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4권 - 6화
새로운 미식의 체험.
레이더스의 유일한 낙이자 삶의 목적이다.
동족 일부가 비웃었지만 글쎄.
단순히 연명할 뿐인 그들보단 차라리 내가 낫지 않은가.
레이더스의 자부심인 것이다.
그는, 브라함과 닮았다.
‘차라리 잘 되었다.’
레이더스가 겉만 번지르르한 음식의 잔재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염룡 트라우카.
태초 이전 혼돈부터 호시탐탐 나를 노렸던 놈이다.
타고나길 호전적인 놈은 드래곤이라는 종(種)에게 동족 포식이라는 잘못 된 생리를 전파했다.
‘그 혐오스러운 놈의 신체가 내 혀를 만족시킬 맛을 내었다면... 그 또한 불쾌했겠지.’
레이더스가 세상에서 가장 혐오하는 것은 의외로 맛없는 음식이 아니다.
그가 가장 혐오하는 대상은 트라우카였고, 두 번째로 증오하는 것은 솜씨 없는 요리사였으며, 맛없는 음식은 세 번째 싫어하는 것에 불과했다.
이단은 무지막지하게 운이 좋은 것이다.
트라우카의 팔은 어떤 맛을 낼까...
기대하는 한편으로 맛이 없길 바라던 레이더스의 무의식적 바람 덕분에 증오의 대상이 되는 사태를 피할 수 있었다.
애초에 레이더스는 드래곤 중에선 드물게 합리적으로 사고를 가졌다.
인간 요리사가 고룡의 신체를 뜻하는 대로 조리하는 게 가능할 리 없음을 알았다.
하여 직접 식재 손질을 도왔던 거다.
물론 별 보람은 없었다.
레이더스는 똑똑히 보았다.
요리사가 트라우카의 살점에 뿌린 소금과 후추가 제대로 스며들지 못하고 소멸하는 광경을.
펄펄 끓는 기름이 트라우카의 비늘을 튀기지 못하고 겉에 코팅되는 수준에 그치던 기척을.
“그... 버린 입맛을 달래셔야지 않겠습니까? 잘 아는 맛집으로 안내해드릴까요?”
그리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트라우카의 팔을 조금밖에 손실하지 않은 건 몹시 다행인 일이었지만, 레이더스에게 맛없는 음식을 먹이게 된 상황이다. 분노를 감당할 각오를 다져야했다.
‘의외로 점잖게 굴고 있지만 속아선 안 돼.’
그리드는 똑똑히 기억한다.
수백 년 동안 맛있게 먹어온 음식이 식상해졌다는 이유로 고뇌하던 레이더스의 모습을.
오로지 자신을 위해 긴 세월 맛을 계승해온 어느 요리사 가문을 멸할까 고민하던 그때도 놈은 무척 평온한 얼굴이었다.
‘거래가 무산 될 염려는 없다. 드래곤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용언이 약해지니까.’
레이더스가 번헬리어처럼 될 작정이 아닌 이상에야.
잠시간의 폭풍만 견디면 될 것이다...
생각하며 사람 좋은 표정을 짓는 그리드에게 레이더스가 반문했다.
“이곳에 당대 최고의 요리사가 있는데 굳이 이동할 필요가 있나?”
레이더스는 이단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다.
우선 그리드라는 신뢰할 만한 존재가 그를 당대 최고의 요리사라고 소개했고, 이후 실제로 본 이단의 조리법엔 어떤 결함이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맛없는 요리가 탄생한 이유는 순전히 식재의 문제로 추정하는 중이었다. 레이더스 입장에선 이단의 실력을 의심하기가 힘든 것이다.
“...이단 공은 재차 요리를 만들 입장이 아닌 듯합니다만.”
흠칫 놀란 그리드가 이단의 모습을 살피고는 안도했다.
숫제 좌절하는 모양.
넋을 잃고 백사장에 주저앉은 그의 모습은 조국을 잃은 자들의 모습과 닮았다. 텅 빈 눈동자와 메마른 눈물자국이 그가 받은 충격과 슬픔을 대변하는 중이다.
