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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690화 (1,689/1,794)

템빨 83권 - 22화

이렇게 쉽게 일이 풀릴 줄이야?

물론 여기까지 오는 길은 순탄치 못했다.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으니 위험의 수위만 놓고 보면 드래곤과 싸울 때와 비견 될 정도였다.

다만 결말이 허무했다.

비반의 의식을 깨우려면 특정 단서를 찾아 어떤 특별한 방법을 써야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간단히 해결 된 것이다.

설마 곧바로 정신을 차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선인들의 말씀은 틀리는 법이 없구나.’

매가 약이라는 말.

상대가 누구라도 대부분 통하지 않나.

감탄하는 그리드의 팔뚝 위로 불쑥 소름이 돋았다.

“공의 손속이 참으로 맵구려. 덕분에 정신을 차렸소.”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난 비반이 말했다.

심유한 눈으로 그리드를 살피는 표정이 근엄했다.

그리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즉시 황혼을 뽑아 비반에게 겨눴다.

“넌 뭐지? 비반 님을 어떻게 한 거냐?”

“내가 비반이오만...”

비반이 고개를 갸웃거렸고 그리드는 콧방귀 뀌었다.

“내가 비반 님과 교제한 세월이 얼만데 속을 것 같나?”

“허허.”

오성을 되찾은 비반이다.

그리드가 오해하는 이유를 단번에 눈치 채고 씁쓸하게 웃었다.

“그간 내가 보였던 추태들이 귀공께 안 좋은 편견을 심은 게로군. 자업자득인 게야.”

검이라는 도구에 의지해선 안 된다.

비반 또한 대부분의 검사들처럼 극단적인 사상을 지녔었다.

검아일체의 의도를 잘못 파악하고 의념의 얼개를 어긋나게 짰다는 말이다.

검사가 검을 부정해선 안 됐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땐 이미 늦었다.

결국 비반은 더욱 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됐다.

그간 부정해온 검을 앞으로는 나 자신처럼 존중해야 한다는 깨달음과 드래곤을 베어야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을 결합시켜 몸소 검이 됐다.

인간이길 포기한 격이었다.

오성을 잃어가며 거의 짐승처럼 설쳐댔다.

하필 맹수도 아닌 겁 많은 작은 개처럼 쓸데없이 짖어대길 반복했었다.

제정신을 찾은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부끄러운 기억이 너무 많았다.

침통한 표정을 짓는 비반이 그리드의 의심을 부추겼다.

그간 자신이 추태를 보여 왔단 사실을 자각하고 있다고?

그리드가 아는 비반이 그럴 리가 없었다.

비반은 염치가 없는 인물이었으니까.

하물며 저런 표정을 지을 리도 없다.

비반은 부끄러움을 아예 모르는 사람이었다.

“가당찮은 연기 관두고 비반 님을 돌려내.”

“음... 내 입으로 직접 말하기 부끄럽소만 내가 비반이 맞소. 내 태도가 낯설어 미덥지 않겠으나 이것이 나의 본디 모습이니 부디 신뢰해주길 바라오.”

“...말도 안 돼.”

그리드가 비반에게 겨눴던 칼끝을 천천히 내렸다.

넋 나간 표정을 짓고서다.

경험으로 쌓아올린 그의 직감이 외치고 있었다.

눈앞의 비반이 진짜 비반이 맞다는 사실을.

그리드는 비반의 사정을 헤아렸다.

검이 되겠다는 의념에서 해방 된 그가 지적능력을 회복했음을 눈치 챘다.

필시 기뻐해야할 일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이 상황이 썩 달갑지만은 않았다.

비반을, 소중한 인연 하나를 잃은 기분이었다.

그리드와 같은 추억을 쌓아올린 비반은 치매 걸린 노인이었으니까.

정상인처럼 행동하는 눈앞의 비반은 낯선 것이다.

“어찌 그리 슬픈 표정을 짓소?”

“...아니요, 아닙니다.”

그리드의 심정과 별개로 비반의 회복은 경사였다.

기뻐해야 옳았다.

서운함을 감춘 그리드가 애써 웃으려고 노력하는 순간이었다.

쿠구구구궁...

두 사람의 뒤편.

태산처럼 솟아있던 거검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리드가 딛고 선 땅이 요동치며 시야가 어지러워졌다.

