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3권 - 16화
‘늦지 않아야 할 터인데.’
결사들의 마음이 초조했다.
진즉부터 시야에서 사라진 그리드를 쫓으면서다.
조금 전.
하야테가 용살의 기운을 피어 올렸을 당시.
의외의 조력자가 일행 앞에 나타났다.
목단룡 크란벨.
세상에 몇 안 되는 상위룡 중 하나이자, 굴절룡의 직계로 추정되는 네임드 중의 네임드였다.
크란벨의 기감은 하야테의 예측을 초월했다.
용살의 기운을 드러낸 거의 즉시 현장에 찾아왔으니까.
절대자인 하야테가 동요를 금치 못할 정도로 충격적인 반응 속도였다.
감탄과 경악을 숨기지 못한 채 자신을 경계하는 결사들에게 크란벨은 설명했다.
[다른 자들은 고룡의 출현을 경계하여 신중할 뿐이다.]
드래곤 중에 이처럼 겸손한 존재가 있을까?
크란벨은 고아한 말투만큼이나 성품이 훌륭했다.
결사들 중에서 유독 본능이 앞서는 검성 비반이 경계심을 풀고 검을 거뒀을 정도다. 목단룡은 우리의 적이 아니라고 말하듯이.
“그간 잘 지낸 눈치군.”
그리드 또한 의외의 태도를 보였다.
크란벨의 멀쩡한 왼팔을 재차 확인하며 미소마저 머금었다. 인류의 대적인 드래곤을 숫제 반기는 눈치였다.
조력자였던 회색룡 제논을 잃은 영향일까.
드래곤이라는 종 자체를 귀중하게 여기는 듯한 그리드의 태도에 비반을 제외한 결사들이 당황하는 그때.
[...서둘러 떠나는 편이 좋다. 하루살이마냥 연명하는 하위룡들에게 용살자란 자신의 운명을 바꿀 몇 안 되는 희망인 바. 일부 둔한 하위룡은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곧 이곳에 도착할 공산이 크다.]
크란벨이 조언했다.
마리로즈에게 자칫 오해 받을 것을 경계하는 건지, 그리드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하야테에게 말했다.
하야테는 마침 트라우카의 옅은 살기를 읽고 위치를 식별한 상태였다.
레드 드래곤답게 흉포한 트라우카는 과연 쉽게 도발에 넘어갔다.
“우리를 순순히 보내주겠다고?”
6좌 켄이 으르렁거렸다.
그리드와 비반의 태도와 별개로 크란벨을 극도로 경계했다.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내가 그대들의 앞길을 막을 셈이었다면 조금 더 은밀하게 행동했겠지. 나의 목적은 용살자에게 이끌릴 하루살이들을 포식하는 것일 뿐, 그대들을 상대로 굳이 위험을 자처하는 게 아니야.]
그리드와 하야테.
탑의 결사들을 이끄는 인물들은 상위룡의 시각으로 봐도 훌륭했다. 마땅히 경계해야 옳았으므로 솔직하게 고백했다.
“믿겠소.”
일부 결사들은 여전히 의심하는 눈치였으나.
하야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크란벨의 조언을 받아들이고 그리드와 결사들에게 트라우카의 위치를 공유했다.
그와 동시였다.
“먼저 갑니다.”
크란벨에게 목례한 그리드가 가장 먼저 앞서갔다. 연속해서 순보를 전개하는 식으로 현장을 빠져나갔다.
체력을 안배할 필요가 있는 결사들 입장에선 도무지 따라잡을 만한 속도가 아니었다.
단순히 서두르는 기색이 아니라 결사들을 따돌리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그리드는 우리를 지킬 셈이야.”
4좌 베티가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드는 황제이고 신이기 이전에 우리의 후대다.
우리가 의지가 되어줘야 했다.
한데 매번.
그리드는 우리를 의지하지 않고 도리어 자신을 의지하게 만들었다.
결사들이 짊어진 책임까지 모조리 짊어질 기세였다.
“...”
어느 시점부터.
이를 악 문 결사들은 전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체력을 안배하지 않고 그리드를 따라잡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로부터 지금이다.
“...왈츠?”
현장에 도착한 결사들이 전생을 떠올렸다.
그들에게 전생이란 당연히 ‘속세를 떠나기 전’을 의미했다.
지혜의 탑에 오르기 전.
세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모든 걸 희생하고 있는 지금과 달리 평범한 한 명의 인간이던 시절.
그들 역시 때때로 향락을 즐겼었다.
혹은 영웅으로서 의무적으로나마 사교계에 입성했었다.
감미로운 선율이 흐르는 무도회장에서 춤을 추는 연인들의 모습을 수차례 보았단 말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지금의 그리드와 마리로즈처럼 고아하고 아름답진 못했다.
“...”
결사들이 점차로 넋을 잃었다.
한 자루의 검을 나란히 거머쥔 두 명의 절대자.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그리드와 마리로즈의 일체감은 실로 엄청났다.
