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4권 - 4화
“아스가르드에 오르는 방법이 하나 외에 더 있습니까?”
하늘에서 빛이 내리고 작은 천사들이 나팔을 불며 등장하면.
빛의 틈새에서 번진 황금색의 구름들이 켜켜이 쌓이며 계단을 이룬다.
바로 그것이 아스가르드로 통하는 길이었다.
천상의 신들이 뜻해야 열리는 길.
타고나길 신으로 태어난, 극히 소수의 선택 받은 존재들만 이용할 수 있는 통로인 것이다. 가장 높은 권위, 혹은 차별의 상징이었다.
“방법이 하나 더 있네.”
그리드의 집무실.
대제국을 다스리는 황제가 업무를 처리하는 공간이라기엔 매우 이질적이다.
펜촉은 잉크의 흔적 없이 말라있었고 그 흔한 서류 한 장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
‘변치 않는군.’
적야의 대도에겐 너무 오래되어 습관이 된 취미가 있다.
각국의 왕이 새로 즉위할 때마다 왕의 집무실에 잠입하는 취미다.
왕이라는 족속은 저마다 나라의 최고 보물을 하나쯤 간직하고 있게 마련이었으니, 보물도 훔칠 겸 겸사겸사 왕의 성향을 파악하고 그 나라의 명운을 예측하는 재미가 있었다.
사하란 제국의 역대 황제들도 그에게 집무실을 털렸을 정도다.
당연히 그리드의 집무실도 무사하지 못했단 의미다.
적야의 대도는 여태껏 두 번이나 그리드의 집무실에 잠입했다.
처음은 템빨국을 건국했을 때, 두 번째는 사하란을 장악하고 템빨국을 제국으로 확장시켰을 때다.
그때마다 그리드의 집무실은 텅텅 비어있었다.
실로 황당한 광경이었다.
통치에 일절 관심이 없는 암군조차도 집무실의 구색 정도는 맞춰놓건만 그리드는 일말의 가식조차 없었다.
책임을 외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유능하고 신뢰할 만한 신하들에게 업무를 일임하고 자신은 종종 검토하는 식이었는데, 그것이 정답은 아니겠지만 나쁘게 보이지도 않았다.
적어도 자신의 능력으론 치세를 이루는 게 불가능함을 알고 대책을 마련한 거니까.
쓸데없는 체면이나 고집 따위로 나라를 말아먹는 암군들과 비교하면 백배 천배 나았다.
‘짧은 시간 동안 급격히 쌓아올린 경험 탓에 온갖 군상을 다 만나봤을 터인데.’
그대는 여전히 인간을 믿는가.
급기야 이런 도둑놈까지.
초월자임에도 세월의 무게에 짓눌린 노인은.
신이기에 앞서 아직 젊은 청년인 그리드의 굳센 심지가 참으로 놀라울 따름이었다.
‘치우는 이자를 보면서 무엇을 느낄까.’
“다른 방법이 있단 말입니까?”
“드래곤.”
짧은 상념을 털어낸 적야의 대도가 대답했다.
그의 시야에 담기는 창밖은 여전히 붉었다.
초대형 용광로의 폭발 여파가 희미하게 남은 까닭이다.
하늘을 태웠던 불꽃은 염룡 트라우카의 원기와 주작의 화염이 섞인 것.
진정으로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화염이므로 쉽게 진화되지 않았다.
그나마 유페미나라는 천고의 기재가 없었다면 저 불꽃들 중 일부는 끝내 도시에 떨어졌을 것이다.
“...드래곤이요?”
“염룡 트라우카가 천상의 신들을 사냥하고 다녔다는 비화를 그대도 이젠 알텐데.”
“아.”
“자유롭게 차원을 왕래하는 것. 드래곤이 타고나는 권능 중 하나일세. 신들의 콧대만큼이나 높이 솟아있는 아스가르드조차 그들에겐 굽어볼 수 있는 대상이야.”
적야의 대도는 그리드에게 분명히 말했었다.
자신을 천상으로 운반해 달라고.
그리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의미가 됐다.
“네펠리나를 타고 올라가잔 말씀이군요.”
괜찮을까.
네펠리나는 해츨링이다.
한계를 초월하면 드래곤급의 비행능력을 발휘하긴 했지만 잠시뿐이다.
고작 1분.
‘차원을 넘는다.’는 개념이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물리적인 거리가 적용 될 경우 1분 안에 아스가르드에 오르는 건 힘들 수도 있었다.
과연 적야의 대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그대와 교감하며 한계를 초월한 해츨링의 위명을 내 익히 들었으나 그래봤자 드래곤이라고 할 순 없으니...”
“다른 방법을 염두에 두셨군요?”
굳이 내가 고민할 문제가 아니었다.
하긴.
적야의 대도가 대책 없이 거래를 제안했을 리가 없다.
자신이 생각한 방법이 따로 있으니까 제안했겠지.
차분하게 귀를 기울이던 그리드가 마침 입에 머금던 찻물을 내뿜었다.
