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3권 - 10화
영원의 감옥.
죄 지은 신들의 종착지다.
이 어두운 감옥에서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하고 잊혀간 신이 한둘이 아니라는 소문이 있었다.
“눈치 볼 필요 없어. 마음껏 울게.”
주섬주섬 정좌하는 천사를 달래는 헥세타이아의 태도는 몹시 인자했다.
대장장이의 신답게 천사의 정체를 한 눈에 알아본 것이다.
차갑고 비릿한 금속의 냄새...
헥세타이아가 그리워해온 냄새가 천사의 몸에 배어있었다.
움찔움찔.
헥세타이아의 유두에서 흐르는 불꽃의 양이 자연스럽게 늘어났다.
“생전의 기억을 되찾은 천사들은 대개 자네처럼 눈물을 흘리더군. 과거의 나는 그 눈물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네만,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아. 그리운 거겠지.”
그립다.
본래 신은 느낄 수 없는 감정이다.
하지만 헥세타이아는 달랐다.
그는 커다란 죄를 범했었다.
인간의 몸으로 천상에 올랐던 ‘벗’과 진심전력으로 맞부딪치며 잘못을 뉘우쳤다.
그러므로 후회를 체험했고 그리움을 알았다.
불과 금을 마음껏 가지고 놀던 시절이.
내가 만든 작품이 인간들의 배움이 되고 삶이 되었던 광경이.
이제는 꿈결 같이 다가오는 모든 순간들을 그는 다시금 붙잡고 싶었다.
“...대장장이의 신을 만나 뵈어 영광이옵니다.”
천사 칸이 정중히 인사했다.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면서다.
칸은 감옥에 갇힌 헥세타이아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천사로 만들어진 존재다.
헥세타이아를 똑바로 마주보기 힘들었다.
“그대가 미안해할 일이 아닐세.”
칸의 속내를 읽은 헥세타이아가 허허 웃었다.
“도리어 모든 신들이 그대에게 미안해해야 옳지.”
강제로 천상에 올려 작금의 상황에 이르게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지랄들을 하고 자빠졌군.”
불쑥 제라툴이 끼어들었다.
정갈한 행색의 헥세타이아와 달리 봉두난발이 된 그는 거의 거지꼴이었다. 디바인스톤마냥 단단한 근육질의 몸과 솥뚜껑처럼 커다란 손이 아니었다면 그의 정체가 무신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으리라.
“이 빌어먹게 좁아터진 감옥에서 썩어 문드러지게 생긴 와중에 무슨 팔자 좋은 헛소리들을 지껄이고 앉은 거지? 괜한 시간낭비 하지 말고 여기서 탈출할 방법이나 모색해라.”
“제라툴 그대는... 어떤 심정으로 나를 이곳에 가뒀었지?”
“뻔한 걸 묻는군? 그야 당연히 잊힐 때까지 영원히 고통 받으라고 처넣었다만.”
“그대를 이곳에 가둔 자들도 똑같은 심정 아니었겠나.”
“뭐...? 큭큭! 크하하하하!!”
잠시 얼빠진 표정을 지었던 제라툴이 이내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헥세타이아여! 유두에서 쓸모없는 불꽃이나 흘려대는 이 젖소만도 못한 놈아! 나는 무신이다! 유일한 신 제라툴이다! 고작 천사 따위로 역할이 대체되는 네놈 따위와는 격이 다른 존재란 말이다! 내가 잊힌다는 건 아스가르드 전역에 크나큰 손해인데 어찌 나를 너와 같은 선상에 올려놓고 고려한단 말이냐?”
“여전히 그대가 특별하다고 믿는가? 이곳은 영원의 감옥일세.”
헥세타이아는 굳이 치우를 언급하지 않았다.
제라툴을 가짜, 복제품 취급하며 상처를 주기엔 헥세타이아가 너무 선량해졌다.
그리드를 만난 여파로 짧은 생애를 살아가는 인간 한 명, 한 명조차 귀중하게 여기게 되지 않았나.
헥세타이아의 입장에선 제라툴이 원망의 대상이 아닌 동정의 대상이었다.
“영원의 감옥에서 탈출할 방법이 있을 리 만무하네. 그대도 슬슬 현실을 주지해야하지 않겠나?”
“...개소리다.”
움찔, 잠시 말문을 닫았던 제라툴이 이내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이곳이 영원의 감옥일 리가 없다...”
“...?”
“고작 10평도 안 되는 이딴 좁아터진 방이 그간 무수한 신화를 소멸시킨 영원의 감옥일 리가 없잖느냐?”
“현실 부정하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리게. 그대는 나를 영원의 감옥에 가뒀는데 이곳이 영원이 감옥이 아니라는 게 말이 되나?”
