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692화 (1,691/1,794)

템빨 84권 - 2화

올해 초.

크라우젤은 대한민국 강원도에 별장 한 채를 구입했다.

어째서 강원도냐고 질문하자 어머니의 할머니의 할아버지께서 그리워하셨던 고향이기 때문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뭔가 태클을 걸고 싶었지만... 아무튼 그리드는 유라, 지슈카와 함께 강원도를 찾아갔다.

어머니를 모시고 잠시 입국한 크라우젤을 만나 회포를 풀 생각이었다.

별장이라기엔 너무나도 으리으리한 대저택이 산 중턱에 우뚝 선 모습이 그리드를 감탄시켰다.

직접 마중을 나오신 크라우젤의 어머니께선 유라와 지슈카를 미소 짓게 만드셨다.

건강하신 모습이 보기 좋았다.

일행은 즐거운 하루를 꿈꿨다.

지옥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한 채.

‘조화가 중요해.’

그리드는 크라우젤의 어머니께서 만들어주셨던 카레를 떠올렸다.

고사리와 두릅이 듬뿍 들어간 카레.

몹시 썼다.

잔가시가 비죽비죽 솟은 두릅의 거칠고 물컹거리는 식감이 특히 끔찍했다.

하지만 당연히 내색하지 않고 웃으며 먹었다. 연신 딜리셔스를 외치면서.

옛날 고려인들이 손쉽게 구할 수 있던 산나물을 재료로 쓴 크라우젤 집안의 카레는 고려인 동포들의 슬픈 역사가 담겨있었다.

하물며 벗의 어머니께서 만들어주신 음식이다.

입맛에 맞지 않다고 해서 거부할 순 없는 것이었다.

그리드는 카레를 싹싹 비웠다. 얼굴이 파랗게 질린 유라와 지슈카의 카레까지 빼앗아서 제 뱃속에 몽땅 털어 넣었다. 헛구역질을 억누르기 위해 허벅지를 꼬집어가며 견뎠다.

그러다가 뒤늦게 본 크라우젤의 표정을 확인하고 깨달았다.

자신이 쓸데없는 짓을 했다는 사실을...

크라우젤의 표정은 말하고 있었다.

미쳤냐고.

그걸 왜 다 먹냐고.

그리드는 그날 꼬박 하루를 배탈에 시달려야만 했다.

조화의 중요성이란, 그만큼 큰 고통을 겪으며 재차 상기한 교훈인 것이다.

‘아무리 비싸고 맛있는 카레를 써도 고사리와 두릅을 왕창 넣으면 답이 없듯이... 조화란 중요하다.’

하위룡은 결코 약하지 않다.

드래곤답게 압도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신체 위로 둘러친 절대방어.

심장에서 무한히 샘솟는 마력으로 난사하는 마법과 강력한 브레스.

어지간한 초월자는 접근 자체가 불가능했다. 설령 접근하더라도 타격을 입힐 가능성은 현저히 낮았다.

용언까지 쓰기 시작하면 초월자 여럿이 덤벼도 승산이 없었다.

애초에 그런 생물인 것이다.

드래곤과 대적하기 위해선 일단 절대자여야 했다.

어디까지나 싸움이 성립된다는 거다. 절대자라고 해서 무조건 드래곤과 싸워서 이기는 것도 아니었다.

상성이 중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비반은 드래곤에게 상극이다.

무엇이든 베는 검기에 용살의 기운과 그리드의 신성을 덧씌워버렸으니까.

용살자가 아니면서도 마치 하야테처럼 드래곤의 강점을 여러 개 무력화시키는 조화를 이룬 것이다.

존경심이 저절로 피어올랐다.

[지혜의 탑... 한 줌조차 안 되는 작은 집단 따위가 두 명의 절대자를 거느리다니...]

잘린 날개를 용언으로 재생시킨 드래곤이 상공 높이 솟구쳤다.

추격해오는 결사들을 마법의 난사로 저지하는 한편 브레스를 2회 연속 내뿜어 비반을 멀찍이 뿌리쳤다.

쏴아아아아...

하늘에서 붉은 비가 쏟아진다.

용언과 브레스를 연속으로 사용한 여파를 하위룡의 몸으로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피를 대량으로 쏟아내는 모습이 위태롭게 보였다.

역시나.

[포기하는 수밖에.]

하위룡이 등을 돌렸다.

위계가 낮은 드래곤일수록 패도적인 이유는 그들의 삶이 벼랑 끝에 내몰려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다른 드래곤에게 추적당하고 잡아먹힐지 몰라 느긋할 수가 없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항시 발악하는 태도로 살아갔다.

바보라서 무식한 게 아니란 말이다.

승산 없는 싸움에 집착하지 않았다.

파하앗...!

전조 없는 텔레포트.

마법의 종주인 드래곤은 당연히 마법을 무영창으로 딜레이 없이 시전했다. 체면을 버리고 오직 도망치는데 집중하면 쫓기가 힘들었다.

