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3권 - 9화
“...대충 이런 식의 구도가 되는 건가.”
힘을 숨긴 전학생이 전학 첫날 도내 5위권의 싸움실력을 지닌 나와 우연히 마주치고 실력을 드러내버렸습니다만...
최근 템빨 아카데미에서 유행 중이라는 소설을 탐독한 뒤 내려놓은 라우엘이 침음했다.
검성 뮐러.
그가 크라우젤과 함께 무후총으로 향하고 있다는 제보를 받았을 무렵부터.
라우엘은 예측했었다.
역대 최강의 검성이 곧 제국의 일원이 될 거란 사실을.
과연 예측은 적중했다.
서사시가 증명하길, 뮐러는 초장부터 그리드에게 매료되어 버렸다.
라우엘은 뮐러의 거취를 고민해야만 했다.
높은 작위를 내린다?
뮐러는 자유롭게 떠돌며 민생을 보살폈던 영웅이다.
그의 성향을 고려해보면 작위가 도리어 족쇄 같은 느낌을 줄 수도 있었다.
자칫 명성을 이용하려는 것으로 비칠까 두렵기도 했다.
검탑주를 맡기는 것도 같은 이치였다.
라우엘은 고민 끝에 결정했다.
그냥 뮐러가 원하는 바를 전부 들어주자고.
그러자 현재의 고민에 이르렀다.
수백 년 만에 속세에 나온 뮐러.
잠시나마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 정체를 숨긴 그가 라인하르트의 번화한 거리를 떠돌던 도중 우연히 템빨신의 사도들과 하나둘씩 마주치게 된다.
당대의 최강자들은 역대 최강의 검성을 한 눈에 알아보게 되어 결국 자존심을 건 대결을 펼치게 되는데...
‘...개연성이 너무 없긴 하군.’
그런 맛에 읽는 거겠지만.
힘을 숨긴 전학생 어쩌구 책을 다시 펼친 라우엘이 재차 탐독했다.
귀중한 휴식 시간을 알뜰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라우엘은 이 책의 저자를 플레이어로 유추하고 있었다.
심지어 높은 확률로 템빨단원이다.
관계자가 아닌 이상에야 파악할 수 없는 템빨아카데미의 정보를 설정에 녹여낸 까닭이었다. 정보 유출 수준까진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허용 가능한 선이었다.
‘미소녀 히로인이 셋이나 등장하고, 주인공은 그녀들 전부에게 호감을 품는 몰염치한 인간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역시 이 책의 저자는...’
높은 확률로 데미안일 것이다.
레베카의 딸들 전부를 사랑했던 자신의 경험을 녹여낸 거겠지.
일본 특유의 문법이 중간 중간 눈에 띄기도 했고.
‘좋아, NPC공략집의 후속작은 앞으로 데미안님께 집필해달라고 하자. 사람들이 접근하기 쉽도록 소설 형식으로.’
Satisfy에서 활동하는 작가는 굉장히 많다.
시간에 쫓기는 직업들이 대개 Satisfy에 많이 의지하는 편이다.
현실보다 3배를 늘려 쓸 수 있는 시간을 이용하면 마감을 맞추기 수월했으니까.
뇌를 혹사시키는 셈이라고 전문가들이 우려를 표하긴 했지만 당장 마감을 맞춰야하는 작가들은 한 귀로 흘릴 뿐이었다.
아무튼 Satisfy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많았지만 라우엘이 원하는 작가는 좀 더 트렌디한 작가였다.
대중을 단숨에 사로잡는 필력을 지닌 작가.
플레이어와 NPC를 구분하지 않고 사로잡은 힘을 숨긴 전학생 어쩌구의 작가처럼.
‘인구수를 늘리는 게 중요해.’
인마대전 이후 크게 줄어들었던 인구 숫자가 좀처럼 회복세를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플레이어와 NPC가 그 어느 때보다 더 협력해야할 때인 것이다.
사랑으로.
격렬하게.
천하의 그리드도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을 우리 모두 힘을 합쳐서 해결해야한다.
‘신께서 오래토록 후사를 얻지 못하고 계신 이유도 빠른 시일 내에 밝혀내야...’
희대의 미스터리.
그리드는 어째서 로드 이후 자식을 얻지 못하고 있는 걸까.
자칫 난무할 수 있는 추측들은 템빨단과 제국이 철저히 통제하고 있었다.
한편으론 각계각층의 명사에게 사람을 보내 그리드가 후사를 얻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알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좀처럼 소식이 없다...
라우엘의 침음이 깊어질 무렵이었다.
