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697화 (1,696/1,794)

템빨 84권 – 7화

“음이온 조리법과 광파 조리법의 힘입니다.”

이단이 설명했다.

표정이 사뭇 달랐다.

망설이거나 좌절하는 기색이 전혀 없고 자신감이 넘쳤다.

“일단 음이온 조리법. 흙과 모래가 자연히 얻은 전자가 고기 내부로 물결치듯 침투하여 연육 작용을 일으키는 동시에 이물질을 배출시켜 고기의 잡내를 없애 줍니다.”

‘음이온 그거 법적으로 금지된 유사 과학 아니야?’

그리드가 혀를 내둘렀다. 현대인인 그는 음이온 만능설이 미신 이라는 사실을 상식적으로 알고 있었다.

“다음은 광파 조리법. 인간이 인위적으로 피어올린 불꽃 따위완 격이 다른 태양의 순수한 빛이 고기를 가열하면 온갖 이로운 영양분이 생성됩니다. 말 그대로 태양의 기운을 머금은 거니까요. 이때 재료 본연의 향과 맛이 극대화되어 감미료나 향신료 없이도 고기에 엄청난 풍미를 더해주는 겁니다.”

‘혹시 귀신도 믿나?’

아, 이 세계엔 정말로 귀신도 존재하지…

연신 궤변을 늘어놓는 이단을 보면서 그리드는 점차 초조해졌다.

레이더스가 자신을 조롱하는 인간을 과연 용서할지 의문이었던 까닭이다.

‘지켜야 돼.’

결과가 이상해지긴 했지만…

아무튼 이단은 소중한 동료다.

그리드는 레이더스가 어떤 이상한 낌새를 보이는 즉시 대응할 준비를 갖췄다. 당연히 싸우기보

단 대화로 설득할 셈이었기 때문에 미리 후로이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실시간으로 후로이의 조언을 들으며 대화를 유리하게 이끌어갈 계획으로.

그런 준비들이 무색하게도.

“흐음.”

레이더스의 표정은 점차 흥미로 물들었다.

“인간들이 말하는 과학을 요리 에 접목시킨 건가?”

인간은 다른 초월적인 존재들과 다르다.

태어나서부터 타고나는 힘과 지식이 형편없어 온갖 학문을 만들고, 배우며 스스로를 단련시켜야 만 했다.

과학이 대표적인 예다.

과학은 인간의 학문이었다.

“과학...? 그럴 리가요. 저는 이래 뵈도 순수한 요리삽니다.”

‘굳이 말 안 해도 그래 보여.’

공부를 못했어도 열심히는 했던

그리드가 속으로 연신 태클을 거는 가운데.

“다만 스스로 깨우쳤을 뿐이라는 건가.”

레이더스는 무척 흡족한 표정이 되었다.

이단의 근거 없는 주장들에 전혀 개의치 않는 반응.

당연하다.

당장 입에 들어온 음식이 맛있었으니까.

이 맛이야말로 이단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힘인 것이다.

“자연의 섭리를 파악하고 이용 해서 요리의 소재로 사용한다라… 여태껏 현자를 자칭했던 그 누구보다 가장 지혜롭고 뛰어나다. 그대가 여태껏 숨어있던 현자로구나.”

순간.

월드 메시지가 떠올랐다.

당연한 수순이다.

일개 인간이, 그것도 그리드와 적야의 대도라는 세계의 주역들

이 지켜보는 앞에서 무려 고룡의 인정을 받았으니까.

세계가, 이단이라는 인물을 좌시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세계에 새로운 전설이 새겨집니다.]

‘설마, 설마 했는데.’

이런 황당하면서도 뻔한 전개라니?

곧 탄생할 전설의 요리사가 필 이단이라는 사실에 그리드의 희비가 교차했다.

내 사람이 전설이 됐다는 사실 이 기쁘면서도, 이단이 정녕 전설의 요리사가 되어도 괜찮은가 의문이었던 것이다.

만약 앞으로 이단이 만들 요리가 능력치를 상승시키거나 버프를 부여한다면?

템빨단과 제국의 기사들, 병사 들은 무조건 그가 만든 요리를

먹어야한다.

당연히 먹지 않을 수는 없고, 앞으로 삼시세끼 고역을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상상만 해도 지 옥이었다.

[새로운 전설, <드래곤의 요리 사>가 탄생하였습니다.]

“...?”

전설의 요리사는 예측했다.

한데 드래곤의 요리사라니?

당황하는 그리드의 귓전에서 대도의 경악성이 울렸다.

