 세상 어딘가에 굴절룡의 흔적이 남아있을 가능성은 높고 나는 그것들을 찾아 헤매왔다네.”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초월자.

“종말을 피하고자 했던 사람들의 염원이 담긴 보물들. 매번 세계의 끝자락에서 피어올랐던 그것들을 닥치는 대로 모으다 보면 언젠간 종말을 막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단순한 바람을 품은 게지.”

타인에게 기대하지 않는다.

종말을 막을 수 있는 인간은 어차피 없으므로.

타인과 교류하지 않는다.

어차피 도둑놈에 불과한 내가 언젠간 반드시 그들을 배신할 테니까.

그러므로 사람들이 불길하여 기피하는 적야에만 활동한다는 제약을 스스로 짊어진 채 다른 인간들을 멀리해온 그가, 타인 앞에서 최초로 목적을 밝혔다.

그리드에게 기대를 품었다는 증거였다.

그리드를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선언이었다.

그리드는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세월과 감정이 깃든 노인의 깊은 눈동자가, 그리드에게 진실과 진심을 전달하고 있었다.

신뢰.

그리드를 움직이는 원동력 중 하나다.

“바로 그게 온갖 진귀한 보물들을 훔쳐 오신 이유였습니까.”

오래 전 사라진 세계에서 태어난 보물들.

용신의 의지가 담겨 여전히 견고하게 작동 중일 그것들을 찾아내기 위해서, 눈앞의 노인은 도둑이 되었다.

“당신 역시 저의 동반자였군요.”

선과 악의 구분은 모호하다.

그리드의 행적 또한 항상 선하진 못했었다.

그러므로 대도에게 어떤 편견을 품지 않았다.

오직 자신과 같은 뜻을 품은 사람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서두르죠. 앞장서시면 놓치지 않고 뒤따르겠습니다.”

그리드가 여러 가지 이유로 흔들렸던 마음을 다잡았다.

일말의 망설임조차 버리고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칸과 헥세타이아를 구출하고 적야의 대도와 함께 무사히 탈출하리라...

그들을 새로운 동료로 삼아 다가올 종말을 억제할 것이다.

다짐하는 그리드에게 대도가 호응했다.

즉시 전력으로 질주했다. 황금의 구름이 빚어낸 길과 계단의 형상에 현혹되지 않고 꿰뚫으며 나아갔다.

체력을 안배하기 위해 순보의 사용을 억제하면서도 엄청난 쾌속.

그리드 또한 계속 전력에 가깝게 달려야했다.

이동 거리는 예상보다 더 길었다.

황금 구름이 깔린 대로가 아무리 나아가도 끝없이 펼쳐져있어 적해를 연상시켰다.

눈이 피로했다.

아스가르드의 하늘은 새카만 우주인 반면 지상은 황금의 구름이 환히 밝혔기에.

급기야 꼬박 하루가 지났을 무렵.

“허...”

다소 침침해진 그리드의 시야에 거대한 신전의 윤곽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말 큰 신전들이었다.

템빨궁전의 가장 높은 첨탑조차 신전을 지탱하는 기둥 하나의 크기를 따라가질 못했다.

그런 신전들이 황금 구름으로 만든 동산 위마다 우뚝 서 웅장함과 위압감을 뽐냈다.

-높은 언덕 위에 있는 신전일수록 높은 신이 기거하는 공간인 겁니까?

-그렇다네.

두 사람은 전음으로 대화를 나눴다.

-한데 저 작은 신전은 뭐죠?

대부분의 신전이 그리스식 유적지와 모습이 닮은 반면.

다섯 번째로 높은 언덕에 있는 신전은 절을 닮았다.

심지어 작고 아담했다.

-나 또한 확실히 알 수는 없네만... 아마도 제라툴의 신전이 아닐까 싶군. 치우를 따라한 거겠지. 하지만 너무 작은데. 제라툴의 성격과 맞지 않아.

-음...

그리드가 그제야 눈치 챘다.

저 작은 신전을 둘러치고 입구를 봉쇄 중인 두꺼운 쇠사슬과 거대한 자물쇠가 현재 제라툴의 신세를 증명하는 것임을.

‘역시 내 예상대로 징벌을 받고 있나보군. 아예 가둬놓고 못 나오게 만들었나 보지?’

십분 이해되는 처사다.

