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83권 - 3화
신의 모습을 떠올림에 있어서 어려운 부분은 없다.
레베카 여신부터가 인간의 형상을 닮았으니까.
하여 천상의 신들을 처음 목격했을 때, 인류는 당황하지 않고 그들의 모습을 받아들였다.
단, 야탄은 예외다.
지옥을 탄생시킨 악신.
인류는 야탄의 생김새만큼은 괴물에 가까울 거라고 상상해왔다.
실제로 신화를 기록하는 벽화 속 야탄의 모습은 악마들의 그것처럼 기괴하고 불길하게 묘사됐다.
한데 직접 본 야탄의 모습은 괴물과 거리가 멀었다.
다른 신들과 마찬가지로 한없이 인간에 가까웠다.
심지어 호남이다.
시원한 미소가 몹시 잘 어울리는 잘생긴 미남자였다.
‘이게... 야탄이라고?’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떨어진 그리드.
야탄을 마주보고 선 그가 내심 놀랐다.
그 역시 편견에 시달려온 탓이다.
야탄이 괴물은 아닐지라도 최소 <마왕 토벌전>의 마왕들과 비슷한 느낌으로 생겼을 거라고 추측해왔다.
야탄이 사실은 선할 수도 있음을 알고도 그랬다.
인간이 레베카를 모티브로 만들어졌듯, 악마는 야탄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고 단순하게 생각했으니까.
‘자기는 멀쩡하게 생겼으면서 왜 악마들은 그 모양 그 꼴로 만든 거야?’
악마들이 비뚤어진 이유는 외모에 대한 열등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리드의 추측은 진지했다.
본인 역시 외모 탓에 자존감이 낮았던 시절을 겪었으니까.
“...”
푸른 동산 위였다.
조악한 목책에 둘러싸인 작은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옹기종기 모인 집들이 수수하다 못해 허름했다.
은근히 구수한 시골의 냄새가 진동하는 것이 소똥과 짚을 섞어 만든 집들이 아닐까 싶었다.
‘대체 얼마나 과거인 거지?’
무척 갑작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그리드는 냉정했다.
야탄을 경계하는 한편으로 주변의 모든 걸 샅샅이 살폈다.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는 것이다.
야탄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새카만 눈동자를 시시각각 흥미로 물들이며.
먼저 입을 연 것은 젊은 시절의 망령이었다.
“그대들은 누구십니까?”
맑은 목소리.
남매가 아는 망령과는 다르다.
바알과 나란히 선 젊은 시절의 망령은 조금도 병들지 않았다.
작은 그늘조차 없이 밝은 얼굴이 보기 좋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지옥이 왜곡되기 이전의 과거로군. 애초에 여기... 지옥인가?’
지옥의 중립 지역들.
악마가 아닌 마족들이 살아가는 구역들은 지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풍경을 지녔다.
상당수의 마족들이 맑은 하늘과 푸른 초원 사이에 도시를 건설하고 법규와 도덕을 지키며 살아갔다.
어쩌면 과거의 지옥은.
지상과 완전히 똑같았을 수도 있다.
“예사롭지 않은 복식... 혹시 폴리모프 한 드래곤이요?”
젊은 시절의 망령이 차츰 그리드 남매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리드의 갑옷과 루비의 의복은 이 시대의 기술력으론 만들 수 없는 것이기에.
하물며 그리드의 갑옷은 드래곤의 비늘을 재료로 삼고 있었다.
숫제 인간으로 보이질 않았다.
점차로 당황하는 망령을 야탄이 진정시켰다.
“경계할 필요 없다. 하나는 나와 같으니.”
“예?”
“신이니라.”
빙그레 미소 지은 야탄이 망령과 그리드를 번갈아 쳐다봤다.
“미래에 연결 된 인연이 여기까지 인도한 건가... 이브가 그대를 퍽이나 마음에 들어했나보군.”
“제가요?”
젊은 시절의 망령, 이브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드를 영 떨떠름하게 살폈다.
미래의 내가 저자에게 호감을 품고 여기까지 인도했다고?
전반적인 분위기가 제법 멋지긴 하지만, 내 취향하고는 거리가 좀 먼데...
급기야 뺨마저 부풀리는 이브였다.
섬기는 신께서 하신 말씀이 아니었다면 헛소리 말라며 소리라도 질렀을 기세다.
그리드는 씁쓸함을 느꼈다.
과거의 망령을 보자 현재의 망령이 한층 더 가엾던 것이다.
저토록 평범한 소녀가 홀로 수천 년을 떠돈 끝에 감정을 잃고, 오직 복수만을 바라는 괴물로 전락하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래, 이브는 무엇을 위해 그대를 여기까지 보냈나? 과거의 내게 어떤 이야기를 전달해 봤자 미래가 바뀌는 일은 없을 테니... 나보단 그대에게 무언가를 전하고 싶은 것 같은데.”
“그녀는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 내게 전달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간절한 마음이 이룬 일종의 기적 아닐까 싶은데...”
과거를 바꿔봤자 미래를 바꿀 순 없다는 말.
막 싹 튼 희망을 빼앗는 선언이었지만 그리드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게 당연하다고 여겼으니까.
