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3권 - 20화
검성 뮐러와 탑의 결사들은 위인이다.
칭송받아 마땅한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정작 본인들은 존경과 찬사를 거부한다.
지켜낸 삶보다 지키지 못한 삶들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평생을 타인을 위해서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늘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겼다.
하물며 뮐러는 차원의 틈새로 도망친 전력까지 있다.
최근의 결사들은 드래곤을 상대로 소임을 다하지 못했고.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뮐러와 결사들은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있었다.
이 순간의 만남을 몹시 큰 영광으로 여기면서도 내색하지 않았다.
그 탓에 데면데면한 그들의 만남을 지켜보던 네펠리나가 콧방귀 뀌었다. 제 말랑말랑한 배를 어루만지면서다.
“천하의 뮐러가 변태라는 사실을 목격당하고 말았으니 피차 민망할 수밖에.”
“뮐러 공이 변태라니?”
“못 본 척하지 마라. 저자가 나를 희롱하는 것을 그리드 너뿐만 아니라 결사들 또한 목격하였으니 사건을 애써 덮으려고 해봤자 네 평판만 깎일 뿐이니라.”
“희롱...? 그렇군.”
잠시 생각해본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뮐러 공에게 텔레포트를 추격당한 일이 꽤 분했겠지. 내가 섬세하지 못했다, 미안.”
그리드는 네펠리나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았다.
비록 해츨링이라곤 하나 광룡의 딸 아닌가.
마법의 종주로서 엄청난 자부심을 지녔을 텐데 인간에게 농락당한 것이다. 분한 게 당연했다.
“하지만 그것 갖고 사람을 변태라는 건 좀...”
“자꾸 뭐라는 것이냐?”
조심스레 뒷말을 덧붙이는 그리드를 네펠리나가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난 네 부름에 응해서 전이됐을 뿐이다. 엄밀히 따지면 뮐러 저자는 내 마법이 아니라 네 마법을 추적한 거야. 분해야할 건 내가 아니라 그리드 너이니라.”
“...?”
그게 그렇게 되나?
하긴, 사도 소환 역시 기사 소환처럼 내가 주체인 스킬이니 일리가 있긴 한데...
괜스레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하는 그리드였다.
그를 바라보는 네펠리나의 두 눈이 게슴츠레했다.
“바보.”
“뭐?”
“외간 남자가 내 배를 제멋대로 만져댔는데 그리드 너는 왜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냐! 뭘 자꾸 쓸데없는 것만 신경 쓰는 거야!! 바보! 그리드는 바보다!!”
“...”
“바사라가 말했느니라! 여자는 몸을, 특히 아랫배를 소중하게 여겨야한다고! 그리드 너는 그것도 모르는 바보얏!!”
그리드의 정신이 차츰 혼미해졌다.
이래 뵈도 염룡 트라우카와 싸운 직후다.
감정이 여러 갈래로 요동치는 탓에 정서적으로 불안했다.
심지어 비반의 병세가 걱정되어 초조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네펠리나는 자꾸 헛소리만 지껄여대는 것이다.
만약 소녀의 모습으로 폴리모프를 한 상태가 아니라면 꿀밤을 한 대 때리지 않았을까?
함부로 그런 생각을 하게 될 정도로 현재 그리드의 상태는 온전하지 못했다.
그때 문득.
“네펠리나 공은 정녕 소녀로구려.”
곁에서 함께 걷던 하야테가 말했다.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그린 채였는데, 몹시 흐뭇해하는 얼굴이었다.
그를 본 그리드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뺨을 부풀린 채 자신을 노려보는 네펠리나와 다른 드래곤들을 비교하게 됐다.
드래곤.
인간의 관점으론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괴물들.
네펠리나는 놈들과 다르다.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온 여파로 인간처럼 사고하고 있었다.
부친을 만났을 때도 그런 일면을 보여주긴 했지만 지금은 한층 더 사람 같았다.
‘이 아이도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는 건가?’
“뭐, 뭐냐?”
얼굴이 하얗게 질린 네펠리나가 뒷걸음쳤다.
그리드가 갑자기 멈춰 선다 싶더니 성큼성큼 다가온 까닭이다.
바보라고 말한 건 너무 심했나?
다소 서운해서 흥분하고 말았다...
뒤늦게 후회하는 네펠리나의 정수리 위로 그리드의 손이 떨어졌다.
작은 소녀의 머리를 통째로 덮어버리는 커다란 손.
울퉁불퉁했지만 몹시 따뜻하고 상냥했다.
“화 풀어. 뮐러 공한텐 내가 따로 주의를 줄 테니까.”
“어... 으, 읏!”
도자기처럼 희던 네펠리나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졌다.
드래곤이란 외로운 생물이다.
대부분 부모를 위해 낳아졌다.
태어난 순간부터 쭉 홀로 살아가다가 부모의 부름을 받는 순간 절명하게 되는.
