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4권 - 3화
무기의 형태는 쓰임에 의해서 바뀌는 법이다.
앞으로 그리드가 새로 만들 드래곤 웨폰이 꼭 검일 필요는 없었다.
한정 된 재료를 활용해야했을 때와는 사정이 완전히 달랐으니까.
‘보조무기까지 싹 다 드래곤 웨폰으로 교체해야지.’
그리드는 축복 받은 환경에 놓여있다.
각기 다른 무기를 극한의 경지로 다루는 동료들 덕분이다.
피와 땀이 강물을 이룰 때까지 노력해온 그들이 쌓아올린 데이터는 모조리 그리드에게 제공됐다.
덕분에 그리드는 온갖 종류의 무기에 통달할 수 있었다. 직접 사용하고 제작함에 있어서 자신 역시 극한의 경지를 이뤘단 말이다.
‘재료는 차고 넘쳐.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매일 새로운 무기를 뽑아낸다.’
바알 토벌은 미뤘다.
템빨단의 상위 전력을 드래곤 웨폰과 아머로 무장시킨 후에 진행하기로.
지금보다 승산이 비약적으로 오를 것이다.
정말로 어쩌면 바알의 무한한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죽이길 반복할 수 있지 않을까...
‘아수라가 큰 변수로 작용하지 않는 이상은.’
고작 하나의 손.
아수라는 신체의 일부분만으로 엄청난 존재감을 뽐냈었다.
무지막지한 불길함을 품은 그것을 바알이 휘두를 때마다 템빨단과 사도들은 큰 위험에 빠진 바 있다.
자신의 손으로 악신을 만들겠다는 바알의 병신 같은 염원이 여태껏 없던 괴물을 태동시키는 것이다.
“정말로... 이게 끝인가요?”
아이린의 목소리가 그리드의 상념을 깨웠다.
달뜬 숨결을 토하는 그녀의 얼굴엔 아쉬움이 가득 담겨있었다.
그리드가 정을 주지 않은 까닭이다. 부드럽게 입을 맞추며 몸을 어루만져주는 게 끝이었다.
따스한 사랑이 느껴졌으나 격정은 없는.
아이린의 기대와는 사뭇 다른 잠자리였다.
“개선하시기 전에 타이탄에 들르셨다고 들었어요.”
아이린은 오늘 밤을 무려 3달 동안 기다렸다.
물론 그리드가 기력을 되찾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한 달이었지만 메르세데스, 바사라와 기력을 공유하다보니 긴 텀이 생기는 것이다.
안 그래도 신격을 쌓고 검술을 연마하며 기운이 넘치게 된 아이린 입장에서 3달의 독수공방은 엄청난 고역이었다.
새치기를 용납할 수 없단 말이다.
약속과 신뢰의 문제였다.
“음...? 헉, 오해하지 마시오. 바사라와는 레이단의 방위 문제로 의논을 나눴을 뿐, 그녀의 침소가 있는 방향으론 눈길조차 돌리지 않았소.”
“레이단의 방위 문제를 어째서 그녀와 논의하셨나요? 레이단은 바사라 왕의 통치 구역이 아닐 텐데요.”
“아니 뭐... 조언도 얻을 겸 겸사겸사 담소를 나누려고... 자주 챙겨주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에...”
그리드는 아이린에게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언젠가부터 쭉 그랬다.
솔직하게 고백하는 그를 빤히 바라보는 아이린의 굳었던 얼굴에 차츰 미소가 번졌다.
“그렇군요. 훌륭하세요. 저는 폐하의 모든 면을 사랑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족을 아끼시는 모습을 세 번째로 좋아한답니다. 하지만 이번엔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오늘은 중요한 약속의 날인데 저를 가만히 놔두셨으니까요.”
“그것이... 자식을 얻고 싶으면 정기를 최대한 좀 축적해놓을 필요가 있다고 어떤 신선이 말하더구려...”
그리드는 이브와 리치들의 증언을 통해서 신선 여울랑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여 그녀를 감옥에서 풀어줬는데, 라우엘은 신선으로 많은 지식을 쌓은 그녀를 라인하르트의 귀빈으로 초대해 많은 질문을 쏟아냈다.
그렇다.
질문 중에는 그리드의 자식 농사에 관한 문제도 포함됐다.
