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3권 - 19화
악룡 번헬리어에게 앞발이란 흔적기관에 가깝다. 신체 중에서 유독 작아 효율적으로 활용하지 못했다.
극검이 비밀리에 집필 중인 저서에서 묘사하길, ‘타조의 몸에 병아리의 날개가 달린 꼴’이라고 서술했을 정도다. 어째선지 데미안을 닮은 주인공의 입을 통해서였다.
반면 네바르탄과 트라우카는 신체적인 밸런스가 완전했다.
그들의 앞발은 퇴화하지 않았으며 인간의 손처럼 유용하게 쓰였다.
일단 컸다.
그 거체를 항시 지탱하는 뒷발과 비교하면 손색이 있을지언정 사족보행도 가능할 수준이었다.
“...”
한바탕 소란을 일으킨 브라함이 자리를 떠난 뒤.
그리드와 마리로즈의 협력을, 하야테와 비반의 희생을 아름답게 칭송하는 서사시의 문장이 음률을 이루는 세계의 중심에서.
그리드는 높고 붉은 성벽의 일각을 잠시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트라우카의 팔이었다.
수 미터 면적의 비늘이 빼곡하게 결집되어 있는 고룡의 팔.
그리드에겐 보물 창고로 보였다.
수천 개의 드래곤 웨폰과 아머가 가득 담긴.
온갖 영감이 떠올랐다.
황혼과 짝을 이룰 여명은 기본이다.
지난 세월.
그리드는 동료들을 위해 온갖 종류의 무구를 개발하고 제작해왔다.
그 모든 게 공부였다.
파그마처럼 혼자였다면 결코 얻지 못했을 공부가 무한히 샘솟는 영감의 근원이었다.
‘그간의 배움과 경험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해야 돼. 기존과 다른 드래곤 웨폰과 아머를 개발하는 식으로.’
‘기존보다 더 나은’ 드래곤 웨폰과 아머가 필요한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자신과 하야테, 그리고 사도들.
애초에 그들을 제외하면 드래곤 웨폰과 아머를 다룰 수가 없다.
그러므로 ‘기존과 다른’ 드래곤 웨폰과 아머가 필요한 것이다.
템빨단원들과 결사들도 사용할 수 있도록.
‘가능과 불가를 논할 문제가 아니라 반드시 해내야 한다.’
트라우카의 선물은 힘든 앞날을 예고하기도 했다.
최소한 이 정도는 갖춰야 더욱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뜻이 담겼다고 해석할 여지가 있었기에.
“...”
진중하게 각오를 다지던 그리드가 슬그머니 손을 뻗었다.
마치 잠에 빠진 사람처럼 호흡이 점차 깊어진다 싶더니 급기야 다리에 힘이 풀린 마리로즈를 부축하는 것이다.
의문이었다.
이 가녀린 여자는 대체 무슨 수로 홀로 트라우카를 감당한 걸까?
협동 검무를 펼치면서 엿본 그녀의 능력치는 그리드의 생각만큼 대단하지 않았다. 지력은 그리드보다 약간 높은 수준이었고 체력은 4천 5백 높았다.
그나마 2배가량의 격차를 보였던 근력과 민첩성도 2만을 조금 웃도는 수준에 불과했다.
반면 트라우카의 중요 능력치는 99,999일 확률이 높았다.
약화 된 상태임을 가정해도 마리로즈보단 몇 배나 강력했을 거란 말이다.
한데 마리로즈는 트라우카를 상대로 홀로 버텼다.
그리드가 이곳에 도착할 때까지 물러서지 않았다.
엄청난 고역이었으리라.
그리드는 재차 큰 진심을 느꼈다.
자신을 향한 마리로즈의 감정이 결코 가볍지 않단 사실을 실감했다.
“너의 청혼이 기쁘다.”
마리로즈가 살포시 웃었다. 무겁게 가라앉는 눈꺼풀을 억지로 치켜세우며 여유를 가장했다.
“하지만 혼인이라는 것은 번갯불에 콩 볶듯이 해내는 게 아니란다. 내가 충분한 준비를 마치고 너를 맞이하러 올 날까지 기다리렴.”
마리로즈는 그리드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즉시 안개로 흩어져서 현장을 떠났다.
배려인 것이다.
속세를 살아가는 그리드에겐 수습해야 할 일이 많다는 사실을 그녀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흡혈의 쿨타임이 생각보다 긴 모양인데.”
덩그러니 남겨진 그리드가 멀쩡한 입술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혈왕>의 패시브 효과는 뱀파이어들의 저주를 일시적으로 극복시켜주는 것에 있다.
그럼에도 마리로즈는 나태의 저주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소모한 체력이 워낙 큰 까닭으로 보였다.
