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4권 - 5화
이단.
동대륙 출신인 그는 템빨제국 아니, 세상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유명한 요리사다.
템빨궁전 요리사와 템빨기사단 요리사를 역임했다는 엄청난 이력을 지닌 까닭이다.
심지어 그리드를 포함한 템빨단원들의 도시락을 책임졌었다는 후문도 있었다.
유일무이하며 전무후무 할 요리사인 것이다.
하필 포이즌 마스터라는 기이한 이명을 지녔다는 점이 의아하긴 했지만, 세상 대부분의 요리사가 그를 존경하며 목표로 삼았다.
[흥미가 생기는군.]
그리드의 설명에 레이더스가 귀를 기울였다.
다른 고룡들과는 전혀 다른 태도.
타인의 말을 경청하는 모습을 보면 그나마 좀 상식적이긴 했다.
빛을 난반사시키는 황금색의 비늘이 새삼 고아하게 다가왔다.
[그대쯤 되는 자가 곁에 두는 당대 최고의 요리사라면 기대해도 좋겠지. 몇 번의 종말과 탄생을 겪으며 영겁의 세월이 흘러도 큰 변화가 없던 인류의 식문화에 경종을 울릴 만한 실력자일 터.]
“경종... 비슷합니다.”
“좋다.”
얼마 전.
트라우카의 전력 해방으로 인해 해수면이 상승했던 차다.
몇 채의 성을 세워도 좋을 거대한 무인도의 지면이 고룡의 무게를 감당 못하고 차츰 가라앉아갔다.
거슬렸는지 마법으로 몸의 중량을 줄인 레이더스가 장발의 미남자로 폴리모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데려와라. 서두를 필요 없다. 기다림 또한 미식의 묘미이므로 나의 인내심은 강하게 단련되어 왔다.”
“아닙니다. 어서 용건을 끝내고 레어로 돌아가서 쉬셔야지요. 서두르겠습니다.”
같은 공간에서 숨 쉬는 것만으로 답답하고 불편한 존재.
그리드에겐 고룡들이 그랬다.
어서 거래를 끝내고 레어로 돌려보내고 싶었다.
애초에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적야의 대도가 말하길, 레베카가 주기에 든 지금이야말로 아스가르드에 잠입할 절호의 기회라고 했으니까.
‘레베카가 주기에 들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안 건진 몰라도.’
그리드는 대도의 엄청난 정보력을 굳이 의심하지 않았다.
동대륙에 관한 일 대부분을 통찰했던 황길동이라는 선례를 이미 보았기 때문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분투 중인 사람들의 역량을 그리드가 함부로 재단하거나 의심한다면, 그건 지독한 오만이었다.
“재촉하다가 일을 그르칠 셈인가?”
안 그래도 서늘한 레이더스의 금안이 한층 더 차갑게 식었다.
냉정을 잃은 요리사들이 흔히 하는 실수들을 떠올린 여파다.
“요리사란 겁이 많아 냉정을 잃기 쉬운 족속이다. 솥뚜껑만 보고도 놀라 사소한 실수를 손쉽게 저지르기 일쑤인데, 서두르느라 조리도구나 조미료를 놓고 오기라도 하면 그대가 무슨 수로 책임질 거지? 내 분노가 자칫 그대에게 향할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할 것이다.”
‘...이상한 편견을 갖고 있네.’
요리사라서 겁이 많다니... 자신에게 음식을 대접하게 된 요리사들의 심정을 이해 못하는 걸까?
타인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하는 건.
미치광이들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레이더스가 비교적 점잖아 보일지언정 드래곤은 드래곤인 것이다.
“알겠습니다. 천천히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돌아오도록 하지요.”
그리드는 속내와 달리 정중히 말했다.
최강의 드래곤은 누구일까?
적어도 현재 시점에선 레이더스일 확률이 높다.
동귀어진을 노린 이프리트에게 치명상을 입은 트라우카.
바알의 계략에 빠져 광증을 앓는 네바르탄과 저주에 시달리는 중인 번헬리어.
약화 된 다른 고룡들과 달리 레이더스는 멀쩡했다.
어떤 사건을 겪지 않고 힘을 완전하게 보존하고 있었다.
