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4권 - 1화
“정말로 괜찮은 거요?”
금일 오전.
비반에 이어서 그리드까지 의식을 잃었다.
비반의 심상으로 침투한 여파라는데, 밤이 찾아온 지금까지 의식을 되찾지 못하는 두 사람을 보자 결사들은 초조해졌다.
애초에 타인의 심상에 침입하는 게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만약 비반 공에 이어서 그리드 님까지 잘못 되신 거라면... 우리는 부득이 귀공께 책임을 물 수밖에 없소.”
결사들은 뮐러를 존경한다. 하지만 뮐러와 개인적인 교분이나 신뢰를 쌓은 관계는 아니었다. 뮐러의 업적과 평판을 고려해도 차츰 의심하는 수밖에 없었다.
뮐러도 이해했다.
“만에 하나 제가 그리드 님께 폐를 끼친다면.”
고개를 끄덕인 그가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당장 지옥으로 떨어져 바알의 목을 3회나마 베고 죽겠습니다.”
무한에 가깝다는 지옥 주인의 목숨을 약간이나마 줄여놓은 뒤 죽겠다...
그조차도 그리드가 앞으로 쌓아나갈 업적과 비교하면 하찮은 것에 불과했지만, 뮐러의 입장에선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결사들이 눈살을 구겼다.
“지금 협박하는 거요?”
뮐러가 바알에게 죽는다?
그보다 더 최악은 없다.
검성의 힘을 차지한 바알은 지금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강력해질 테니까.
“적게나마 책임을 지겠다는 겁니다. 어차피 그리드 님께서 잘못되는 순간 이번 세상은 끝인데 협박이 성립하겠습니까?”
뮐러는 그리드가 세상에 반드시 필요하단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리드를 위험에 빠뜨릴 일은 없음을 못 박았다.
하지만 사실 그도 내심 초조했다.
그리드가 생각보다 너무 오래 의식을 잃고 있었으니까.
‘검의 저항이 내 예측 이상으로 강력한 듯한데...’
현재 비반의 심상은 검이 다스리고 있을 터였다.
본래 비반의 일부에 불과했을 한 자루의 작은 검이 비반보다 거대해진 상태로 비반을 흡수했을 테니까.
소통이 힘든 대상이란 말이다.
어쩌면 그리드는 검이 된 비반과 문답무용의 격전을 벌이고 있을 수도 있다.
‘...그리드 님의 기척이 비반 공의 의식을 깨울 거라고 기대했건만.’
뮐러는 그리드를 최근에야 알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드는 뮐러의 삶을 통틀어서 가장 특별한 인연으로 각인 됐다.
그만큼 대단한 인물인 것이다.
뮐러가 추측하기로, 그리드와 몇 년째 인연을 맺어온 비반에게 그리드는 몹시 각별한 존재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물며 비반은 그리드가 만들어준 드래곤 웨폰의 주인이니까.
검사가 검에 의존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을 뒤늦게나마 깨우친 상태일 거라고 믿었다.
그리드가 깊이 잠든 비반의 의식을 깨워줄 거라고 기대한 배경이다.
하지만 상황을 보니 힘든 듯했다.
비반의 의식은 뮐러의 예상보다 더 깊이 침잠한 것 같았다.
‘여기서 더 늦어질 경우엔 내가 직접 나서서 힘으로 부수는 수밖에 없겠군.’
검에 한해서 뮐러는 무적에 가깝다.
자신이 검을 잘 다룰 뿐만 아니라 검을 다루는 대상과 싸워서 무조건 승기를 잡는 게 가능했다.
그러므로 바알의 목을 3회 벨 수 있다고 단언했다.
유쾌한 척하길 즐기는 바알의 성격상 최소 3번은 검술을 써서 자신과 대적하려 들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비반의 심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검’인 이상.
뮐러가 그것을 이기지 못할 리 만무한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그리드를 보낸 이유는 당연히 비반을 위해서였다.
비반의 심상을 지배 중인 검은 비반이기도 하다.
뮐러가 비반의 심상에 침입해 검을 베어버린다는 건 즉 비반의 심상을 벤다는 의미가 됐다. 마음과 기억, 그리고 경험 따위를 훼손시킬 우려가 있는 것이다.
