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3권 - 21화
결사들의 등장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선사했었다.
용의 목을 베었다는 드래곤 슬레이어와 옛 시대의 전설들.
그야말로 살아 숨 쉬는 신화의 출현이었으니까.
실제로 결사들은 명성에 어울리는 활약을 펼쳤다.
지옥 원정부터 전면에 나서 새로운 희망으로 우뚝 섰다.
인마대전의 후유증으로 상실을 겪었던 사람들 중 상당수가 그들을 보고 재차 꿈과 용기를 얻었을 정도다.
드넓은 지옥에 각자 산개한 채로 대악마들의 목을 벤 결사들의 활약이 그만큼 대단했기에.
소임을 못하고 있다며 자책 중인 결사들은.
사실 몹시 겸손한 것이다.
그들은 다만 드래곤이라는 재난에 항거하지 못할 뿐이었고 이를 무능하다고 비난해선 안 됐다.
지진이나 허리케인 따위에 휩쓸리는 사람들을 비난할 수 없듯이.
드래곤이란 그런 것이다.
출현을 예측하고 피해를 최소화하는 게 최선일 뿐, 대적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리드라는 대적자가 나타나기 전까진 그랬다.
그리고 그리드가 화룡 이프리트를 만나기 한참 이전부터.
자신이 드래곤의 대적자가 되기를 소망했던 자가 있다.
검성 비반이다.
막 탑에 올랐을 무렵.
현기를 가득 품었던 시절의 그는 암울한 미래를 즉시 예측했다.
용살자 하야테가 드래곤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엿보면서였다.
하여 자신이 용을 베고자 했고, 이전까지와 다른 심상을 다졌다.
드래곤의 브레스와 무게를 견딜 수 있는 견고함.
드래곤의 비늘을 베고 가죽과 살을 가르는 예기.
단 한 번의 날갯짓으로 대륙을 횡단하는 드래곤을 뒤쫓아도 지치지 않을 체력.
그 모든 것을 갖추기 위해 자신을 인간이 아닌 검으로 벼려갔다.
차츰 희미해져가는 오성을 느끼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언젠가 자기 자신조차 잊게 될 것을 알았으니까.
머잖아 스스로의 상태를 파악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를 텐데 무엇이 두렵겠나.
그렇다.
비반은 처음부터 각오했다.
오늘 염룡의 의념을 통째로 베어내면서 완전한 검으로 거듭난 그는.
의식의 끊어짐 직전에 여태껏 잃었던 기억들을 잠시 되찾았지만 도리어 후련함을 느꼈다.
굳이 아쉬운 부분을 하나 꼽자면.
한창 병세가 악화됐을 무렵에야 그리드를 만났다는 점이다.
조금이나마 온전한 정신이 남아있었다면 그에게 고맙단 말 한 마디 정도는 제대로 건넸을 텐데...
[검성 ‘비반’의 심상세계에 입장하였습니다.]
“...”
심상이란 마음의 상태를 뜻하는 바.
심상세계에는 당연히 주인의 감정이 녹아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다.
비반의 심상은 그저 황량하고 고요할 뿐이었다.
“비반 님, 혹시 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
적막한 세상에 그리드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공허한 외침이다.
누구에게도 닿지 않고 되돌아오는 메아리였다.
‘...검.’
황량한 바람을 유독 차갑게 느끼던 그리드가 눈치 챘다.
피부에 소름이 돋게 만드는 이 한기는 검의 예기다.
수천수만 자루의 검을 만들어온 그리드가 모를 리 없다.
자각한 순간 코끝에 스치는 쇠 냄새를 맡으며, 그리드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숫돌로 갈아주질 않으니까 이딴 냄새가 나지.’
주인 없는 검.
현재 비반의 상태다.
기껏 검이 된 보람이 없게도 차츰 무뎌지다가 녹슬고 흙이 되리라.
“...애초에 검성이 왜 검이 됐냐고.”
영락이다.
검을 지배해야 할 자가 검이 됐으니.