그리드에게 신체적인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단 사실을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공개하게 된 것이다...
그리드가 더 많은 자식을 낳아야 국가에 이롭다고 믿는 라우엘 입장에선 그리드의 수치심 따위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아무튼 여울랑은 말했다.
그리드의 씨가 너무나도 막강하여 섭리의 비호를 받는 중이라고.
자연계를 지배하는 원리와 법칙이 그리드의 씨앗을 귀중하게 여기는 까닭에 도리어 잉태를 남발하지 못하도록 조율하고 있다는 무슨 사이비 교주 같은 주장을 펼쳤다.
“나의 정기가 불완전한 상태로 아이를 얻게 되면... 안 그래도 반신으로 태어나게 될 그 아이는 나와 비교해서 손색이 클 거라고 하더군. 그때 생길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세상 자체가 우리의 2세 계획을 훼방 놓는 거였고.”
만약 그리드의 자식이 그리드의 재능을 잇지 못한다면.
그건 굉장히 심각한 문제다.
그리드를 증오하는 적들에게 손쉬운 표적이 될 테니까.
단순히 존재하는 것만으로 끝없는 침략과 전쟁을 야기할 거란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로드는 참 기특했다.
부단히 노력하는 까닭에 인간 시절의 그리드와 비슷할 정도로 빠른 성장 속도를 보여주지 않나.
적들이 쉽게 노리질 못했다.
애초에 그리드가 걸어온 길을 고스란히 답습하는 까닭에 활동 반경을 예측하기 쉽다는 게 강점이다. 로드를 노릴만한 위험과 변수를 제국이 사전에 차단하는 게 가능했다.
“...전혀 신뢰가 안 가는 주장이긴 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정기를 아껴볼 생각이오.”
“그렇...군요. 얼마나요?”
“힘들겠지만 1년쯤...?”
“1년...”
아이린의 녹색 눈동자가 마구 흔들린다 싶더니 차츰 빛을 잃어갔다.
몹시 큰 충격을 받은데 이어서 좌절하는 기색.
그리드의 예상보다 더 격한 반응이었다.
결심이 흔들리기 시작한 그리드가 다급히 말했다.
“그대를 외롭게 만들지는 않을 거요. 그간 연마해온 이 두 손으로 자주 그대를 달래주겠소. 만약 부족하다면 내 언제고 그대를 안아주겠소. 자식이 대수요? 그대가 중요하지.”
“아니요.”
어느새 정신을 차린 아이린의 눈동자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살짝 젖어있는 것이 묘하게 요염했다. 마리로즈를 떠올리게 만들 정도로.
“1년의 기다림이 저희에게 더욱 귀중한 하루를 선물해주겠죠. 외로움은 백성들을 보살피며 달랠 테니 폐하께서는 괘념치 마시고 정기를 잘 모아두세요.”
“으, 음...”
뭐지?
그리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의아함을 느꼈다.
아이린이 여태껏 본 적 없을 정도로 흥분한 눈치였기 때문이다.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듯했으나 호흡부터 거칠었다.
맹수 앞의 쥐가 된 기분이랄까.
“...그건 그렇고. 가족을 아끼는 내 모습이 세 번째로 좋다면 가장 좋아하는 모습과 두 번째로 좋아하는 모습은 뭐요?”
“그야... 비밀입니다.”
“...”
여러 의문 속에 밤은 깊어져갔고.
간신히 진정한 아이린이 새근새근 잠든 모습을 확인하고서야 그리드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목적지는 당연히 대장간이었다.
성처럼 거대한 대장간.
초대형 용광로를 수용하고도 남는 규모다.
백린목도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그리드가 나설 필요도 없이 준비물이 모두 갖춰진 것이다.
증축 된 대장간과 초대형 용광로는 케를 옹과 건축가들의 작품이었고, 잔뜩 쌓인 백린목은 무려 주작 신이 직접 운반해왔다.
[고룡의 신체를 제련하는 일. 보통의 화염으로는 방도가 없을 테니 제가 당신의 곁에 머물며 돕겠습니다.]
주작은 그리드와 무척 특별한 인연을 맺고 있다.
이미 오래 전부터 그리드에게 자신의 심장을 내어주는 등 엄청난 호의를 베풀어왔다.