아이린이 직접 우린 귀중한 차를...
내심 큰 충격을 받은 그리드에게,
“신들의 기감에 읽히기 전에 아스가르드에 도착할 수 있는 신속이 필요하네. 아무래도 고룡의 등을 빌리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겠지.”
적야의 대도가 설명했다.
얼굴 주름 곳곳에 고인 찻물을 손수건으로 침착하게 닦아내면서다.
‘절대자가 다르긴 다르군.’
찻물이 뿜어지는 속도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했다...
자각하고 반응했을 땐 이미 찻물이 얼굴을 뒤덮기 직전이어서 수공(水攻)을 일부 허용하고 말았다.
‘과연 유일신... 실력적으로도 믿음직해졌어.’
내심 흡족해서 편안한 표정을 짓는 적야의 대도와 달리 그리드의 얼굴은 썩어 들어갔다.
“고룡의 등을 빌린다?”
“그래, 드래곤 나이트인 그대만 할 수 있는 일이지.”
“뭔 헛소립니까? 제가 그걸 무슨 수로?”
번헬리어, 레이더스, 네바르탄, 트라우카.
실존 여부가 파악되지 않는 투명 드래곤을 제외한 고룡 명단이다.
하나 같이 미치광이란 말이다.
광증을 겪고 있는 네바르탄이 딱히 특별하게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넷은 닮았다. 나쁜 쪽으로.
애초에 그리드는 그들과 친분이 없었다.
뭔가를 부탁할 처지가 아닌 것이다.
“농담하지 마시고 올바른 방법을 알려주십시오.”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중이지만.
그리드는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트라우카의 팔로 드래곤 웨폰을 양산하겠다는 계획이 초장부터 어그러진 상태였으니까.
바알을 토벌하고 레벨을 더 올려서 끝내 칸과 헥세타이아를 구출하겠다는 목적이 통째로 어긋난 것이다.
한시라도 빨리 사태를 해결하고 싶었다.
한데 해결책을 손에 쥐고 있는 사람이 농담으로 시간을 지체했으니 상당히 불쾌했다.
“내가 농담 따위나 하려고 그대를 만나러 온 줄 아나?”
이어지는 대도의 말은 몹시 충격적이었다.
“곧 두 마리의 고룡이 현현할 걸세. 하나는 번헬리어. 그대도 예상하고 있겠지만 바알 토벌의 낌새를 읽고 그대와의 협력을 시도하겠지.”
확실히.
트라우카도 말했었다.
곧 번헬리어가 협력을 요청할 거라고.
그리드도 그럴듯한 추측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하나는 누굽니까?”
“미식룡 레이더스일세.”
“레이더스가? 글쎄요. 아실지 모르겠지만 레이더스의 출현 주기가 돌아오려면 아직 한참 남았습니다.”
일명 미식 주기.
레이더스의 맛집 탐방 여행은 100년에 한 번씩 되풀이 된다.
“주기가 반드시 지켜질 필요는 없지. 하물며 그대에겐 레이더스의 일정을 앞당기게 할 만한 가치를 지닌 식재료가 있지 않나.”
“...?”
영문 모를 말이다.
나한테 그런 식재료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공감하지 못하는 표정을 짓는 그리드에게 대도가 설명했다.
“염룡 트라우카의 팔.”
“...!”
그리드의 머리에 벼락이 떨어졌다.
엘프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세계수의 뿌리를 산 채로 씹어 먹었다는 미식룡의 비화를 떠올린 것이다.
애초에 드래곤은 동족 포식에 익숙하다.
아니, 동족 포식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개체가 대다수였다.
힘을 얻고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트라우카의 팔을 먹으면 레이더스는 한층 더 강해지는 겁니까?”
“그건 아닐세. 드래곤의 동족 포식 행위가 힘의 상승으로 직결되기 위해선 드래곤 하트를 섭취해야 돼. 다른 신체 부위는 아무런 가치가 없지.”
맞다.
트라우카도 제논의 심장만을 꺼내 먹었었다.
“레이더스가 트라우카의 팔을 탐내는 이유는 그럼 단순히 식탐 때문이라는 거군요.”
“위험한 발언이군. 나 자신을 위해 그대에게 조언을 하자면, 레이더스 앞에서 식탐이란 단어는 절대로 꺼내지 말게. 놈은 미식가니까. 놈에게 음식이란 음미하는 것이지 게걸스럽게 탐하는 게 아니란 말일세.”
“...”
그리드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세계수의 뿌리를 캐서 잘근잘근 씹어 먹는 레이더스의 모습을 상상하며 괴리감을 느끼는 것이다.
‘충분히 게걸스러운 것 같은데.’
“아무튼 레이더스의 방문은 우리에게 커다란 기회가 될 게야. 트라우카의 팔을 조금 떼어주는 대가로 천상에 올라 나는 원하는 물건을 훔치고 자네는 헥세타이아를 얻게 될 테니.”
“음...”
그리드는 대도의 방문이 새삼 감사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레이더스와의 재회는 필연인 바.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미리 알고 대비하는 편이 낫다.