“그런가...? 나에 대해 ‘설명’이 필요한 세계란 말이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곱씹는 야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리드가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말했다.
“미래에, 지옥이 왜곡되고 맙니다.”
“흐음?”
“바알이... 당신의 아들이 당신이 주기에 든 틈을 노려서 배신했습니다.”
“그래... 과연 그렇군.”
“예상하고 있던 일입니까?”
“그 아이는... 자신의 고향이 죽은 자들을 위한 낙원이 되는 걸 꺼려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일 테지.”
“알면서도 방치했단 겁니까?”
“방치가 아니라 믿고 맡기는 걸세.”
“바알은 당신의 믿음에 보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바알을 당장...”
“우리가 세계를 창조한 것은.”
당장 바알을 죽여라.
그리 외치려는 그리드의 말을 야탄이 도중에 끊었다.
“누군가를 억압하기 위함이 아닐세. 물이 자연히 흐르듯 세계 또한 흐르게 놔둘 뿐이야.”
“너무 무책임한 거 아닌가요? 왜곡 된 지옥 탓에 죽은 사람들이 환생하지 못하고 영겁의 고통을 받고 있어요. 그들은 무슨 죄죠?”
듣다 못한 루비가 끼어들었다.
다소 흥분한 그녀에게 야탄이 차분하게 반문했다.
“그대는 환생이라는 개념이 옳다고 생각하나?”
“네...?”
“이미 한 번의 삶을 겪은 생물이 굳이 다시 태어나서 또 다시 고통스러운 삶을 겪는 게 옳다고 보냔 말일세.”
“꼭 고통스러운 삶만 겪으란 법이 있나요? 애초에 환생이라는 개념은 당신들 태초신들께서 만든 거 아니었어요?”
“수용했을 뿐, 우리가 만든 개념은 아닐세. 이 세상의 영혼은 대부분 처음부터 윤회했었지. 뭐... 물론, 고통스러운 삶만 겪으란 법이 없다는 그대의 주장엔 크게 공감하는 바이네.”
“...??”
“나는 윤회와 환생을 필요하다고 보는 쪽일세. 다만 종종 내가 틀린 게 아닐까 회의감을 느끼곤 했지. 열 번, 백 번, 천 번을 환생하는 동안 쭉 고통만 받는 이들을 목격할 때면 정말이지 괴롭더군...”
“...”
“지옥에 망자들의 영혼을 가뒀다는 바알의 심정을 아주 조금은 이해한다는 말일세.”
“뭔가 곡해하는 듯한데.”
그리드가 끼어들었다.
“바알은 단순히 영혼을 노리개로 삼기 위해 윤회의 강을 점령한 겁니다.”
“허, 천벌 받을 놈이군.”
“놈을 죽이시죠.”
그리드의 표정이 사늘했다.
이 과거와 현재와 연결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빌어먹을 바알 놈이 죽는 걸 보고 싶을 뿐이다.
“안 되네.”
야탄이 고개를 저었다. 장발처럼 흐르는 새카만 신성이 잔광을 남기며 나부낀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세계를 억압 할 생각이 없네. 나의 의지로 살생하지 않아.”
“세계를 파괴하길 반복했다는 자가 말은 잘 하는군.”
눈살을 찌푸린 그리드가 쯧, 혀를 찼다.
“한가로이 선문답 따위나 나눌 생각은 없어. 태초신들의 주기란 뭐지? 너희들은 왜 자꾸 세계를 창조하고 파괴하길 반복하는 거냐?”
“당신...!”
젊은 시절의 망령이 적의를 드러냈다.
야탄의 신성이 아닌 ‘기’로 빚은 몽둥이를 거머쥐며 그리드에게 한 걸음 바짝 다가왔다.
그녀를 그리드가 사늘하게 노려봤다.
“너 따위가 끼어 들 자리가 아니다.”
“...!!”
다리에 힘이 풀린 이브가 주저앉았다.
그리드의 높은 위엄과 신격이 그녀를 짓뭉개버린 것이다.
태초신의 사도라 하나 아직 많은 경험을 쌓지 못했던 시절의 그녀는 그리드의 상대가 아니었다.
“반대로 묻지.”
그리드의 행동 하나하나를 흥미롭게 관찰하던 야탄이 몹시 묵직해진 음성으로 물었다.
“그대들은 어디에서 온 거지?”
“또 쓸데없는 말을... 미래에서 왔다는 걸 눈치 챈 거 아니었나?”
“나는, 세계를 말하는 걸세.”
“지상이다.”
“아니지.”
“...?”
“그대들의 근원은 내가 아는 세계들과는 전혀 동떨어진 곳에 있는 느낌인데.”
“...!”
그리드 남매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야탄의 말에 담긴 뜻을 눈치 챈 까닭이다.
“그대들과 같은 자들이 혹 더 있나? 레베카가 그대들을 인지했나?”
“...”
“만약 그렇다면, 주기란 단순히 도피일세.”
“...잠깐, 지금 뭔가 좀... 여러모로 충격이 커서 내 머리가 좀 굳은 거 같은데. 천천히, 자세하게 설명해줄 순 없나?”