툭하면 지상에 내려와 신들을 망신시키는 제라툴을 아스가르드에서 언제까지 용서할 리 없었다.

‘쌤통이긴 한데...’

속이 시원하기보단 아쉬움이 더 컸다.

제라툴은 늘 그리드에게 큰 이득을 안겨줬던 호구니까.

고객 하나를 잃은 기분.

동시에 깊은 근심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주신 중 하나인 제라툴조차 저런 신세인데.

일개 천사인 칸은 대체 어떤 형벌을 받고 있단 말인가...

-우선 저곳으로 잠입해야하네.

대도는 높이 있는 신전들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신전들 중 유독 큰 곳을 지목했다.

-천사들의 병영일세. 저곳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열쇠들을 보관하고 있을 확률이 높아. 아스가르드의 치안은 리파엘이 관장하니까.

대도가 원하는 보물창고의 열쇠와 헥세타이아가 갇혀있는 감옥 열쇠.

두 사람은 서둘러 병영으로 잠입했다.

웅성웅성.

고요한 바깥과 달리 병영 내부는 몹시 소란스러웠다.

머리 위로 저마다 다른 형상의 황금색 고리를 단 천사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하나 같이 고집이 강한 모습.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는 전대 전설들다웠다.

“...”

대도의 걸음이 중간 중간 멈췄다.

천사들 중에 낯익은 얼굴이 많은 눈치였다.

어떤 여성형 천사를 보고선 얼굴을 왈칵 구기기도 했다.

옛 연인이었을까...

그리드가 저자도 구출하는 게 어떠냐고 말하려는 순간.

-서두르세.

대도가 걸음을 재촉했다.

저기에 있는 천사들은 과거에 자신이 알던 사람들과 이제 완전히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덕분에 자신을 기억해낸 칸의 경우가 매우 특수한 것임을, 그리드는 알게 됐다.

‘칸.’

진실을 알게 되자 그리움이 커진다.

두 사람은 병영을 철저히 수색했다.

때로는 천사들이 등지고 앉은 의자 바닥까지 수색하는 대범함을 보였다.

각자 지니고 있는 굴절룡의 보물들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쥐새끼가 숨어들었나.”

문득.

그리드와 대도의 동작이 멈췄다.

석상처럼 굳어버린 그들이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천천히 시선을 들렸다.

병영에 막 들어서는 천사가 보였다.

제1위 대천사 리파엘.

레베카가 태초에 빚은 일곱 천사의 필두로, 천사임에도 불구하고 어지간한 주신보다 위에 있다는 존재다.

절대자인 것이다.

물론 지상에선 제대로 된 위용을 보여주지 못했었지만 이곳은 아스가르드.

그리드는 리파엘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았다.

어쩌면 놈이 우리의 기척을 읽었을 수도 있다고 판단한 채 숨을 죽였다.

“감옥 말이야. 안에서 어찌나 소란을 피우는 건지 바깥까지 요란할 지경이라니까.”

“생쥐 잡는 무신이라. 그거 재밌네. 진짜로 지상에 내려가서 쥐 몇 마리 잡아올까?”

“아서라. 제라툴을 필요 이상으로 자극했다간 분풀이로 헥세타이아와 그 천사를 해치는 수가 있어. 그럼 여러모로 난감해진다고.”

예상치 못한 정보가 흘러들어온다.

헥세타이아와 제라툴이 현재 같은 감옥에 갇혀있다는 정보.

게다가 어떤 천사도 함께인 눈치였다.

당연히 칸일 확률이 높았다.

‘저 자식들이 감히 칸을 감옥에...’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하게.

솟구치는 분노에 휩싸인 그리드를 대도가 진정시켰다.

-훔쳐야할 대상들이 모여있으면 차라리 편하지. 다만 변수가 있다면 제라툴인데...

‘아...’

그리드가 똥 씹은 얼굴이 됐다.

칸과 헥세타이아를 구출하는데 곁에 제라툴이 있다?

그놈이 뭔 짓을 벌일지 전혀 예측이 안 됐다. 다만 변수가 있다면 제라툴인데...

‘아...’

그리드가 똥 씹은 얼굴이 됐다.

칸과 헥세타이아를 구출하는데 곁에 제라툴이 있다?

그놈이 뭔 짓을 벌일지 전혀 예측이 안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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