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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680화 (1,679/1,794)

템빨 83권 - 12화

화르륵!

염룡 트라우카의 불꽃은 꺼지지 않았다.

제논의 거대한 몸이 산화한 뒤에도 불꽃은 남아 레이단의 땅과 건축물들을 휘감았다. 곧 그리드까지 집어삼킬 기세였다.

‘두려워할 필요 없어.’

불은 금속과 마찬가지로 그리드의 심상을 이루는 개념이다.

<금의 성역>에서 온갖 형태의 무구가 빚어지는 배경에 뜨거운 불길이 있었다.

그리드는 염룡의 불꽃이 몹시 강력할지언정 자신이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착각이다.

“...!”

트라우카를 예의주시하고 있던 그리드의 두 눈이 서서히 커졌다.

레이단을 감싼 채 타오르는 새빨간 불꽃이 어느 것 하나 불태우지 않고 있단 사실을 뒤늦게 눈치 챈 까닭이다.

조금 전 회색룡 제논을 잿더미로 만들었던 불꽃이 정녕 맞는가.

그런 의문이 생길 정도로 염룡의 불꽃은 전혀 뜨겁지 않았다.

레이단의 흙과 초목, 건물과 사람.

불꽃에 휩싸인 모든 것이 평온하게 형상을 유지했다.

‘심상...’

그리드가 불꽃의 정체를 눈치 챘다.

저것은 산화 과정의 부산물이 아니다.

마법에서 말하는 원소도 아니었고, 신성이나 마력으로 재현한 현상 따위도 아니었다.

염룡 트라우카의 의념이 구체화된 것일 뿐.

즉, 금의 성역을 구성하는 탐욕과 같은 것이다.

타인의 개입을 일절 허락하지 않는다.

저 불꽃이 만드는 모든 결과는 순전히 트라우카의 의지를 따른 것이리라.

“...의뢰.”

그리드가 용납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자신의 인연을 해치는 것.

자신의 재산을 탐하는 것.

염룡 트라우카는 제논을 해친 시점부터 그리드의 명백한 적이었다.

물론 제논은 그리드의 친구가 아니다.

사적인 교류를 나누진 않았다.

하지만 매달 드래곤 웨폰의 재료를 진상하는 귀중한 물주였다.

제논은 그리드를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그리드는 제논에게 늘 감사했다. 개인적으로 호감을 품었다.

하여 그리드는 제논의 죽음에 몹시 큰 분노를 느꼈지만 일단 대화를 나눠보기로 했다.

문답무용으로 죗값을 치르라고 요구하기엔 트라우카의 이름값이 너무 높았다.

트라우카의 이름 앞에 ‘상처 입은’이라는 수식언이 붙어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리드를 <광신광룡>의 주역으로 만들어준 화룡 이프리트.

트라우카와 동귀어진을 노린 그녀 덕분에 트라우카는 족히 수백 년을 요양해야하는 신세라고 탑의 결사들을 추측했지만.

추측이 무색하게도 트라우카는 레어 바깥으로 나와 활개를 치고 있었다. 회색룡 제논을 너무나도 손쉽게 죽여 버렸다.

드래곤 하트.

제논의 심장에 담긴 강대한 마력과 생명력을 실시간으로 흡수하는 중이기도 했다.

애초에 고룡이다.

상처와 별개로 최강의 존재였다.

“무슨 의뢰를 하겠다는 겁니까?”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른 그리드가 최대한 공손히 물었다.

상대를 가려가며 분노 조절을 잘하는 것.

그리드의 장점 중 하나다.

과연.

화르르륵...

레이단 전역을 휘감을 기세로 번지던 트라우카의 불꽃이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마치 숨결이었던 것처럼 트라우카의 입과 코로 빨려 들어가더니 급기야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쏴아아아아.

강렬한 빛에 휩싸인 트라우카의 몸은 빠르게 작아지고 있었다.

태산보다 거대했던 풍채.

레이단의 절반을 그림자로 물들였던 몸집을 거두고 인간의 형태가 되어갔다.

폴리모프다.

인간 버전의 트라우카는 적발의 미남자였다.

하지만 위압감은 여전했다.

2미터를 가뿐히 넘기는 신장과 불꽃처럼 요란하게 솟구친 머리카락, 그 어느 짐승의 것보다 날카로운 이빨과 삼백안.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존재임을 확실히 알아 볼 수 있다.

미식룡 레이더스와 전혀 다른 듯 닮은 것이다.

인간 버전의 레이더스는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신비한 눈동자 때문에 그리드에게 위압감을 줬었다.

“브라함의 주인치고 예의를 아는 자라 다행이군. 쓸데없이 체력 낭비를 안 해도 되겠어.”