한 뼘 높이로 부양해 지진의 여파에서 벗어난 그리드가 거검을 경계했다.

검이 심상찮은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의아해하는 그리드의 귓전에 비반의 중얼거림이 스쳤다. 몹시 희미한 목소리. 절대자가 아니었다면 듣지 못했으리라.

“저 잡것이 주인을 몰라보고...”

“...?”

“내가 심중에 품은 검이 공교롭게도 나의 통제에서 벗어나버렸소. 나와 동화 된 경험 탓인지 자신과 나를 동일시하는 감각이야. 나를 자신으로부터 분리시킨 귀공을 원망하며 적대하는군.”

“방금 잡것이라고 하셨지요?”

비반의 말간 눈이 꿈뻑였다.

“음? 검의 살기 여파가 귀공께 환청을 들려준 듯하오.”

“비반 님 맞으시군요.”

“...”

비반의 얼굴이 미세하게 구겨졌다.

순식간에 스쳐지나는 표정이었다.

이 또한 절대자가 아니었다면 읽지 못했을 것이다.

“변치 않으셔서 다행입니다.”

“당최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구려.”

불쾌해하면 지는 느낌이라 참는 눈치다.

본인이 비반이면서 비반 같다는 말을 욕으로 인식하는 모습이 참으로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론 이해가 갔다.

‘누구에게나 지우고 싶은 과거는 잊는 법이니까.’

그리드는 요즘도 가끔 머리를 감을 때 비명을 지른다.

아영이에게 프로포즈했을 때의 기억 따위가 불쑥 떠오르는 까닭에.

그 당시의 신영우를 기억하는 누군가가 지금의 신영우에게 역시 너답다고 말한다면 욕으로 들리지 않았을까?

“과연 비반 공과 저는 벗이 될 만합니다.”

“자꾸 헛소리 그만하고 상황에 집중하십시다.”

거검이 떠오르고 있었다.

점차 커진다.

땅에 박혔던 검날이 전체의 절반은 되는 듯했다.

급기야 고룡의 거체를 양단할 수 있을 정도의 크기를 온전하게 드러낸 검이 그리드를 겨눴다.

‘스쳐도 중상이겠군.’

엄밀히 말하면 스치지 않아도 화를 입을 확률이 높다.

검의 크기가 워낙 거대했다.

물리적으로 피하기 힘들 뿐더러, 설령 피하더라도 반경 수백 미터가 초토화되면서 후폭풍이 그리드를 덮칠 터였다.

순보를 못 쓰는 상황에서 최악의 상성을 만난 격이다.

물론 1시간 전까지의 이야기다.

촤르르륵!

갓 핸드들이 결집했다. 서로의 손을 맞잡으며 원형을 이뤄갔다.

“템빨태양권.”

대충 생각나는 대로 지껄인 그리드의 몸을 원형의 태양이 감쌌고,

꽈아아아아앙!!

그 위로 거검이 떨어졌다.

갓 핸드가 온전히 피해를 흡수해줬지만 문제가 생겼다.

단 일격에 태양이 깨졌다는 점.

평범한 크기의 장검들을 대량으로 막았을 때와는 경우가 완전히 달랐다.

거검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서로의 손을 놓친 갓 핸드가 너무 많았다.

쿠화하하하하항!!

흐트러지는 황금의 파편들 속에서 폭풍이 휘몰아쳤다.

거검의 충격파가 만든 폭풍이다.

그리드의 흑발과 신성이 거칠게 나부꼈다.

“허.”

비반이 감탄했다.

그리드가 추락하지 않았으니까.

무지막지하게 강력한 충격파의 압박을 그리드는 쉬이 견뎌냈다.

‘압사하지 않는다.’는 자격이 만드는 기적이었다.

빠르게 자세를 고쳐 잡은 그리드가 소리쳤다.

“저거 못 멈춥니까?”

“그렇소. 나와 완전히 별개의 존재로 독립해버렸으니 내가 다스릴 수가 없구려. 무시하고 탈출하는 게 최선이오.”

“저걸 그대로 방치하고 탈출하겠다고요?”

비반은 분명히 말했다.

저 거검은 이제 자신이 다스릴 수 없다고.

그런 게 비반의 심상에 남아있으면 안 되는 것이다.

