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3권 - 5화
“나의 방문을 무슨 수로 눈치 챘지?”
바알이 당황한 이유는 사도들의 면면이 화려해서가 아니다.
그리드의 사도들.
하나하나가 만만찮은 존재란 사실쯤이야 바알도 진즉부터 인정하고 있었다. 새삼 당황할 이유가 아닌 것이다.
“절대자의 기감조차 속이게끔 준비를 철저히 했는데 말이지.”
어느새 여유를 되찾은 듯이 빙그레 웃는 바알.
놈의 발밑으로 생소한 형태의 마법진이 그림자마냥 번져있었다.
발걸음에 맞춰 따라붙는데, 바알의 어깨 위로 떠올라있는 모래시계와 연동되어 기능시키는 중이다.
브라함은 처음부터 그것들을 주시했다.
‘제한 시간 동안 사용자의 기척을 흐리게 만드는 아티팩트를 운용하는 건가. 마법으로 변형을 줘서 기능을 극대화시켰군.’
바알의 행보는 항상 파격적이었다.
지옥을 왜곡시킨 시점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보여준 모습들 전부가 상식과 동떨어져 있었다.
대책 없이 날뛰는 미치광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불과했다.
브라함은 오래 전부터 바알이 영리하고 철저히 계획적인 존재란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애초에 진짜 단순히 미친놈이었다면 무슨 수로 야탄과 베리아체를 비롯한 수많은 존재들을 기만해왔겠나.
“조악한 아티팩트로 수작을 부려봤자 나를 속일 순 없지. 인자하신 어머니와 달리 나는 순수하지 않아 의심이 깊거든.”
“조악하다...? 납득하지 못하겠군.”
바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사용 중인 아티팩트는 장인 파울드의 기술력을 이용해서 만든 물건이기 때문이다.
죽은 자의 능력을 흡수하는 바알이기에 가능했다.
그는 자신이 만든 아티팩트가 역사상 보기 드물 정도로 강력한 성능을 지녔다고 자부했는데 브라함에게 부정당한 것이다.
브라함이 턱을 치켜세우고 웃었다.
“지금 막 한 가지 사실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명백히 조소였다.
“바알 네놈은, 필연적으로 시대에 뒤떨어지는 놈이다.”
브라함의 붉은 눈동자에 비치는 바알의 모습은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불쾌한 오물이었다.
썩은 고기가 덕지덕지 뭉친, 보는 것만으로 혐오감을 느끼게 만드는 물체.
그것이 미세하게 들썩였다.
“내가 시대에 뒤떨어진다?”
“당연한 거지. 죽은 사람들의 힘을 수집하는 네 능력은 이미 끝난 시대를 붙잡고 늘어지는 것에 불과하니까.”
각 분야에서 주류를 이루던 자들이 죽으면.
새로운 자들이 새로운 주류를 만들게 마련이다.
새로운 시대가 열린단 말이다.
바알은 영영 체험하지 못할 경험이었다.
“나는... ‘우리’는.”
브라함.
오직 자신밖에 몰랐던 사내가 자리에 있는 모두를 논한다.
그리드의 사도들과 템빨단원들.
그들에겐 그리드와 함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너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큭큭큭! 크하하하핫!! 브라함! 베리아체의 아들아!! 기껏 신격을 쌓고도 제 어미보다 못한 놈이 기고만장하는 꼴이 우습구나!!”
사실 바알에겐 억울한 부분이 많았다.
광룡 네바르탄.
바알이 본래 계획한 대로라면, 놈은 진즉에 사하란 제국에서 크게 날뛰고 인간들을 대량으로 학살해야만 했다.
한데 크라우젤이 백아도를 확보한 변수로 인해 계획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이후에도 죽었어야 할 수많은 존재들이 그리드 세력에 의해 지켜졌다.
당장 눈앞에 있는 사도들도 그중 일부다.
바알은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힘을 얻지 못했단 말이다.
하여 검성 뮐러에게 집착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찾아왔다.
심즉살.
태초신을 상대로 반역을 일으킨 자신의 강력한 의지에 뮐러의 권능이 보태진다면.
틀어진 계획에 의해 입은 손해를 상당히 복구할 거라고 바알은 판단하고 있었다.
한데 그리드의 사도들이 훼방을 놓으려 나타났다.
솔직히 말하면 불쑥 짜증이 치솟았다.
하지만 이 순간.
