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681화 (1,680/1,794)

템빨 83권 - 13화

드래곤 레이더.

라드볼프가 개발한 아티팩트다.

성룡급 드래곤의 기척을 실시간으로 탐지하며, 위계가 높은 드래곤일수록 집중 감시한다.

탑의 결사들은 기본적으로 드래곤 레이더에 잡히는 기척을 근거로 삼아 대상을 추적한단 말이다.

대상이 레이더의 감시망에서 벗어나면 반응이 늦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안일했다.

지혜의 탑은 트라우카의 기척을 벌써 몇 달째 놓치고 있었으니까.

‘안일했다는 건 너무 가혹한 평가이긴 하지.’

에너지 측정기로 주변을 조사하던 라드볼프가 쯧, 혀를 찼다.

측정기가 파악한 힘의 잔재는 확실히 기준치 미달이었다.

이곳이 정녕 염룡의 출몰 지역이 맞는지 의심이 생길 정도로.

트라우카의 상태가 결사들의 추측대로 온전치 않다는 증거였다.

화룡 이프리트가 동귀어진을 시도했던 여파로 트라우카는 엄청나게 약해져 있었다.

기척을 숨기고 지내는 게 당연한 입장이었단 의미다.

즉, 탑이 트라우카의 기척을 놓친 건 결사들이 안일해서가 아니라 트라우카의 방어기제 때문이었다.

오늘 이곳 레이단에 트라우카가 출몰했다는 사실을, 결사들은 한 발 늦게 파악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리로즈는 즉시 파악했다.

그녀가 드래곤의 기척을 읽는 재주가 드래곤 레이더의 성능보다 탁월하다는 뜻일까?

‘그럴 리가.’

라드볼프는 이번 사태의 원인이 몹시 단순하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 있었다.

결사들은 ‘드래곤’을 감시해온 반면 마리로즈는 오직 ‘그리드’를 주시해왔다.

그 차이가 마리로즈를 한 발 먼저 움직이게 만들었다.

“추적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드도 눈치 챈 듯했다.

마리로즈가 자신에게 몹시 큰 호의를 품고 있단 사실을.

살기등등한 표정이 증명했다.

당장 트라우카를 쫓아가 싸울 기세였다.

“쉽지 않습니다.”

라드볼프와 눈빛을 교환한 프론잘츠가 조심스레 답했다.

트라우카가 남긴 워프의 잔재가 어떤 좌표를 담고 있는지 실시간으로 분석하면서도 모르는 체 했다.

그리드의 분노가 가라앉길 바라면서다.

지금 그리드는 시한폭탄과 같은 느낌이었다.

트라우카와 마주치는 순간 폭발할 것만 같았다.

뻔히 위험할 거란 사실을 알고도 그에게 트라우카의 위치를 알려줄 순 없는 노릇이었다.

하야테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반드시 찾아내시오.”

“하지만...”

예상치 못한 하야테의 명령에 당황한 프론잘츠 형제가 이견을 제시하려고 했지만.

“마리로즈가 기껏 마련해준 기회를 놓칠 순 없소.”

하야테가 형제의 말을 잘라버렸다.

물론 프론잘츠 형제의 고집도 엄청났다.

그들은 지식인이고 과학자다.

고집 빼면 시체였다.

-그녀가 무슨 기회를 마련해줬단 말씀입니까? 워프를 추격할 수 있게끔 좌표를 남긴 거요? 이게 무슨 기회입니까? 우리를 사지로 몰아넣는 게 아닐까 의심을 해야 할 지경인데.

라드볼프의 전음이 속사포처럼 쏟아졌다.

-염룡의 상태가 온전치 않다고 해서 대적하는 것이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애초에 고룡 중 절반은 상태가 온전치 못했다.

번헬리어는 바알에 의해서, 네바르탄은 번헬리어와 바알에 의해서 저주에 시달리고 있는 실정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감히 고룡을 해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과거 고룡들에게 수모를 겪었다는 천상의 신들조차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고룡을 없는 존재 취급했다.

고룡의 저력이 결사들의 생각 이상으로 대단할 거라는 증거가 됐다.

단순히 약해졌다는 이유로 대적하기엔, 상상치 못한 변수를 맞이하고 역으로 당해버릴 공산이 큰 것이다.

-하면 언제까지 도망만 치자는 거요?

라드볼프의 말을 잠자코 듣던 하야테가 반문했다.

그리드 덕분에 되찾은 용기를 되새기면서, 용기를 되찾은 날 선언했던 다짐을 떠올리면서, 그는 말을 이었다.

-나는, 우리는 더 이상 도망쳐선 안 되오.

현재 인류의 전력으로 드래곤의 저력을 가늠하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누군가는 가늠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희망을 찾을 수 있었고 미래가 생겼다.

그 역할.

당연히 지혜의 탑이 맡아야 옳다.

-우리의 역할을 잊지 맙시다.

“크음...”

더 이상 반론할 수 없던 라드볼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 생겨도 그리드를 위험에 빠뜨리는 일은 없도록 만들겠다고 다짐하면서다.