‘선택의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너무 극단적이잖수.’
검성도 해먹을 짓이 못 된단 생각이 들었다.
뮐러쯤 되는 재능의 소유자가 아닌 이상에야 검을 도구로 인식해서도 안 되고, 스스로를 검으로 여겨야하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했으니.
‘일단 구한다.’
호흡을 고르고 잡념을 털어낸 그리드가 순보를 전개했다. 예기의 발원지까지 단숨에 돌파할 의도였다.
하지만 이곳은 현실과 동떨어진 비반의 심상이다.
비반의 뜻을 최우선으로 작동하는 공간이었다.
침입자인 그리드가 온전한 실력을 발휘하는 건 불가능했다.
[순보의 발동에 실패하였습니다.]
[75,09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리드가 스킬을 전개함과 동시에 땅에서 솟아난 검이 그리드의 양발을 찔렀다. 설마 갑자기 공격이 날아올 줄은 몰랐던 탓에 공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절대자의 영역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애초에 검의 속도가 빛살 같기도 했고.
‘이거야말로 진정한 심검이구나.’
비반의 심상이 빚은 검.
그리드의 양발을 꿰뚫고 올라온 2자루의 검이 빙글빙글 회전하며 그리드를 경계한다. 그리드가 움직이는 즉시 쏘아질 태세였다.
‘갓 핸드로 대응할 수준이 아니야.’
직접 뿌리치는 수밖에.
그리드가 판단하는 순간이었다.
고오오오...
광야에서 새로운 검들이 솟아났다.
수백.
아니, 수천수만 자루의 검들이 눈부신 광채를 뿌리며 일제히 그리드를 조준했다.
‘미친?’
그리드가 과거에 목격했던 비반의 심상세계를 떠올렸다.
태산보다 높은 거대한 한 자루의 검과 그 주위를 구름처럼 맴돌던 수천 자루의 검들.
무척 화려한 연출효과 만큼이나 강력했었다.
지금은?
당연히 과거보다 더 강력해졌을 것이다.
당장 검이 품은 예기부터가 이전보다 훨씬 강력했다.
‘순보 없이 돌파가 가능할지 모르겠는데.’
쩌저저저저저정!!
그리드가 어떤 대책을 세우기도 전에 검들이 쇄도해왔다.
사방팔방에서 그리드를 찌르고 베며 압박했다.
회전하며 올려 찬 발로 네 자루의 검을 떨쳐낸 그리드가 양쪽 겨드랑이에 힘을 꽉 줬다. 그러자 그리드의 가슴팍으로 파고 들던 아홉 자루의 검이 꺾이고 우그러졌다.
그리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릿한 통증을 느껴서다.
그리드의 양팔에 조여 우그러진 아홉 자루의 검이 그리드의 피부에 생채기를 남겼다.
<화룡 이프리트의 팔>의 방어력을 관통했다는 뜻이다.
검의 예기가 빈틈없이 결착 된 매끄러운 붉은 비늘들을 쉽사리 파고들었다.
이건 필시 용살의 기운이다.
‘고룡의 의념을 베었다는 업적 때문이겠지. 상위룡의 신체를 어렴풋이 재현한 수준에 불과한 방어구론 못 막아.’
현재 그리드는 금의 협곡을 전개하지 못하고 있다.
타인의 심상세계에서 자신의 심상을 세운다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심상세계의 주인이 심리적으로 어떤 문제를 겪고 있다면 충분히 가능했지만, 현재 비반의 심상은 일말의 흔들림 없이 완전했다.
검이 되겠다는 목적을 이룬 직후이니 당연하다.
‘기대되는 걸.’
비반을 구하고 싶다는 소망이 한층 더 강해진다.
부활한 비반은 이전과 완전히 다른 사람일 테니까.
아마 높은 확률로 절대자가 돼서 돌아오지 않을까?
검성과 용살자를 반반 섞어 진화한 형태의 절대자로.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그리드가 허공에 손을 뻗자 황금빛의 거대한 나선이 휘몰아쳤다.