기고만장한 브라함의 낯짝을 보자 생각이 바뀌었다.
상황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보았다.
브라함에게 품게 된 살의가 제시한 새로운 대책 덕분이다.
“오늘 난, 여기서 한 번 죽어야겠다.”
꽈드드드드득!!
강철이 응축되는 듯한 단단한 굉음이 장내에 메아리쳤다.
바알이 몸에 두른 칠흑의 마기가 검의 형상을 갖추는 것이다.
“너희 중 몇을 죽이는 대가로 말이지.”
바알에게 죽음이란 극복되는 것이다.
100번 1,000번을 죽어도 곧바로 다시 부활해버렸으니까.
그리드의 서사시가 작동 중일 때는 그런 바알조차도 죽음을 두려워했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리드가 없을뿐더러, 설령 자신의 죽음이 세상에 널리 알려져서 격이 훼손될지언정 손해가 아니었다.
어차피 지옥의 지배자로 군림하는 이상 격은 서서히 복구 될 것이며, 당장 메르세데스의 혜안만 봐도 몇 단계의 격보다 높은 가치를 지녔으니까.
콰르르르릉!!
천둥이 휘몰아치는 소리와 함께 브라함의 한쪽 팔이 잘려나갔다.
초월자 여럿이서 한 명의 절대자를 감당할 수 있을까?
호사가들의 질문에 대답을 내놓는 장면이다.
바알이 브라함에게 접근해서 칼을 휘두르기까지 그 누구도 저지하지 못했다.
“너는... 노리지 않는 편이 좋겠군.”
바알은 썩 흡족하지 못했다.
브라함의 목을 자르려고 했는데 실패한 탓이다.
마법과 지혜의 신.
높은 신격을 쌓은 브라함은 비록 아직 절대지경엔 오르지 못했지만 초월자보단 명백히 위였다. 절대자만이 인지하는 시간을 아슬아슬하게나마 붙잡고 늘어져서 바알의 노림수를 무위로 돌렸다.
“디스인티그레이트.”
심지어 한편으론 마법의 캐스팅까지 마쳤다.
환영처럼 나타난 빛의 창이 바알의 상체를 꿰뚫었다.
동시에 지크가 나섰다.
룬의 힘으로 바알의 동작을 순간이나마 정지시키고 바알에게 공격을 명중시켰다. 바알의 가슴을 벤 사하란의 검이 극성의 적기를 발휘하여 바알을 통제하려 들었다. 소별왕에게서 빼앗은 신성까지 함께 활용했다.
움찔 놀란 바알이 기운을 거두고 물리력을 사용했다.
꽈아앙!
우악한 손이 지크의 얼굴을 붙잡아 땅에 처박는다.
지면이 폭발하는 굉음 사이로 들려선 안 될 소리가 들렸다.
뭔가가 뚝 끊어지는 소리였다.
지크의 목뼈가 부러진 것이다.
지면에 처박힌 지크의 목이 기이한 각도로 돌아가 있었다.
“지크!”
지슈카가 <날아오르라>를 전개했다.
파마의 화살을 섞었다.
지크의 회복을 노리는 한편 바알의 약화를 도모하는 것이다.
루비가 없는 전장에서 템빨단의 힐러는 그녀였다.
과연 바알의 어그로가 즉시 바뀌었다.
뮐러와 사도들의 능력을 탐내면서도 잠시나마 지슈카를 가장 경계했다.
불쑥 지슈카 곁에 나타난 놈의 검을,
“우오오오오오!!”
꽝!
의외로 반트너가 막아냈다.
‘일정 시간 동안 지정 대상을 반드시 보호하는’ 궁극기를 미리 전개해놓은 덕분이다.
지슈카가 날아오르라를 쏜 시점부터 이런 상황을 예측하고서.
대가가 컸다.
“호오? 제법 흥미롭다만 내게는 불필요한 능력이군.”
꽈앙! 꽈앙!! 꽈아앙!!
바알의 마검이 반트너의 방패를 두드릴 때마다 반트너의 코와 입에서 검붉은 피가 쏟아졌다.
점차로 깨져가는 방패와 함께 땅에 못처럼 박히기 시작한 그를 물리적인 상태이상 ‘내상’과 ‘골절’이 괴롭혔다.
순식간에 불사가 소모되기 직전까지 갔다.
동료들이 좌시하지 않았다.