“레베카는 처음부터 ■■의 ■■를 ■■... 허?”
씁쓸한 표정으로 들리지 않는 말을 잇던 야탄이 탄식했다.
“이번 ■■은 빠르...”
그걸로 끝이었다.
환한 빛이 세상 전체를 뒤덮어버렸고, 그리드 남매의 의식은 현재로 튕겨져 나왔다.
***
“...”
정신을 차린 남매의 안색은 거짓말처럼 멀쩡했다.
방금까지 비 오듯 흘렸던 식은땀을 그리드는 칸의 유작으로, 세희는 패시브 정화 스킬로 흔적도 없이 증발시킨 것이다. 숨 쉬듯 자연히 해내는 거라 본인들조차 의식하지 못했다.
“야탄 신께선. 사람들에게 위협이 되는... 요소들을. 처음부터 배제하기 위해...”
“그만.”
그리드 남매가 과거를 다녀왔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른 체.
야탄에 대해 말해나가던 망령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드가 그녀에게 물었다.
“야탄보다 레베카가 상위의 존재인가?”
“그건... 몹시 큰 실례가 되는. 질문이군... 두 분께선. 당연히 동등하시다.”
“다음 질문. 세계는 파괴되고 창조되길 반복해왔다고 들었는데. 당신도 종말을 목격했나?”
“...그래.”
“야탄이 세계를 파괴한 거 맞아?”
“모른다.”
망령이 즉답했다.
“직접 본 적은. 없노라...”
마치 아니라고 부정하듯이.
“오빠...”
루비가 그리드의 손을 붙잡았다.
이 세계의 주민을 대상으로 태초신에 대해서 깊이 파고드는 것.
결코 좋은 일이 아님을 그녀는 직감하고 있었다.
그리드도 마찬가지다.
“그래... 지하에 묻혀있다는 야탄을 어서 직접 봤으면 좋겠군.”
“...”
평정을 되찾은 그리드가 온화하게 말한다.
망령은 그의 태도를 통해서 자신이 모르는 어떤 일을 겪었단 사실을 짐작했다. 더 이상 말없이 걸음을 재촉했다.
무후총의 가장 깊은 곳.
어둠 중심에 우뚝 솟은 신전이 보였다.
***
“리치가 83기에 데스나이트가 161기... 그 외 언데드 1만 3천 기에 토병 8천...”
망령의 최측근.
‘가장 큰 지팡이’가 올린 보고서의 내용을 살펴본 지슈카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현 시점부터 템빨제국에 합류하는 언데드 전력이 상상 이상으로 강력했던 까닭이다.
가장 큰 지팡이가 가슴을 당당하게 펴고 말했다.
““언데드의 숫자는 헤아리실 필요 없습니다. 그런 잡병들 따위. 시체만 있으면 얼마든지 더 일으킬 수 있으니까요. 천군만마를 얻었노라 셈하시죠.””
“하하...”
지슈카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무후총에서 얻은 리치와 데스나이트는 일반적인 언데드와 다르다.
생전에 초월자였던 자들이 태반이었다.
모자이크에서 튀어나왔던 초월자들의 시체마냥 강력한 개체가 족히 수십이란 말이다.
그만한 전력을 하루아침에 손에 넣었으니 도통 실감이 안 됐다. 제대로 통제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시체를 구한답시고 죄 없는 인명을 해칠 일도 없으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망령 님을 비롯한 무후총 전원은... 앞으로 오직 지고하신 분의 뜻대로만 움직일 것입니다.””
무후총의 언데드들은 생전에 큰 업과 죄를 쌓은 존재들이다.
본질적으로 위험한 부분이 있어 망령은 그들을 철저하게 훈육했다.
덕분에 거의 템빨골마냥 주인에게 충성하는 습성을 지녔다.
지슈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드가 신뢰하기로 결정한 이상 우리 역시 당신들을 믿을 거야. 부디 믿음에 보답해주길 바랄게.”
““오오오...!””
“뭐, 뭐야? 왜 그래?”
다짜고짜 감격하는 지팡이의 태도를 지슈카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지팡이의 붉은 안광이 반짝반짝 빛났다.
““지고하신 분을 친숙하게 부르시는 모습을 통해 당신께서 얼마나 위대하신 존재인지 되새겼을 뿐입니다. 앞으로 늘 낮은 자세로 따르겠나이다...””
“그리드랑 나는 결혼을 약속한 사이거든. 좋아, 앞으로 잘 부탁해.”
““오오... 수백 년을 존재하며 목격한 그 어떤 인간보다 아름답고 기품이 넘치신다 싶더니 지고하신 분의 신부님이셨군요.””
“에이~ 예비 신부라니까, 신부는 무슨 신부야~~”
“...”
방금 전까지만 해도.
지슈카는 무후총의 언데드들을 몹시 경계하며 긴장을 금치 못했었다.
한데 어느새 하하호호 웃으며 담소를 나누는 것이다...
템빨단원들은 깨달았다.
이번에 동료로 합류한 언데드들.
여러모로 보통 내기가 아닐 거라는 사실을.