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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685화 (1,684/1,794)

템빨 83권 - 17화

실수 따위가 아니었다.

본능에 이끌린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영겁의 세월을 살아온 위대한 고룡은 합리적이고 냉철하게 상황을 분석하고 판단했다.

자신이 전력을 다해 쏜 브레스를 반으로 갈라버린 규격 외의 존재.

인간의 몸으로 동족을 죽이고 절대지경에 오른 용살자 하야테를 최우선 순위로 경계했다.

점차 쾌속하게 다가오는 중인 그리드와 마리로즈를 잠시 외면했을 정도다.

트라우카는 결사들이 잔재만 남겨버린 브레스의 불꽃을 오직 하야테의 멸살에 집중시켰다.

화르르르르륵!!

위계가 낮은 드래곤은 하야테의 격을 노리고 그에게 집착하지만.

위계가 높은 드래곤이 하야테에게 집착하는 이유는 그의 잠재력이 위협적이란 사실을 알아서다.

조금 전 하야테가 브레스를 베어서 증명했듯이, 용살의 기운은 고룡에게도 치명적이었다. 드래곤이 당연하게 누리는 힘과 권리를 감히 침범하고 무력화시켰다.

“...!”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는 하야테의 모습이 트라우카를 안심시켰다.

용살의 기운과 함께 통째로 녹아내리기 시작한 그가 곧 죽을 거라고 보았다.

덕분에 트라우카는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그리드와 마리로즈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이 함께 쥔 드래곤 웨폰.

번헬리어의 송곳니로 만든 검의 진행 방향을 주시했다.

그때였다.

고룡의 지혜로도 예측하지 못한 변수가 생긴 것은.

콰아아아아아아앙!!

검성 비반의 거검이 하야테를 불태우고 있는 의념의 불꽃을 통째로 날려버렸다.

항시 견고했던 트라우카의 의지가.

영원불멸해야 할 고룡의 의지가 꺾였다는 의미다.

생전 처음 겪는 일.

트라우카의 사고가 잠시 정지했다. 믿기지 않는 허탈감에 휩싸인 채였다.

물론 찰나였다.

트라우카의 꺾였던 의지는 거의 즉시 회복됐고 동시에 허탈감을 떨쳐냈다.

다만 문제는, 이 자리엔 찰나를 영원처럼 늘려 쓰는 절대자가 트라우카를 제외해도 셋이나 있다는 점이다.

번쩍!

‘월야철?’

그리드의 허리춤에서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검광을 시야의 끝자락에 담은 트라우카는 깨닫고 말았다.

처음부터 잘못 됐다는 사실을.

하야테 한 명에게 신경을 빼앗겨선 안 됐다.

이 자리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은 마리로즈도, 하야테도 아닌...

서걱!

거인족이 멸망을 겪었던 이유 중 하나.

월야철의 가능성 때문이었다.

저것을 하찮은 장난감의 외피 따위가 아닌 ‘무구’로 빚어 다룰 수 있는 존재가 만에 하나 실재하게 된다면.

드래곤을 군림하게 만들어온 절대방어의 권능과 비늘이라는 호신강기가 무가치한 것으로 전락할 수 있었기에.

아스가르드의 신들이 거인족을 벌하고 그들의 땅을 바다에 묻을 당시 드래곤들이 방관했던 이유다.

괘씸하게 지상에서 활개를 치는 신들을 트라우카 또한 묵인했었다.

쩌적! 쩌저저저저적!!

거인족이 사라진 역사가 무의미해졌다.

트라우카의 절대방어와 비늘이 낙월검에 처참하게 베였다. 그가 등지고 선 구체 형태의 거대한 레어까지 함께.

스스로를 ‘온전한 상태’로 만드는데 용언을 소모해버린 트라우카 입장에선 낙월검에 저항할 도리가 없던 것이다.

이미 기적과도 같은 위력을 행사한 용언 위에 ‘베이지 않는다.’ 따위의 새로운 용언을 덧씌운다는 건 ‘현재의 트라우카’에게 불가능했다.

‘이프리트여.’

살아생전 단 한 번도 도움이 안 됐던 네놈이 죽어서까지 내 발목을 붙잡는구나.

트라우카가 한탄했다.

3명의 절대자를 대적함에 있어서 만전이 아니라는 사실에 엄청난 아쉬움을 느꼈다.

직감했다.

오늘 나는 패배하지 않고 승리를 거둘 테지만.

무지막지한 손해를 감수하고 말 거라고.

가슴으로 꽂혀오고 있는 노을빛 검을 통해 엿본 미래다.

쩌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엉!!

마리로즈와 그리드가 함께 찌른 황혼이 트라우카의 가슴을 아래서부터 위로 꿰뚫었다. 켜켜이 쌓여 심장을 보호하고 있는 유독 두꺼운 비늘들을 점차 박살내며 파고들어갔다.