이럴 때야말로 그리드의 피를 흡혈해서 빠른 회복을 도모해야 옳았다.
한데 그냥 떠난 것이다.
그녀의 흡혈도 만능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하야테 님의 상태는?”
아쉬움을 달랜 그리드가 동료들이 모여 있는 장소로 다가가며 물었다.
다행히 하야테의 외상은 거의 회복 된 상태였다.
염룡의 브레스에 녹아내렸던 뼈와 살이 대부분 온전한 모습을 되찾았다.
그리드의 예상대로였다.
성녀가 있는 한 하야테가 죽을 리 없다고 그리드는 믿었었기에.
한데 루비의 표정이 의외로 어두웠다.
“하야테 님은 괜찮아. 근데... 그런데...”
“...?”
그리드가 루비의 흔들리는 시선을 좇았다.
죽은 듯 잠들어있는 비반이 보였다.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모습이다.
병자라고 생각하기 힘들었다.
실제로 그는 트라우카에게 어떤 타격을 입지 않았다.
한데 루비의 저 반응은 뭐란 말인가?
의아해하던 그리드가 문득 서사시의 구절 몇 개를 떠올렸다.
용살자 하야테가 제 한 몸을 불살라 염룡의 브레스를 베었고, 검성 비반은 제 자신을 완전무결한 보검으로 벼리어 불꽃의 잔재를 꺼뜨렸다...
거기까진 그리드도 직접 목격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활약을 ‘희생’으로 치장한 서사시의 의도는 그리드도 이해하기 힘들던 차였다.
어째서 희생이지?
“...진원진기라도 소모한 건가?”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그리드의 얼굴이 왈칵 구겨졌다.
이곳 트라우카의 레어까지 달려오면서.
그는 온통 절망만을 떠올렸었다.
마리로즈의 죽음으로 인해 급변하는 세계관.
그녀의 죽음을 막지 못하고 뒤따라 죽는 자신.
뿌리친 보람이 없게도 합류해서 덩달아 몰살당하는 결사들.
이후 급격히 약화 된 지상을 바알이 유린하는 지경에 이르는 최악의 상황을, 그리드는 상상했었다.
레이단에서 조우했던 트라우카가 그만큼 강력했다.
하지만 다행히 승리를 쟁취했다.
모든 게 좋게 끝났다.
그런 줄로만 알았다...
“비반 님. 이봐요, 비반 공?”
비반을 둘러싸고 있던 결사들이 뒤로 한 걸음씩 물러나주었다.
비반 곁에 앉은 그리드가 애써 웃었다.
“또 사고라도 치신 겁니까? 화장실 청소하기 싫어서 그래요?”
“...”
대답은 없었다.
청소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발작을 일으켰어야 할 비반이 끝내 아무런 반응 없이 침묵했다.
그의 굳게 닫힌 입과 눈이 그리드를 차츰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
“외상의 흔적은 전혀 없어. 내상을 입은 것도 아니고 저주는 더더욱 아니야.”
루비의 목소리가 떨렸다.
굉장히 혼란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이상해... 어떤 종류의 회복 마법을 써도 아무런 반응이 없어. 미안... 미안해...”
비반이 그리드에게 소중한 인연이라는 사실을.
적어도 루비는 알고 있었다.
지혜의 탑의 존재가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이후로.
그리드는 동생 앞에서 종종 비반과의 일화를 즐겁게 이야기하곤 했으니까.
“세희 이리와.”
괴로워하는 루비를 지슈카가 달래주었다. 작은 몸을 품에 안고 몇 번이고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점차로 무거워지는 분위기 속에서 무투가 켄이 말했다.
“비반은 검이 되고자 했었어.”
검성의 의념이다.
부러지지 않고, 무엇이든 베는 검.
“그 끝에 진짜로 검이 되어버린 거야. 이 미련한 인간은.”
켄은 솔직한 사람이다.
솔직하다 못해 순수한 비반과 가장 잘 교감해왔다.
그래서일까.
비반의 상태를 누구보다 잘 파악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천하의 검성이 식물인간이 되다니?
이래선 안 됐다.
재촉하듯 묻는 그리드를 하야테가 진정시켰다.
“시선이 너무 많구려. 사람들이 이변을 눈치 채기 전에 자리를 옮기는 편이 좋겠소.”
결사에게 동료란 자기 자신처럼 소중한 존재다.
속세를 떠난 그들에겐 서로가 전부였으니까.
하여 그리드는 성치 않은 몸으로 비반을 등에 업는 하야테를 말리지 못했다.
일행은 곧 둘로 나뉘었다.
그리드와 결사들은 지혜의 탑으로 향했고 지슈카와 템빨단은 현장을 수습한 뒤 라인하르트로 복귀했다.