“브라함...”

아주 먼 옛날.

대체 무슨 배짱인지 브라함은 트라우카의 레어에서 강도짓을 저질렀었다.

브라함의 자존감이 유독 높은 이유는 그가 트라우카와 대적하고도 살아남은 생존자라는 점에 있었다.

아무튼 여태껏 무사히 살아남았다.

그리드는 그것이 트라우카의 자비 따위가 아니라 당연한 생리로 해석했다.

트라우카에게 있어서 브라함은 하루살이 따위와 같았을 테니까.

인간이 하루살이의 얼굴을 일일이 기억하고 쫓아다니는 게 아닌 것처럼, 트라우카 또한 브라함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금방 기억에서 지운 것이라고 여겼었다.

하여 브라함이 무사히 살아남은 거라고 생각했다.

오판이었다.

트라우카는 브라함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협박하는 겁니까? 의뢰를 거부하면 브라함을 해칠 거라고?”

잔뜩 경계하며 묻는 그리드에게 트라우카가 반문했다.

“내 의뢰를 거부할 셈이었나?”

상상해본 적 없다는 반응.

그리드가 황당해하는 사이 트라우카가 말을 이었다.

“브라함의 안위는 걱정 마라. 놈은 ‘기준’을 넘겼으니 나는 놈을 해칠 생각이 추호도 없다.”

“기준...?”

“내가 대상의 가치를 판별하는 기준이다.”

“...”

그리드는 이해하길 관뒀다.

트라우카는 제 자식을 포식하는 미치광이다.

미치광이를 이해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자 불필요한 일이었다.

“어서 의뢰의 내용이나 말하시죠.”

이 만남이 불편했던 그리드가 재촉했고,

“번헬리어의 심장.”

트라우카는 즉시 답했다.

“네 다음 행선지는 필시 지옥일 테지. 반드시 번헬리어가 동행하려고 할 거다. 번헬리어가 ‘약화의 저주’를 풀기 위해선 바알에게서 얻어야할 게 있으니까.”

“...”

“놈과 협력하다가 도중에 배신하여 심장을 취해주길 바란다. 지옥이 무대인 이상 놈을 해칠 기회가 한 번쯤은 올 테니.”

고룡을 죽이고 심장을 취해오라고?

트라우카는 쉬운 일인 것처럼 지껄였지만 성공 가능성이 0퍼센트에 가까운 의뢰였다.

번헬리어가 지옥에서 약해진다는 점을 고려해도 그랬다.

영원을 살아온 고룡이 바보도 아니고 위험에 충분히 대비할 테니까.

‘애초에 고룡의 심장을 얻는 게 가능하면 내가 쓰지 널 주겠냐?’

목구멍까지 솟구치는 말을 간신히 삼킨 그리드가 고개를 저었다.

“싫습니다.”

“보상의 내용은 듣지도 않고 거절부터 하는 건가?”

“당신이 번헬리어의 심장을 노리는 건 회복을 도모하기 위함이 아닙니까? 당신이 회복해봤자 인류에겐 잠재 된 위협만 늘어나는 꼴인데 내가 왜 당신을 돕습니까?”

“뭔가 큰 오해를 하는군. 내가 온전해야 비로소 지상이 안전하다.”

“...?”

그리드 입장에선 생각해본 적도 없던 개소리였다.

귀를 의심하는 그리드에게 트라우카가 설명했다.

“쥬다르와 도미니언 등. 가짜 무신과 달리 생각이 제대로 박힌 천상의 신들이 지상에서 ‘선’을 넘지 않는 이유는 내게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함이니까.”

그리드가 떠올렸다.

신과 드래곤이 충돌하지 않는 이유.

과거 천상의 신들을 ‘사냥’했던 트라우카와 불가침조약을 맺었기 때문이라고 했었다.

“뒤늦게 세계의 주역이 된 너는 모르겠지만 세상은 이미 먼 과거부터 강력한 규칙을 이루고 유지되어 왔다. 유일신 그리드. 네 역할은 네가 스스로 자부하는 것처럼 대단하지 않아.”

“지랄.”

결국.

더 이상 참지 못한 그리드가 얼굴을 구겼다.

“트라우카 네 존재와 별개로 세상은 종말을 맞이하길 반복해오지 않았나? 네가 존재하는 덕분에 지상이 안전하다는 듯이 궤변을 지껄이는 건 씨발, 무슨 염치야?”

“...흐음.”

즉시 반박하려던 트라우카가 이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이를 가는 그리드를 빤히 쳐다보다가 질문을 던졌다.

“그럼 넌 종말을 막을 수 있나?”

“막을 거다.”

