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3권 - 7화
제32위 대악마 벨리알.
대악마 중 최초로 지상에 강림했던 그녀는 인류에게 끔찍한 공포를 각인시켰다.
홀로 국가 단위의 힘을 압도하고 그리드와 피아로를 포함한 템빨단을 몰살 직전까지 몰아붙이지 않았나.
그녀의 포스는 실로 엄청난 것이어서,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됐다.
어쩌면 그녀가 원인이었다.
사람들이 바알을 최종 보스로 지목하기 시작한 것은.
[제1위 대악마 바알을 해치웠습니다!]
가장 강력한 최종 보스 후보.
물론 세상엔 바알보다 강한 존재가 더러 있다.
하지만 바알만큼 순수한 악의로 똘똘 뭉친 존재는 보기 드물었다.
바알의 최종 보스설에 무게가 실리는 이유다.
실제로 Satisfy의 뒤틀린 역사 중 상당수엔 바알이 개입해 있었다.
놈이 배후에 있는 탓에 망가진 개인, 집단, 국가, 시대는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지금 이 순간.
바알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템빨단의 생각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바알을 최후의 최후까지 대적해야 할 존재로 인식했다.
‘물론 최종보스는 태초신들의 성향에 따라서 판가름 날 것 같은 분위기이긴 하지만.’
아수라라는 게 영 거슬린다.
주변의 모든 자원을 삭제시키고 피아로의 생기를 빨아먹었던 투명하고 거대한 손.
‘완성되어가는 아수라의 손’이라는 이름이 떠올라있던 그것은 섭리에 어긋나는 힘이었다.
특히 레가스의 동요가 몹시 컸다.
500레벨을 달성하고 5차 전직을 시도하던 중에 3차 직업 아수라로 회귀해버린 그는 ‘클래스에 발목을 붙잡힌 것 같다.’는 기분을 느껴왔다.
아수라라는 클래스가 살아 숨 쉬며 자신을 훼방 놓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러던 차에 바알이 만들고 있는 아수라의 일부를 목도한 것이다.
지옥 원정에서 봤던 아수라의 파편과는 비교가 안 되는 강력한 신체의 일부 말이다.
필시 자신과 큰 관련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수라로 전직하기 위해선 부단한 노력과 재능이 필요하다.’
전직 난이도가 어찌나 높았으면 ‘사람을 걸러내는 듯하다.’는 평가까지 있었겠나.
언젠가부터 아수라로 전직하는 일은 재능 있는 사람들의 도전의식을 불러일으켰다.
젊은 후발주자 중에선 순전히 아수라를 목표로 무도가가 됐다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다.
자신의 재능과 실력을 증명하고 싶어서 아수라에 도전한 사람 중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끈기와 기발한 발상을 지닌 소수의 천재만 아수라 전직에 성공했다.
혹시 그들 전부가 바알이 만들고 있는 아수라와 어떤 관련을 갖게 된다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레가스의 마음이 불안해졌다.
자신을 비롯한 아수라 플레이어들이 어떤 퀘스트에 강제당해 지옥 편에 서는 사태를 상상한 여파다.
“너무 걱정하지 마.”
레가스의 표정을 읽은 지슈카가 그의 등짝을 짝짝 두드렸다.
“바알의 계약자마저도 바알에게서 독립한 마당인데 너라고 크게 다르겠어? 만에 하나 네가 걱정하는 사태가 벌어져도 너 스스로 상황을 통제하면 그만이야. 말 안 듣는 건 예전부터 네 특기였잖아?”
“하하...”
지금은 순전히 기뻐할 때다.
그리드 없이 바알 레이드에 성공한 업적을 세우고 얻은 보상이 몹시 컸다.
물론 바알의 상태는 온전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본체’였던 이상 큰 보상을 주는 게 당연했다.
[인간의 한계를 초월합니다.]
전설들은 처음으로 초월의 격을 얻었고,
[당신이 걸어온 길이 서서히 전설이 되어가는 중입니다.]
누군가는 새로운 전설을 개척할 자격을 얻었고,
[당신의 격이 한층 더 상승합니다.]
이미 초월자였던 사람은 격이 상승했다.
활약도가 낮았던 단원들은 아쉽게도 레벨이 크게 오른 수준의 보상을 얻는 것에 그쳤지만, 대신 무지막지한 명성과 칭호를 얻었다.
<영웅왕의 수호자>
뮐러와 호감도가 상승하고 검술 스킬을 배울 자격을 갖게 됐다.
사도들이 얻은 보상은 더 컸다.
아무래도 템빨단원들보다 많은 활약을 펼친 덕분에 격이 몇 단계나 상승했다.