트라우카가 전력을 해방했던 여파로 변해버린 세계 각지에서 벌써부터 이변이 발생하고 있었다. 템빨단의 향후 일정은 무척 바빠질 수밖에 없었다.
***
“그걸 왜 이제야 말하는가?”
옛 기억들을 떠올리는 그리드의 뇌리에 비반의 생생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새삼스레 깨달았다.
비반에게도 참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구나.
그 또한 나의 스승이었고, 벗이었다.
‘제발.’
그리드는 알고 있다.
자신이 지금에 도달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왔는지.
언젠간 반드시 갚아야 할 은혜가 너무 많았다.
‘적어도 내가 빚을 청산할 때까진 무사하십시오.’
하야테의 등에 업힌 비반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리드가 간절히 바랄 때였다.
[오만한 것. 나를 도발하고도 살아남을 거라고 생각했나?]
무언가의 의념이 머릿속으로 강제로 흘러들어왔다.
몹시 거대하고 강력한 존재의 의념으로, 세상을 뜻대로 움직일 자격이 있는 듯했다.
그리드와 결사들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짙은 구름 사이로 햇살과는 다른 광채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하늘의 한 축을 물들이고 있는 그리드의 신성과 비교해도 짙은 금색이었다.
꽈르르르릉...!!
하나로 뭉친 광채가 거대한 기둥을 이루고 떨어졌다.
하늘을 반으로 가르며 정확히 하야테를 노리는 그것의 정체는 브레스였다.
이를 악 문 결사들이 방어에 나서는 그때.
“그리드! 드디어 불러줬구나!”
초월룡 네펠리나가 현장에 강림했다.
그리드의 의지에 호응한 것이다.
[세계에 유일한 칭호, <드래곤 나이트>의 효과가 발생합니다.]
네펠리나의 등을 밟고 올라선 그리드가 휘두른 검이 브레스를 반으로 갈라버렸다.
사방으로 나부끼는 빛의 파편이 그리드의 신성에 섞여 사라져갔다.
[놈...! 방해하지 마라!]
구름 너머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드래곤.
쿠바르토스라는 이름의 골드 드래곤이었다.
목단룡 크란벨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위용을 지닌 놈이 짙은 녹색의 안광을 번뜩였다.
[나를 잠에서 깨운 것은 저 오만한 용살자다. 대가를 치러야 옳다.]
하야테는 제 존재감을 만천하에 드러냈었다.
드래곤들의 살기가 자연히 자신을 향하도록 유도하고, 거기에 섞인 트라우카의 살기를 식별해 위치를 특정하기 위해서였다.
그로 인한 후폭풍이 지금 막 상위룡 쿠바르토스라는 형태로 찾아온 것이다.
흉포하게 울부짖는 그와 어느새 같은 눈높이를 맞춘 그리드가 아이템 합체를 전개하며 물었다.
“네가, 트라우카보다 위인가?”
[유일신 그리드...]
그리드의 정체를 뒤늦게 눈치 챈 쿠바르토스가 벌렸던 입을 다물었다. 심지어 드래곤 피어와 레이지를 억누르며 날개를 펄럭였다.
[...이번만큼은 고룡의 체면을 봐서 물러나마.]
서사시가 써진 직후다.
서사시조차도 트라우카의 격을 감히 훼손하진 못했지만, 트라우카가 그리드에게 고개를 숙이고 사죄했다는 내용은 분명하게 서술했다.
상위룡의 위계로 그리드를 대적하기엔 꺼림칙한 구석이 있는 것이다.
결국 쿠바르토스는 현장을 떠났고 일행은 무사히 지혜의 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네펠리나의 등에서 내려온 그리드가 병실로 옮겨지는 비반을 쫓으며 재차 다짐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결사들을 드래곤 웨폰과 아머로 무장시킨다.’
어지간한 드래곤은 감히 탑을 넘볼 수조차 없도록.
“...근데.”
그리드의 걸음이 문득 멈췄다.
네펠리나의 배에 달라붙어있던 인영이 꿈지럭거리며 일어나는 기척을 느낀 까닭이다.
검성 뮐러였다.
“당신께서 여긴 어떻게...?”
뭐지?
네펠리나가 텔레포트 될 때 붙잡고 늘어진 건가?
그게 가능해?
혼란스러워하는 그리드와 술렁이는 결사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뮐러가 예의를 갖추며 설명했다.
“비반 공의 상태를 듣고 부득이 신세를 지고 말았습니다. 제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
검의 마음은 검이 가장 잘 안다.
언젠가 지옥에서 적야의 대도가 예언했던 비반의 최후는, 죽은 줄로만 알았던 뮐러가 속세에 복귀한 시점부터 뒤바뀔 운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