마리로즈처럼 대상의 신체가 마법에 반응하기도 전에 따라붙어 뒤쫓는 방법이 존재하긴 했지만...

비반은 마법에 대해서 문외한이었고 그리드도 마법에 정통하지 못했다. 그녀처럼 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하야테는 달랐다.

용을 잡음에 있어서 하야테는 마법을 알 필요가 없다.

━━━!

그 어떤 소음도 없이.

뚝 떨어진 거대한 백색의 기운이 하늘을 갈랐다.

드래곤의 생존을 돕는 마법이 즉시 발동을 멈췄고 안 그래도 넝마가 됐던 절대방어가 산산이 조각났다. 가장 두꺼운 비늘에 보호받고 있던 심장은 더욱 처참하게 부서졌다.

비반이 운영했던 용살의 기운보다 훨씬 더 순수하고 강력한 용살의 기운에 의해서다.

하야테가 멀찍이서 휘두른 일검이 만든 결과였다.

[...드래곤 슬레이어!!]

이름조차 밝히지 못한 하위룡의 마지막 의념이 단말마였다.

마력의 잔재 탓에 목과 심장을 잃은 채로도 허공에 한참을 정지해 있던 거체가 새카만 바다로 서서히 추락했다.

라드볼프의 마장기들이 뒤쫓아 회수했다.

용살.

탑이 생기고 무려 천 년이 지나 이뤄진 결과다.

온갖 감회에 젖은 결사들이 할 말을 잃었다.

현장이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비반!!”

한참이 지나서야.

제시카가 비반에게 달려갔다.

워낙 강력해서 유형화 된 마력을 몸에 두르고 비행하는 그녀의 궤적은 신비했다. 메아리 마법의 여파로 파문을 일으키는 마력 탓에 하늘에 백색 원반의 무대가 채워져 가는 것처럼 보였다. 오직 비반과 제시카를 위한 무대였다.

“다행이야... 무사히 돌아와서 정녕 다행이야...”

“말에 어폐가 있군. 이전보다 더 나아진 상태로 돌아온 것인데.”

슬며시 미소 지은 비반이 제시카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탑에서도 사랑은 싹튼다.

이뤄져선 안 될 사랑이다.

결사들은 오늘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신세였다. 무한에 가까운 수명과 별개로 세계를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친 그들의 나날은 한없이 위험했다.

서로를 지금보다 더 소중하고 각별하게 여기었다가 잃게 되면.

그 충격을 쉽게 감당하지 못하고 본분에 집중하지 못할 터였다.

수백 년을 살아온 초월자도 깊고 진실 된 감정 앞에선 냉정할 수 없는 법이기에.

“무, 무슨...”

제시카가 당황했다. 애틋하게 바라보며 눈물을 닦아주는 비반의 행동이 필시 연인의 그것과 닮았으니까.

이 순간.

비반은 분명히 한 발 자국 앞으로 나아가려하고 있었다.

두려워서 외면해온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낼 조짐을 보였다.

잔뜩 겁을 먹은 제시카가 뒷걸음치는 순간.

“앞으론 나 또한 하야테 님의 책임을 나눠서 짊어질 거요.”

비반이 제시카의 손목을 덥썩 붙잡았다.

“그리드와 함께 말이오.”

하야테와 결사들을 찬찬히 바라본 그가 제시카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선언한다.

“그 무엇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소. 앞으론 어느 누구도 귀공들을 쉬이 해치지 못할 테니 귀공들께선 지금까지처럼 의무를 다하는 한편으로 부디 사람답게 사시오.”

온 세상을 통틀어도 절대자의 숫자는 적다.

아스가르드와 환국의 주신들, 그리고 상위룡 이상의 드래곤을 모조리 포함시켜도 서른 단위가 못 됐다.

하나하나가 무척 특별한 것이다.

절대자를 하나의 범주로 묶는 건 말이 안 될 정도로.

그러므로 비반에겐 자격이 있었다.

무엇이든 선언해도 좋았고, 무엇이든 행해도 좋았다.

감히 그 누구도 그의 선택에 토를 달 수 없다.

“...혹시 하야테 님께서 안 된다고 하시면 당연히 방금 내 말은 취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반은 하야테의 눈치를 살폈다.

뒤늦게 아차 싶어선 황급히 말을 수습했다.

똑같은 절대자가 됐다고 해도 탑의 수장은 하야테다.

또한 비반은 여전히 하야테를 존경했다.

하야테의 권위에 도전할 생각이 추호도 없단 말이다.

큰 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안절부절 못하던 그의 얼굴이 이내 환하게 밝아졌다. 하야테의 말 덕분이었다.

“비반 공의 말이 맞소. 두렵다고 권리를 포기한 채 숨어 지내는 삶은 앞으로 끝이오.”

결사들이 속세를 떠난 가장 큰 이유는 드래곤에게 추적당할 가능성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젠 상황이 크게 바뀌었다.

