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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683화 (1,682/1,794)

템빨 83권 - 15화

꽈르르르릉...!

지평선에 걸린 달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침략자가 일으킨 힘의 파동에 의해서다.

급기야 침략자의 손끝에서 휘황찬란하게 번진 노을이 밤의 어둠을 물리쳤을 때, 창백한 달의 표면에 거미줄처럼 새겨진 균열의 연쇄가 만천하에 모습을 드러냈다.

[유일신 그리드...]

달의 주인은 개의치 않았다.

이미 위치가 노출되어 가치를 잃은 레어에 신경 쓸 여력 따위 없었으니까.

꿰뚫린 몸의 상처를 수습하며 그리드를 관찰할 뿐이다.

[드래곤 피어가 당신의 모든 능력치를 대폭 하락시키고 행동을 마비시킵니다.]

[저항하였습니다.]

[염룡의 불꽃이 당신의 육신과 정신을 불태우기 시작합니다.]

[저항하였습니다.]

[염룡의 불꽃이 당신이 착용 중인 아이템을 불태우기 시작합니다.]

[염룡의 시선이 당신을 해부합니다. 당신의 레벨과 스탯, 보유 중인 칭호와 스킬의 정보 일부가 노출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고룡의 거체를 관통한 순간.

그리드의 경험치 게이지는 무려 15퍼센트 가까이 차올랐다.

염룡 트라우카는 여태껏 그리드가 싸워온 그 누구보다 막대한 경험치를 안겨준 것이다.

제1위 대악마 바알, 지상에 강림한 무신 제라툴, 저주에 시달린 악룡 번헬리어, 야탄의 사도 이브.

그 누구도 트라우카의 비교 대상이 못 되었다.

‘약화 된 상태인데도 그렇단 말이지.’

그리드가 눈살을 구겼다.

경험치가 많이 오른다는 건 좋은 소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리어 그리드와 트라우카의 수준 차이가 크다는 증거였다.

실제로 위룡극파살연의 데미지가 제대로 먹혀들지 않았다.

검무에 포함 된 동작 중 ‘베기’의 데미지가 모조리 용언에 씹혔다.

고룡의 용언.

<조건부 검성>과 <황혼>의 효과마저 무력화시킨다.

두 힘이 결합됐을 때 드래곤의 비늘과 절대방어를 두부처럼 쉽게 썰어버린다는 점을 감안하면 용언의 위력은 실로 무지막지한 것이다.

검무 전개 도중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쓴 <거세안>도 당연히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건 격의 차이가 아니야.’

단지 용언이라는 개념이 특별하고 강력할 뿐이다.

당연하다.

섭리를 세우는 힘이니까.

물론 만능은 아니었다.

만약 용언이 만능이었다면 트라우카는 용언으로 자신을 ‘무적’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트라우카는 그러지 않았다. 어느 정도 피해를 감수하는 수준까지만 스스로를 강화시켰다.

그리드를 약화시키는 식으로 활용하지도 않았다.

여러모로 한계가 있다는 뜻일 터였다.

‘그나마 다행이긴 하다만...’

그간 그리드가 체험해온 용언엔 전쟁을 반전시키는 위력이 있었다.

심지어 네펠리나의 불완전한 용언조차도 엄청난 활약을 펼치지 않았었나.

트라우카가 고룡이라는 점을 감안해야했다.

트라우카의 용언에 제약이 있을지언정, 제약 있는 용언들이 중첩되어 어느 시점부터 트라우카는 진정 무적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상기하자.’

눈앞의 존재는 아스가르드의 신들을 처참하게 사냥했던 괴물이다.

대적함에 있어서 늘 최악의 경우를 상정해야 옳다.

속전속결을 노리는 편이 낫다.

“당신은 어째서.”

자신을 낱낱이 관찰하는 고룡의 시선을 앞두고.

“내게 집착하는 겁니까?”

그리드는 일단 마리로즈에게 물었다.

“복수엔 딱히 관심이 없는 눈치던데.”

브라함은 말했었다.

마리로즈는 어머니가 복수를 위해 낳은 존재라고.

하지만 정작 마리로즈는 복수할 기회들을 스스로 외면해왔다.

그녀가 ‘마음만 먹었으면’ 언제든 풀 수 있었을 나태의 저주를 굳이 감수한 채 지냈다.

무력으로 브라함을 겁박하지도, 그리드를 범하지도 않았음이 증거다.

‘나하고 브라함을 제 뜻대로 움직이는 게 충분히 가능했던 강자이면서 방관했을 뿐이다.’

심지어 그리드가 대규모 지옥 원정대를 꾸렸을 때도 방관했었다.

그리드는 얼마 전 무후총에서 보았던 마리로즈의 얼굴을 떠올렸다.