“스테이크 한 장 구워줄 정도로 내어주면 되는 건가...”
문제는 레이더스가 얼마만큼의 양을 요구하는가.
안 그래도 한정 된 재료를 누군가와 나눠야한다는 사실이 그리드는 안타까웠다.
“세부 협상 내용이야 내가 아닌 그대의 책임이고. 레이더스와 번헬리어가 찾아오기 전에 일단 인적 드문 곳으로 떠나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네만.”
적야의 대도가 은근히 재촉했다.
고룡은 작은 날갯짓 하나로 폭풍을 일으키는 존재.
도시 한복판에 나타나서 좋을 게 없었다.
‘선인은 선인이라니까.’
은근히 사람들을 걱정하는 대도에게 호감을 느낀 그리드가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이 없는 곳이라면 알고 있습니다.”
적해.
어디 무인도에 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어련히 찾아오겠지.
“그런데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만.”
“뭔가?”
“헥세타이아 님을 구출... 아니, 훔치실 때 다른 천사도 한 명 훔쳐 주실 수 없겠습니까? 아마 안 좋은 취급을 받고 있을 거라고 예상되는데...”
“...노력해보지.”
대도는 그 천사가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무심해 보이는 태도와 별개로 그리드에 대해서 잘 아는 것이다.
그리드와 칸이라는 대장장이의 일화를 알았고, 칸이 천사가 됐으리란 사실도 추측했다.
얼마 전에 세계 곳곳에 나타났던 성검과 분명한 관계가 있으리란 것까지도.
‘응당 안식을 누려야할 자들이 고통 받는 세계.’
어긋나있다.
너무 오랫동안 어긋나있었다.
바뀌어야한다.
바꾸기 위해서 노력해왔다.
보이지 않는 탑을 쌓고 천 년 동안 드래곤을 억눌러온 어느 절대자처럼 영웅다운 면모를 보인 적은 없지만.
노력해왔노라 자부한다.
깊은 지하에 틀어박힌 채 애써온 어떤 망령처럼.
어딘가에 나 같은 사람이 또 여럿 존재하길 바라며 각 시대를 대표하는 보물들을 훔치고 축적해왔다.
새로운 가능성을 열기 위해서.
“...후.”
그리드.
여태껏 없던 최고의 영웅과 함께하다 보니 자연히 피어오르는 호연지기를 한숨으로 털어낸 노인이 벗겨지기 직전이던 도둑놈의 탈을 고쳐 쓰고 말했다.
“기대해도 좋네. 훔치는 건 나의 특기니까.”
***
“또 용인가...”
깊은 산속.
체구가 장대한 백발의 중년인이 하늘을 가득 채웠다가 사라지는 그림자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한 발 늦게 불어 닥친 폭풍이 높이 솟은 나무들을 뿌리 채 뒤흔들고 급기야 뽑아내려하자 붉은 기운을 퍼뜨려 억누르면서다.
물질을 통제하는 힘.
멸망한 제국의 시조가 사용했던 ‘적기’를 계승한 사내의 이름은 쥬앙데르크.
저주 받은 마갑을 몸에 둘러 죽지 않는 불사자를 최후의 신하로 거느린 옛 황제다.
“더 이상 아무런 기척이 없습니다. 이쪽은 정리가 끝난 듯합니다.”
마갑 첸슬러가 말했다.
스쳐지나간 드래곤이 수풀을 잠시 걷어준 덕분에 인근의 수색을 빠르게 끝낸 것이다.
“그래, 가세. 쿠자라크가 기다림에 지치지 않았을까 걱정이군.”
“괜찮을 겁니다. 워낙 목석같은 사내잖습니까.”
얼마 전.
두 명의 검성으로 인해 차원의 틈새가 연속해서 붕괴됐다.
거기서 쏟아진 타차원의 존재들을 그리드의 사도들이 대부분 정리했으나 일부 지능을 지닌 존재가 숨죽인 채 살아남았다.
새로운 위협인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지하지 못했고 그리드에게도 전달되지 않았다.
하야테와 결사들처럼, 이브와 적야의 대도처럼, 황길동과 노검마처럼.
저마다 뜻하는 바가 다르고 때로는 어긋날지언정.
어쨌든 세상을 위해 싸우는 영웅들은 그리드 말고도 있었으니까.
그들에게도 희망인 그리드는 더 큰 대의에 집중하면 그걸로 족했다.
당연히 그리드도 집중하고 싶었다...
“뭐? 절반을 달라고?”
[못 본 새 말이 짧아졌군.]
“요? 농담이시죠?”
[거래의 대가로는 싸다고 생각하는데.]
무신의 유적지.
영락한 제라툴의 신세를 증명하듯 텅텅 빈 무인도가 된 그곳에서 그리드는 미식룡과 재회했다.
[만약 맛이 없으면 한 입만 먹고 돌려주지.]
‘이단을 데려오자.’
그리드는 늘 최선을 다한다.
이번 거래에서도 손해를 볼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