애초에 결사들은 영웅이다.

의무를 망각하지 않는다.

라드볼프 형제가 트라우카의 추격에 부정적인 의견을 낸 이유는 순전히 그리드를 걱정해서였다.

자칫 그리드가 트라우카와 무리하게 싸우다가 변고라도 당하면 감당할 수 없었으니까.

하야테도 뻔히 알 것이다.

하지만 추격을 종용하고 있었다.

그리드를 지켜낼 자신이 있어서인지, 그리드를 말릴 자신이 없어서인지.

라드볼프 형제는 둘 중 전자이길 바랄 뿐이었다.

동료들의 속내를 읽은 하야테가 헛웃음을 흘렸다.

‘마리로즈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군.’

하야테는 마리로즈와 합을 맞춰봤다.

그녀가 무지막지하게 강력하단 사실을 여실히 체험했었다.

작금의 상황을 ‘마리로즈가 만든 기회’라고 평가한 것은 진심이란 말이다.

하지만 결사들은 실감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럴 수밖에.

그들은 마리로즈의 실력을 직접 목도하진 못했으니까.

‘물론 여유가 있는 건 아니다.’

마리로즈의 힘은 한시적이다.

금방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감당하지 못하곤 했다.

그녀가 만든 기회는 아마 쉽게 위기로 변질 될 것이다.

그러니까 서둘러야만 했다.

“근심 마시오.”

차랑, 차라라라랑...

하야테가 피어 올리기 시작한 용살의 기운이 빛을 난반사시키며 맑은 소리를 냈다. 초조해하고 있는 그리드의 마음을 차츰 안정시켜줬다.

하지만 사실 이 소리는 용들을 도발하기 위해 내는 것이었다. 트라우카에게 닿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겼다. 대륙 곳곳에서 뻗어진 살기가 이쪽을 향해오기 시작했다.

“우리가 모조리 죽는 한이 있어도 귀하의 연인은 지켜낼 터이니.”

“...?”

태클 걸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서, 그리드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

“미친 게냐, 네놈?”

마리로즈의 추격을 허용한 트라우카가 동요를 숨기지 못했다.

추태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트라우카가 설령 온전한 상태였어도 지금과 같은 상황을 겪었으면 동요했을 것이다.

뱀파이어 공작, 마리로즈.

그녀는 베리아체의 이상(理想)이니까.

야탄의 세 자식 중 가장 높은 ‘잠재력’을 지녔던 자가 자신의 모든 걸 희생해서 낳은 존재가 바로 눈앞의 마리로즈였다.

지상에서 유일하게 고룡과 비견되는 존재인 셈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조건을 충족했을 때’라는 전제가 붙지만.

현재 트라우카는 심각한 중상을 입고 있다.

다른 고룡의 추적을 경계해서 레어의 위치를 옮겼을 정도다.

콧대 높은 염룡이 자존심을 버렸단 말이다.

눈 돌아간 불효자식이 입힌 상처는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컸다.

그나마 방금 약간 회복하긴 했지만 온전한 상태일 때와 비교하기엔 어림도 없었다.

“감히 내 레어를 침략해?”

콰드드드득!!

트라우카가 신경질적으로 휘두른 오른팔이 폴리모프를 벗고 드래곤의 신체를 되찾았다.

거대한 용의 앞발이 마리로즈의 결계를 무게로 짓눌러 깨뜨리고 그녀를 통째로 짓뭉개버렸다.

푸화하하학!!

트라우카의 발가락 사이사이로 붉은 핏물이 솟구쳤다.

그것은 금세 하나로 다시 뭉쳐 아름다운 여인의 형상을 갖춰갔다.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한 마리로즈였다.

“네가 먼저 내 낭군의 땅을 침략했잖니.”

콰작!

트라우카의 발가락 하나가 찢겨나갔다.

트라우카 스스로 잘라낸 것이다.

마리로즈의 혈액 일부가 비늘 틈새로 침투한 것을 감지한 즉시 잘라냈다.

“침략? 나는 단지 선물을 받으러 갔을 뿐이다.”

“선물이라고 하지 마. 그게 낭군에겐 상처가 되잖아.”

“미친 것이 아까부터 거슬리게 지껄이는군. 뱀파이어인 네가 정녕 신의 신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거냐?”

꾸드드드득!

트라우카의 오른팔이 수축했다. 재차 인간의 팔처럼 변해선 지척까지 다가온 마리로즈의 목젖을 짓누르고 땅에 처박았다.

“베리아체의 원념아. 너는 어서 지옥에나 가서 바알과 서로 물어뜯어라. 어찌하여 갈 곳을 잃고 내 심기를 건드리느냐?”

뚜둑!

트라우카의 팔에 짓눌린 채 땅에 처박힌 마리로즈의 가는 목이 끝내 꺾였다. 기이한 각도로 돌아가선 덜렁거렸다.

트라우카가 눈살을 찌푸렸다.

