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3권 - 8화
“태초신들의 주기는 단순히 안전장치 아니었소?”
S.A그룹 본사.
개발팀에게 질문이 쏟아졌다.
신들의 주기.
개발팀에선 단순히 ‘레벨업 주기’라고 불렀다. 임철호 회장 역시 임직원 회의에서 직접 언급한 바 있다.
특별하지 않은 것이다.
현실 시간으로 1년에 한 번.
시스템은 플레이어들의 성장 수준을 체크하고 태초신들 역시 한꺼번에 성장시킨다.
‘범접할 수 없다.’는 설정을 지닌 존재들이 플레이어에게 성장을 따라잡히는 불상사를 피하기 위한 안전장치였다.
그래, 태초신들의 주기라는 건 순전히 성장과 관련이 있었다.
한데 언젠가부터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했다.
플레이어가 아닌 Satisfy 속 존재들에 의해서.
“인공지능이 이미 설정 된 개념의 의미를 바꿔버린다...? 이거 상당히 위험한 거 아니오? 애초에 인공지능이 변화의 주체가 되어도 괜찮은 겁니까?”
Satisfy의 세계관은 여태껏 실시간으로 변해왔다. 플레이어의 개입이 만든 변화들이었다.
Satisfy는 ‘플레이어가 만들어가는 세상’이라는 기치 아래 묵인 됐던 현상이다.
역으로 말하면, 플레이어가 아닌 인공지능이 만드는 세상은 S.A그룹이 감수해야 할 부분이 아니란 말이다.
우려를 표하는 임원들에게 반박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럼 괜찮지 않을 건 뭡니까? 네임드 NPC만 되어도 각자의 입장과 판단으로 자신이 타고난 운명을 바꾸길 반복하는 마당에.”
“태초신의 인공지능이 네임드 NPC의 인공지능보다 월등히 뛰어나다는 게 문제지. 게다가 보통 게임에서 GM이 맡는 역할을 일부 소화할 정도로 권한 역시 막강하고. 그들이 모색하는 변화의 규모가 네임드 NPC들이 보여준 변화의 규모와 같을 거라고 생각하시오?”
“옳소. 충분히 경계해야 할 사태입니다.”
“억측입니다. 태초신들이 개인 재량으로 변화를 모색했을 가능성은 지극히 낮습니다. 아직 우리가 파악하지 못했을 뿐, 직간접적으로 플레이어의 영향을 받았겠죠. 임원 분들께선 혹시 란담이라는 마을을 아십니까?”
“란담...? 처음 들어보는데요.”
“폴드 왕국의 북부에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인구가 3천 명이 채 안 되고 명사를 배출한 전력도 없이 몹시 평범한 마을이죠. 근처에 광산이나 사냥터도 없어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존재조차 모를 겁니다. 혹은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던가.”
“한데?”
“그 마을에선 5년 전부터 해마다 축제가 열리고 있습니다. 언젠가 라우엘이 람달 근교 전장에서 마법을 사용했을 때 바뀐 기후가 우연히 맞아떨어진 덕분에 탄생한 젤리 호박의 출하를 기념하는 소규모 마을 축제지요. 영 소박하지만 아무 것도 없던 마을엔 유일한 자랑거리가 되었죠.”
“...”
“정작 라우엘은 모를, 라우엘이 행사한 영향력과 변화란 말입니다. 태초신들의 주기가 다른 무언가로 변질 된 배경에도 필시 플레이어의 개입이 있을 겁니다.”
“...흠, 하지만 태초신은 플레이어에게 일일이 영향을 받을 위계가 아니지 않나.”
쉽게 납득하지 못하던 임원들이 이내 탄식했다.
화면 속 그리드를 보면서다.
***
“본래 주기란. 딱히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3년에 한 번마다 되풀이되는. 일상에 가까운 것이었지... 하지만 그날은. 모든 것이 달랐다...”
가면 사이로 언뜻 보이는 망령의 눈가에 깊은 주름이 파였다.
그날을 회상하자 괴로워 얼굴을 종잇장처럼 구긴 것이다.
“아니... 처음부터. 달랐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평소와 같았다. 신께서는 지옥에 막 터전을 잡은. 망자들을. 격려하러 다니셨고... 지옥에서의 삶에. 적응한 일부 망자들은. 신께 공물을 바치며. 윤회의 강을 건너지 않고. 평생토록 지옥에서... 살아가고 싶다며. 기도를 올리고...”
너무 오래 전의 기억이다.
아직 지옥이 왜곡되기 전.