둘이 아닌 하나로 보일 지경으로 똑같은 보폭을 밟으며 서로를 지탱하지 않나.
염룡 트라우카가 막 다시 일으키기 시작한 불꽃의 소음이 그들을 위한 연주로 들렸다.
그들의 발밑에 깔린 고룡의 레어가 그들을 위한 무대로 보였다.
“저게, 무슨...”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하야테가 멈췄던 숨결을 토하는 순간이었다.
[나의 심장은 온전하다.]
트라우카가 용언을 외쳤다.
순간.
“...!!”
그리드의 노을에 휘청거리던 밤의 어둠이 완전히 물러났다.
이글거리는 태양을 머리 위에 둔 것처럼 세상이 밝아졌다. 곳곳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며 풍경을 일그러뜨렸다.
순전히 열기에 의해서다.
일대를 장악한 염룡의 불꽃이 ‘대륙 전체’를 뜨겁게 달군 여파가 컸다.
태양의 고도에 따라 밤과 낮으로 구분 됐던 지역들이 온통 낮이 되었고 대륙의 혈관과도 같았던 강물들이 모조리 메말랐다.
적해의 해수면이 서서히 상승하며 대륙의 규모가 작아져갔다. 기존의 서대륙 지도가 무가치한 것으로 전락해갔다.
생태계가 붕괴되고 있었다...
[염룡 트라우카의 불꽃이 지상의 기온을 급격히 상승시킵니다.]
[오랜 세월 깊은 강에 묻혔던 문명들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기존의 문명 일부가 해일에 삼켜지고 바다에 묻힙니다.]
[무수히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현생 인류가 기억하는 생태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고룡.
창세 이전부터 존재해왔던 절대종.
탑의 결사들조차 몰랐던 사실이지만.
그들은 늘 세계를 배려하고 있었다.
제 힘을 억누름으로써 지상의 주인을 자처하는 필멸자들이 그 짧은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런 미친...’
황혼을 쥔 그리드의 손이 덜덜 떨렸다.
이프리트에게 입었던 상처를 용언으로 회복하고 전력을 드러낸 염룡 트라우카.
기껏 찾아온 낮을 제 그림자로 덮어버린 눈앞의 거대한 존재는 그리드의 예측과 상식을 초월하는 존재였다. 단순히 강함과 약함으로 구분 지을 수 없는, 진정한 세계의 중심이었다.
“유일신 그리드. 네 역할은 네가 스스로 자부하는 것처럼 대단하지 않아.”
레이단을 방문했던 트라우카가 남긴 말이 그리드의 귓전을 맴돌았다.
그리드는 순전히 농락당한 기분을 느꼈다.
플레이어 따위가 평생 노력해봤자 Satisfy를 바꿀 순 없다...
그간 발버둥 쳐온 자신을 보고 비웃어왔을 S.A그룹의 악질적인 감상이 자연히 떠오르며 그의 심장을 후벼 팠다.
급기야 의욕을 상실하기 시작한 그리드의 발걸음이 머뭇거리는 그때.
“허장성세야.”
마리로즈가 속삭였다.
덜덜 떨리는 황혼을 더욱 강하게 거머쥔 그녀가 그리드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왼 손에 힘을 실었다. 그리드가 걸음을 멈추지 못하고 계속 나아가게 만들었다.
“우리의 궁극이 그러하듯, 고룡의 궁극 또한 유지되는 것이 아니란다.”
쿠오오오오오...!!
그리드의 주황색 신성이, 마리로즈의 붉은색 혈기가 하나로 뭉쳐갔다.
검기보다 날카롭고 투기보다 흉포한 기세로 벼려지며 황혼을 감쌌다.
[염룡 트라우카의 불꽃이 당신을 녹입니다.]
[저항에 실패하였습니다.]
[강력한 열기에 당신의 존재감이 흐릿해진 여파로 모든 능력치가 대폭 하락합니다.]
그리드에겐 확신이 없었다.
자신을 리드하는 마리로즈에게 보폭을 맞추며 6융합 검무를 전개하면서도, 이 검무가 과연 저 무지막지한 용에게 닿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잠시뿐이다.
‘어차피 물러날 수 없다.’
흔들리던 그리드의 눈빛이 빠르게 자리를 찾았다.
검고 심유한 눈동자에 막 강제로 재생한 고룡의 심장을 노려봤다.
마리로즈가 인도하는 방향이었다.
둘이 하나의 검무를 펼치는 두 사람은 무지막지하게 쾌속했다.
시스템이 보정하고 있었다.
[뱀파이어 공작 ‘마리로즈’의 혈액이 당신의 체내로 침투하였습니다. 강화 된 피가 당신이 겪고 있는 모든 약화 효과를 벗겨냅니다.]
[협동 검무의 영향으로 뱀파이어 공작 ‘마리로즈’와 주요 스탯을 공유합니다.]
[근력이 7,873 상승합니다.]
[민첩성이 9,911 상승합니다.]