신성이 아닌 갓 핸드다.
수백 개의 갓 핸드가 서로의 손을 맞잡으며 결착하는 과정이었다.
대량의 황금이 녹아 폭포처럼 내려앉고 분수처럼 솟구치길 반복하는 것처럼 보였다. 굉장히 화려한 것이다.
쩌저저저저정!!
그 와중에도 수만 자루의 검은 그리드를 베고 찌르길 반복했다.
그리드가 최선을 다해서 저항했지만 생명력 감소 속도가 엄청 빨랐다.
결국 불사의 소모까지 각오한 그리드의 머릿속엔 거인족의 보물과 트라우카의 레어가 그 모습을 연달아 교차하고 있었다.
‘구.’
현재 프론잘츠가 보유 중인 거인족 최후의 보물과 염룡 트라우카의 레어에는 공통점이 있다.
원형을 이룬다는 것.
그리드는 거기서 영감을 얻었다.
온갖 능력이 봉인되고 닥쳐온 위기 앞에서 자연히 떠올렸다.
무의식에 녹아있던 경험과 지식들이 생존 욕구와 맞물려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아니, 살고 싶다는 욕망보단 비반을 구하고 싶다는 소망이 수천 배 더 강하다.
비반을 구하기 위해서, 그리드는 비반을 꺾어야했다.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
순식간에 시야가 붉게 점멸했다.
저마다 용살의 기운을 품은 수만 자루의 검은 그리드를 손쉽게 압도하고 있었다.
금의 성역을 소환하지 못해 무한한 발할라를 겹쳐 두르지 못하고, 순보와 룬 등 ‘권능’으로 분류 될 만한 능력들이 모조리 봉인당한 그리드는 평소와 비교해서 손색이 컸으니까.
가장 큰 문제는 검무나 무패왕의 검술을 쓸 환경이 아니라는 점이다.
수만 자루의 검들은 하나하나가 무쌍검법을 구사하고 있었다.
그리드가 검술과 관련 된 스킬을 쓰는 즉시 힘을 합쳐서 파훼하길 반복했다.
‘뮐러 공이 나만 보낸 이유가 있었구만.’
키이이이잉!!
갓 핸드들의 결착 속도가 빨라짐에 따라 황금빛 원의 궤적이 회전하는 속도 또한 빨라지고 있었다.
후진하며 활을 쏴 몇 자루의 검을 요격한 뒤 금나수를 연계, 수십 자루의 검을 한데 뭉쳐 공처럼 구겨버린 그리드가 서서히 여유를 찾아갔다.
텅 빈 생명력 게이지는 개의치 않는다.
자신의 회복력은 압도적이니까.
아주 잠시간의 틈만 벌 수 있다면.
그때 잃은 생명력을 모조리 회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그리드에겐 있었다.
불사를 소모할지언정 죽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다.
쩌어어엉!!
그리드는 지형을 적극 활용했다.
광야를 벗어나 최대한 벽을 등지고 서서 직접 상대하는 검의 숫자를 줄였다. 빛살처럼 뻗치는 공세를 방패로 막아낸 뒤 창을 투척해서 검진을 흐트러뜨렸다.
그러길 대체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알쏭달쏭 도리깨마저 활용하기 시작한 그리드를 추적하던 검들이 일제히 전진을 멈췄다.
당연히 한 몸처럼 움직여 서로 얽히거나 충돌하는 일은 없었다.
뚝 끊긴 가속 탓에 곳곳에서 바람 터지는 소리만 울릴 뿐.
쿠르르르르릉!!
검이 멈춘 가운데.
세상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리드가 딛고 선 땅과 등진 벽이 날카로운 검으로 재질을 바꾸었다.
검림.
검의 숲이 펼쳐진 것이다.
이제 그리드의 모든 방위가 검의 표적이 되었다.
수만에서 수십 만 단위로 늘어난 검이 일제히 그리드를 겨누고 쏘아졌다.