비반을 온전히 구출하기 위해선 무력이 아닌 대화가 필요했고, 대화로 비반을 구출할 만한 인물로 가장 적합한 것은 하야테와 그리드였다. 적어도 뮐러는 비반의 의식을 폭력 없이 깨울 자신이 없었다.
‘이 상황에선 하야테 님을 보내는 게 가장 이상적이지만...’
하야테는 창백하게 질린 상태였다.
비반을 망친 당사자가 본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적잖은 충격을 받은 눈치다.
용살자인 자신이 드래곤을 겁낸 까닭에 비반을 저 지경까지 몰아붙였으니 죄책감을 느끼는 게 당연했다.
심기체의 합일이 깨질 듯 흔들리는 것이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리드 님 다음으로 잃어선 안 될 분이다. 저분을 위험에 빠뜨릴 순 없어.’
인류 최초의 절대자.
순수한 인간의 몸으로 절대지경에 오른 존재는 하야테가 유일했다.
다른 절대자들과 달리 인간인 탓에 여러 제약을 받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서 드래곤의 폭주를 억제해왔다.
누구보다 더 드래곤을 두려워하면서도.
실력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흠결이 없는 위인인 것이다.
인류의 자부심이기도 했다.
뮐러가 생각하기에 하야테의 가치는 세계보다 높았다.
이번 세상이 멸망할지언정 하야테만큼은 기필코 지켜야 인류의 희망이 이어질 것이기에.
혹시 또 아는가.
다음 세상에서, 또는 그 다음 세상에서 하야테가 세계의 종말을 끊어낼지.
‘그리드 님께서 이번 세상에서 종말을 끊어주시길 바라지만.’
하야테는 보험이다.
잃어선 안 된다.
재차 확신한 뮐러가 심검을 뽑았다.
자신이 직접 나서서 그리드와 비반을 구출할 각오였다.
자칫 비반을 해칠지언정 현재로서는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
스카악.
심검을 휘둘러 비반의 심상으로 향하는 입구를 열려고 시도하던 뮐러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입구가 열리지 않았으니까.
무엇이든 베어야 옳은 심검이 비반의 심상을 베지 못했다.
‘뭐지?’
어떤 심각한 문제가 생겼음을 깨달은 뮐러가 그리드의 신변을 한층 더 걱정하는 그때였다.
“비반!!”
“그리드 님!”
죽은 듯 잠들어있던 그리드와 비반이 동시에 눈을 떴다.
드디어 얼굴을 편 결사들이 안도하는 가운데 뮐러는 전율했다.
심검이 비반의 심상을 베지 못한 이유를 눈치 챈 것이다.
‘세계가... 오분 되었다.’
지상, 지옥, 천상, 환국.
세계는 크게 4개로 나뉘어있었다.
각자 절대자를 보유한 그 4개의 세계를 제외하면 다른 차원들은 하찮은 것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판도가 바뀌었다.
세계는 4개가 아닌 5개로 나뉘게 됐다.
지상, 지옥, 천상, 환국, 그리고 지혜의 탑으로.
채 10명이 안 되는 집단이 다른 세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단 의미다.
그럴 수밖에 없다.
무려 2명의 절대자를 보유하게 됐으니까.
“그대...”
하야테 또한 비반의 이변을 감지하고 있었다.
비반의 깊고 그윽한 회색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술렁이는 분위기 속에서.
“그리드의 도움을 크게 받아 심득을 얻었습니다.”
비반이 설명했다.
순간.
번쩍!!
그리드의 황혼이 찬란한 광채를 내뿜었다.
[절대자의 탄생에 기여한 황혼의 강화 수치가 +3이 되었습니다.]
압도적인 기운이 장내를 휘감는다.
움찔 놀란 결사들이 서서히 압도당했다.
황혼에서 어렴풋한 고룡의 기운을 느낀 까닭이다.
고룡의 이빨로 만든 검이 진정으로 드래곤의 기운을 품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검, 잠시 빌릴 수 있겠나?”
비반이 그리드에게 정중히 부탁했다.
“물론입니다.”
그리드가 흔쾌히 건네줬다.
애초에 그는 결사들을 위해서 새로운 드래곤 웨폰을 만들 계획이었다. 황혼을 빌려주는데 망설일 이유가 전혀 없었다.
스르륵.