고룡들이 정한 운명으로, 거부할 수 없는 섭리였다.
태어난 순간부터 세계의 이치를 깨우치고 ‘애정’과 ‘사랑’이라는 개념을 머릿속으로 당연히 이해하건만 직접 체험할 기회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네펠리나는 체험하고 있었다.
그리드와 제국의 인간들 틈에서.
새삼 기뻤다.
아버지에게 거역하고 그리드를 선택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만큼.
그리드의 따스한 눈길에 뭉클해진 그녀가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해.”
“응?”
“바보라고 해서 미안하다구!”
“별 걸 다.”
미소 짓는 그리드와 기뻐하는 네펠리나.
사이 좋은 부녀처럼 보이는 두 사람은 결사들의 희망이다.
드래곤과 인간이 공생하는 미래를 꿈꾸게 만들어주었으니까.
‘네펠리나에게 필히 사죄해야겠군.’
한참을 앞서 걷던 뮐러가 웃으며 생각했다.
검성의 기감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절대자의 영역을 어색하게나마 유영하는 수준이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란을 모를 리 만무했다.
켄에게 업혀있는 비반의 숨결이 차츰 희미해지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놓치지 않았다.
“서두르는 편이 좋겠습니다.”
뮐러가 재촉하자 켄이 즉시 호응했다.
일권을 내질러 병실까지의 거리를 단축시켰다. 수십 개의 벽이 허물어지며 사방으로 먼지가 자욱하게 번졌다.
“...”
그리드와 뮐러는 무척 당황했지만 결사들은 태연했다.
그들에게 탑은 소모품에 불과했으니까.
‘그 금색 드래곤이 탑의 위치를 대략적으로나마 유추한 눈치였지.’
그리드도 뒤늦게나마 납득했다.
지혜의 탑과 비교적 가까운 곳에 매복해있던 상위룡 쿠바르토스를 떠올린 것이다.
탑은 또 한 번 이사를 강행할 터.
그때 잠시 결사들의 위치가 노출 될 확률이 높아지므로 비반이 어서 회복해야 여러모로 좋았다.
“이봐! 비반!”
병실에 도착해 비반을 눕혀놓던 켄이 당황해서 언성을 높였다.
어떤 악몽에 시달리는지 비반의 눈꺼풀이 미친 듯이 경련하고 있었다.
“나 외의 인간을 해부해보는 건 처음이야...”
당황하는 결사들 사이에서 베티는 메스를 꺼내들었다.
지옥의 생물들을 해부하며 습득한 의학적 지식을 활용해야겠다는 의식의 흐름에 도달한 듯했다. 덜덜 떨리는 손을 보면 전혀 믿음이 안 갔다.
급기야 눈이 핑핑 돌기 시작한 그녀를 막아선 그리드가 뮐러에게 말했다.
“저는 제정신입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제게 말씀해주십시오.”
무후총에서 돌아온 뒤로.
그리드는 뮐러에게 공대하기로 결정했다.
뮐러를 상대로 제국 황제와 신이라는 위계를 굳이 적용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당연하다.
뮐러는 만인에게 존경 받는 영웅이면서 수백 년 전의 인물이었다.
그에게 존대한다고 해서 주책도 아니었고 어떤 관계에 혼란을 야기할 염려도 없었다.
“마침 폐하께 도움을 청하려던 참이었습니다.”
뮐러는 마다하지 않았다. 빙그레 웃으며 손끝에 빛을 명멸시켰다.
어느새 뽑아 쥔 검이 햇살을 반사하고 흡수하길 반복하며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
검을 뽑았다?
그리드와 결사들의 얼굴이 굳었다.
상대가 의원이나 사제가 아닌 검에 미친 족속이란 사실을 상기한 것이다.
그래, 크고 맑은 눈이 유달리 인상적인 눈앞의 사내는 비반과 동류다. 올곧은 눈빛에 현혹되어선 안 될 상대란 말이다.
“잠ㄲ...”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은 그리드가 손을 뻗었지만 늦었다.
푸욱!
말릴 틈도 없이 뮐러의 검이 비반의 가슴에 꽂혔다.
순간 솟구치는 선혈의 방향이 일정했다.
단 한 방울의 피도 어긋나지 않고 햇살 아래로 번졌다. 와인처럼 짙은 색으로 그리드와 결사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저런 미친?”
켄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아벨리오가 즉시 붓을 휘둘러 방벽을 세우지 않았다면, 그의 손은 마력뭉치가 아닌 뮐러의 손목을 우그러뜨렸을 것이다.
총체적 난국.
트라우카의 침공부터 시작해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짧은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일을 겪은 그리드는 엄청난 피로감을 느꼈다. 다 때려 치고 잠시 쉬고 싶었다.
“검사의 소망은 대부분 같습니다. 보다 잘 베는 것.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든, 검사의 입장으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검을 잘 다루는 편이 수월하니까요.”