[체력이 4,453 상승합니다.]
[지력이 1,320 상승합니다.]
[협동 검무의 영향으로 당신의 자격을 ‘마리로즈’와 공유합니다.]
[뱀파이어 공작 ‘마리로즈’가 <황혼>을 온전히 다룹니다.]
[기어이...]
염룡 트라우카가 눈살을 구겼다.
헤아릴 수 없는 세월 동안 수많은 언약을 이행해온 고룡의 용언은 필시 강력하다.
하지만 만능은 아니었다.
용언으로 새로이 세우는 법칙의 수준이 강하면 강할수록 트라우카가 감당해야하는 페널티도 컸다.
세계의 법칙을 새로이 세운다는 건 즉, 태초신 레베카가 만든 법칙을 부정한다는 의미가 됐기 때문이다.
하물며 현재 트라우카는 ‘드래곤 하트’를 회복시켰다.
딸이 제 목숨을 바쳐 날린 일격에 훼손 됐던 심장을 온전한 상태로 만든 대가는 필시 크게 치러야할 터였다. 고룡의 입장에서도 긴장 될 만큼.
솔직히 말해서.
트라우카는 자신이 이쯤 했으면 마리로즈가 물러날 거라고 생각했다.
완전해진 그는 마리로즈가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마리로즈는 물러나지 않았다.
그리드와 함께하면 진정으로 자신을 상대할 수 있다는 듯이.
트라우카는 몹시 큰 분노를 느꼈다.
살면서 이처럼 큰 멸시를 받는 건 처음이었기에 좀처럼 가라앉힐 수 없는 분노였다.
크롸라라라라라라!!
트라우카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심각한 상처 탓에 끌어내려졌던 그의 격은 이 순간 다시 회복된 상태였다.
굳이 마리로즈와 같은 눈높이에서 대화를 나눌 이유가 없었다.
꽈아아아아아아앙...!!
거대한 불기둥이 직선으로 뻗어나갔다.
지척까지 다가온 마리로즈와 그리드를 통째로 집어삼키는 불기둥이었다.
“어림없다...!”
결사들의 행동이 빨랐다.
힘을 되찾은 염룡의 기세에 놀랄지언정 온전한 정신을 유지했던 그들이다.
냉정한 판단력으로 그리드와 마리로즈의 곁을 따라붙고 있었다.
두 사람을 덮치는 염룡의 브레스를, 자신들이 대신 맞섰다.
하야테가 선행했다.
드래곤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하는 용살검을 휘둘러 브레스를 반으로 갈라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강맹한 기운을 라드볼프의 마장기들이 몸으로 막아냈고, 프론잘츠의 아티팩트가 흐트러뜨렸다.
하지만 열기가 남았다.
결사들의 피부 곳곳이 빠르게 타들어갔다.
가장 선두에 선 하야테는 이미 전신이 불길에 휘감겨 있었다. 피부와 살이 불타고 뼈가 녹아내리기까지 순식간이었다.
“하야테 님!!”
다른 결사들이 다급히 궁극기를 전개했다.
그리드에게 길을 열어주는 한편 하야테를 구출하려고 시도했다.
시도는 절반의 성공으로 그쳤다.
결사들의 전력은 그리드에게 길을 열어줬을 뿐, 하야테를 구출하진 못했다.
트라우카의 불꽃은 의념이다.
고룡이 의지를 상실하지 않는 이상 결코 꺼지는 법이 없기에 집요하게 하야테를 불태웠다. 용살의 기운으로 두른 호신강기를 처참하게 녹이면서.
그것을.
“우오오오오오오오!!”
검성 비반이 베어버렸다.
심상에 품은 검 한 자루를 최대한 크고 날카롭게 벼르기 위해 오성(悟性)마저 포기했던 그는.
이 순간 진정으로 뮐러를 뛰어넘었다.
짐승마냥 지성을 완전하게 상실한 대신 고룡의 의념을 베고 불꽃의 잔재를 모조리 꺼뜨렸다.
“비반 공...?”
결사들의 표정이 처참하게 일그러진 그 순간.
물러났던 밤이 급속도로 되돌아와 세상을 재차 검게 물들였다.
노을이 번졌다.
그리드의 신성과 마리로즈의 혈기가 뒤섞여서 만든 노을이었다.
[협동 검무 <초연룡극살파(超聯龍極殺派)>을 전개합니다!]
서로의 능력을 공유한 두 명의 절대자가 함께 전개하는 검무.
그것이 트라우카에게 도달하기 직전에,
서걱!
그리드가 반대편 손에 꺼내 쥔 낙월검을 먼저 휘둘렀다.
트라우카의 절대방어와 비늘을 베어 약화시킬 의도였다.
쩌적! 쩌저저저저저적!!
트라우카가 등지고 선 달이 반으로 갈라졌다.
푸화하하하하하학!!
기울어진 달 위로 대량의 핏물이 쏟아진다.
염룡 트라우카가 흘린 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