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3권 - 11화
오래 전.
그리드가 에트날 왕국의 공작이던 시절.
그리드와 템빨단원들은 피아로에게 검술을 사사했다.
귀중한 배움이었다.
레벨이나 스탯이 오르는 등, 수치로 표기되는 힘을 얻은 건 아니지만.
피아로에게 검술을 배운 사람들은 분명히 강해졌다.
본래라면 실전을 겪으며 얻었어야 할 노하우를 순식간에 체득했으니까.
피아로가 템빨제국의 근간으로 칭송 받는 이유다.
지상을 침략한 대악마를 토벌하고, 템빨국을 적대했던 왕국들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고, 온갖 황폐한 땅들을 논과 밭으로 가꿔 식량난을 해결하는 등.
피아로는 수많은 업적을 남긴 것 외에도 그리드와 템빨단의 스승이었다.
사람들에게 개국공신 이상의 대우를 받았다.
그런 거물 중의 거물이.
“후배에게도 부디 가르침을 주십시오.”
검성 뮐러를 찾아가 고개를 조아렸다.
그리드가 지옥 원정을 선언한 이후.
제국의 영웅들은 수련을 위해 대륙 전역으로 흩어졌지만 피아로는 라인하르트에 남았다.
뮐러라는 최고의 스승이 라인하르트에 있었으니까.
뮐러는 난감했다.
“이 논밭을 귀공께서 가꿨다고 들었소.”
“예, 농업은 미천한 후배가 자랑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재주이지요.”
“농부로서 위대한 업적을 세워놓고 겸손하시오.”
“선배님 앞에서 겸손하지 않을 자가 세상에 몇이나 있겠습니까? 그보다 하대하여 주시옵소서. 마음이 불편합니다.”
“음... 그러니까 난 귀공의 선배가 아닌데...”
메르세데스가 스승, 스승 거리는 거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메르세데스는 검을 다루는 기사였으니까.
뮐러에게 가르침을 청해도 이상하지 않은 위치인 것이다.
반면 피아로는 농부였다.
농부가 자꾸 선배라고 부르면서 뭘 가르쳐달라는데 뮐러는 난감했다.
피아로에게 무쌍검의 잔재가 남아있음을 엿보지 못하는 것이다.
전설의 농부로 성장해온 피아로는.
어느새 검사의 형(形)을 완전히 버리고 자신만의 무도를 세운 경지에 올라있었다.
그가 한때 검사였다는 사실을 역대 최강의 검사가 알아보지 못했다.
그만큼 피아로는 완전한 농부였다.
“귀공께서 새삼스레 검에 뜻을 두기에는, 그간 귀공께서 걸어온 길이 너무나도 귀중하오. 만약 귀공께서 농부의 길을 버리고 검사가 된다면 그건 이 세계에 크나큰 손해요.”
자연경.
자연의 모든 기운이 피아로에게 실시간으로 스며드는 중이다.
피아로의 호흡과 몸짓 하나하나가 세계의 호의를 얻었다.
뮐러는 한 눈에 알아보고 있었다.
눈앞의 농부는.
시간이 지날수록 고강해질 인물이라는 사실을.
세상이 악마나 신 따위에게 위협받지 않고 풍요로워질수록 걷잡을 수 없이 강해질 거란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정작 피아로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적었다.
“후배는... 이미 검사였나이다.”
피아로가 고백했다.
“선배님을 동경하며 검성을 꿈꿨던 무수히 많은 검사 중 하나였지요. 하지만 도중에 밭을 가는 매력에 빠져 검을 버리고 호미를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이런 제가 어찌 다시 검사를 꿈꾸겠나이까?”
“귀공께서 내게 얻고자하는 가르침은 검술이 아닌 게로군.”
뮐러가 눈치 챘다.
눈앞의 농부.
자신이 걸어온 길이 정녕 올바른 것인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누군가가 자신을 대신해서 객관적으로 평가해주길 바라고 있다.
그 대상으로 내가 적합했던 것이고.
“사도들의 면면이 몹시 대단하긴 하더군.”
스륵.
뮐러의 손이 검파에 얹어졌다.
낡은 철검의 손잡이.
볼품없기는커녕 오래 된 골동품처럼 귀중하게만 보였다.
“그들과 자신을 비교하다보면 의문이 생길 법도 하지.”
“...”
인간 출신의 절대자.
혹은 절대자에 근접한 인물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승승장구한 경험이 적다는 것이다.
그리드도, 하야테도, 뮐러도.
약자의 입장에서 삶을 시작했었다.
영웅이라 칭송 받던 시절에도 자신보다 훨씬 더 고강한 대적들을 만나 패배를 반복했다. 두려움에 떨며 잠 못 이룬 날이 흔할 정도였다.
다만 꺾이지 않았을 뿐.
“나 또한 귀공과 비슷한 심정으로 방황했던 시절이 있음을 떠올려 본다면, 내가 귀공의 선배가 맞긴 맞구려.”
스릉.