묵직하면서도 맑은 음성.
뮐러의 힘 있는 미성이 장내의 소란을 일축시켰다.
그리드와 결사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분명히 찔렸던 비반의 가슴에 상처가 없었기 때문이다.
비현실적인 방향으로 솟구쳤던 핏물이 힌트였다.
뮐러는 비반을 찌른 적이 없다. 다만 심검으로 찔렀다는 착각을 일으켰을 뿐.
“하지만 이 세상에 완전한 검술이란 없습니다. 비반 공께서 창안하신 무쌍검도, 하늘조차 두려워않던 사하란을 크게 위축시켰던 무패왕의 검술도, 성취할수록 아쉬운 부분이 보이게 마련이었죠. 검이라는 도구에 의지하는 이상 당연한 결과입니다.”
단순히 손을 휘두르는 것과 검을 쥔 손을 휘두르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주 미세한 이질감까지 떨쳐내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므로 합일을 꿈꾸게 되는 겁니다.”
검과 하나가 된다.
궁극에 도달한 검사들은 어김없이 이와 같은 바람을 품었다.
검을 제 몸으로 인식하고 도구라는 제약에서 탈피시키기 위함이었다.
그건 검성의 최소 자격이기도 했다.
실제로 검아일체를 이룬 검사들은 일반적인 검사와 격이 달랐다.
본인 스스로도 검을 의식하지 않은 채 검을 휘둘러 보다 빠르게 대상을 베었으니까.
“하지만 이 합일을 유지한다는 게 상당히 고역이지요.”
손에 쥐고 휘두르는 검을 본인의 신체로 인식하기 위해선 흔들리지 않는 심상이 필요했다. 자신과 검은 하나라는 사실을 무한히 되뇌어야만 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뮐러만 해도 세상의 진실을 알고 절망했을 때 검과의 합일이 깨졌었다.
하여 차라리 한 자루의 검을 더 쥐고 연마했다.
마음에 품고 마음으로 휘두르는 검.
심검이다.
비반은 달랐다.
“그래서 비반 공께선 다른 방법을 선택하신 겁니다. 자신과 검을 합일시키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검으로 인식하는 방향으로.”
비반의 오성이 차츰 옅어져간 이유.
쉽게 말해 인간이길 포기했기 때문이다.
탑에 오른 뒤.
드래곤 슬레이어조차 두려워하는 드래곤이라는 괴물을 대적하게 된 영웅은.
자신에겐 없는 뮐러의 재능을 대체하기 위해 스스로를 검으로 벼려왔다.
언젠가 반드시 한 번은 드래곤의 목을 치고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오늘날 하야테를 지켜냈으니 더 큰 뜻을 이룬 셈이리라.
스윽.
살기가 가득 담긴 뮐러의 검이 비반의 뺨을 베었다.
거친 수염을 타고 흘러내리는 핏물이 진짜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이번에 비반은 정말로 베였다.
하지만 반응이 없다.
인간이 아닌 검이기에, 단순한 도구이므로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는 살기에 반응하지 않았다.
“...제가 무슨 도움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비반이 어떤 심정으로 지금에 이르렀는지 알게 된 그리드의 목소리가 떨렸다.
자신이 뭘 할 수 있을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근심했다.
“비반 공께 도구의 위대함을 알려주시지요.”
그리드를 처음 만난 순간을, 뮐러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각기 다른 손때가 묻은 수천 자루의 검을 소환해 원하는 것을 골라보라고 말하던 그리드의 인상이 워낙 강렬했다.
그때 깨달았다.
검아일체란, 검이라는 도구를 부정함으로써 이루는 경지여선 안 된단 사실을.
접근법 자체가 잘못 됐었다.
일부 검사들, 특히 비반은 각성할 필요가 있다.
그리드를 보고 배워야한다.
“오늘 막 태어난 검을.”
파지직!
뮐러의 심검이 굉음을 토했다.
비반의 무의식이 만든 심상을 베어 입구를 만드는 과정에서 생기는 소음이었다.
“꺾어주십시오.”
워프 게이트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문이 그리드의 눈앞에 열렸다.
창백한 빛을 발산하는 문.
텅 비어버린 비반의 마음을 표현하는 듯했다.
“오직 당신께서 꺾어야만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뮐러의 표정이 어두웠다.
무후총의 망령과 생사결을 펼친데 이어 고룡과 싸운 그리드에게 쉴 틈도 안 주고 새로운 책임을 짊어지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안타까운 것이다.
그리드가 못 견디고 외면해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짊어진 자의 고통은 그가 가장 잘 알았으니까.
하지만 의외로 그리드의 눈은 의욕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제가 도울 수 있다니 기쁩니다.”
[검성 ‘비반’의 심상세계에 진입합니다.]
영웅들의 왕이 영웅을 구원하러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