망령이 어리고 순수했던 시절의 기억.
그래서 흐릿한 부분이 많았다.
잊고 있던 기억도 많았다.
그것들이.
이 순간 주마등처럼 떠오르기 시작했다.
“모든 게 평소와 같다가... 갑자기 바뀌었다. 불청객이 찾아오면서.”
“불청객?”
“...신.”
괴로운 듯 머리를 감싸 쥔 망령의 호흡이 점차 가빠졌다. 잔뜩 굽힌 허리가 파르르 경련하길 반복했다.
“그자를... 나의 신께선 자신과 같다고 하셨다...”
“자신과 같다...? 야탄과 같은 위계의 신이라면 한울이나 레베카 정도밖에 없지 않나?”
“하지만... 그자는 태초신이 아니었다... 신께서 말씀하시길. 미래에 연결 된 인연이... 인도한 자라고...”
“...어?”
“에?”
그리드 남매의 두 눈이 커졌다.
자신이 살짝 바보 같은 소리를 냈다고 생각한 루비는 귀를 붉히기도 했다.
강렬한 기시감을 느낀 것이다.
망령도 한 발 늦게 깨달았다.
“이브가... 그들을 인도했다...고...?”
자신의 이름을 남의 이름마냥 부르던 그녀가 입을 다물었다.
그때 당시 신께서.
정녕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이브.
그건 분명 나의 이름이 맞다.
내가 수천 년 전에 버린 이름...
“...아아.”
“이, 이봐!”
“아아아아아아!!”
그리드가 진정시키려고 노력했지만 소용없었다.
급기야 두 귀를 틀어막은 망령은 끝없이 절규했다.
오래 전 과거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신과 소녀.
그 불길한 자들이 나타난 직후에 하늘에서 빛이 떨어졌고 신께서는 핏물이 되셨다.
소멸은 아니었다.
여태껏 없던 형태의.
마치 징벌을 받는 듯한 형태의 주기에 드셨을 뿐.
“내가.... 내가 그대들을. 신께 인도하여... 내가. 나의 손으로. 나의 신을...?”
그리드 남매를 야탄에게 보낸 범인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망령은 극도로 큰 혼란에 빠졌다.
그날 야탄께선 왜 그런 수모를 겪으셔야 했는가.
수천 년 동안 해소하지 못했던 의문에 답이 나온 것이다.
나 때문이었다.
정녕 높은 확률로 미래의 내가.
즉, 어쩌면 현재의 내가 실수를 범한 것이다.
“...태초신의 위계는. 전부 같은 게 맞냐고. 물었었지?”
“그래...”
“그대는. 목격했던 거로구나. 나의 신을 짓뭉개는 빛을.”
“‘짓뭉개는’ 빛을 봤다고 하기엔 어폐가 있어. 환한 빛이 야탄을 감싸는 순간에 내 의식은 현재로 돌아왔으니까.”
즉, 그리드는 야탄이 곤죽이 되는 장면을 목격하진 못했다.
다만 어렴풋이 짐작했을 뿐...
거기에 야탄과 나눴던 대화의 내용을 종합해서 레베카가 야탄보다 상위의 존재가 아닐까 추측했던 것이고.
“그대가 과거로 가서. 야탄 신을 뵙게 된 것은. 내 탓이 맞나?”
“네 탓이 아니다. 네가 야탄을 묘사하는 순간 우리의 의식은 자연히 시공간을 초월해서 야탄 앞에 섰으니까. 그건 차라리 운명이나 필연적인 현상에 가까웠지 네 개인의 영향이라기엔 자의식 과잉 아니냐?”
“...그래.”
그걸로 끝이었다.
영겁을 견뎌온 존재답게.
망령의 정신력은 훌륭했다.
어느새 정신을 온전히 수습하고 상황을 명료하게 파악했다.
야탄께서 그런 꼴을 당하셨던 건 내 탓이 아니다.
그리드 남매를 그곳으로 인도한 것은 내가 아닌 세계의 의지였다.
어쩌면 이 세계는, 레베카가 야탄 신을 해하는 모습을 그리드 남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결론은. 하나다.”
길게 심호흡한 망령이 단언했다.
“현재 야탄 신께선 유례없이 긴 주기를 겪고 계시고, 그것은 야탄 신의 의지가 아닌 레베카의 의지라는 것.”
원래부터 그랬던 건지.
그리드가 야탄을 만난 까닭에 이렇게 바뀌게 된 건지.
망령은 알 도리가 없었다.