레벨 상승은 덤이다.
하지만 브라함의 표정은 어두웠다.
‘일대일로 이기지 못했다.’
현재의 브라함은 그리드가 바알을 처음으로 꺾었을 때보다 강하다.
물론 방어력은 훨씬 낮았지만 다양한 마법으로 커버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지옥이 아닌 이상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믿었었다.
하지만 현실은 믿음과 많이 달랐다.
찰나를 영원으로 늘리는 절대자를 상대로 브라함은 초반에 완전히 수세에 몰렸다. 전투의 흐름을 제대로 따라잡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손해를 입길 반복했다.
‘초월자 시절의 그리드는 무슨 수로 절대자들과 싸웠던 거지?’
그리드라고 해서 절대자들과 싸워서 늘 이겼던 건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 운 좋게 상황이 풀리는 식으로 위기를 모면했었다.
하지만 아무튼 ‘싸움’은 성립시켰었다.
중요한 순간에 바알의 털끝 하나 건들지 못했던 자신과는 달랐다.
그리드가 싸웠던 순간들을 돌이켜 본 브라함이 진지하게 고민했다.
‘나도 용 한 마리를 길들여야 하나?’
제2의 드래곤 나이트를 꿈꾸기 시작했단 말이다.
‘...말도 안 되지.’
이내 브라함이 눈살을 찌푸렸다.
드래곤을 길들인다?
무슨 수를 써도 불가능하단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드래곤의 알을 훔치거나 해츨링을 납치해서 처음부터 키워도 불가능했다.
드래곤은 태어나는 순간 모든 개념을 이해하고 세상의 흐름을 파악하는 존재다.
납치범에게 호의적일 리 만무한 것이다.
성룡과 협력한다는 건 완전히 미친 짓이고.
‘...가만.’
브라함이 문득 떠올렸다.
그리드가 드래곤 나이트가 되기 전에도 본인보다 상위 격의 존재와 싸웠던 순간들을 떠올린 까닭이다.
갓 핸드들이 아무런 규칙성 없이 그리드의 주변을 맴돌던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갓 핸드가 움직이는 방향을 쫓는 희미한 마력의 흐름이 덩달아 떠올랐다.
‘설마...?’
그리드의 인공 감각은 흔적이 없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잘게 쪼갠 은사의 가루를 마력과 혼합한 것으로, 밀도가 워낙 낮아서 그리드를 제외한 존재들은 인지하기 힘들다.
사람이 걸을 때 몸에 닿는 먼지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한데 지금.
브라함은 순전히 가설로 인공 감각의 존재를 눈치 채버렸다.
“나는 먼저 돌아가마.”
“그리드 님은 뵙지 않고?”
“흥, 어련히 무사하겠지.”
전투 도중.
바알의 기척을 흐리게 만들었던 아티팩트는 파괴 됐다.
하지만 그리드는 현장에 찾아오지 않았고 일부 사람들은 그리드를 걱정했다.
혹 지하에서 어떤 일을 당해서 ‘올 수 없는 상황’을 겪고 있는 건 아닐지.
하지만 브라함은 알고 있다.
그리드에겐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단지 우리를 믿고 바알을 맡겼을 뿐.
바알은 우리가 없앨 테니까 신경 쓸 필요 없다는 브라함의 의념을 읽고 거기에 대답한 것이다.
브라함은 정말로 미련 없이 현장을 떠나버렸다.
지금 막 떠오르기 시작한 영감을 붙잡기 위해선 여기서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웅웅.
브라함이 떠나고.
텔레포트의 잔재만 남아 벌떼 우는 소리를 냈다.
잠시 흐르는 침묵 속에서 지슈카가 상황을 수습했다.
“그리드와 루비가 돌아올 때까지 뮐러의 회복을 돕도록 하자.”
***
‘진짜로 이길 줄이야.’
무후총의 가장 깊은 지하.
그리드가 숨 죽여 환호했다.
조금 전.
불쑥 나타난 바알의 기척을 읽고 악귀 같은 표정을 지었던 사람이라곤 믿기지 않게도 환한 얼굴이다.
“비록 바알이. 만전은 아니었을지언정... 어찌. 사도들과. 인간들의 힘만으로...”
망령이 중얼거렸다.
그녀는 바알이 무후총에 침입하는 사태를 전혀 상정하지 못했었다.
바알의 기척을 읽은 순간 여태껏 놈에게 농락당하고 있었단 사실을 깨닫고 크게 한탄했다.
사실상 좌절이었다.
하필 자리를 비운 틈에 바알이 침입한 것이다.
그리드와 격전을 치른 직후라 즉시 대응하기도 힘들었다.