뮐러가 칼집에서 검을 뽑았다.
이름난 검사들이 자랑하는 전가의 보도와는 다르다.
날카롭기보단 무뎠고, 빛나기보단 음영이 짙었으며, 화려하지 않고 조악했다.
하지만 베지 못하는 것이 없는 검이다.
뮐러와 모든 순간을 함께하며 절세의 명검으로 거듭난,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유명한 검’이었다.
“오라.”
검성의 말은 드래곤의 언령과 닮았다.
마음에 날붙이를 품은 자들이 즉각 반응하게 만들었다.
콰앙!!
반사적으로 자연경의 힘을 극대화한 피아로가 내달렸다. 씨앗을 뿌려 지형을 자신에게 이롭게 만드는 한편 뮐러가 딛고 설 땅을 협소하게 만들었다.
솟구치는 콩나무와 뒤얽히는 고구마줄기 사이로 뮐러의 검이 번쩍였다.
“무섭게 따라붙는 후인들이 있음을 축복으로 여기시오.”
켜켜이 쌓인 고구마줄기를 불시에 흩어버린 뮐러의 검을 낫으로 간신히 비껴내는 피아로의 뇌리로 템빨단원들의 면면이 스쳤다.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까마득히 아래였던 이들.
피아로는 어느새 자신과 비슷한 속도로 걷기 시작한 그들이 두려웠다.
정확히는 초조했다.
자신이 그들에게 무가치한 존재가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 싶었기에.
하지만 뮐러의 말이 맞았다.
두려워해선 안 됐다.
축복으로 알아야한다.
나를 지탱해주는 한편 채찍질하는 이들이 있기에 나는 꾸준히 발전해올 수 있었다.
쩌어어어엉!!
뮐러의 종베기는 매 순간이 벼락같았다.
단순히 빨라서 붙이는 비유가 아니라 형태 자체가 비스듬히 꺾이길 반복하는 탓이다.
백호의 숨결을 운영하는 피아로와 동화 된 지반이 협곡마냥 치솟았다가 허망하게 파괴되길 반복했다. 뮐러의 검력을 도저히 견뎌내질 못했다.
“앞서가는 자들이 있음을 감사히 여기시오.”
줄기에 매달린 고구마와 감자를 포탄처럼 쏘아 뮐러의 진격을 막아내는 피아로의 뇌리에 사도들의 면면이 스쳤다.
자신을 배신했다는 이유로 조국을 쉽게 버리고, 새로운 길을 찾았다는 이유로 꿈을 간단히 포기하길 반복하며 가볍게 살아온 자신과 달리 거대한 역사를 짊어진 자들이다.
출신성분부터가 고귀한 그들은 호흡조차 묵직했다.
경거망동하는 법 없이 꾸준히 정진하면서 모든 면에서 피아로를 가볍게 추월했다.
감사한 존재들이 맞았다.
피아로에게 매 순간 새로운 영감을 주는 자들이었으니까.
“...알고 있습니다.”
츠카카카카칵!!
피아로가 휘두른 쇠스랑이 흙더미를 크게 일으켰다.
언젠가 그리드가 보여줬던 브레스에서 영감이라도 얻은 듯, 직선으로 쏘아져 뮐러에게 검막을 펼치도록 강요했다.
“홀로 고독했던 선배님과 달리 제가 놓인 환경은 축복과도 같음을 예전부터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매 순간이 불안하고 시기가 샘솟아 좌절하길 반복하니 이런 저를 무슨 수로 다스려야할지 모르겠습니다.”
피아로의 방황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지크와 브라함을 영영 따라잡지 못할 거란 사실을 깨달은 날에도.
한때 종자였던 메르세데스에게 완전히 추월당해버린 날에도.
네펠리나가 그 작은 몸에 그리드를 태우는 모습을 목격한 날에도.
미르가 뮐러의 검술을 재현해보였던 날에도.
피아로의 방황은 계속됐다.
기껏 극복했다가도 다시 헤매는 식으로 스스로를 불신해왔다.
“제게는...”
내게는, 사도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급기야.
피아로가 오랜 시간 숨겨온 속내를 입 밖에 꺼내려는 순간이었다.
“귀공은 몹시 훌륭한 검사였을 테지.”
뮐러가 문득 말했다.
피아로가 일군 밭의 감촉을 발바닥의 모든 면으로 점검하면서다.
“검사가 어떤 환경에서 온전한 실력을 발휘하는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걸 보면. 검을 다루는 사도들은 귀공께서 일군 땅에서 비로소 온전한 실력을 발휘할 것 같구려.”
확실히.
무후총에서 메르세데스는 피아로와 호흡을 맞추려고 노력했었다.
미르가 본격적으로 활약한 것도 피아로가 논밭을 일군 뒤였고.
당시 뮐러의 상태는 온전치 않았지만, 상황을 똑똑히 기억했다.
“토양이 품은 마력의 양도 상당하고...”