‘안타깝게 됐지만 여러모로 잘 됐어.’
이단은 그리드의 신뢰에 충분히 보답해주었다.
맛없는 요리를 만들어 트라우카의 팔을 보존했고, 레이더스의 솔직한 감상평에 큰 충격을 받아 제정신이 아닌 모습을 보여줬다.
후환을 남길 여지조차 남기지 않고 활약하는 것이다.
‘레이더스도 저런 상태의 요리사는 신뢰하지 못하겠지.’
이단에게 품은 관심을 순순히 거둘 거다.
이단이 ‘진짜로 요리를 못한다.’는 사실을 끝내 눈치 채지 못하고 이번 사건은 끝나리라.
‘앞으로 이단에게 더 잘해주자.’
다짐하는 그리드의 입가에 어렴풋한 미소가 번졌고,
‘신이 된 부작용인가?’
적야의 대도가 침음했다.
그늘 속에 숨어 상황을 지켜보는 중인 그는, 그리드가 세운 계획을 사전에 모두 들어 알고 있었다.
이단이라는 저 요리사가 마음에 얼마나 큰 상처를 입었을지 유추하는 게 가능하단 의미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웃는 그리드가 대도를 걱정시켰다.
‘사람을 사랑하고 신뢰하기에 그토록 희생해온 자가.’
그리드는 늘 인류를 위해서 싸웠다.
그런 사람이 타인의 고통을 보며 웃는다?
물론 현재 그리드는 이단을 비웃는 게 아니다. 돌아가는 상황이 흡족해서 미소 짓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점을 감안해도 인간성이 다소 상실 됐다는 인상을 지우긴 힘들었다.
‘결국 다른 신들과 같아지는 건가... 아니, 가만?’
깊이 근심하던 대도의 표정이 차츰 밝아졌다.
그리드의 근원을 떠올린 까닭이다.
그리드가 갓 떼어낸 고룡의 팔을 자신감 있게 제련하려고 시도했던 이유가 뭔가?
그의 근원이 대장장이였기 때문이다.
그는 대장장이의 궁극이 아니되, 그의 시작은 대장장이였다.
하여 자신이 대장장이의 신이라도 되는 것마냥 트라우카의 팔을 도시 한복판에서 제련하려고 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대도는 한 인물을 떠올릴 수 있었다.
‘파그마.’
그래, 그리드는 다름 아닌 파그마의 후예다.
인류를 위해 싸우는 한편으로 수많은 인명을 희생시켰던.
‘비난 받아 마땅할지언정 파그마는 진정으로 인간을 사랑했었다.’
하여 자신이 죽어 어떤 꼴을 당할지 뻔히 알고도 바알과 계약했던 것이다.
대의를 위한답시고 정말로 많은 사람을 희생시켰다지만, 거기엔 일말의 악의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드는 그를 닮은 거겠지.’
신이 된 부작용으로 인간성을 상실해가는 게 아니라.
본래부터 대를 위해 소를 쉽게 희생하는... 상당히 양면적이면서도 자칫 개차반 같은 성격을 지닌 것이다.
‘대개 제자란 스승을 닮기 마련이니.’
파그마의 삶을 알게 될수록 동화되어 간 것일 터...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대도의 귓전으로 어째선지 욕을 토하는 그리드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스며들 무렵.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가 된 자다. 본인이 맛없는 요리를 만들었다는 믿기 힘든 현실에 당장은 충격을 받았겠지만... 견고한 정신력을 바탕으로 필시 금방 회복하리라 믿는다.”
“염ㅂ... 네?”
어디서 누가 나한테 저주라도 퍼붓는 건가?
어째서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지는 거지?
반사적인 욕설을 토하던 그리드의 말문이 막혔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이해한다는 듯이 지껄이며 이단을 바라보는 레이더스의 눈빛이 그윽하다.
지랄 맞은 고룡답지 않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설마?’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있던 그리드의 얼굴이 곧 하얗게 질렸다.
‘내 계획을 눈치 챘구나?’