‘레이더스의 무력을 가늠할 만한 사료는 없지만.’
문헌에 기록 된 드래곤은 대부분 네바르탄이다.
광증 탓에 거리낌 없이 설치고 다닌 까닭인데, 가장 호전적이라는 레드 드래곤 트라우카마저 네바르탄과 비교하면 인류에게 목격 된 기록이 적다. 대부분 탈리마와 관련 된 것이 고작일 정도로.
맛집 투어나 다니는 레이더스의 기록은 한참 적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드는 네펠리나가 알려준 덕분에 골드 드래곤의 특징을 파악하고 있을 뿐, 레이더스 개인의 무력은 전혀 몰랐다.
‘아무튼 고룡이다.’
일단 번헬리어보단 무조건 강력할 테고.
굳이 얼굴을 붉힐 상대가 아니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늦진 않을 테니 꼭 여기서 기다려주십시오.”
자리를 비운 사이 섬 어딘가에 숨죽이고 있을 적야의 대도가 무사하길 바라며.
그리드는 라인하르트로 귀환했다.
“싫습니다! 저를 죽일 작정입니까? 으악! 싫다고! 싫어어어어!!”
잠시 후.
템빨궁전 지하에서 어떤 중년인의 끔찍한 비명소리가 메아리쳤다.
그리드에게 상황을 청취하고선 완전히 겁에 질린 것이다.
드래곤의 존재감이다.
평소 대범한 편에 속하던 사내도 드래곤을 상대론 겁쟁이로 전락했다.
드래곤 슬레이어인 하야테조차 드래곤을 두려워했던 실정이다.
그리드가 생각하기로 드래곤, 특히 고룡을 상대로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인간은 세상에 쥬드밖에 없을 것 같았다.
“이단 경께서 왜 저러시지?”
“폐하의 추천으로 미식룡 앞에서 음식을 만들게 되었다는데...”
“허, 그게 사실인가?”
수군거리는 기사들의 얼굴이 차츰 밝아져갔다.
템빨기사단 전원은 최소 1년 이상씩 이단의 요리를 먹었다.
덕분에 독에 대해 강력한 내성을 갖추게 됐지만, 동시에 이단을 원망하는 마음을 함께 품고 말았다. 사실상 긴 고문을 당한 느낌이었기에.
물론 본인들도 자각하지 못했던 마음이다.
사람이 도살장에 끌려가게 생긴 마당에 허허 웃다니.
자기 자신에게 실망한 기사들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지는 가운데 드디어 이단의 비명이 멎었다.
“알겠습니다. 피할 수 없다면 받아들이지요. 늘 그래왔듯이 폐하의 뜻에 성심성의껏 따르겠나이다.”
자포자기에 빠진 채다.
동대륙 출신답게 새카만 눈동자에 빛이 없었다.
삶을 포기한 눈치.
그리드가 오해를 풀기 위해서 노력했다.
“당신이 해코지 당할 일은 추호도 없소. 내가 곁에서 막을 거요.”
“막겠다라... 드래곤이 저를 죽이려 들 가능성이 있긴 하다는 거군요.”
이단이 기운이 없는 이유가 있다.
공교롭게도 그는 이제 알고 있었다.
자신의 요리가 맛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몇 년 동안 궁전에 머물며 수백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요리를 만들어줬으니 눈치를 못 챌 리 만무했다.
여러 번 들었다.
이단의 요리는 최악이라는 기사들의 수군거림을.
음식을 먹는 게 아니라 마치 독을 먹는 것 같다는 흐느낌을.
이런 내게... 무려 ‘미식룡’이라는 드래곤을 위한 요리를 만들라고?
이건 고의적인 살인에 가깝다.
‘죽으라면 죽어야지...’
이단의 독서량은 의외로 상당했다.
손님 없는 식당을 운영하던 시절 할 일이 없어서 책을 탐독했었다.
덕분에 여러 나라의 역사를 어렴풋이 알았다.
왕이나 황제가 되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게 된 지존들이 가장 먼저 하는 일.
권력의 독점을 위해 건국기에 힘썼던 장수들의 목을 베는 것이다.
‘토사구팽.’
이유는 모르겠지만, 폐하께서는 나를 몹시 높이 평가하시며 두려워하는 게 분명하다.