“...레베카 여신께서 개입하신 걸 거다. 그래, 분명해. 나를 가엾이 여기신 여신께서 영원의 감옥을 없애버리신 거고 덕분에 얼떨결에 너 또한 구원받게 되었구나.”
“...”
제라툴을 바라보는 헥세타이아의 눈빛이 한층 더 측은해졌다.
제라툴은 애써 외면했다.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 급히 화제를 돌렸다.
“이곳이 영원의 감옥이 아닌 이상 빠져나갈 방법이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탈출할 방법을 모색해야 돼.”
“제라툴 그대...”
“그리드.”
“...?”
“...?”
미친놈처럼 날뛰던 제라툴이 문득 그리드의 이름을 입에 담자 헥세타이아와 칸의 귀가 쫑긋 섰다.
제라툴의 표정이 어느새 다시 득의양양해졌다.
“그놈은 희대의 사기꾼이다. 나와 치열하게 겨뤘던 성전의 무대에 ‘신들의 무덤’이라는 가당찮은 이름을 갖다 붙인 것만 봐도 허언증 하나는 기가 막힌 놈이지.”
“...”
갑자기 그리드의 이름을 꺼낸다 싶더니 비판이라니.
실망한 헥세타이아와 칸이 무시하려는 순간이었다.
“항상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세상을 속여 대는데, 어리석은 인간들이 놈을 숭배하는 까닭에 속임수가 몹시 잘 먹힌다. 이 순간에도 세상이 놈에게 속아 넘어가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지. 놈은 반드시... 반드시 재차 천상에 오르게 될 거다. 어떤 치졸한 방법을 써서라도, 무조건.”
“왜 그렇게 생각하나?”
“이 몸과 제대로 싸워보고 싶을 테니까.”
“...?”
“그리드를 상대로 나는 지상에서 불리함을 감수하고 싸웠다. 그런 나를 간신히 쓰러뜨렸다고 해봤자 놈은 전혀 만족하지 못했을 터.”
제라툴의 표정이 의미심장했다.
진짜로 진지하게 말하고 있었다.
“조만간 그리드가 천상에 올라 질서를 무너뜨릴 때가 기회다. 그때가 되면 비로소 이곳이 영원의 감옥이 아니라는 사실이 증명되겠지. 우리는 그때 힘을 모아 이곳을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 자꾸 궤변을...?”
칸이 혀를 내둘렀다.
하나부터 열까지 앞뒤가 맞지 않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제라툴이 미치광이로 보였던 까닭이다.
칸의 입을 틀어막은 헥세타이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제라툴. 때가 오면 그대에게 협력하겠다.”
영원한 적은 없다.
누구보다 헥세타이아가 그 사실을 잘 알았다.
***
“여기 뒤집힌. 신상들과 마찬가지로. 그대는. 부정한 존재다.”
“신의 뜻을 거역하므로. 인간의 몸으로 기적을 행사하는 것으로.”
“그대의 본질은. 신성이 아닌 역행이고, 반역이다.”
“나는 그것을. 야탄 신의 바람으로 간주한다.”
“실제로 성녀라는 것은. 야탄 신께서 긴 주기에 드신 후에야. 처음으로 역사에 등장하기 시작하였으니.”
“성녀는. 야탄의 화신이 아닐까.”
루비의 머릿속에 망령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맴돌았다.
모두가 연회를 즐기는 가운데 홀로 편치 못한 얼굴로 술잔만 기울였다.
성녀.
오직 인류애를 실천하며 본인을 증명하는 존재다.
루비는 여전히 일, 주, 월 단위로 나뉘는 퀘스트를 통해 하루도 쉬지 않고 선행을 반복하고 있다. 그래야만 성녀의 자격은 유지 됐다.
종종 궁금했었다.
성녀는 왜 이렇게까지 박애하는가.
루비야 플레이어다.
Satisfy에 접속해있는 동안만 희생하면 됐다. 퀘스트라는 시스템으로 강제되는 희생이었기 때문에 거부감도 적었다.
반면 역대 모든 성녀들은 이 세계의 주민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삶 전체를 바쳐서 타인을 도왔다. 어떤 대가를 바라지 않고 본인을 희생했다.
평범한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을까?
인신의 개념을 알게 된 이후론 더 많은 의문을 느꼈다.
성녀 중 인신이 된 존재는 없었으니까.
루비도 마찬가지다.
세상 사람들이 그녀를 신으로 섬기며 그녀를 모시는 종교까지 세웠다지만.
실제로 루비가 ‘신’이라는 판정을 받은 적은 없다.
성녀들은 왜.