돌이켜보면 당연하다.
레이더스는 무려 미식룡.
요리 자체에 일가견이 있다.
실제로 조금 전 식재료를 손질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러니 모를 리가 없는 것이다.
이단의 요리 솜씨가 사실은 형편없다는 사실을.
‘내가 일부러 요리 못하는 요리사를 데려왔단 사실을 눈치 챈 게 분명해.’
앞으로 벌어질 일은 뻔했다.
레이더스는 이단에게 ‘정상적인 식재료’를 사용하는 음식을 주문할 것이다.
그리고 그조차도 형편없이 맛없는 음식물 쓰레기라는 사실을 확인한 뒤 그리드에게 확실한 책임을 물 터였다.
‘망했다.’
어쩐지 일이 쉽게 풀린다 싶었다.
‘손목을 부러뜨릴까? 어차피 나중에 세희가 치료해주면 되니까. 하지만 레이더스를 납득시킬 명분이 있어야하는데...’
도둑놈으로 몰아가야 할까.
초조함에 휩싸인 그리드가 이단의 양쪽 손을 바라보며 고민할 때였다.
“태양보다 먼저 빛나오신 찬란한 골드 드래곤, 만물 위에 군림하시는 위대한 고룡 레이더스 님을 뵙습니다.”
적야의 대도가 나섰다.
그 역시 그리드와 같은 결론을 내린 것이다. 상황을 반전시킬 필요를 느꼈다.
레이더스의 두 눈이 사늘하게 가라앉았다.
“낡은 인사군.”
레이더스는 두 가지 사실에 놀랐다.
첫째, 자신이 한낱 인간의 기척을 읽지 못했다는 것.
둘째, 이번 세상에선 결코 들을 수 없을 인사를 들었다는 것.
“...몇 번의 멸망을 겪은 망령이냐, 너는.”
창조와 종말의 반복.
레베카와 야탄이 만드는 주기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존재한다.
일정 수준 이상의 ‘힘’을 취한 존재들은 종말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무수히 많은 종말을 겪고도 온전히 살아가는 드래곤들과 템빨신의 사도 지크가 대표적인 예다.
매번 태어나는 것이다.
망령은.
“아시다시피 인간은 위대하신 당신들과 다릅니다. 망각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가여운 생물이지요. 내가 언제부터 태어나 몇 번의 종말을 겪었는가. 잊은 지 오래입니다.”
충분한 대답이 됐다는 듯이.
레이더스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어느새 붉어진 하늘에 물들어가는 자신의 긴 금발을 빤히 바라보며 중얼거릴 뿐이다.
“적야의 대도가... 그래서...”
“레이더스 님, 제가 감히 말씀을 올려도 되겠습니까?”
“그대를 뛰어난 요리사만큼 존중한다. 허가하마.”
“그리드 님께서 당신과의 거래에 응하신 이유는 저의 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평소 대도는 그리드를 젊은 청년 대하듯 했다.
하지만 정작 높은 위계의 대상을 만나자 그리드를 공대했다.
대상에게 무언의 뜻을 전달하는 것이다.
당신과 그리드의 위계가 결코 다르지 않음을.
당신 또한 그리드를 존중하라고.
레이더스는 짐짓 거슬리는 눈치였지만 묵인했다.
“천상에 오르는 것 말인가.”
“예, 순전히 저를 돕고자 이번 계획을 세우신 것이니 책임을 물으셔야 한다면 부디 제게...”
“책임?”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던 레이더스의 귀가 얕게 흔들렸다.
흐느낌을 멈추고 숨을 고르는 이단의 기척에 반응하는 것이다.
“대화는 식사를 끝내고 나누도록 하지.”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마법으로 둥실 떠오름과 동시에 이단의 곁으로 이동한 레이더스가 이단에게 친히 손을 내민 것이다.
“이 시대 최고의 요리사여.”
“...”
“내게 제대로 된 음식을 대접할 기회를 주마.”
편향 된 정보의 여파다.