[유일신 ‘그리드’의 사도들과 신하들이 무후총을 침략한 제1위 대악마 ‘바알’을 해치웠습니다.]
월드 메시지가 떠올랐다.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까지 잠시 시간이 필요했다.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그리드 님 없이 해치웠다고?’
라우엘의 머릿속에 벼락이 튀었다.
마침 브라함이 라인하르트로 귀환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
“브라함 공.”
“재상. 무슨 일이지?”
브라함은 마구잡이로 떠오르는 영감을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누구에게도 방해 받길 원치 않았다.
단, 라우엘이 상대라면 예외다.
다소 아쉽지만 시간을 할애할 수 있었다.
지금의 그리드와 제국을 만든 일등공신 아닌가.
브라함이 존중하는 몇 안 되는 인간 중 하나가 바로 라우엘이었다.
“결혼, 해주십시오.”
“...”
하지만 이런 개소리를 허락할 정도로 존중하진 않았다.
라우엘의 몹시 결연한 얼굴을 차가운 눈빛으로 살피던 브라함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문득 삶이 무료해졌나? 죽고 싶어 하는 걸 보면.”
“예전부터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브라함 님 같은 분들께서 어서 장가를 가시고 2세를 보셔야 그리드 님께도 큰 힘이 될 거라고.”
“아, 그 이야기였군.”
“예...? 그럼 무슨 이야기로 오해하셨던 겁니까?”
“되었다. 아무튼 짝짓기는 흥미가 없다고 말했을 텐데.”
“어떻게 하면 흥미가 생기실까요?”
“생길 리 없다.”
“만에 하나라는 게 있잖습니까? 최소한의 조건 같은 것만 말해주십시오.”
“나와 나란히 있어도 손색이 없는 외견과 나와 지적으로 교감할 수 있는 수준의 지성을 겸비한 이성이 있다면... 조금쯤 고민은 해볼 수도 있겠군.”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에 있... 아! 혹시 대지의 신 가리온 님은 어떠십니까? 외모가 아름다우실 뿐더러 오랫동안 지상을 보살펴 오신 까닭에 지혜롭지 않으십니까?”
“천박하다.”
“예? 대지의 신께 천박하다니...”
“흉부와 둔부를 강조하는 옷차림과 몸짓 하나하나까지 모조리 천박해.”
“아, 그건 사람들에게 숭배 받기 위함이시라고... 음... 아무튼 알겠습니다.”
라우엘이 머릿속 메모장에 입력했다.
브라함의 취향은 단정한 쪽인 것 같다고.
귀중한 정보였다.
***
사도들과 템빨단원들이 귀환했다.
템빨계의 일부로 편입 된 거대한 비행선, <신들의 무덤>에 몸을 실은 채다.
무후총을 점령한 것으로 모자라 바알까지 해치우고 돌아온 그들을 사람들이 열렬히 환영해주었다.
“...”
검성 뮐러는 전율하고 있었다.
도시를 가득 채운 인파.
뮐러의 시대에서 저만한 인파가 모이는 경우는 딱 하나였다.
피난.
고향을, 나라를 잃은 사람들이 살 길을 찾아 헤매는 행렬을 이뤘을 때.
지금은 달랐다.
사람들의 표정에 담긴 환희와 열기는 암울한 암흑시대를 살았던 뮐러가 목격해본 적 없는 것이었다.
“당신이 뿌린 씨앗이 지켜낸 세상이오.”
그리드가 다가와 말했다.
전혀 공감할 수 없었다.
납득이 안 됐기 때문이다.
뮐러의 얼굴이 자조로 물들었다.
“저는, 영웅이라 칭송 받았음에도 책임을 등졌습니다.”
검처럼 날카로운 기파가 바람 앞에 선 갈대마냥 흔들린다.
“구해야 할 사람들을 외면하고 홀로 떠나 연명했지요. 부디 청컨대 저를 추켜세우지 말아주십시오.”
쥐구멍이라도 찾듯이 고개를 숙이는 뮐러.
그리드가 부정했다.
“아니, 당신은 마지막까지 사람들을 외면하지 못했소. 대악마가 된 칠악성들을 안배했음이 증거지.”
“...”
“당신의 안배 덕분에 나와 내 동료들은 무사히 지옥 원정을 다녀올 수 있었고.”
뮐러가 존재했기 때문에 인류에게 이롭게 작용했던 부분들.
일일이 열거하자면 한도 끝도 없이 많다.
하여 그리드는 간단명료하게 말했다.
“당신이 없었다면 인류는 나아가지 못했을 거요.”
진심이다.
헬가오가 인류에게 지옥 디버프를 극복하는 칭호를 내려주지 않았다면.