침입자를 확실하게 끝장낼 의도인 것이다.
늦었다.
황금의 구체가 그리드의 전신을 완전히 감싸버렸다.
작은 태양.
수백 개의 갓 핸드가 결착해서 만든 구체는 트라우카의 레어와 비교하면 한없이 작았지만 위엄이 있었다.
달처럼 스산하고 황폐했던 트라우카의 레어와 달리 찬란했다.
쩌저저저저저저저저저저저정!!
결착에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는 흐트러지지 않기 위함이었다.
전 방위를 찌르는 검의 폭격 속에서도 갓 핸드는 서로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리드를 감싼 태양은 유지되었다.
깨질 염려는 없다.
탐욕의 최대 강점은 무한의 내구력에 있었기에.
“도대체 몇 년이 걸린 거야.”
갓 핸드를 제대로 활용하는 방법을 찾는 데까지.
황당해서 헛웃음을 흘리는 그리드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서서히 벌어지는 태양의 틈새에서 안광을 뿜었다.
몇 자루의 검이 즉시 반응해서 틈새를 파고 들었지만 그리드는 이미 검무를 완성한 상태였다.
태양 안에서, 검들의 훼방을 받지 않고.
“초연살파극.”
꽈르르르르르르르릉!!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간 검기가 여태껏 일방적으로 그리드를 괴롭혔던 검들을 밀쳐냈다.
순간 흩어졌던 갓 핸드는 어느새 다시 결착하고 있었다. 검들의 반격을 원천 봉쇄했다.
마치 태양이 점멸하는 듯한 광경이다.
그리드는 거침없이 나아갔다.
예기의 발원지에 점차 가까워져갔다.
그곳에.
-나는... 검이다...
비반이 존재했다.
정확히는 검의 일부가 된 비반이다.
태산보다 높이 솟구친 거검의 중심부에 못 박힌 채, 비반은 스며들어가고 있었다. 조만간 영영 빠져나올 수 없도록 깊이, 더 깊이.
“정신 차려 이 인간아!!”
그리드는 일단 주먹부터 날렸다.
애초에 대화가 통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반의 면상을 집요하게 때렸다.
솔직히 꽤 후련했다.
비반을 좋아하는 마음과 별개로 쌓인 게 많았기 때문이다.
왜 이제야 말하는가...
그 악몽 같은 대사는 요즘도 종종 환청으로 들리곤 했다.
“검은 뭔 개뿔이 검이야!!”
퍽! 퍽퍽퍽!!
“그러려고 검성 됐습니까!!”
콰작! 뻐엉!!
“뭣하면 제가 써줄까요?!”
-...그만.
“녹여서 탐욕이랑 섞어버릴까?! 아니면 개밥그릇으로 만들...”
-그만하시게, 그리드 공.
심상세계는 만능이 아니다.
만약 만능이었다면 브라함은 진즉부터 자신보다 강한 적들과 싸울 때 무조건 상대방을 심상세계로 끌어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던 이유는 위험해서였다.
심상의 노출은 즉 자신의 심리를 적에게 드러내는 것.
그리드의 심상마냥 사방이 협곡으로 꽉 막혀있다면 또 모를까, 대부분의 심상은 오래 노출할수록 약점을 노출하곤 했다.
하물며 현재 비반의 사고는 몹시 단순했다.
오직 ‘검이 되겠다.’는 생각밖에 못하고 있었다.
공략하기 쉬운 것이다.
그리드가 제 무기로 써먹겠다느니, 탐욕이랑 섞어버리겠다느니, 차라리 녹여서 개밥그릇으로 만드는 것도 좋겠다느니 협박을 일삼을 때마다 비반의 심상은 흔들렸다. 검과 일체되며 상실했던 이성을 잠시 되찾았을 정도다.
털썩!
끝내 검에서 뚝 떨어져 나온 비반과 그리드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서로 꽤 민망해서 입을 다문 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