어지간한 드래곤도 감당 못하고 폭사했을 자신의 힘을 고작 꺾인 수준으로 감당한 마리로즈의 신체 내구력에 놀란 것이다.

주르륵.

마리로즈의 붉고 도톰한 입술을 타고 흐른 핏물이 그 형상 그대로 마법진이 되었다.

시전자의 재생을 촉진하는 한편 접촉자의 체내로 침투하는 혈마법이다.

발동 즉시 마법의 속성을 간파한 트라우카가 기겁하며 떨어져나갔다.

숫제 역병 취급하는 태도였다.

슬그머니 몸을 일으킨 마리로즈가 부러진 목뼈를 똑바로 맞추며 말했다.

“낭군은 나와 입도 맞춰주었는데. 낭군과 비교하면 넌 겁쟁이구나. 고작 그 정도 배짱으로 어찌 군림해온 거야?”

[...너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 불쾌하다. 썩 꺼져라.]

결국.

트라우카가 폴리모프를 완전히 풀어버렸다.

기껏 새로 만든 레어가 무너지는 것을 감수할 생각이다. 온전한 모습으로 날뛰며 마리로즈를 어서 쫓아낼 각오였다.

죽일 생각은 없었다.

‘진짜 뱀파이어’의 까다로운 점은 무한에 가까운 생명력에 있다.

하물며 마리로즈는 내구력마저 고룡급이었다.

저런 걸 죽인다?

죽이려고 결심하는 시점부터 손해다. 필연적으로 긴 시간을 써야했으니.

화르르르륵!!

거대한 레어 전체에 불길이 번졌다.

트라우카의 의념이 만든 불꽃이다.

염룡을 상징하는 호신강기였다.

이 불꽃이 있는 이상, 마리로즈의 혈액은 더 이상 트라우카의 체내로 침투를 시도하지 못한다.

정확히 말하면 의미가 없다.

이 순간부터 마리로즈의 혈액은 분출되는 즉시 증발하여 무용해질 테니까.

지금부턴 순수한 마법 대 마법, 힘 대 힘의 대결이 될 거란 말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고룡보다 더 마법을 잘 쓰는 종은 없다.

고룡보다 강한 힘을 지닌 존재 또한 없었다.

트라우카가 비록 중상을 입은 상태일지라도 적용되는 법칙이었다.

단순히 고룡이라는 종 자체가 다른 모든 종과 비교해서 우월했다.

또한 트라우카는 고룡 중에서 가장 강한 힘과 마력을 지녔다.

그러므로 트라우카의 승리는 필연이었다.

콰르르르르륵!!

트라우카의 날갯짓이 마리로즈의 시야를 수십 바퀴 뒤집었다.

고작 날갯짓이 발생시킨 폭풍에 떠밀린 여파다.

나태의 저주 탓에 반개해 있던 마리로즈의 커다란 눈동자가 동그랗게 뜨였다.

‘이런 식으로 잠에서 깰 수도 있구나.’

드물게 감탄하면서다.

레어의 출입구까지 떠밀린 그녀가 가녀린 팔을 뻗었다.

검고 푸른 드레스가 마구잡이로 펄럭이는 가운데, 그녀의 섬섬옥수는 산처럼 쌓인 보물들 틈새에 꽂힌 보검을 더듬었다.

[검? 잡기를 부리겠다고?]

트라우카가 조소했다.

마리로즈는 순전히 계승한 힘에 의존하는 존재다.

베리아체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할지언정, 베리아체가 쓰지 못했던 기술을 쓸 수는 없다.

물론 흡혈 대상의 기술을 베껴 쓰는 건 가능하겠지만.

현재 그녀는 순수한 상태였다. 다른 대상을 흡혈한 상태가 아니었다.

한데 검을 쥔 것이다.

조금 전 폭풍에 휩쓸렸을 때 종유석에 머리를 잘못 부딪친 게 아닐까 의심이 생길 지경이었다.

“말 했잖니.”

저벅.

마법을 써서 폭풍의 영향력을 억누른 마리로즈가 지면에 두 발을 붙였다.

자신보다 수천 배는 거대한 트라우카에게 서서히 다가가는 몸짓이 요염하지 않고 우아했다.

기도 자체가 바뀐 느낌.

부드럽게 이어지는 그녀의 발걸음이 점차 춤을 추는 것과 닮아갔다.

“낭군과 입을 맞췄었다고.”

그리드의 검무.

마리로즈가 몸속 깊은 곳에 소중하게 간직해온 그리드의 피가 그리드의 기술을 재현시킨다.

여섯 종류의 춤사위를 하나로 엮은, 몹시 고아한 검무였다.

“낙룡(落龍)━”

[...!]

극연살파(落龍極聯殺派).

용이, 떨어졌다.

용의 비늘을 헤집은 여파로 산산조각 난 보검을 털어내듯 던져버린 마리로즈가 일렁이는 불꽃을 등지고 선 채 말했다.

“낭군이 태어나기 전의 세상에서 군림해온 용아.”

[...]

“너는, 반드시 낭군에게 사죄하는 편이 좋단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