베리아체의 심장을 빼앗기는 불상사를 겪고 영겁의 세월 동안 쌓아올린 모든 노력이 곧 수포로 돌아갈 거라고 판단했다.
한데 실상은 어떤가.
바알이 무력하게 패퇴하고 말았다.
그리드를 섬기는 사도들과 인간들이 만든 기적이었다.
“그대는 사실... 나를 쉽게 꺾을 수. 있었던 거로군...”
망령이 오해했다.
사도들과 함께 침입했으면 자신을 쉽게 이겼을 그리드가 자신을 봐준 거라고.
“처음부터. 나와 교감하는 것이. 목적이었나... 나를 인류의 대적이라. 규정하고도. 우선은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했던 것인가. 과연. 그대가 나를. 끝내 죽이지 않은 이유를. 이제야 확실히 알겠다. 그대는... 내 생각보다 더. 상냥한 존재인 게야...”
“...”
그리드가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하지만 굳이 오해를 풀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망령은 덕공이 발동해서 살려준 대상이다.
시스템적으로 호의를 얻었단 말이다.
망령은 그리드에게 큰 호감을 품고 있었다. 그리드와 관련 된 일을 대부분 긍정적으로 해석하려고 노력하는 성향을 지녔다.
“자꾸 이러면. 안 되는데...”
[야탄 신의 사도 ‘이브’와의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가면이라도 벗고 그러면 안 되나?’
인신들의 뼈로 만든 가면과 갑옷은 망령의 기본 옵션 같은 거였다.
그리드에게 패배하고 앞으론 변할 것을 맹세했어도 가면과 갑옷을 벗진 않았다.
자신이 살해한 존재들을 영원히 잊지 않을 거라고 선언하듯이.
아무튼 무시무시한 외관을 지녔단 말이다.
얼핏 보면 리치나 다름없었다.
리치가 양팔로 가슴을 감싼 채 몸을 비비 꼬는 모습 따위, 그리드는 굳이 보고 싶지 않았다...
“그... 언제 보여주실 거예요?”
루비도 마찬가지였다.
파리해진 얼굴로 망령을 재촉했다.
그러자 정신을 차린 망령이 굳게 닫힌 신전의 문을 열었다.
끼이이이익...
어두운 지하에 고독하게 선 백색 신전.
오랜 시간 굳게 닫혀있던 그곳이 내부를 드러낸다.
황량한 풍경이 펼쳐졌다.
신전의 내부는 텅텅 비어있었다.
“이 분이... 나의. 신이다.”
털썩.
무릎 꿇은 망령이 바닥을 어루만지며 소개했다.
그리드 남매가 한 발 늦게 눈치 챘다.
바닥을 가득 채우는 그림이 있다는 사실을.
누군가의 초상화였다.
남매가 조금 전 만났던 야탄의 초상화.
한데 야탄의 실제 모습과 달리 초상화는 영 불길한 느낌을 줬다.
붉은 물감 하나만 사용해서 그린 초상화였기 때문이다.
“이게 다라고?”
그리드는 이곳에 잠들어 있는 야탄이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망령은 이곳에 야탄의 일부가 잠들어 있을 뿐이라고 고백했으며, 실제로는 일부조차 아닌 그림 하나가 전부였다.
실망도 못하고 당황하는 그리드에게 망령이 설명했다.
“신께서. 주기에 들기 전에. 흘리신 피다...”
“...?”
그리드가 귀를 의심했다.
야탄의 초상화는 신전의 바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수십 미터 규모였다.
이만한 그림을 피로 그렸다고?
“이게 전부 야탄이 흘린 피라고? 누군가에게 빨래처럼 쥐어 짜이기라도 했다는 건가?”
그 외엔 비유할 방법이 없었다.
야탄이 흘린 피는 많아도 너무 많았다.
몸에 남은 피가 단 한 방울도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 정도로.
물론 진정한 신을 생물로 규정하는 건 무리가 있으니 피가 없다고 해서 죽을 일은 없겠지만...
‘...아무튼’
주기.
그리드는 그것의 형태를 대충 겨울잠이나 은둔쯤으로 상상해왔다.
주기가 정확히 무엇이고, 왜 필요한 건지는 몰라도.
아무튼 두문불출하는 거였으니까.
즉, 이렇게 피를 흘릴 일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단 말이다.
당최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략. 맞다.”
“...?”
의아해하던 그리드가 큰 충격을 받았다.
“곤죽이. 되어버리셨으니.”
망령의 시점으로 그날이 회상되기 시작한다.
“본래 주기란. 딱히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3년에 한 번마다 되풀이되는. 일상에 가까운 것이었지... 하지만 그날은. 모든 것이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