그래야만 굳이 나를 직접 사지로 몰아넣으시는 이유를 납득할 수 있다...
‘얀페이가 떠날 때 나 역시 함께 떠났어야하는데... 어리석었다.’
동대륙에서 이단과 함께 왔던 얀페이.
그녀는 작년에 궁전을 떠났다.
형제들을 돌보기 위해 철이 들기도 전부터 노동전선에 뛰어들고 어쩌다 보니 템빨궁의 시녀장까지 올랐던 젊은 여인은, 청춘이 끝나기 전에 평범한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바람을 품었던 것이다.
이 멋지고 화려한 궁전에서의 생활을 버리고 굳이 다시 힘든 평민의 삶을 살겠다니... 이단 입장에선 도무지 이해가 안 갔었다.
하지만 이젠 알게 됐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거겠지.
‘주제 파악을 못한 죄다. 그간 폐하께 입은 성은이 크니 원망하지 말고 순순히 받아들이자.’
그래, 그간 입은 은혜가 몹시 컸다.
기왕이면 은혜를 갚고 떠나고 싶었다.
그래야 죽어서 욕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내가 만들 최후의 요리는... 역사에 남을 것이다.’
눈을 반개하는 이단의 기도가 바뀌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느낌.
회광반조다.
‘고집을 버리고 대중의 입맛에 맞는 요리를 만들어주마.’
그간 이단은 ‘재료 본연의 맛’에 집착해왔다.
자연이 탄생시킨 식재료들을 경외하고 이를 음미할 수 있는 인간의 미각을 예찬하는 뜻을 담아서다.
장인의 정신이었다.
그에게 향신료란 재료의 맛을 해치는 오물이었으며 소금 따위로 하는 간은 혀를 속이는 기만 행위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해해주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사람들의 비웃음이 환청처럼 울렸다.
그러므로 최후의 순간만큼은 보여주고 싶었다.
내 요리가 너희들의 입맛에 맞지 않았던 이유는 내가 요리를 못해서가 아니란 사실을...
‘너희들 우민들의 입맛에선 전설이 될 요리를, 보여주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눈물을 흘리며 숨 죽여 울다가, 결연한 얼굴이 되었다가, 이젠 또 광기에 사로잡혀 웃는 이단을 보면서.
왠지 모를 찝찝함을 느낀 그리드가 그를 재촉했다.
“가죠. 장소는 적해의 어느 무인도입니다. 깨끗한 모래도 많으니 조리도구는 필요 없겠죠?”
이단은 요리를 할 때 가열조리법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간혹 사용하더라도 태양열에 달궈진 모래를 썼다.
정 사정이 여의치 않거나, 종종 어떤 영감이 떠오를 때면 팬을 손에 쥐기도 했지만, 그런 경우는 정말로 드물었다.
“아니요. 준비할 물건이 많습니다.”
고개를 저은 이단이 주방으로 들어갔다.
평소엔 거들떠도 보지 않던 온갖 조리도구를 보따리에 주섬주섬 싸더니 급기야 소금과 후추를 손에 쥐었다.
“...?”
이변을 눈치 챈 그리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고,
“드래곤의 고기를 조리하는 건 생전 처음입니다. 기존의 조리 방법이 통용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으니 만반의 준비를 갖출 셈입니다.”
이단은 설명했다.
맛있는 요리를 만들겠다는 속내를 감춘 설명이다.
그는 그리드를 깜짝 놀라게 만들 작정이었다.
‘보고 싶습니다. 제가 만든 요리를 먹고 맛있어서 깜짝 놀란 당신께서 뒤늦게 후회하시는 모습을.’
이후.
그리드의 예상과 달리 꽤 많은 시간이 지난 뒤에야 두 사람은 무신의 유적지에 도착했다.
작은 얼굴에 길게 솟구친 레이더스의 눈썹이 미세하게 씰룩였다.
그리드가 데려온 요리사를 보고 내심 놀란 탓이다. 약간이나마 평정을 잃은 것으로, 고룡답지 않았다.
‘무척 강렬한 눈빛이군.’
두려움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눈빛.
설령 죽음을 코앞에 둘지언정 흔들리지 않을 것만 같다.