반트너와 마찬가지로 지슈카에게 어그로가 끌릴 것을 예측했던 템빨단의 최정예가 바알을 팔방에서 감싸며 공세를 퍼부었다.
“네놈도 제법이구나.”
템빨단의 공세를 피하지 않고 반격하던 바알의 시선이 크라우젤에서 페이커로 서서히 옮겨갔다.
페이커의 <살생부>에는 바알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대상을 지정해서 공격력을 대폭 강화시키는 소모성 단검 <습격>에도 바알의 이름을 새겼다.
지금의 페이커는 바알을 한정으로 무지막지하게 강력한 실력을 뽐낼 수 있단 말이다.
공격력만 따지면 사도들에게도 전혀 밀리지 않는 수준이었다.
하물며 암살자의 강점은 추적, 은신, 잠입, 함정 설치 관련 스킬을 활용할 수 있다는 부분에 있었다.
중요한 순간마다 바알의 어그로를 흘리고 감각을 교란하는 등, 페이커는 초월의 격 없이도 초월자 같은 전투방식을 구현했다.
다만 문제는 결국.
콰아앙!!
바알이 절대자라는 점이다.
페이커의 피지컬과 영리함이 만들어낸 편법들이 초월자를 구현할지언정 바알을 상대로는 큰 의미가 없었다.
“쿨럭!”
그림자에 숨어드는 걸 실패하고 저 멀리 벽까지 날아가 처박힌 페이커가 물리적인 상태이상 ‘속박’ 탓에 꼼짝도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두꺼운 벽을 수십 미터나 꿰뚫고 들어간 여파가 컸다.
데미안과 카츠가 다급히 바알의 시선을 끌었다.
동료들이 페이커를 구출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서였다.
어느새 회복한 브라함과 지크도 합류했다.
바알이 거침없이 휘두르던 검이 브라함의 ‘주먹’에 가로막혔다. 강화마법을 덕지덕지 두른 괴력난신의 주먹이다.
“이 힘... 베리아체의 핏줄답군. 그 무식한 녀석의 자식 놈이 지혜의 신으로 숭배 된다는 사실이 우스울 따름이다.”
그리드는 베리아체의 괴력이 ‘망령을 흡혈’한 결과라고 판단했었지만.
실상은 시조의 순수한 육체능력이었다.
“무식하신 게 아니라 순수하신 거다.”
함부로 베리아체를 평가하는 바알의 개소리가 브라함의 심기를 건드렸다.
사실 정곡을 찔려서 화난 게 컸다.
무식하다.
바알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스스로를 희생해 자식을 낳고, 기껏 낳은 자식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해 버린 베리아체를 평가하기에 비교적 옳은 말이었으니까.
그렇다.
브라함도 어머니가 늘 옳진 않으셨음을 알고 있었다.
다만 그럼에도 사랑할 뿐.
콰르르르릉!!
바알의 손목을 붙잡고 늘어진 브라함이 무영창 마법을 연속해서 시전했다. 평생 살면서 단 하나도 보기 힘들 대마법이 바알과 모래시계를 겨냥하고 줄줄이 쏟아졌다.
모래시계.
바알의 ‘존재감’을 주변 환경과 동화시켜서 흐릿하게 만드는 저 아티팩트를 파괴해야만 그리드에게 이곳의 상황을 전달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브라함의 손을 뿌리치고 가슴을 검으로 베어버린 바알이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드 없이 싸워도 이길 거라는 듯이 지껄인 놈이. 또 금방 다시 그리드에게 도움을 요청하려는 거냐? 어미에게 자존심은 물려받지 못한 모양이지?”
“도움을... 바라는 게 아니다.”
쿠콰콰콰콰쾅!!
끝없이 쏟아지는 마법의 격류 속에서.
바알의 몸은 찢겨지고 폭발하는 즉시 초고속으로 재생하는 반면 브라함의 몸은 넝마가 되어갔다.
부활할 수 있다는 이점을 살려서 바알과 동귀어진을 노리는 듯했던 브라함의 노림수가 수포로 돌아간 거라고, 템빨단원들은 생각했다.
착각이다.
브라함은 사람들의 생각보다 더 자존심이 세다.
바알을 죽이면 죽였지 같이 죽을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너의 죽음을 알리려는 거지.”
“헛소리를...”
터무니없는 허세에 바알이 헛웃음을 터뜨리는 그때.