감정을 읽을 수 없어 차갑게 느껴지는 눈빛과 별개로 그리드를 대하는 태도가 한없이 따뜻한 것이다.
“주작께선 초국을 수호하셔야하는 거 아닙니까? 자칫 환국에서 당신의 부재를 눈치 채기라도 한다면...”
[초국의 절반이 템빨계에 편입 된 상황입니다. 사실상 당신의 영역이므로 쫓겨난 신들이 함부로 넘볼 수 없지요.]
“다행이군요...”
[순전히 당신께서 만드신 결과입니다.]
“...”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리드의 가슴은 벅차오른다.
힘내는 보람을 느꼈다.
지쳐 노곤했던 몸과 정신이 아이린과 주작 덕분에 연달아 회복되는 느낌.
환한 미소를 그린 그리드가 주작의 도움을 받아 한껏 달아오른 초대형 용광로에 트라우카의 팔을 집어넣었다.
천천히, 신중하게.
통째로 집어넣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트라우카의 팔이 워낙 거대해서다.
손부터 녹일 계획이었다.
일단 6개의 발톱을 분리해서 액세서리 제작용으로 남기고...
“...”
대장간 바깥으로 수많은 기척이 느껴졌다.
로드와 대장장이들이다.
드래곤.
감히 범접하지 못할 절대적인 생물을 재료로 삼아 무구를 제작하는 역사적인 순간을 목격하고 배움을 얻으려는 자들이었다.
야심한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인파가 모일 조짐이 보였지만 기사들이 통제했다.
위험할 수도 있다는 그리드의 경고 때문이었다.
실제로 대장간 주변엔 브라함을 제외한 사도 전원과 유페미나, 그리고 마탑주 라엘라와 반트너, 데미안이 대기하고 있었다.
대장간이 폭발할 상황을 대비하는 것이다.
폭발의 여파가 대장간 바깥까지 뻗어나가지 못하도록 사도들이 결계를 짰고 템빨단원들은 방어 스킬을 준비 중이었다.
쩌적!
무지막지한 화력이 용광로에 담긴 트라우카의 손에 균열을 일으킨다 싶었을 때.
번쩍!
초대형 용광로가 붉게 물들었다.
갈라진 염룡의 비늘에서 치솟은 열기와 주작의 불꽃이 결합되면서 급격히 상승한 온도 탓이었다.
[당신의 실력으론 제련할 수 없는 물질입니다.]
‘망했...’
그리드가 염두에 뒀던 가장 최악의 사태가 닥쳐온 가운데.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앙!!
끝내 열기를 감당 못한 용광로가 폭발했다.
“...!!”
사도들이 짠 결계가 요란하게 흔들리며 사람들의 비명이 빗발쳤다.
천만다행인 사실은 폭발의 여파가 대장간 외부에 미치지 못했다는 점.
사도들의 결계가 뚫리기 직전에 유페미나와 라엘라의 마법을 등에 업은 반트너와 데미안이 불길을 몸으로 막았다.
덕분에 거대한 화염의 파도는 도시로 뻗어나가지 못하고 하늘 높이 솟구쳤는데, 그 광경이 마치 염룡 트라우카의 브레스를 닮았다.
“...”
아직 동이 트려면 이른 시간이건만 밤이 물러났다.
구름을 모조리 증발시키며 솟구친 화염의 잔재가 인공적인 태양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어느새 멀쩡히 재생한 트라우카의 팔과 붉게 물든 하늘을 번갈아 쳐다보는 그리드의 귓전에 의외의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내심 기대했건만 역시 이렇게 되는군.”
“당신?”
메르세데스는 진즉 그리드의 곁으로 다가온 상태였다.
그녀가 뽑아 쥔 검이 겨누는 대상, 초월을 이루고도 세월의 무게에 짓눌린 노인이었다.
“적야의 대도...”
그리드가 새삼 깨달았다.
눈앞의 노인이 감당해온 세월.
어쩌면 하야테와 비견되거나 그 이상이 아닐까?
“무슨 수로 잠입한 겁니까?”
사리엘의 차가운 음성이 불길에 휩싸인 현장을 급격히 냉각시켰다.
목소리가 동요로 떨린다.
외부인의 침입을 허용했다는 사실에 굉장한 수치심과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다.