브라함의 마법 역시 피아로가 있는 곳에서 위력이 배가되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한 뮐러가 슬며시 웃었다.
“다른 사도들은 귀공을 의지하고 있지 않을까 싶은데.”
순간.
피아로가 개안했다.
자신이 수확한 농작물 덕분에 배불리 먹고 사는 백성들과 병사들.
그들과 사도들이 크게 다르지 않단 사실을 깨달으면서다.
“내 장담컨대 그대가 걸어온 길은 가장 훌륭한 길 중 하나요.”
뮐러가 재차 못 박았다.
역대 최강의 검성이 농부의 위대함을 공증한 것이다.
[전대 검성 ‘뮐러’와 전설의 농부 ‘피아로’가 세계에 새로운 법칙을 세웠습니다.]
[앞으로 <농부> 클래스와 파티를 맺을 경우, 습득 중인 검술 관련 스킬의 위력이 크게 상승합니다.]
“...?”
결과적으로 피아로 덕분에 농부들의 일자리가 늘어났다.
농부들의 무대는 더 이상 논밭으로 국한되지 않았다.
안 그래도 피아로를 숭상하던 농부들에게 피아로는 위대한 신과 같은 존재로 거듭나고 있었다.
[인류가 당신의 사도 ‘피아로’를 숭배합니다.]
[당신의 사도 ‘피아로’가 3개의 신위 스탯을 얻었습니다.]
“...자꾸 뭔데?”
최근에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사도들은 내가 없는 곳에서 도리어 더 빠르게 성장하는 듯하다.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몰라 미묘한 표정을 짓는 그리드였다.
현재 그는 라인하르트가 아닌 레이단에 있었다.
회색룡 제논과 만나기 위해서다.
정확히는 제논이 자신의 비늘을 진상하는 날이었다.
그리드는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누구에게 가장 먼저 드래곤 웨폰을 만들어 줘야하나.’
황혼과 비교하기엔 물론 손색이 있지만.
제논의 비늘로 만드는 드래곤 웨폰도 충분히 훌륭하다.
현재 그리드의 경험과 기술이라면 구젤의 어금니와 동급의 무기를 만드는 게 가능했다.
그리고 그리드 주변에는 드래곤 웨폰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여럿 존재한다.
사도들과 하야테, 거기에 검성 뮐러까지.
누구에게 선물하든 인류의 전력은 급격히 상승하리라.
‘아무리 그래도 역시 사도들에게 먼저 선물하는 게 옳겠지. 지크는 사하란의 검에 있는 적기를 워낙 요긴하게 사용하니까 메르세데스나 미르를 최우선으로...’
그리드의 생각이 멈췄다.
쿠우우우우우웅!!
평화롭던 도시의 일각이 눈앞에서 박살난 까닭이다.
제논의 추락 여파였다.
거대한 드래곤이 맥없이 지상에 곤두박질 쳤다.
“뭐야?”
그리드가 다급히 몸을 날렸다.
다행히 사상자는 없었다. 제논이 인적이 없는 장소에 떨어진 덕분이다.
애초에 그래서 그리드의 반응도 늦었던 거다.
“제논? 이봐! 무슨 일이지?”
가까이서 본 제논의 상태는 처참했다.
호신강기로 두른 절대방어와 비늘이 무색하게 온 몸이 난도질당한 상태였다.
심장 부근의 두꺼운 비늘들은 완전히 녹아내렸다.
그 안에 있어야할 심장이 없었다.
녹아내린 비늘 안쪽으로 어렴풋이 남은 잔불이 제논의 살을 실시간으로 불태우고 있었다.
[미안...하오...]
간신히 내뱉는 말이 사죄다.
레이단을 재차 파괴했단 사실이 영 미안한 눈치였다.
“일단 치료를...”
그리드가 루비에게 연락하려는 순간이었다.
[우선... 인간들을... 대피...]
힘없이 고개를 저은 제논이 재촉했고,
콰르르르르르르릉!!
하늘에서 용암이 쏟아졌다.
그리드는 실제로 처음 봤다.
드래곤이 죽는 광경을.
[회색룡 ‘제논’이 사망하였습니다.]
영생을 살며 만물 위에 군림한다는 절대종이 허망하게 산화한다.
여태껏 본 적 없는 규모의 잿빛 기둥이 레이단 전역을 뒤덮어버렸다.
“...”
그리드의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크르륵, 크르륵...
거친 짐승의 숨소리가 가까워진다.
온통 회색으로 물든 세상에 붉은 화염이 번져갔다.
[염룡 ‘트라우카’가 출현하였습니다.]
고룡 중 아마도 최강이라는 존재.
탈리마를 속세로부터 격리시킨 원흉.
본래 포식의 대상에 불과했던 제 딸에게 상처입고 두문불출했던 지상의 절대자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우주를 담은 듯이 온갖 색채를 품은 동공에 그리드를 투영한 채다.
[네게 의뢰할 일이 있다.]
와그작!
제논의 펄떡 뛰는 심장을 씹어 삼키며, 놈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