“되었네.”
피아로의 목소리가 울렸다.
바알이 붉은 살덩이를 이용한 여파로 무후총도, 템빨계도 아닌 ‘지옥과 닮은’ 기이한 환경을 갖게 된 공동.
그곳이 어느새 황금빛 밀밭으로 변모해 버렸고,
“훌륭하세요.”
칼자루에 남은 누군가의 손자국을 되새기며 잠자코 있던 메르세데스가 드디어 전투에 합류했다.
인내의 시간이 끝난 것이다.
그리드님께서 밟았던 성역을 감히 침범한 대적을 당장에 죽여 버리고 싶다는 살심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던 그녀는,
“소닉 레이지.”
결과적으로 바알에게 이롭게 작용하던 주변의 환경이 피아로에 의해 회복됨과 동시에 극의를 전개했다.
브라함과 지크, 그리고 템빨단원들이 시간을 벌어줬기에 가능한 노림수였다.
효과가 컸다.
츠카카카칵!
바알은 소닉 레이지가 만든 검기의 환영을 잠시 구분하지 못했다.
쌍검을 역수로 쥔 채 쏘아진 메르세데스를 당연히 진짜로 여기며 베었고, 때마침 한 발 늦게 다가온 진짜 메르세데스에게 베였다.
붉은 살덩이를 이용해 지옥과 비슷한 환경을 만들고 잠시나마 절대자의 위용을 뽐냈던 바알이 밑천을 드러낸 순간이다.
“농부... 놈...”
반으로 갈라진 바알이 피아로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다.
초고속 재생의 권능마저 잃은 놈의 몸을 여전히 작동 중인 브라함의 마법들이 갈아버리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
위력이 아주 약간 부족했다.
템빨단원들이 쉬지 않고 쏟아 붓는 궁극기와 사도들의 공세를 어떻게든 버텨낸 바알이 피아로를 노리고 손을 뻗었다.
그러자 거대하고 투명한 보라색의 손이 훅, 하고 주변의 모든 기운을 촛불처럼 꺼뜨리며 날아가 피아로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말했잖나. 혼자 죽지 않겠다고.”
꾸우욱!!
피아로의 목이 꺾여갔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파랗게 질린 그의 몸이 급속도로 미라처럼 말라갔다. 그의 몸속에 담겼던 자연의 기운들이 모조리 바알에게 빨려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 누구도 피아로를 구하지 못했다.
저 정체불명의 투명한 보라색 손에 의해서 템빨단원과 사도들은 마력과 검기 등의 모든 자원을 일시적으로 사용할 수 없게 됐다.
순수한 육체능력만으로 바알을 빠르게 제압하고 피아로를 구한다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단, 한 명의 예외가 있었다.
서걱!
검성 크라우젤이 피아로의 목을 조르고 있는 투명한 손을 베어버렸다.
검기를 잃었을지언정 ‘베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검성의 권능은 견고했던 것이다.
“건방진 놈!”
바알이 드물게 분노했다.
크게 경계하지 않고 있던 애송이 검성에게 ‘완성되어가던 아수라의 손’을 잃은 만큼 치솟는 화를 숨기지 못했다.
콰아앙!
피아로가 마기에 침식당하고 질식 된 여파로 메말라버린 논밭.
덕분에 재차 자신이 원하는 환경을 되찾아가기 시작한 바알이 크라우젤과 피아로 사이에 난입했다.
둘의 목을 동시에 베어버릴 기세로 검을 크게 횡으로 휘둘렀고, 그 속도가 몹시 쾌속해서 크라우젤은 죽음을 직감했다.
다만 어떻게든 피아로는 지키려고 애썼다.
자신이 아닌 피아로를 대상으로 검막을 펼쳤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바알의 검이 훨씬 더 빨랐다.
피아로의 목이 베이기 직전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쩌어어어어엉!!
한동안 뮐러의 곁에 잠자코 있는 듯 싶었던 미르가 바알의 검을 막아냈다.
‘순수한 검술’로.
뮐러를 보고 되찾은 기억이 그의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나는, 그대와 대적하기 위해 만들어졌다지.”
템빨신의 마지막 사도.
본래 태초신 한울의 보검이 됐어야 할 미르의 잠재력이 바알과의 만남을 계기로 개화됐다.
제1위 대천사 리파엘과 잠시나마 호각을 겨뤘을 당시 보여줬던 모습과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