다만 직시해야 할 현실은 명확했다.
언젠가 레베카를 마주해야한다는 것.
“언젠가 지옥을 수복하고. 바알을 벌한 뒤에.”
“...”
“나는 천상에 올라. 레베카에게 책임을 물 것이다. 어째서 지옥이 왜곡 된 배후에 그녀가 있는 건지. 소멸할지언정 알아야겠다.”
“마침 잘 됐군.”
그리드의 입가에 커다란 미소가 번졌다.
“내 최종 목적지도 천상이거든. 같이 가면 되겠어. 안 그래?”
“...천상에. 도전할 셈이었다고?”
“그럼 내가 뭘 할까?”
“그야. 인류를 위해... 지옥의 바알을 벌하고. 지상을 평화롭게 만드는...”
답하던 망령이 서서히 입을 다물었다.
깨달은 것이다.
고작 바알을 목표로 삼기엔 지상의 전력이 너무나도 막강하단 사실을.
방금 전.
그리드의 사도들은 그리드 없이 바알을 퇴치해버렸다.
거기에 자신까지 힘을 보탠다면?
‘어쩌면 정말로... 천상을 범할 수도 있단 건가...?’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란 말인가.
전율하는 망령과 태연히 선 그리드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드럽게 얽히는 그때.
‘나는 안 와도 됐던 거 아닐까?’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된 루비가 민망해서 헛기침했다.
물론.
망령은 루비를 데려온 이유를 망각하지 않았다.
“성녀 루비. 그대는 이쪽으로...”
끼이이익.
그리드 일행이 신전의 지하로 내려갔다.
***
같은 시각, 무후총 상층.
“오오...”
“주화입마를 자체적으로 극복했다고?”
템빨단원들은 순수하게 기뻐했고 사도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직 성녀가 도착하지도 않았건만.
검성 뮐러가 스스로의 의지로 주화입마를 극복한 까닭이다.
정신력만 놓고 보면 어지간한 절대자보다 나은 게 아닐까 싶었다.
“드십시오. 회복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피아로가 황금호두를 비롯한 온갖 진귀한 열매를 뮐러에게 건넸다.
하나 같이 템빨계의 풍요로운 땅에서 전설의 농부가 정성들여 재배한 영약이었다.
“허... 고맙소.”
열매들의 가치를 한 눈에 알아본 뮐러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
피아로의 만면에 미소가 번졌다.
“후배에게 감사하실 필요 없습니다. 존경하는 선배님께 작은 도움이라도 드릴 수 있단 사실이 축복이고 영광일 따름입니다.”
“후배라...? 그대 또한 검사의 길을 걷는 자구려.”
피아로의 두꺼운 손에 박인 굳은살을 확인한 뮐러가 인자한 미소를 그리다가 굳었다.
“농업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만... 아무쪼록 편히 후배로 대해주십시오.”
...왜?
농부가 왜 굳이 선배와 후배라는 호칭에 집착하는 거지?
뮐러는 피아로가 참으로 기이한 인물이라고 여기면서도 순순히 영약을 입속에 털어 넣었다.
원기가 빠르게 회복되는 것이 느껴졌다.
“맛있느냐?”
웬 소녀가 불쑥 물어보았다.
크게 벌린 입가에 맑은 침을 줄줄 흘리면서다.
며칠을 굶은 아이 같아 안타깝게 여기던 뮐러가 이질감을 느꼈다.
여기에 며칠 굶은 아이가 있을 이유가 없잖은가?
“...해츨링?”
원기가 회복되고 감각이 돌아오자 소녀의 정체를 파악한 뮐러가 경악했다.
해츨링.
심지어 고룡의 직계로 보이는 해츨링의 기운이 그에게 커다란 위험을 경고하는 것이다.
“진정하세요, 스승님.”
푸른 머리카락의 아름다운 여기사가 차분하게 속삭여왔다.
스승님?
어처구니없는 호칭에 황당해하는 뮐러에게 여기사가 빙그레 웃어보였다. 허리춤에 맨 검파에 힐끔 시선을 내리면서다.
“칼자루에 흔적을 남겨 깊은 가르침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앞으로 평생 제자의 예로 모시겠습니다.”
고릴라였다.
이성이 마비 된 듯한 눈빛과 콧김을 내뿜는 꼴이 상상했던 이미지와 얼추 닮았다.
“내가 좀 더... 쉬어야할 듯싶소.”
만인에게 존경 받는 영웅 중의 영웅.
검성 뮐러가 수많은 목격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약한 모습을 보였다.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