온 세상을 통틀어 가장 강력한 보검 중 하나로 재탄생한 번헬리어의 송곳니에 깃든 절대자들의 힘은 용살의 기운 없이도 강력했다.

콰드드드드드드득!!

급기야 비늘을 모조리 꿰뚫은 황혼이 트라우카의 가죽과 살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난무하는 트라우카의 혈액 방울 하나하나가 인간의 상식으론 이해할 수 없는 원기(元氣)를 품고 마법과도 같은 파괴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멈추지 말고 나아가렴.”

피를 통제하는 능력은 단언컨대 마리로즈가 으뜸이었다.

연쇄적으로 폭발하는 피의 폭우 속에서 위축 된 그리드를 그녀가 인도했다.

자칫 흡혈되지 않도록 폭발한 뒤 증발하는 핏물의 파장을 갈라버리면서다.

좌우로 솟구치는 붉은 장벽의 틈새에서.

“트라우카!!”

이를 악 문 그리드가 전진했다.

마리로즈와 협동해서 펼친 초연룡극살파의 모든 검로를 트라우카의 심장에 적중시켰다.

쿠웅! 쿠구구구구구궁!!

위대한 고룡의 거체가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우연히 멀리서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은 불현듯 나타난 산맥이 마구잡이로 흔들리는 것으로 착각했다.

천상의 신들이 끝내 넘지 못했던 붉은 성벽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크리티컬!!]

[탄생 후 쓰러진 경험이 없던 염룡 트라우카가 협동 검무의 위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무릎 꿇습니다!]

[당신과 마리로즈의 저력에 경악한 아스가르드의 신들이 숨죽인 채 지상을 주시합니다.]

[‘신들의 입’을 통해 구전 될 업적을 세웠습니다.]

[세계가 수차례 멸망해도 잊히지 않을 업적입니다.]

[훗날의 누군가에겐 창세 신화의 일부로 해석 될 여지가 있습니다.]

[칭호, <희미한 태초의 자격>을 획득합니다.]

<희미한 태초의 자격>

등급:???

효과:???

[금전의 신 베니스가 아스가르드의 신들에게 당신과의 친분을 과시하는 중입니다.]

[당신의 활약과 베니스의 설명에 매료 된 아스가르드의 신 중 일부가 당신에게 호감을 품기 시작합니다.]

쿠우우우우웅...!!

초연룡극살파의 검무가 끝나고 급기야 지면에 떨어진 달이 산산이 조각났을 때.

그 위로 트라우카의 거체가 추락했다.

쓰러진 채 움찔거리는 모습이 한데 얽혀 물결치는 산과 성벽을 보는 듯했다.

고룡이란 상처 입은 모습조차도 초월적인 광경을 자아내는 존재인 것이다.

“이겼...다고?”

“고룡을 쓰러뜨리다니?”

하야테와 비반을 수습하고 있던 결사들이 술렁였다.

기겁한 그리드가 눈을 부릅뜨고 눈치를 줬지만 이미 늦었다.

플래그는 세워졌다.

트라우카가 즉시 몸을 일으켰다.

드래곤의 몇 안 되는 약점 중 하나인 심장을 난도질당하고도 치명상이 아닌 것처럼 행동했다.

“가짜이기 때문이야.”

마리로즈가 트라우카의 갈라진 가슴을 관찰하며 설명했다.

현재 트라우카의 심장은 용언으로 만들어진 ‘가짜’다.

설령 산산조각 났어도 실제로 입는 피해는 의외로 적었을 것이다.

하지만 드래곤 하트가 쉽게 부서질 리 만무했다.

트라우카의 심장은 가짜이되 성능만큼은 온전했으니까.

‘고룡...’

과연 불합리한 존재다.

꿀꺽, 마른 침을 삼킨 그리드가 고개를 끝까지 치켜들었다.

혼자서 전개했을 때와 비교하면 몇 배나 강력했던 6융합 검무에 약점을 얻어맞고도 고고한 거룡의 시선을 긴장한 채 마주봤다.

그나마 다행인 사실은, 그리드가 혈왕이라는 점에 있었다.

그리드와 함께 있는 이상 마리로즈는 나태의 저주를 극복한다.

완전히 극복해서 모든 능력치를 되찾는 건지, 단순히 졸음을 물리치는 수준인 건지는 그리드가 알 도리가 없었지만.

적어도 눈꺼풀이 무거워진 기색은 아니었다. 아직 더 싸울 수 있는 눈치였다.

결사들의 전력 또한 건재한 편이었다.

중상을 입은 하야테와 어째선지 정신을 잃은 비반을 제외하더라도 결사들은 강했다.

노에와 랜디, 그리고 템빨골과 직계들을 모조리 소환한 그리드가 천천히 심호흡했다.