슬픈 표정이 스쳤던 얼굴.

찰나지간에 지나갔었다.

절대자가 아니었다면 눈치 채지 못했을 정도로.

그 표정과 마리로즈의 태도를 결합해 보면...

그녀는 복수에 관심이 없는 수준을 넘어 내키지 않는 게 아닐까?

굳이 내게-혈왕-에게 집착할 이유가 없단 말이다.

“말 했잖니.”

성격과 별개로 마리로즈의 옷차림은 늘 정숙했다.

햇볕에 닿는 면적을 최소화하고 싶기 때문인지, 그녀가 입는 드레스가 살결을 노출하는 경우는 몹시 적었다.

한데 오늘은 달랐다.

치마가 무릎 한참 위까지 올라가 있었다.

흉측하게 뜯겨나간 허리를 그리드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가슴 아래까지 치마를 올려 묶어 상처를 숨긴 그녀는 염룡의 불꽃에 새삼 감사함을 느꼈다.

피를 증발시켜주는 덕분에 상처가 티나지 않게 되었다면서.

“낭군이 좋...”

단지 네가 좋다.

좋아서 지켜봐왔다고 얼마 전에도 고백하지 않았느냐.

인간의 정서로는 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

아쉬움을 느끼며 재차 말하려던 마리로즈가 입을 다물었다.

창백한 얼굴에 혈색을 띄면서다.

그리드의 시선이 제 다리를 스친 순간 엄청난 부끄러움을 느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당혹감.

장갑 낀 두 손을 허벅지 위에 가지런히 놓고 우물쭈물했다.

“...”

뱀파이어의 얼굴이 붉게 물드는 모습.

브라함을 비롯한 직계들과 긴 시간 동안 인연을 맺어온 그리드조차 처음 보았다.

얼떨결에 같이 얼굴을 붉힌 그가 드디어 확신했다.

마리로즈가 그간 내게 보낸 호의.

장난이나 가식 따위가 아닌 진심이었음을.

‘내가 봉인을 풀어줬던 게 워낙 감사했던 건가?’

유라와 지슈카, 아이린과 메르세데스, 그리고 바사라에 이어서 너무 과분한 게 아닌가...

드문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그리드는 태도를 똑바로 했다.

‘일단 은혜를 갚는다.’

그간 마리로즈에게 받은 도움이 많다.

오늘 그녀를 지키는 것을 시작으로 보답해 나가리라.

다짐하는 그리드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잠시 마리로즈에게 빼앗겼던 시선을 재차 트라우카에게 고정하며 아이템 합체를 풀었다.

탐욕이 아닌 재료로 만든 무구들.

즉, 트라우카의 불꽃에 저항하지 못하고 실시간으로 내구력을 잃어가는 아이템들을 잠시 인벤토리에 돌려 넣는 것이다.

필요할 때만 꺼내서 사용해야한다는 판단이었다.

다소 번거롭지만 부담감은 전혀 없었다.

아이템 스왑 속도를 측정하는 대회가 만약 존재한다면.

그리드는 무조건 1등을 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우선 마리로즈의 신변을 보호하다가 결사들이 도착하면 역공을...’

그리드가 봤을 때 마리로즈의 외양은 멀쩡했다. 상처 하나 입은 흔적이 없었다.

하지만 속지 않았다.

그녀가 트라우카를 쫓아 워프를 탄 게 벌써 15분 전이었으니까.

최소 10분 이상을 고룡과 격전을 치른 상태란 말이다.

겉모습은 멀쩡할지 몰라도 크게 지쳤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엔 나태의 저주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

‘당장 잠 들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하자.’

사실 그리드는 결사들이 이곳에 오는 게 내키지 않았었다.

결사들의 의무가 드래곤으로부터 세계를 지키는 거라지만.

상대가 염룡인 이상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애초에 지혜의 탑은 드래곤과 싸움을 ‘피하는 걸’ 원칙으로 세우고 활동해온 조직이다. 염룡을 상대로 잘 싸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들을 위험에 빠뜨리느니 혼자서 마리로즈를 구출할 각오였다.

하여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했다.

하지만 정작 도착해서 보자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트라우카의 존재감이 상상 이상이었다.

저 괴물을 따돌리고 마리로즈를 구출한다?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았다.

결사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지닌 능력 이상으로 파괴적인 검술을 구사하는군... 드래곤 웨폰의 위력 덕분인가...’

그리드가 상황을 파악하고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목덜미에 뻥 뚫린 상처를 회복한 트라우카가 그리드의 저력을 파악했다.

겉으로 드러나는 정보를 신뢰해선 안 되는 유형의 적이다.

일신의 능력을 초월시키는 무구들을 워낙 많이 보유했다.