그리드와 템빨단은 지옥에서 날뛸 엄두를 내지 못했을 테고 지금처럼 성장할 수도 없었다.
“불필요한 죄책감에 짓눌려서 분위기 망치지 말고 그냥 다 좋게 생각하시오.”
이젠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는 듯이 툭 내뱉고 떠나는 그리드.
상냥한 건지, 퉁명스러운 건지.
구분하기 애매한 그리드의 태도가 뮐러를 적절하게 위로하고 적절하게 지탱해주었다.
***
“우와아아아아!!”
“...”
라우엘은 검성 뮐러에게 비밀 신분을 보장해줄 생각이었다.
당분간 자유를 만끽하며 마음을 달랠 시간을 주는 편이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한데 그럴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신들의 무덤에서 내린 뮐러의 모습을 단번에 알아봤다.
머리 위에 떠올라있는 이름 때문에?
아니다.
뮐러는 모자를 눌러 쓴 상태였다.
사전에 라우엘에게 연락을 받은 크라우젤이 씌워준 모자였는데 덕분에 이름이 노출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단순히 뮐러의 용모파기만 보고 뮐러의 정체를 알아본 것이다.
템빨단원들이 SNS에 올린 인증샷을 통해 미리 특징을 파악해놓은 덕분에 가능했다.
“이참에 SNS 금지령이라도 내려야 할까요?”
“미... 미안...”
드물게 분노하는 라우엘의 눈치를 살피느라 템빨단원들은 진땀을 빼야만 했다.
그날 저녁.
“예? 그거 제가 쓴 소설 아닌데요?”
성공적인 무후총 정벌과 뮐러의 합류를 기념하는 연회 자리.
데미안이 정색했다.
“소설을 뭐 아무나 쓰는 것도 아니고... 저한테 작가 아니냐니...”
“정말로 데미안 너 아니야? 라우엘 말 듣고 읽어보니까 진짜로 내부자가 쓴 거 같은데?”
“그러게. 템빨아카데미 관련자가 아니면 모를 만한 정보들을 설정에 잘 녹여냈네.”
“템빨단원이 수천 명인데 왜 하필 저를 범인으로 지목하는 거죠? 그리드 님의 가장 충실한 신도인 저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범인...을 찾는 게 아니라 작가를 찾는 건데...”
“아무튼 데미안은 아니라잖아. 데미안이 아니면... 설마 카츠인가?”
“라이트노벨은 일본인만 쓴다는 편견 따위 버려라.”
“카츠도 아니라고? 그럼 대체 누구야.”
의외의 난항을 겪자 술렁이는 분위기 속에서.
“작가님께서 본인의 정체가 알려지는 걸 원치 않나보군요. 좋습니다. 제게 따로 귓속말을 주세요. 비밀은 엄수하겠습니다. 부업으로 소설을 출판할 정도면 짭짤한 부수입원을 원하거나 소설을 쓰는 것 자체가 즐거운 분 아닙니까? 제가 당신의 작품이 앞으로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게 해드릴 테니까 더욱 보람 있게 재능을 살려보십...”
열변을 토하던 라우엘이 입을 다물었다.
작가로부터 귓속말이 온 까닭이었다.
-나다.
“...”
-비밀은... 반드시 지켜라.
극검이었다.
***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아스가르드.
아름답고 고결한 신들의 세상에 욕설이 울려 퍼졌다.
이어서.
쾅!!
배 나온 늙은 천사가 어둡고 축축한 감옥에 집어던져졌다.
“으윽...”
천사의 기억에선 처음으로 느끼는 고통이었다.
한데 좀처럼 낯설지가 않다.
이 마음의 통증...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난 천사가 크고 두꺼운 손으로 제 가슴을 움켜쥐었다. 몸 곳곳에 새겨진 붉고 푸른 멍 자국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고동치는 심장에 집중했다.
그리드의 얼굴을 떠올릴수록 더욱 세차게 뛰는 심장이었다.
“아아... 으아아아...”
배 나온 늙은 천사.
전설의 대장장이 칸이 드디어 생전의 기억을 모조리 되찾고 오열했다.
기뻐서 쏟는 눈물이었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이들이 있었다.
“천사의 눈물이라. 생전의 기억이라도 되찾았나보구나.”
양쪽 유두에 푸르고 붉은 불꽃이 맺힌 대장장이의 신 헥세타이아와,
“유일한 신인 내게 독방을 제공하기는커녕 수감자 숫자를 늘려...? 이 굴욕... 영원히 잊지 않겠다...!!”
봉두난발을 한 무신 제라툴이었다.
슬그머니 눈물을 닦아낸 칸이 주섬주섬 정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