그리드가 즉답했다.

“막을 수 있고, 없고를 떠나서 무조건 막을 거라고.”

어차피 무조건 막아야한다.

그리드가 막지 않으면 아이린도, 로드도, 메르세데스도, 바사라도 모조리 사라져버린다.

“좋다. 의뢰를 취소하마.”

“...?”

그리드는 뒤늦게 아차하고 있었다.

흥분해서 트라우카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으니 전쟁을 치러야할 것으로 각오했다.

깊은 후회가 밀려왔다.

승패의 여부를 떠나서 싸움의 여파만으로 레이단이 소멸하게 될 터였으니까.

한데 의외로 트라우카는 순순히 물러났다.

“사실 난 제논을 선물로 받은 것으로 충분히 만족한다.”

“뭐?”

선물?

전혀 이해할 수 없던 그리드가 눈살을 찌푸렸고,

“네가 제논에게 주기적으로 같은 장소를 방문하게 만들지 않았느냐.”

트라우카가 조소했다.

“제논을 사냥감으로 여길 만한 존재에게 선물로 바치기 위해 제논의 위치를 강제로 노출시킨 거 아니었나?”

“...!!”

그리드가 큰 충격을 받았다.

커다란 망치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특히 난 마침 보신이 필요하던 차였지. 내 딸 이프리트와 협력했던 네 탓에.”

“...아니야.”

“내 노여움을 피하기 위해 제논을 진상한 것으로 여겼다만, 의도야 어찌됐든 잘한 일이다. 네 정성이 내 진노를 조금쯤 풀었으니.”

“아니라고!!”

그리드의 분노에 신성이 호응했다.

똬리를 풀고 몸을 일으킨 황룡의 형상이 트라우카를 집어삼킬 기세로 아가리를 벌렸다.

그래봤자 트라우카의 본체와 비교하면 한없이 작은 미물이다.

트라우카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아서라. 제논의 희생을 헛된 것으로 만들고 싶은 게 아니라면.”

희생.

그리드가 재차 큰 충격을 받았다.

설마 제논은 자신이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고도 묵묵히 레이단을 방문했단 말인가?

무지막지한 죄책감이 밀려온다.

완전히 넋이 나간 그리드에게 등을 돌린 트라우카가 워프를 생성했다.

레어와 연결되는 워프였다.

언뜻 엿보이는 레어의 풍경이 그리드가 과거에 방문했을 때와는 많이 달랐다.

위치 자체가 다른 듯했다.

천하의 고룡이 레어의 위치를 옮긴 것이다.

트라우카의 몸 상태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는 증거였다.

“의뢰는 취소했다만, 네가 굳이 번헬리어의 심장을 가져온다면 거부하진 않으마. 합당한 보상을 지불할 테니 기회가 오면 충분히 고민하도록... 뭣이?”

워프를 타고 넘던 트라우카가 헛숨을 들이켰다.

양산으로 햇볕을 가린 여인의 흑단 같은 머리카락이 그리드의 흔들리는 시야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왜 낭군을 괴롭히니.”

콰드드드드득!!

트라우카를 태운 뒤 빠르게 닫혀가는 워프의 틈새로.

마리로즈의 가늘고 흰 육신이 함께 빨려 들어갔다.

툭.

덩그러니 남은 양산만이 그리드의 발치로 굴러왔다.

“...”

“괜찮소?”

지혜의 탑의 결사들이 한 발 늦게 현장에 도착했다.

그리드와 레이단이 무사하단 사실을 확인하고 안도하며 워프의 잔재를 분석했다.

그들을 묵묵히 지켜보던 그리드가 흙투성이가 된 양산을 주섬주섬 챙겼다.

이번에도.

마리로즈는 누구보다 빠르게 현장에 도착했다.

늘 드래곤의 동향을 감시하는 결사들보다 한 발 빨리 그리드의 위기를 감지하고 달려왔다.

‘...항상 나를 지켜보고 있는 건가.’

그리드가 새삼스레 의문을 품었다.

나는, 마리로즈에게 고맙다는 말을 제대로 건네 본 적이 있던가?

“추적할 수 있겠습니까?”

마리로즈의 양산을 인벤토리에 소중히 챙긴 그리드가 물었다.

살기등등한 표정이다.

당장 트라우카를 쫓아가 싸울 기세였다.

“쉽지 않습니다.”

프론잘츠 형제가 조심스레 답했다.

설령 트라우카의 위치를 찾아내도 쉽게 안 알려줄 눈치였다.

그리드가 답답함을 느끼려는 순간이었다.

“반드시 찾아내시오.”

하야테가 결사들에게 명령했다.

이견은 받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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