“설마 전속 요리사로 삼을 셈인가?”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그대의 요리는 실로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지녔다. 획일적인 조리법에 의존하는 다른 요리사 들과 달리 변화무쌍한 자연의 힘을 고스란히 이용하는 현자이므로.”

이단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마구잡이로 흔들리다가 물기를 머금으며 그의 심정을 대변했다.

이단은 전율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인정받았기에.

없던 재능을 다른 방식으로 개화시킨 그는, 어쩌면 세상에서 유일한 이해자를 만난 것이다.

최후의 순간까지 고독할 뻔했던 삶에 광명이 비쳤다.

“나는 그대를 영원히 내 곁에 두고 싶다. 물론 나의 보금자리는 한낱 인간인 그대에겐 너무 크고 황량할지 모른다. 드래곤인 나는 그대의 고충과 외로움을 헤아리지 못하여 많은 상처를 안겨 주겠지.”

몇 번이나 증명됐듯이 레이더스 는 보통의 드래곤과 달리 합리적인 사고를 지녔다.

자신이 평생토록 찾아온 ‘새로운 미식’을 선사해줄 눈앞의 인간 요리사에게 종을 초월하는 호

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대를 곁에 두고 싶다. 무의미한 방랑을 끝내고 정착하고 싶어.”

“...”

“대가는 충분히 지불하마. 나의 마법과 권위로 그대에게 영원한 향락을 제공하리라.”

레이더스의 음성이 몹시 나긋했 다. 약간의 두려움이 섞인 애정 어린 눈빛으로 이단을 바라보는데, 마치 연인에게 청혼하는 태

도를 닮았다.

‘꿈인가...’

그리드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순순히 납득하기엔 상황이 너무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단은 그리드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폐하는 나를 해치려던 게 아니다.’

보통의 요리사와는 다른 내게 새로운 길을 전파하고 싶어 드래

곤과의 만남을 성사시켜주신 것이다.

내 요리를 거부감 없이 먹던 네펠리나의 모습을 기억하셨음이 분명하다…

‘당신께선 정녕... 처음부터 끝까지... 저를 도와주시는군요...’

당시 멸망으로 치닫던 동대륙에서 구출해주신 걸로 부족해.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요리할 수 있게 해주시고, 이젠 더 나은 삶을 주선해주셨다…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한참동안 그리드를 바라보던 이단이 이내 결연한 표정으로 답했 다.

“위대하신 당신을…”

여전히 그리드에게 시선을 못박아둔 채 말한 이단이.

“따라가겠습니다.”

마지막 순간에서야 비로소 레이더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속내.

태초 이전 혼돈부터 존재해온 레이더스에게 뻔히 드러났다.

이단이 말하는 ‘위대한 당신’이 자신이 아닌 그리드를 칭하고 있음을 알았단 말이다.

개의치 않았다.

레이더스는 다만 감사했다.

“나의 수면은 인간에겐 제법 길수도 있다. 그때마다 잠시간 그대에게 자유를 줄 터이니, 적어 도 그때만큼은 마음껏 살아도 좋다.”

언제든지 그리드를 만나도 좋다는 뜻.

배려를 읽은 이단이 감격해서 눈시울을 붉혔다.

“위대하신 분들의 사랑을 받아 죽어도 여한이 없나이다.”

이쯤 되자.

그리드도 미소 지었다.

이단이 진정으로 행복해하고 있음을 눈치 채서다.

‘도대체 이게 뭔 상황인지 모르 겠지만... 아무튼 다 잘 된 것 같다.’

레이더스가 분노하는 사태가 발생하지 않았고, 거래는 유효했으 며, 전설이 된 이단 또한 행복을 찾았으니.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사실은 이단과 작별하게 됐다는 점.

이단은 계륵이다.

요리사임에도 요리를 맡기고 싶 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등

한시하기엔 사람이 너무 좋았다.

몇 년 동안 함께하며 쭉 신의를 보여주지 않았던가.

템빨단원들과 기사들의 독 내성 을 올려주는 업적을 남기기도 했고.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이단이 행복하다면 그걸로 됐다.’

게다가 이 시점부터 이단의 가치는 천문학적이었다.

미식룡 레이더스의 최측근이 된 그는 앞으로 고용과 지상을 잇는

교두보로 작동할 테니까.

그리드 개인의 아쉬움과 별개로 드래곤 셰프가 된 이단은 무조건 인류에게 이로운 것이다.

마음을 다스리던 그리드가 대도의 중얼거림을 들었다.