‘네펠리나는 부를 수 없어. 여기에 템빨단을 소집한 전력으로 마무리를 지어야 된다.’

사도들을 부르지 않는 이유는 역시 그들의 목숨을 걱정해서다.

특히 네펠리나는 트라우카에게 잡아먹힐 우려가 있었다.

소중한 존재가 눈앞에서 산 채로 잡아먹히는 광경?

그리드는 절대로 보고 싶지 않았다.

<초월룡>이라는 특별한 이명을 지닌 네펠리나가 트라우카에게 큰 양분을 제공할 가능성도 높았고.

‘...브라함도 못 불러.’

브라함은 죽음을 극복한다.

죽음이 뒤따르는 전장에 소환하기에 그만큼 적합한 인물도 없었다.

특별한 것이다.

하지만 특별해도 너무 특별하다는 점이 문제였다.

브라함은 사도 중에서 유일하게 그리드가 통제할 수 없는 인물이기도 했다.

브라함이 감정적으로 행동할 경우 막을 도리가 없었고, 감정적일 때의 브라함은 대부분 트롤링을 일삼았다.

브라함이 세상에서 가장 혐오하는 존재.

다름 아닌 마리로즈가 있는 전장에 그를 소환한다는 건 시한폭탄을 떠안는 셈이 될 수도 있었다.

“기사 소환.”

그리드가 템빨단원들을 소집했다.

마침 구경꾼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무려 고룡의 출현.

안 그래도 눈에 띄는 거체를 지닌 트라우카는 낮과 밤을 교차시키고 강물을 모조리 메마르게 만들어 제 출현을 세상에 널리 알렸다.

구경꾼이 몰리는 게 당연하단 말이다.

당연히 죄다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플레이어였다.

개중 극히 소수는 그리드도 얼굴을 기억하는 랭커였다.

그리드는 즉시 대규모 레이드를 계획했다.

염룡 트라우카 레이드.

세상이 멸망하는 꼴을 보지 않기 위해서라도 현장의 모든 플레이어에게 싸움을 종용할 생각이었다.

사실 그리드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사람들 모두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구경꾼들이 꺼내 쥔 무구가 그 사실을 증명했다.

누군가는 100레벨조차 안 되는 초보자였고, 누군가는 간신히 200레벨을 넘긴 중급자였으며, 극히 소수만 300레벨을 넘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력조차 될 수 없는 자들이 대다수였지만...

그리드는 그들을 의지하기로 결정했다.

“죽으면 곧바로 부활해서 다시 날아오자고.”

큼지막한 방패를 세운 반트너가 동료들의 전위에 서며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템빨단원 전원 예측했다.

의외로 짧은 싸움이 될 거라고.

그리드를 제외한 플레이어는 아마 대부분 트라우카의 숨결조차 감당하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당장 전장을 불태우고 있는 의념의 불꽃만으로 상당수의 플레이어가 잿빛으로 산화하는 실정이었다.

하지만 싸워야 한다.

모두가 각오할 때였다.

[유일신 그리드.]

거룡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 깃든 압박감이 실로 무지막지했다.

트라우카는 단순히 ‘말’을 했을 뿐이지만, 전설 이하의 플레이어 전원 귀가 먹먹해지는 것을 느끼며 온갖 상태이상에 시달렸다.

쿠우우웅...

트라우카의 얼굴이 점차 커졌다.

놈이 인간들을 향해서 고개를 뻗었기 때문이다.

템빨단원들조차 사색이 되고 말았다.

트라우카가 재차 입을 여는 순간 쏟아질 브레스에 플레이어가 전멸하는 광경을 머릿속에 자연히 그리면서다.

잔뜩 긴장한 그리드와 결사들이 이어질 트라우카의 공격에 대비하는 그때였다.

번쩍!

상공에 워프 게이트가 열렸다.

그리고 은발의 미남자가 나타났다.

지혜와 마법의 신 브라함이다.

불쑥 찾아온 낮을 보고 트라우카의 출현을 감지한 직후.

대륙 전역에 추격과 탐지 마법을 전개한 그는 트라우카의 위치를 특정했다. 그리고 그리드가 트라우카 곁에 있음을 깨닫고 한달음에 달려왔다.

“어째서 나를 부르지 않았지?”

브라함이 치를 떨며 그리드를 노려보았고,

“히익!”

사람들의 비명이 빗발쳤다.

트라우카의 거대한 얼굴이 지상에 한층 더 바짝 다가온 여파였다.

만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크르르...

그리드를 비롯한 인간들과 눈높이를 맞춘 고룡이 서서히 입을 열었다.

브레스의 전조였...

[...사죄하마.]

“...”

“...”

비명과 신음이 빗발치던 현장에 거짓말 같은 적막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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