신으로 숭배 받아야 마땅한 업적을 쌓고도 인신이 되지 못했던 걸까?
‘애초에 신의 화신이었으니까.’
망령의 추측대로라면.
성녀란 처음부터 ‘신의 다른 형태’였으므로 신이 될 수 없던 것이다...
거기까지 깨달은 루비는 거대한 운명을 느꼈다.
성녀의 잠재 된 특성, 혹은 신분에 ‘야탄의 화신’이 존재한다면.
자신은 정말로 오빠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마치 이 세상이 그리드의 미래를 예측하고 자신을 선택해서 성녀의 지위를 내린 것만 같았다.
‘...내가 이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까?’
루비는 힐러이자 버퍼다.
대부분의 큰 전쟁에 그녀가 필히 동참해야했다.
하여 그녀는 수많은 전쟁에 참가해왔지만 오빠처럼 큰 책임을 짊어진 경험은 적다.
다만 상처 입은 자들을 치료하다보면 오빠와 동료들이 일을 해결한 뒤였으니까.
그렇게 의지하는 것에 익숙해져왔다.
하지만 앞으론 주체가 되어야만 했다.
칸의 구출.
즉 아스가르드 정벌을 최종 목표로 삼고 있는 오빠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란 ‘함께 싸울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당연히 할 수 있지. 내가 누구 동생인데.’
적어도 이 세상에선 오빠의 등을 보고 자랐다.
짝짝!
근심걱정을 털어낸 루비가 제 빰을 두드리며 용기를 북돋았다.
영락없이 미친 사람처럼 보였다.
술을 쉬지 않고 퍼 붓다가 스스로의 뺨을 때리는 모습은.
“도대체 지하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루비의 평소 같지 않은 행실에 몇몇 사람들이 걱정하는 그때였다.
“열흘 후, 파그마와 알렉스의 영혼을 구출한다.”
그리드가 다짜고짜 지옥 원정을 선언했다.
하물며 몇 번이나 실패했던 과업을 목표로 삼았다.
“움직이는 템빨계를 얻었잖아. 승산이 높다고 보는데.”
지체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그리드의 판단이었고,
“신의 뜻대로 하시지요.”
라우엘이 동의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방금 전까지 웃고, 떠들며, 마시던 템빨단원들이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각자의 방법으로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전원 자각하고 있었다.
지옥?
더 이상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다.
천상에 오르기 전에 경험치를 쌓는 교두보에 불과하다.
우리의 첫 번째 목표는 칸.
그리운 그를 지상으로 데려오는 것이다.
‘파그마는 너무 안중에도 없는 거 아니냐...’
그리드는 내심 파그마가 불쌍했다.
명색이 뮐러처럼 세상을 구한 영웅인데.
하지만 자업자득인 걸 어쩌겠나.
세상을 구한다는 핑계로 저지른 일이 너무 많았다...
아무튼.
‘나도 지긋지긋한 전직 퀘스트부터 마무리하자.’
이번에 그리드는 반드시 목적을 이룰 각오였다.
유일신이 된 마당에 전설 클래스 전직 퀘스트도 못 끝냈다?
이건 정말로 치욕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
“드디어...”
지옥.
드디어 신살의 자격을 소화한 제1위 대악마 바알이 드물게 환희했다.
그를 한 영혼이 비웃었다.
-이미 오래 전에 고인이 된 내 힘을 이제야 간신히 얻어놓고 기뻐하는 꼴이 우습다.
양반 가람의 영혼이었다.
에고가 어찌나 강한지 바알에게 소화되지 않고 몇 년을 버텼던 놈은 여전히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왜곡 된 지옥이 주는 온갖 고통이 놈의 에고를 조금도 흔들어놓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쯤 되자 바알도 흥미가 생겼다.
“네게는 진심으로 기회를 주고 싶구나. 내 곁에서 새 삶을 살아보는 건 어떻겠나?”
-기회를 줘? 기회는 내가 만드는 거지 네깟 놈이 주는 게 아닌데.
“...좋게 봐주니 정도껏을 모르는군.”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
요즘 누구나 자신을 우습게 본다는 생각이 들면서 바알은 큰 회의감을 느꼈다.
이러다가 자신의 근원인 ‘공포’가 차츰 희미해지는 건 아닐까, 그런 황당한 생각이 머릿속에 잠시 스쳤을 정도다.
물론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 이상 그럴 일은 절대로 없겠지만.
‘네놈들이 기고만장해봤자 어차피 시간은 내 편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나는 고강해질 운명이다...
변치 않는 진리를 상기하며 마음을 진정시킨 바알이 어둠 속 요람에 몸을 뉘였다.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전혀 실감하지 못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