언제든지 템빨계와 협력할 수 있게 된 것으로 모자라 또 한 명의 절대자를 얻었으니까.

물론 고룡들을 좌시할 순 없으니 탑의 위치를 대놓고 드러낼 순 없겠지만... 어쨌든 숨통은 트인 것이다. 앞으로는 여러 제약을 벗어던질 수 있었다.

[동족이 인간에게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드래곤들의 분노가 당신에게 쏟아집니다.]

마침 들려온 소식에 도발하듯 도리어 용살의 기운을 확장시킨 하야테가 깊이 고개 숙여 사죄했다.

“내가 처음부터 용기를 내었다면 귀공들을 벼랑 끝까지 몰아붙이는 일도 없었을 터인데... 그저 미안할 따름이오.”

하야테의 그늘 진 얼굴은 몹시 초췌했다.

비반의 사정을 알고 주화입마에 빠지기 직전까지 갔던 만큼 멀쩡할 리가 없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한 걸음에 하야테 앞에 선 비반이 그를 부축하며 말했다.

“당신의 선택은 늘 옳았습니다.”

만약 하야테가 신중하지 못했다면.

탑은 이미 수차례의 위험을 겪고 다수의 결사를 잃었을 것이며, 드래곤의 활동을 원활히 유도하거나 억제하지 못해 속세에 엄청난 피해가 연달아 발생했을 것이다.

비반이 하야테가 못해온 일들을 하기 위해 애썼던 이유는.

하야테가 틀렸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하야테의 입장을 이해해서였다.

탑의.

아니, 인류 역사상 유일했던 절대자.

하야테는 본인을 위험에 빠뜨려선 안 되는 입장이었다.

실제로 하야테는 그리드가 절대자가 된 뒤로 용기백배했다. 전과 다른 적극성을 보여줬다.

비반도, 그리드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앞으로 하야테는 엄청난 활약들을 펼쳐갈 것이다.

비반과 그리드가 필사적으로 도울 것이며, 종국에 이르러서 막강해진 하야테와 탑은 그리드의 힘이 되리라.

그것은 쉽게 바뀌지 않을 운명이었다.

비반이라는 절대자가 탄생하면서 세계에 새겨진 새로운 운명.

[새롭게 탄생한 절대자의 이름은.]

그리드를 절대자로 규정할 당시.

시스템은 굉장히 오랜 시간을 할애했었다.

비반의 경우도 비슷했다.

그리드처럼 몇 날 며칠이 걸리진 않았지만 시스템은 새로운 절대자를 규정함에 있어서 대단히 신중했다.

하여 절대자의 탄생 소식을 알리고 수십 분이 흐른 지금에 이르러서야 멈췄던 월드 메시지가 다시 흘렀다.

[검신 ‘비반’입니다.]

신의 종류는 다양하다.

태어난 순간부터 신이었던 존재들이 있는 반면 인간들의 숭배를 받아 신으로 거듭난 자들이 있었고, 또한 스스로 신을 참칭하는 존재들이 있었다.

비반은 달랐다.

숭배 받아 신이 된 것도 아니고, 스스로 신을 자처한 것도 아니다.

단순히 강해서.

그가 휘두르는 검이 신의 권능과 맞먹는 위력을 발휘할 것이기에 시스템은 신이라는 ‘칭호’를 내린 것이다.

“...검신.”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검성 뮐러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앞서 비반이 펼쳤던 검의 궤적들을 복기하며 얻은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더 큰 충격을 받은 까닭이다.

내가 검으로 최고이던 시대가 끝났다...

이와 같은 진실을 인지하고 느낀 충격이었다.

“비반...”

절대자의 이름을 곱씹는 뮐러의 입가가 서서히 올라간다.

자신보다 더 뛰어난 검사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에게 상상해본 적 없는 쾌감을 선사하고 있었다.

희망 없는 세계의 진실을 알게 된 이후로 상실됐던 의욕이 마구 샘솟는 감각.

목표가 생긴 덕이다.

‘봐야 할 등이 많구나.’

하야테와 비반, 그리고 그리드의 뒷모습을 차례대로 바라보면서.

뮐러는 수백 년 만에 가장 밝은 미소를 그렸다.

한편 그리드는...

‘인벤토리에 안 들어가는데?’

마장기들이 인양해온 드래곤의 유해를 앞에 두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어쩔 수 없이 신들의 무덤을 호출했다.

지상 최강의 병기를 단지 시체 운반용으로 써먹기엔 다소 찝찝한 구석이 있었지만 뭐 어쩌겠나. 뭐든 편한 게 최고다.

“그리드 님!!”

구름과 달을 가리며 등장한 초대형 비행선에서 그리드를 부르는 목소리가 빗발쳤다.

비행선에 도시를 건설 중인 케를 옹과 제국의 백성들, 그리고 사도들의 목소리였다.

드디어 끝났다...

고향에 돌아온 기분을 느낀 그리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비행선에 올랐다.

쉴 생각은 없었다.

이번엔 대장장이로서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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