상시 ‘예상을 웃도는’ 퍼포먼스를 보여주리라.

‘까다로운 상대군.’

트라우카의 전투 경험은 굉장히 많다.

동족을 포식하고 천상의 신들을 사냥하며 얻은 경험들이다.

그에게 까다로운 상대란 당연히 몇 없어야 정상이었다.

제아무리 유일신이얼정.

고작 몇 년 전에 탄생한 신을 경계하게 될 줄은.

트라우카 본인도 상상 못해본 일이었다.

‘겨뤄보고 싶다만... 피해야 옳다.’

트라우카는 현재 위험한 상태였다.

몇 분 전.

용살자 하야테가 자신의 존재감을 퍼트려 온 세상의 용들을 모조리 깨워버린 까닭이다.

안 그래도 레어의 위치가 노출 된 상태인 트라우카가 덩달아 관심을 받게 됐다.

당장 현장을 벗어나지 않으면.

트라우카는 일부 겁 없는 동족들에게 도전 받는 신세로 전락할 터였다.

그래, 고룡의 냉정한 판단력은 트라우카에게 퇴각을 종용했다.

싸움을 갈망하는 레드 드래곤의 흉포한 본능이 억눌렸다.

결국.

[유일신 그리드. 마리로즈를 데리고 떠나라. 나는 네게 의뢰를 부탁했던 몸이다. 우리가 당장 대적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어.]

“...!”

트라우카가 한 발 물러났다.

사실 그는 처음부터 물러난 상태였다.

그리드가 도착하기 전부터 마리로즈를 쫓아내려고 노력했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사정을 몰랐다.

설마 고룡이 자신을 순순히 보내줄 줄이야?

예상치 못한 전개에 당황했다.

아무튼 좋았다.

무사히 이 위기를 넘길 수만 있다면.

스륵.

그리드가 트라우카를 경계하면서 순보를 전개했다.

마리로즈의 곁에 섰다.

트라우카는 그리드를 가로막지 않았다. 오히려 불꽃을 거두며 길을 열어주었다.

‘정말로 순순히 보내줄 셈인가?’

이프리트에게 입은 상처가 보기보다 큰 걸까?

설령 그렇다고 해도 충분히 압도적인데.

‘호의로 해석해야 하나?’

혼란스럽다.

그리드는 제논을 죽인 트라우카를 증오하는 동시에 어렴풋한 호의가 고마웠다.

일단 위기를 넘길 수 있다는 게 중요했다.

마침 허리의 재생을 마친 마리로즈는 치마를 내린 상태였다.

덕분에 그녀를 다시 똑바로 쳐다볼 수 있게 된 그리드가 재촉했다.

“떠납...”

떠납시다.

그 짧은 한 마디를 채 완성하기도 전이었다.

“어영부영 넘길 생각하지 마렴.”

마리로즈의 고운 손이 그리드의 뒷목을 부드럽게 감쌌다. 당황하는 그리드에게 강제로 입을 맞췄다.

아릿한 통증과 무지막지한 쾌락이 그리드의 입술에서부터 번졌다.

[너... 너 이 미친 것이 정녕...?]

실수를 깨달은 트라우카가 낭패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냈고,

“낭군에게 사죄해.”

꿀꺽, 그리드의 입술을 씹어 핏물을 삼킨 마리로즈가 읊조렸다. 숫제 명령하는 태도였다.

‘이게 뭐야?’

트라우카 이상으로 놀란 그리드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기껏 도망칠 기회를 날려 버리려는 마리로즈를 황당하게 쳐다봤다.

그에게 마리로즈가 속삭였다.

“명심하렴.”

붉은 눈동자가 맑게 빛난다.

위대한 존재를 흡혈하고 잠시나마 저주를 완전히 떨쳐낸 덕분이었다.

“우리에게 기회란 주는 것이지 얻는 것이 아니란다.”

우리라는 말이 어색했던 걸까.

아까보단 옅은 홍조를 띄운 마리로즈가 그리드의 오른손을 감쌌다. 긴 손가락을 꼼지락거린다 싶더니 황혼을 그리드와 함께 쥐는 형태로 만들었다.

“낭군의 것을 범한 용을 벌하자꾸나.”

그게 낭군의 위계야...

몽환적인 속삭임과 몸짓이 그리드의 넋을 빼앗았다.

그리드가 인식하는 풍경이 바뀌었다.

아름다운 선율이 흐르는 무도회장에서, 마리로즈와 함께 춤을 추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착각이 아니다.

실제로 두 손을 맞잡은 두 사람은 같은 검무를 펼치고 있었다.

마리로즈가 리드했고, 그녀의 이마에 뺨을 기댄 그리드가 뒤쫓았다.

[뱀파이어 공작 ‘마리로즈’와 협동 검무를 펼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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