암세포를 남겨두는 격이었다.

비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딱히 방법이 없으니...”

비반이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거검을 잃고 평범한 장검만 남은 손이다.

그로써도 저 거검에 대적할 방법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검은 비반이 평생을 함께해온 심상이니까.

비반의 경험과 기술은 저 거검 또한 모조리 보유하고 있었다.

자신감 없는 표정을 짓는 그에게 그리드가 물었다.

“여전히 검에 의존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드는 뮐러의 경우를 떠올렸다.

뮐러는 그리드가 소환한 검들을 마다하지 않고 빌려 쓰며 적재적소에 활용했었다.

역대 최강의 검성이라는 자가 대부분의 검사와 다르게 검에 의존했단 말이다.

만약 비반이 ‘검에 의존해선 안 된다.’는 고집을 고수한다면.

그리드는 실망할 것만 같았다.

“안 될 게 있나.”

비반의 대답이었다.

다행히 비반은 고집을 버린 상태였다.

당연하다.

그가 그리드에게 순순히 구출 된 이유는 진즉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계기는 그리드에게 선물 받았던 드래곤 웨폰이다.

구젤의 검.

그때 흔들렸었다.

세상엔 이토록 훌륭한 검이 존재하건만.

검사가 검에 의존하는 게 정녕 잘못 된 거란 말인가?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그런 의문을 품었었다.

검아일체를 새로운 관점에서 다시 이루는 편이 옳다고 어렴풋이 생각했었다.

다만 너무 늦었다는 게 문제였다.

시간이 없었다.

당시 비반은 오늘 품은 생각을 다음날 바로 잊는 병세를 앓고 있었으니까.

침통한 표정을 짓는 그에게 그리드가 말했다.

“그럼 의지해보십시오.”

“이건...”

비반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리드가 건네는 황혼을 바라보면서다.

그리드의 주황색 신성을 머금고 있는 아름다운 검.

무려 고룡의 소재로 만든 지상 최강의 보검을, 그리드는 비반에게 순순히 건네주었다.

“당신이 직접 저 검을 베십시오.”

거검.

그것은 비반이 평생토록 쌓아올린 심상이었다.

본래라면 버릴 수 없는 것이고, 버려선 안 될 것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통제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 그리드는 말하고 있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라고.

낡은 검 따위, 자신이 만든 신상으로 베어버리라고.

“...”

비반이 망설였다.

그리드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 또한 무한의 발할라라는 낡은 갑옷을 버리지 못하는 입장이었으니까.

만약 비반이 끝내 저것을 베지 못하더라도 원망하지 않을 것이었다.

다만 혹시 몰라 기회를 줬을 뿐이다.

쿠와아아앙!!

거검이 재차 덮쳐오고 있었다.

스스로 검을 버린 그리드를 집요하게 노렸다.

훼방을 놓는 침입자를 베어버리고 다시 비반과 하나가 되기를 소망하는 듯했다.

이제 순전히 비반의 선택만이 남았다.

‘정 안 되면 튀자.’

진즉 찾아놓은 탈출구를 의식하면서.

그리드는 내색하지 않고 비반의 선택을 기다렸다.

비반에겐 한없는 신뢰로 비쳤다.

목숨(?)을 걸고 자신을 믿어주는 그리드에게 무한한 감사를 느꼈다.

그러므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헤어질 때다.”

치링. 치리리리링...

황혼에서 잿빛의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용살의 기운.

하야테의 것과 달리 희미했으나 위력이 약하다고 볼 순 없었다.

하야테에겐 없는 검성의 검기가 결합 된 용살의 기운이었으니까.

번쩍!

세계가 갈라졌다.

그리드의 황혼과 비반의 검술이 결합되어 무적처럼 보였던 거검을 두부처럼 베어버렸다.

심상의 주인이 자신의 심상을 통째로 베어버린 것이다.

유래 없는 사건이다.

빠르게 무너지는 세상 속에서.

“고맙네, 그리드.”

여태껏 없던 존재로 거듭난 비반은 그리드와 새로운 유대를 다졌다.

어색한 태도를 버리고 진정어린 미소를 보여줬다.

[새로운 절대자가 탄생하였습니다.]

월드 메시지와 함께 그리드의 의식이 현실로 빠져나갔다.

(83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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