황혼을 쥔 비반의 모습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리드와 하야테, 뮐러가 차례대로 시선을 바깥으로 옮겼다.
거대한 창문 너머로 비반의 등이 보였다.
너울거리는 잿빛의 머리카락이 달빛을 받아 흰 눈처럼 빛난다. 황혼이 내뿜는 주황색 신성을 차갑게 식혀주는 느낌이다.
“...!”
한 발 늦게 비반을 발견한 결사들이 경악했다.
밤하늘을 관통하며 다가오는 거대한 빛을 발견한 까닭이다.
드래곤의 브레스였다.
정확히 비반을 노리는 궤적.
기껏 정신을 차린 비반을 잿더미로 만들고 탑을 붕괴시킬 포격이었다.
“탑의 위치를 특정하기 시작했구나...!”
이주를 서둘러야한다.
하지만 당장 습격해온 드래곤을 감당하려면 꽤 많은 희생을 치러야할 터였다.
첫 번째 희생자가 비반이 되게 생겼고.
꽈아아아앙!!
켄의 주먹이 창문을 박살냈다.
프론잘츠 형제와 베티가 창문을 박차고 날아갔고 아벨리오의 그림과 제시카의 속성 버프 마법이 비반의 몸에 덧씌워졌다.
5좌 쥬르네는 드래곤을 상대로 테이밍을 시도했다. 성공할 가능성은 당연히 0퍼센트였지만 잠시나마 행동에 제약을 주는 게 이론적으로 가능했기 때문이다.
모두가 필사적이었다.
그리드, 하야테, 뮐러를 제외하고.
콰르르르르릉!!
염룡 트라우카의 브레스와 비교하면 볼품없이 약한 불줄기.
하지만 인간의 도시쯤은 통째로 소멸시켜버릴 수 있는 하위룡의 브레스가 비반의 지척까지 다가왔다.
결사들이 도착하기 한참 전이었다.
“비반!!”
홀로 브레스에 맞서게 생긴 비반을 염려한 결사들이 절규하듯 외치는 그때.
꽈과과과과과과과과과광!!
브레스가 연달아 폭발을 일으켰다.
일직선으로 쭉 이어진 불길을 비반이 관통하며 나아가자 발생한 폭발이었다.
밤하늘을 화염으로 이뤄진 해일이 뒤덮어가는 느낌이다.
[...뭣이?]
경악성에 가까운 드래곤의 의념이 결사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됐다.
뮐러와 하야테는 살짝 입을 벌리고 말았다.
뮐러는 황혼의 위력을 이용해서 질주하는 비반의 움직임을 보면서 감탄했다. 검과 교감하고 상호 의지하는 모습. 검아일체의 극의라 할 수 있었다.
하야테는 비반의 검기에 섞인 용살의 기운을 느끼고 감탄했다.
본래 용살의 기운은 오직 용을 해치는데 집착하여 폭급한 기질이 있었다. 살기와 닮아서 의도를 읽히기 쉬웠다.
하지만 비반이 다루는 용살의 기운은 달랐다. 검기에 자연히 억눌려서 오로지 필요한 순간에만 위력을 발휘했다. 드래곤이 대응하기 어렵도록 만들었다.
[놈...! 네놈은 뭐냐!!]
비늘이 베이고 뼈가 도려내진 드래곤이 발악적으로 외쳤다.
새로운 드래곤 슬레이어의 출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천하의 드래곤에게 비반이 미지로 다가왔다.
“내가 누구냔 말이지.”
질문을 곱씹어본 비반이 슬그머니 웃었다.
결사들의 뒤편에서 합류해오고 있는 그리드에게 용살의 기운을 머금은 황혼을 던져주며 대답했다.
“그저 한 명의 검사일세.”
가슴에 그리드의 검을 품은 검사.
푸화하하하학!!
황혼이 남긴 궤적이 드래곤의 날개를 가른다. 비반이 의도한 것이다. 그는 황혼에 깃든 그리드의 신성을 제 기운처럼 활용하고 있었다.
그리드의 검을 빌려 자신의 심상을 베고 탄생한 절대자는 검성이되 용살의 자격을 갖췄으며, 그리드의 검을 무기로 삼았을 때 가장 빛나는 존재였다.
“템빨 검사...”
그리드의 혼잣말이 드래곤의 비명소리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