“미식룡의 평균 수면 시간은 백 년 아닌가...”

“...”

과거.

그리드에게 레이더스의 미식 주기에 동참해주길 부탁했던 하야테 또한 설명했었다.

잠에서 깨어난 레이더스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새로운 미식을 찾는 거라고.

“물론 반드시 백 년씩 수면할 거라는 보장은 없네. 이번처럼 큰 사건이 생기면 불쑥 깨어나기도 하니까. 하지만 역으로 말해서 큰 사건이 없으면 굳이 깨어 날 일이 없단 거겠지.”

‘...’

아무튼 전설인 요리사 이단.

무사히 템빨제국에 복귀 예정.

***

“고맙다.”

앞으로 수십 년에 한 번, 혹은 백 년에 한 번 꼴로 이단이라는 출장 요리사를 부를 수 있게된 레이더스.

골드 드래곤답게 찬란한 금발과 금안을 지닌 미남자로 폴리모프한 그가 그리드에게 작게

고개 숙였다.

그리드와 대도 모두를 경악하게 만드는 태도였다.

레이더스는 개의치 않았다.

“그대는 내게 당대 최고의 요리사를 소개하고 양보하지 않았느냐. 감사 받아 마땅한 것이지.”

나는 본능에 매몰 된 다른 고룡들과 달리 원칙을 지닌 고귀한 존재다…

레이더스의 오연한 눈빛이 마치 그런 속내를 담고 있는 듯했다.

괜히 또 토를 달았다간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한 그리드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제 호의를 알아주셔서 영광일 따름입니다. 그럼 이걸로 저희의 거래가 깨질 일은 없다고 믿어도 되는 거겠죠?”

“당연하다. 굳이 시간 끌 필요없이 즉시 거래를 이행하도록 하지.”

“당장 출발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문제 있나?”

“아니요, 아닙니다...”

무인도로 전락해버린 무신의 유적지.

인자한 미소를 짓고 일행을 지켜보는 이단의 시선 속에서.

레이더스, 대도와 함께 당장 천상에 오르게 생긴 그리드는 어떤 이질감을 느꼈다.

이질감의 정체를 파악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지금 이래 뵈도 아스가르드에 가는 건데?’

한데 집 앞 공원에 산책이라도 나가는 듯이 평온한 레이더스와 대도는 대체 뭐란 말인가?

레이더스야 두려울 게 적은 고룡이니 그렇다 쳐도 대도는 뭐가 저렇게 침착한 거지?

“뭐 준비물 같은 거 필요 없습니까?”

“레이더스와 나, 그리고 그대가 준비물일세. 충분하니 걱정 말게.”

“그렇...”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그리드의 얼굴이 문득 구겨졌다.

나도 준비물에 포함되는 거였다고?

“설마 올라가서 싸워야 됩니까?”

“자칫 발각당하면 그리 되겠지. 아무리 나라고 해도 신들의 영역 에 침입하는 거라 100퍼센트 안 전을 장담 못해. 그땐 그대가

나의 호법을 서 줘야하네.”

왜 미리 말해주지 않았는가…

괜히 비반을 그리워하게 된 그리드의 얼굴가죽이 아래로 벗겨 질 듯 출렁였다.

어느새 그와 대도를 등에 태운 레이더스가 비행한 여파다.

무신의 유적지가 순식간에 점이 된다 싶더니 광활한 적해가 구름에 가리어 보이지 않게 됐다.

[명심해라. 어디까지나 인간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아스가르드의

신들보단 차라리 우리가 낫다.]

레이더스의 의미심장한 의념이 그리드의 뇌리에 새겨졌을 무렵엔.

[신들의 세계 ‘아스가르드’에 입장하였습니다.]

그리드의 시야를 물결치는 황금색 구름이 가득 채웠다.

고룡의 권능으로 차원을 순식간에 넘어버린 것이다.

“따라오시게!”

레이더스의 등을 박차고 뛰어내린 대도가 다급히 외쳤고,

“감사했습니다.”

그리드는 정신없이 뒤쫓으면서도 레이더스에게 인사를 잊지 않았다.

헥세타이아와 칸을 구할 기회를 얻었다.

감사해서 자연히 묻어나는 인사였다.

레이더스가 피식 웃었다.

‘거래에 감사라.’

감사해야할 것은 약속한 이상의 대가를 받은 나인데 어찌 자꾸.

‘…나쁘지 않아.’

<황금의 가호>가 점차 멀어지는 그리드를 뒤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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