레이더스는 그리드가 제출한 이단의 이력을 믿고 여전히 그가 최고의 요리사라고 생각했다.
이단 입장에선 조롱으로 들렸다.
‘이런 XX.’
기껏 만든 요리를 맛없다고 뱉어놓고 이 시대 최고의 요리사라고?
처음부터 목숨을 포기했던 이단이다.
영혼까지 불태워 요리했음에도 끝내 실패를 맞이한 그는 눈에 뵈는 게 없었다.
한 마디로 겁을 상실했다.
“좋습니다. 만들어드리죠.”
몹시 도전적인 눈빛.
이미 한 번 실패를 겪고도 두려워하기는커녕 도리어 당당한 요리사의 눈빛이 레이더스를 희미하게 전율시켰다.
‘진정으로 내가 찾던 요리사다.’
그 자신감의 근원을 보여라.
촤르르르르륵!!
급기야 미소지은 레이더스가 마법을 전개하자 신비로운 광경이 펼쳐졌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조리도구와 식재, 또한 그리드는 난생 처음 보는 온갖 향신료들이 아무것도 없던 해안가 중앙을 가득 채워버린 것이다.
“뭐든 좋다. 네가 하고 싶은 요리를 해라.”
“다 필요 없습니다.”
“...!?”
안절부절 못하며 상황을 지켜보던 그리드는 사색이 됐고 레이더스의 두 눈은 무섭게 치켜져 올라갔다.
“기필코 살해당하겠군...”
적야의 대도가 중얼거렸다.
고룡이 기껏 마련해준 조리도구를 발로 걷어차고, 팔로 쓸어버리는 등 신경질적으로 치워버리는 이단의 패악질을 보면서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이단이 말했다.
“내 방식대로 하겠습니다. 조금 전 그 드래곤 고기나 다시 좀 손질해주십쇼.”
예상치 못했던 실패를 맞이한 직후.
절망 속에서 이단은 깨달았다.
남들과 똑같은 요리를 한답시고 평생토록 연마해온 나만의 기술을 버린 게 실수였다는 사실을.
‘자신이 추구해온 길을 스스로 부정하면 어쩌자는 거냐, 이단. 너는 최후의 순간에 후회를 남길 셈이었냐?’
감미료와 향신료 따위에 의존하는 요리는 너무 평범하다.
애초에 그런 건 순수한 실력이 아니다.
나는, 자연을 요리한다.
퍽퍽!
이단의 손에는 식칼이나 냄비 따위가 들리지 않았다.
그는 태양에 뜨겁게 달궈진 백사장에 손이 데어가면서도 직접 구덩이를 파 냄비의 형상을 만들었다.
“...?”
레이더스가 뭔가 잘못 됐음을 직감한 순간.
새롭게 얻은 트라우카의 고기를 구덩이에 던져버린 이단이 드디어 칼을 손에 쥐었다.
지금이라도 뒤늦게 다른 재료를 손질할 셈인가?
모두가 주목하는 가운데.
바닷물에 떠내려 온 유리병을 주운 이단이 그것을 조심히 반으로 갈라 고기 위에 얹었다.
그러자 유리가 태양빛에 뜨겁게 달궈져갔다...
“...뭐냐, 저놈?”
이단을 지목하는 레이더스의 호칭이 격하됐다.
연속적인 기행에 황당해하면서.
그러거나 말거나.
이단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고기를 조리해갔고 끝내 레이더스에게 겉만 약간 익은 시뻘건 고기 한 덩이를 내어주었다.
접시도 아닌 돌 위에 얹은 고기였다.
“지금 설마 위대한 드래곤을 짐승취급하는 건가?”
레이더스의 목소리는 어느 순간부터 완전히 사늘해졌다.
포크와 나이프를 꺼내 쥔 그가 이단을 노려봤다.
“만약 나를 기만할 셈이면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할 것이다.”
잠시 후.
땡그랑!
레이더스가 다시 한 번 포크와 나이프를 떨어뜨렸다.
매우 놀란 표정으로.
“...향신료와 섞여 잡내로 다가왔던 육향이... 향긋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