당연하다.
사리엘은 다른 사도들과 달리 활동에 제약이 있는 입장이었다.
어쩔 수 없이 라인하르트의 수호라는 소임을 떠맡게 됐는데 그조차도 제대로 못해낸 것이다.
“수치심을 느낄 상대가 아니다.”
지크가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네는 그때.
“그대는 대장장이의 신도 아니면서 어찌 고룡의 신체를 제련하겠다는 오만을 부리는가?”
적야의 대도가 그리드에게 질문했다.
힐난에 가깝다.
메르세데스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지는 반면 그리드는 깨닫는 바가 컸다.
‘오만.’
틀림이 없는 말이었다.
자신의 근원은 대장장이가 맞지만 궁극마저 대장장이인 것은 아니니니까.
자신이 여전히 최고의 대장장이라고 착각했다.
돌이켜보면 단 한 번도 헥세타이아를 뛰어넘은 적이 없건만.
“그것은 본체에서 분리된 지 오래여서 원기를 잃었던 번헬리어의 송곳니 따위완 격이 다르네. 고룡의 기운을 여전히 생생하게 담고 있단 말일세. 한데 조심성 없게 도시 한복판에서... 그대는 스스로를 굉장히 과신하는군. 여러 도움을 받으며 승승장구해온 끝에 주제 파악을 못하게 됐나?”
급기야 메르세데스의 칼이 쏘아지려는 순간이었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겁니까?”
메르세데스를 물린 그리드가 본론을 물었다.
적야의 대도.
여태껏 그는 이유 없이 출현했던 적이 없다.
과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올라갈 때일세.”
노인의 주름 진 손가락이 하늘을 가리킨다.
“나를 천상으로 운반하시게. 그럼 난 그대를 위해서 대장장이의 신을 훔쳐주지.”
검버섯 핀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무척 의미심장해서 바알의 미소가 연상 될 지경이었다.
“그대는 헥세타이아의 힘을 빌리고 나는 신물을 훔쳐 뜻을 이루게 되므로 서로에게 좋은 거래 아닌가?”
“폐하를 대하는 태도가 못 배워먹은 자의 표본입니다. 신용할 만한 자가 아니에요.”
메르세데스가 의견을 피력했다.
그나마 뮐러의 가르침을 받아서 망정이지, 뮐러를 만나기 전이었다면 그리드가 말릴 틈도 없이 대도와 칼부림을 벌였을 그녀다.
‘예민할 만도 해.’
전날.
그리드는 메르세데스를 달래주느라 진땀을 뺐다.
매번 중요한 순간마다 부름을 받지 못한단 사실이 굉장히 슬펐는지 우울해보였던 까닭이다.
‘아무튼 적야의 대도는 신뢰해도 좋은 인물이다.’
그리드는 사리엘이 드라시온이던 시절 함께 싸웠던 적야의 대도를 기억한다.
<나라 훔치기>라는 말도 안 되는 스킬로 무수히 많은 인명을 구했었다.
그가 헥세타이아의 소검을 회수했던 이유 또한 알고 있다.
그리드가 신들의 표적이 되지 못하도록 배려했던 것이다.
게다가 지옥 침공 당시 비반을 도운 전력도 있었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함이라는 명분을 내세우긴 했었지만...
‘괴팍한 성정을 지닌 반면 선인이야.’
대도는 약속 또한 기가 막히게 잘 지킨다.
헥세타이아의 소검을 가져갔을 때.
자신이 뱉은 말을 수습하기 위해서 네바르탄의 목걸이를 순순히 돌려줬을 정도니까.
결국.
“정말로 헥세타이아 님을 구출할 수 있는 겁니까?”
“구출은 모르겠고. 훔치는 거라면 뭐.”
대답으로 충분했다.
눈앞의 노인은 지혜의 탑을 털어먹었던 괴물이다.
자신의 분야에선 고룡보다 몇 수 위란 의미다.
그리드는 거래에 응하기로 결정했다.
기껏 얻은 트라우카의 팔을 썩히지 않으려면 일의 순번을 바꿔야 할 필요가 있었다.
‘앞으론 차라리 계획을 세우지 말까.’
매번 계획과 다르게 흘러가는 상황에 회의감을 느끼는 그리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