저런 요리사의 눈을, 레이더스는 생전 처음 보았다.
‘그만큼 실력에 자부심이 있다는 거겠지.’
레이더스의 기대감이 증폭됐다.
급기야 희미한 미소마저 머금은 그가 물었다.
“말하라. 너는 이 귀중한 식재를 어떤 방법으로 조리할 거지?”
트라우카의 팔을 해안가에 길게 늘어놓은 레이더스가 칼을 꺼내 쥐며 말했다.
어차피 인간 요리사의 손으론 손질할 수 없는 식재다. 자신이 직접 도울 셈이었다. 재료에도, 이 재료를 사용할 요리사에게도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비늘은 한 줌의 가루로 만들어주시고 가죽은 투명하여 비칠 정도로 얇게 편으로 썰어주십시오.”
이단은 무서울 게 없었다.
거대한 드래곤의 팔을 자세히 살펴보고 만져보며 당당하게 요구했다.
“겨드랑이 아래쪽 살은 형태를 살려서 잘라주시고 위쪽 살은 큐브 형태로 잘라주십시오. 두께는 이 정도로... 그리고 손목의 뼈와 힘줄도 사용하겠습니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손등 살도 얇게 저며서...”
“흐음...”
레이더스는 이단의 까다로운 요구사항을 전부 들어주었고 그리드는 느긋하게 지켜봤다.
이단이 만드는 요리는 어차피 맛이 없다는 사실을 뻔히 알았으니까.
하물며 드래곤의 팔은 별걸 다 식재로 쓰는 이단도 처음 써보는 식재다. 제대로 조리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평소보다 더 최악의 요리가 나오겠지.’
그 와중에 가장 흡족한 점은.
이단이 사용하는 재료의 양이 인간을 기준으로 삼았단 점이다.
레이더스가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한 탓에 드래곤이란 사실을 잠시 망각한 듯했다.
레이더스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대식가가 아닌 미식가니까.
적게 먹어도 맛있게 먹는 걸 선호했다.
잠시 후.
“시작하겠습니다.”
이단의 요리가 시작됐다.
레이더스가 마법으로 일으킨 불꽃으로 팬을 달구고 갖가지 향신료를 사용해가면서.
‘뭐지?’
평소와 달리 굉장히 정상적인 조리법.
심지어 화려하고 숙련 됐다.
정말로 실력 좋은 요리사가 조리하는 듯한 광경.
‘설마 맛있게 만들 셈인가?’
그게 가능한 거였나?
반신반의하면서도 차츰 초조해지는 그리드와 달리 레이더스의 기대감은 점점 증폭되었고...
“이 순서대로 드십시오.”
한 상이 거하게 차려졌다.
흐물흐물해지기 직전까지 푹 찐 힘줄과 튀긴 비늘로 상반되는 식감을 극대화시킨 요리를 전채로 삼은 만찬이었다.
엄청나게 맛있는 냄새가 사방팔방으로 진동했다.
구석에 숨죽이고 있던 적야의 대도가 꿀떡꿀떡 침을 삼킬 정도로.
그리드도 엄청난 식욕에 휩싸였다.
‘먹어보고 싶다.’
예상치 못한 욕망에 휩싸인 순간.
그리드는 계획이 망했음을 직감했고, 레이더스는 천천히 음식들을 음미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땡그랑.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은 레이더스가 중얼거렸다.
“...트라우카는 이로운 구석이 하나도 없는 놈이군.”
몇 번 씹던 스테이크를 조용히 뱉어낸 뒤 입가를 닦아내는 레이더스의 아름다운 얼굴은 무섭게 일그러져 있었다.
“하나부터 끝까지 맛이 없다. 씹을 때마다 입 안 가득 잡내가 진동하고 식감은 엉망에 간이 맞는 요리가 하나도 없군.”
“...”
“걱정마라, 요리사. 네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내가 곁에서 지켜봤다. 이건 네 탓이 아니라 재료의 문제겠지. 해치지 않으마.”
창백하게 굳은 이단을 레이더스가 안심시켰지만 이단은 조금의 위안도 얻지 못했다.
“최선을... 정말로 최선을 다했는데...! 흑...! 흑흑흑!!”
재능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봤자 안 된다.
지독한 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